海雲臺(해운대) 엘레지(elegy, élégie) 노래를 부르던
그때 그 時節(시절) 追憶(추억) !
파도치는 海雲臺(해운대) 바닷가 !
海雲臺(해운대) 엘레지 Haeundae Elegy 1958 손인호 Inho Son
https://www.youtube.com/watch?v=Bz8e_yQTBEY
엘레지(elegy, élégie)는 슬픔을 노래한 시 등의 문학, 악곡이다.
梁芳秀 釜山 海雲臺(양방수 부산 해운대)를 가다.
부산 해운대 백사장 횟집에서 놀던 때가 1964년 2월 경이였다. 고교 졸업후 고향에 잠시 들렸다가 上京(상경)하는 날, 장목 부두에서 영복호를 타고 초등학교 동창 김석렬군과 동생 김수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따지자면 김군과는 査頓之間(사돈지간)이다. 집안 고모님이 김석렬군의 형수가 되었으니... 저녁 12시(십이)열차를 타고 서울을 갈 생각이였는데, 김석렬군이 갑짜기 택시를 타고 해운대로 차를 몰았다. 어디 가느냐는 질문에 가 보면 안다고 했다. 오늘 놀다가 떠나라는 것이다. 어리던 수자가 벌써 환갑도 지나고 진갑도
지나 치매 5기로 양노원에 입원 했다는 소식이 왔다. 한치의 앞을 모르고 사는 인생...요즘 노랫말 처럼 언제 갈지 모르는 인생 웃으면 살아가자는 말이 실감이 난다. 해운대에서 만나 회포를 풀던 그 친구들 모두들 소천하고 혼자 남아 이 글을 쓴다.
해운대에 오니, 언제 연락을 했는지, 利水島(이수도)에 살던 김광한군, 율천(밤개) 구연자가 와 있었다. 김군이 깜짝 Show를 연출했다.
그냥 조촐하게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送別會(송별회)"란다. 그때 그날 밤은 통금이 있어 통금전까지 놀았다. 그때 우리는 광어회와 멍게에 소주를 주문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가면서 노래로 시간을 보냈다. 그때 유행하던 젓가락 장단에, 흘러간 노래 ~ 줄줄이 쉬지않고, 이어졌다. 모두들 名唱(명창)들로 쉴새없이, 누군가가 선창하면, 따라 불렀다. 목이 터지라고.....懷抱(회포)를 풀었다.해운대에서 운영하던 횟집의 경비는 약 3,000원 정도로 기억된다. 1960년 高 3때의 [수학여행의 경비]가 서울에서 경주에 4박 5일 동안에 지불했던 금액이 8,000원이였으니, 적은 돈이 아니였다.
그리고 거제에서 서울까지 가는 경비는 '애용하던 키타'를 팔아서 갔다.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지나간 추억이다. 巨濟島 장목 부두에서, 여객선 영복호를 타고, 파도와 싸우면서 4~5시간을 뱃멀미 하면서, 부산 남포동(자갈치)에 도착하면, 간단한 정심을 먹어야 했고, 저녁 서울행 야간열차를 타면 밤새도록 찻칸에서, 수잠 자면서,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아침에야 서울역에 도착했던, 가난했던 시절이였다.
필자가 서라벌 고등학교를 졸업 하던, 해인 1961년 5월 16일에는 명동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잤다. 그날 새벽에 요란스러운 총소리에 잠에 깨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完全軍裝(완전군장)을 갖춘 군인들이 골목 코너에서 防禦(방어) 자세로 총을 쏘며, 골목을 이리 저리 돌아 다녔다. 순간 전쟁이 일어났다는 강박관념에 영문을 모르고 얼른 문을 닫고, 있었으나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전쟁이 아닌 군사 쿠테타라는 뉴스를 듣곤, 잠자리에 다시 들수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발생한,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자행한 쿠데타. 이로 인해 제2공화국이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지고, 약 30년간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유명한 군사 철권통치가 열린다. 1961년 당시 군인들이 명동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큰 소리쳐, 젊은 혈기에 빠에서 육군 소위와 다툰적도 있었는데, 그 파워는 대단했다. 까불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아 다투었던 추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자존심이 상해 싸웠다. 객지에서 깡이 없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다. 필자의 人生觀이였다.
1964년경의 海雲臺(해운대) 바닷가의 寫眞(사진)이다.
이날 栗川(율천) 출신 구연자가 [이별의 노래]를 불러 박수 갈채를 받아, 再唱으로, 당시에는 듣지도 못한,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에, 이미자 노래로 인기가 있어 1965년 4월에 지구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낸 [울어라 열풍아]를 구슬프게 불러, 노래에 대한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친구들의 박수 갈채도 받았다. 필자는 [해운대 엘레지élégie]와 [추억의 소야곡]을, 석렬군이 18번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김광한군은 [굳세어라 금순아]를 제마다 노래 부르고 놀다 보니, 통금 시간이 임박하여 택시를 불러 탓다. 그때의 구연자 모습.
구 연자가 산다는 신중달 국회의원댁 서대신동으로, 데리러 준다고 갔다가, 집으로 안가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할수없이 우리 모두 여관으로 들어가 한방에서 밤을 세우고, 上京한 추억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때 손벽치고 불렀던 추억의 노래다. 우리 시대에 유행하던 추억의 노래다. 연자에게 !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우리네 인생의 삶속에는 인연이라는 연속의 삶이였다.
지난 삶속에 나쁜 인연 좋은 인연도 있었지만 그중에 수십년 인연의 연을 끊지 않고 사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그 모진 인연을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인연도 있었고, 잊을수 없는 아픈 상처를 남긴 인연도 있었다. 1963년 癸卯年(계묘년) 음력 11월 6일(양력 12월 21일)에 너의 父親(부친)의 回甲(회갑)을 맞이 하신 자리에서 였다.
그리고 우리는 잊지 못할 수 많은 아픈 추억을 남기고 너는 어느날 한마듸 말도 없이 훌쩍 내 곁을 떠나 버렸다. 불신에서 오는 배신이였다고 판단하고 나는 너와의 인연을 포기 했다. 그러나 지금 너는 ..... 아마 저 세상 어디에 있겠지?
아마 나는 너가 아름다운 좋은 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를 위해 기도한다. 오늘은 11월 2일 慰靈의 날이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돌아가신 모든 조상님들과 지인들을 위해 의무를 지니고 기도하는 날이란다. 그래서 특별히 나는 아침 미사에 불렀던 입당 聖歌를 너를 위해 다시 불러 준다.
1. 나는 부활이요, 새명이니, 목마른 사람은 내게로 오라! 무거운 짐 진자 멍에 벗겨 주고, 영원한 생명을 네게 주리
2. 나를 믿는자는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기쁨이 넘치는 아버지 집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리라!3. 나는 생명이요. 진리이며, 너희가 가야할 길이로다! 누구나 이 길을 충실히 걸으면 영원한 복락 얻으리라!
https://www.youtube.com/watch?v=TTZq8BigsAU
그리고 너를 위해 奉獻聖歌(봉헌성가)도 불러 준다.
1. 주여! 세상 떠난 영혼 당신품에 받으소서! 자비 하신 천주여 영원한 생명 주소서!
2. 세상 떠난 영혼에게 주여! 빛을 비추소서 주님만을 따르며 한 세상 살고 갑니다.
3. 부활이요, 생명이니 주여! 용서 하 옵소서 주님 품에 안으사 영원한 행복 주소서
그리고 너를 위해 派遣聖歌(파견성가)도 불러 주마!
1. 살아서 나를 믿는이 영원히 죽지 않으리 영원히 나와 더불어 살리라!
2. 부활한 우리 주 예수 모든 죄 용서 하시고, 영원한 생명 그에게 주소서!
오늘의 제1독서의 말씀은 의인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더라도 안식을 얻고, 人生은 햇수로 재는것이 아니라 현명이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생활이 곧 노년기의 원숙한 결실이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짧은 세월동안이지만 너에게 주어진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 완성에 도달하도록 애쓰다가 恨을 안고 돌아 갔지만 너야 말로 오래 산 것과 같아, 이 세상의 악의 소굴에서 하느님께서 미리 빼내 주신다는 오늘의 복음 말씀이 생각이 나서 너에게 전한다.
너도 이제는 잘 알겠지만 만약을 위해서 연옥에 있다면 천국으로 하느님께 보내 달라는 청원을 드리는 이 기도는 너에게는 아주 소중한 기도라고 생각 되어진다.
돌아가신 모든 우리 조상님들과 아울러 이 세상에서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그 영혼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 되지만,
특별히 오늘은 너의 이름을 오늘은 기억하며 기도 한다.
물론 나의 어머님, 세살때 떠난 내 동생 명애도 ,, 어릴때 격려해 주시던 양 종식 아저씨도 나를 위해 학비를 보태 주시든 외할머님도 미국에 와서 사업 자금이 없어 할때 도와주던 후배 안 마틴 형제도 나를 지금까지 있게 해 주신 모든 조상님들과 은인들도 나에게 소중 하지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다는 속담과 옷 자락을 스쳐도 전생에 인연이 있었다는 불교의 말대로 너와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 못다한 꿈을 안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의지할곳이 없던 우리의 처지를 두고 공감하며 서로 의지하며 살자고 굳게 언약하고 갈망했던 추억만을 남기고 미련없이 떠나버린 너를 바보같은 놈이라고, 많이도 원망하고, 이수일과 심순애의 드라마를 많이 연상하며 공감했다....
나는 지난 1960년 부터 주님의 백성으로서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며 살아 왔다. 새삼 흘러간 지난 과거를 돌아 보면 주님을 일찍이 알아보지 못한 사람도 많고, 주님을 알고도 주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주님을 떠난 사람도 많다고 생각한다.
또한 옹졸한 고집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나 불목하여 갈린 사람들도 부르시어 저희가 모두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 되게 하소서 ! 하고 기도하며 살아왔다.
세상은 우직하게 보일지라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살아 왔다.
언제나 갈망 했던 또 다른 삶의 질이 다른 차원의 인생을 渴求하고 살아왔다.
회개하는 전제 조건 아래 이글을 쓴다.
회개란 증거하는 것으로 회개하므로 하느님과 화해하고 용서로 이웃과 화해하며, 사랑으로 이웃과 나눌 때 진정으로 증거 할 수 있다고 교회는 강조하고 있어 현실에서 과거를 뒤 돌아 보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정리해 본다.
속담 이란 그 나라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나타내며, 시대의 변천에 따른 그때 그때의 사회상은 물론이고, 인간의 본질에 이르는 근원적인 문제까지도 적나라하게 내포하고 있는 속담은 명실공히 한 나라의 전통적인 문화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른 어느 나라 보다도 값지고 귀중한 [속담 문화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 한다. 조상들의 입과 입을 통하여 한 시대를 머물다가 다음 세대로 계속 전해져 내려온 금석 같은 속담은 하나 같이 그 마디 마디가 삶의 진솔한 철학을 담고 있는 진리의 그릇이며. 또한 속담은 한 시대의 애환을 담고 있으면서도 하나같이 시대의 장벽을 초월하고 있으며. 우리말 속담의 대부분이 삶의 진실한 교훈이며 인생의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다.
우리의 속담은 무수히 많다. 각계 각층의 입을 통하여 수 많은 속담들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모두가 우리 조상들의 얼과 삶의 지표가 깃들어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 중에도 이런 말은 너에게 말하고 싶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그러나 용서해야 하지 하고 생각 하지만 화살처럼 떠 오르는 잊을수 없는 과거는 그리 쉽게 잊혀지지 않터라.
용서는 단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받아 준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 놓아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 베푸는 가장 큰 베품이자 사랑이다.라고 한다.
도리켜 보면 너와의 인연이 아니라고 결론을 짓고 살아왔다. 그런데 왜 이 토록 글을 써야 할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라는 속담데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으로써 해야할 의무라고 생각 하고 이글을 쓴다.
로마에 가면 무덤 앞에 이런 글이 크게 쓰여 있다. [오늘은 내 차례지만 내일은 네 차례다.] 언제가엔 어차피 우리도 하늘 나라로 갈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켄터키(Kentucky)주의 루이스빌(Louisville)에 있는 성모권고(Mother of Good Counsel) 카톨릭 교회앞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크게 새겨져 있다.
PRAY TO YOUR BELOVED DECEASED ! THEY CAN HELP ! (사망한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도하라! 그들이 도와 줄 수 있다!) 죽은 사람은 단지 죽은 것 처럼 보일뿐일까? 또 다른 형태로 어디서 무얼 할까?
이 글을 읽고 이 질문에 대한 결론을 얻었을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우리 기도 하자 서로를 위해~
외갓집 이야기
http://blog.daum.net/bangyang/376
http://blog.daum.net/bangyang/2700
★16.慶州金氏族譜 (8)
https://www.youtube.com/watch?v=TpFlLLKT8Kk&t=36s
이별의 노래를 불렀던 : 구연자 양
https://www.youtube.com/watch?v=qjQANtqzr3E&feature=emb_rel_end
https://www.youtube.com/watch?v=GK6nbSxgwAE
울어라 열풍아 노래를 불렀던 :구연자 양
https://www.youtube.com/watch?v=u9oDlW5We7Y
해운대 엘레지 노래를 불렀던 : 양방수 필자
https://www.youtube.com/watch?v=Bz8e_yQTBEY
추억의 소야곡 노래를 불렀던 : 양방수 필자
https://www.youtube.com/watch?v=YX-FGPtbBnk
이별의 부산 정거장 노래를 불렀던 : 김석렬 군
https://www.youtube.com/watch?v=VLAnpopmukM
굳세어라 금순아노래를 불렀던 : 김광한 군
https://www.youtube.com/watch?v=yUeSSy9ZAbc
1962년 박 영식 감독과 함께
1962년 중앙대학교 졸업식장에서
당시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시던, 김수용(金洙容, 1929년 9월 23일.생) 선생님을 박영식 감독으로 부터 소개 받아 "목놓아 울어 봐도"라는 대역(代役)을 소개 받아, "脚本(각본)"을 받아 꿈 많던 시절이였다. 불행이도 이 영화는 불발되고 말았다.
김수용 감독님은 1963년 김승호와 황정순 주연의 굴비,1965년에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갯마을,을 비롯하여, 그후로도 많은 작품을 발표 했었다. 아역 배우로 '저 하늘에도 슬픔이" 주연을 맡았던 김용연군은 1971년 용산구 후암동에서 옆방에서 같이 살던 추억이 떠오른다. 촬영 갔다가 오는 날엔 아저씨 "담배"하고 양담배를 주어 "禁煙(금연)"할려고 하는 나에게는 유혹이였다. 신혼의 꿈을 안고 살던때여서, 부인이 싫어했던 추억이 떠 오른다. 아역을 맡았던 이야기는, 엄마의 손을 잡고 따라가, 누나가 연극 실습장에서 잘못하면, 용연군이 "누나" 그것도 못해? 하고 詰責(힐책)을 하길래, 감독이 그러면 너가 한번 해봐! 그래서 인정을 받아 주연을 맡았다고 했다. 그후 아역 배우로 乘勝長驅(승승장구)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1965년 영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저 하늘에도 슬픔이 아역 배우 김 용연 관련 이미지
1963년 김포 촬영장에서 1959년도 Miss Korea 오현주 女史와
1959년도 미스코리아 오현주 관련 이미지
오현주 여사와 복혜숙 여사와 筆者(필자).
복혜숙 여사 관련 이미지
여운계 여사와 筆者(필자), 오현주 여사, 복 혜숙 여사님.
여운계 여사 관련 이미지
嚴冬雪寒 冬將軍(엄동설한 동장군)의 시샘으로 꽁꽁 얼어붙은 손발을 녹이기 위해 모두들 장국밥을 먹고 몸을 녹이던 정겹던 배우들~
당시 綺羅星(기라성)같은 助演(조연) 女俳優 (여배우)들이다.
유난이 춥고 춥던 겨울, 촬영을 마치고 staff 陣(진)들과 장국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아역스타 박종화군과 함께
박종화군은 1952년생으로 1960년대에 아역스타로 활동하면서 필자의 사무실로 야구팬이였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왔었다.
도봉동 촬영장에서 아역 사물놀이 꼬마 스타와 함께 !
도봉동 史劇(사극) 촬영장에서 애들아 ~ 활은 이렇게 쏘는 가야 ~
해운대 아파트 앞에서 타국으로 宣敎를 떠나는 수녀님들의 방문을 받고 기념 촬영
http://blog.daum.net/bangyang/1976
2008년 1월 부터 3월 까지 경남 삼랑진 오순절 마을을 창설한 오수영(히지노) 신부와 3개월간 전국 聖靈 徹夜 祈禱에 參與하면서 당시에 없던 해운대 고층 아파트에서 그때의 추억을 吟味하면서 지내고 왔다.
1960년경 그 때 같이 갔던 장목 선후배들이 한동안 대통령 별장으로 갈수 없는 [猪島]를 유호에서 배를 타고 들어 가서 놀았던 친구들의 그때의 모습이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daum.net/bangyang/376에 있다. 기념사진 촬영중에도 노래를 계속 부르는 여자애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후 결혼을 하고 뿔뿔히 흩혀졌다가 이제 노년이 되어 이들 친구들이 아직까지 부산 김정매네 집에서 가끔 만나지만 주역을 맡아 대중을 리드하던 김 석렬군이 떠나, 그때의 추억과 아쉬움을 못잊어 아직까지 모임을 갖는다는 자리에서 얼마전 김정매와 김금자와 전화 통화를 했었다.
사진참조 ~ 뒷줄 왼쪽으로 부터-양 방수-김인길-이원태(장목 담배집 손자) - 김계자(서편 사진관 딸) 다음이 故 김석렬군 - 다음 - 다음이 - 김 명재군이 키타를 치고, 앞줄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 장목 국민학교 후배 여자들인데 앞줄에 앉은 여자중에 우측에서 네번째가 장목 김정매 동생이 입 벌리고 모래를 부르고 있다. 맨 앞에 누워 있는 故 서정언군,
부산 해운대 해수욕 장 전경 관련 이미지
율천 구 대영 형님이 보낸 소식 정리 해 보면
해운대해수욕장(海雲臺海水浴場, Haeundae Beach)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과 중1동에 걸쳐서 위치한 해수욕장이다. 모래사장의 총면적은 58,400㎡, 길이는 1.5 km, 폭은 30m ~ 50m 이다.
이 곳에는 300여개의 편의·숙박시설이 있고, 해수욕장의 가까운 부산조선비치호텔, 동백섬 누리마루(APEC하우스) 등이 있다. 개장기간은 6월초부터 9월말까지로, 피서객 인파가 2007년 1천 279만명이고, 2008년 1천 45만명으로 감소했다.
2008년 8월 2일 오전 10시부터 7시간 동안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비치된 파라솔의 수가 1시간 동안 가장 많은 파라솔이 백사장에 펼쳐진 시점인 오후 4시 총 7937개의 파라솔이 설치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3개월 후 '기네스 세계 레코드' 본사는 파라솔이 세계 공통의 문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네스 기록 등재불가를 통보했다.
1월에는 추위를 수영으로 건강한 겨울을 보낸다는 뜻으로 하는 북극곰 수영대회가 열린다. 6월에는 해운대 모래축제가 열린다. 7~8월에는 부산국제요트매치컵대회가 열린다. 8월에는 또한 부산바다축제가 열린다.
해운대해수욕장에서는 이안류가 자주 발생하여 매년 입욕 통제가 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이안류는 해저 언덕 등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역파도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해변으로 밀려든 바닷물이 깊이 패인 지형을 통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급물살을 만들어 해수욕을 즐기는 피서객이 여기에 휩쓸리면 깊은 바다로 끌려가기 때문에 위험하다. 2012년에는 11차례의 이안류가 발생해 418명이 휩쓸렸다가 구조되었으며 2013년에는 무려 13차례나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이안류가 발생하여 546명이 이안류에 휩쓸렸다가 구조된 바가 있다. 2014년에는 7월 24일에 이안류가 발생하여 입욕이 통제되기도 하였다.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이안류가 자주 발생하는 원인은 기상, 지형, 해상의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해운대해수욕장은 인근 송정해수욕장과 광안리해수욕장과 달리 해안선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 인근 두 해수욕장은 해안선이 남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해운대해수욕장에는 지속적으로 남풍, 남서풍의 바람이 불게 되며 1.5 m 이상의 파도가 해안선의 직각으로 밀려들면서 이안류가 발생하게 된다. 또한 해운대해수욕장의 지속적인 백사장 모래 유실도 해저에 골짜기를 만들어 이안류 발생 횟수를 증가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기상청에서는 매년 해운대 해수욕장의 이안류 발생 예측정보를 전 해역에 걸쳐 망루별, 시간별 이안류의 발생 가능성 예측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안류 예측정보는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오후 6시까지 3시간 간격으로 5단계(매우안전, 안전, 주의, 위험, 매우위험)로 매일 제공된다. 또한 지자체에서는 이안류 발생의 다른 원인으로 판단되고 있는 백사장 모래 유실을 막기 위해 제방을 설치하는 계획도 검토하고 있다.
해운대 모래축제 관련 이미지
파도치는 海雲臺(해운대) 바닷가
지금도 변함없이 海雲臺(해운대) 바닷가는 그대로인데...
人傑(인걸)도 물과 같아 가고 아니 오는 메라는 옛 詩人(시인)의 말이 떠 오른다. 그리고 그 追憶(추억)이 아스란히
떠 오른다.
2008년 해운대 마린시티의 夜景(야경)
釜山(부산)海雲臺(해운대)
2008년 海雲臺(해운대) 마린시티의 夜景(야경)
海雲臺(해운대) 地域(지역)의 略圖(약도)
해운대(海雲臺, Haeundae)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의 해운대구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부산광역시 부도심의 하나로 해운대해수욕장과 광안리해수욕장을 비롯하여 동백섬, 영화의전당, 달맞이고개, 해운대온천, 오륙도, UN기념공원, 수영사적공원, 광안대교 등의 부산의 상징들과 유명 관광지가 있고 호텔, 식당가, 영화관 및 쇼핑몰 등 위락 시설이 많으며 해운대 신시가지와 마린시티에는 대규모 주거단지가 있다. 해운대해수욕장, 광안리해수욕장, 벡스코(BEXCO), 누리마루 등이 있어서 국내외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海雲臺(해운대) 地域(지역)의 略圖(약도)
目次(목차)
1 관광지 1.1 해운대해수욕장
1.2 광안리해수욕장
1.3 동백섬
1.4 누리마루
1.5 UN기념공원
1.6 오륙도
1.7 광안대교
1.8 영화의전당
1.9 달맞이고개
1.10 해운대온천
1.11 수영사적공원
2 해운대 신시가지
3 센텀시티(센텀혁신도시)
4 마린시티
5 지명의 유래
6 개념 6.1 해운대구, 수영구, 남구를 아울러 이르는 말
6.2 위 지역에서 남구를 제외한 지역
6.3 해운대구만을 일컫는 경우
6.4 더 좁혀서 해운대해수욕장 및 그 일대만을 일컫는 경우
7 사진
8 각주
9 외부 링크
觀光地(관광지)
海雲臺(해운대)해수욕장
海雲臺(해운대) 海水浴場(해수욕장) 夜景(야경)
海雲臺海 水浴場(해운대 해수욕장)은 海雲臺 中心(해운대 중심)에 있는 大韓民國(대한민국)의 代表的(대표적)인 海水浴場(해수욕장)으로, 釜山 廣域市 海雲臺區(부산 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과 중1동에 걸쳐 있다.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해변의 총 面積(면적)은 58,400m2이며 길이는 1.5km, 폭은 30m ~ 50m이다. 가까운 지역에는 조선비치호텔 등 300여개의 편의 · 숙박 시설이 있다. 2011년부터 개장 기간은 6월 초부터 9월 말까지다.
1994년 여름 기간에는 海雲臺(해운대) 리베라 百貨店(백화점)에서 釜山(부산)을 代表(대표)하여 고구려 古墳壁畵(구분벽화) 特別展(특별전)을 열기도 하였다.
광안리(廣安里) 段丘
海水浴場(해수욕장)
광안리해수욕장(廣安里海水浴場, Gwangalli Beach)은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 2동에 위치한 해수욕장이다. 모래사장의 총면적은 82,000m2, 길이는 1.4km, 폭은 25m ~ 110m이다. 이 곳에는 300여개의 고급 레스토랑, 카페, 횟집 등이 있고 활어시장과 수변공원이 해수욕장 바로 옆(민락동 방면)에 있다. 해수욕장 해안에는 광안대교가 건설되어 있어 밤에는 LED 조명이 형형색색으로 비취지는 곳이며, 부산세계불꽃축제가 개최되면 100만명 이상의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의 결승전이 일 년에 한 차례씩 열리는 까닭에 ‘E-스포츠의 성지’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冬柏(동백)섬
冬柏(동백)섬 海邊(해변) 散策路(산책로)
섬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나무가 섬의 이름이 된 동백섬은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바다 방향을 향해 서서 오른쪽을 볼 때, 백사장 끝에서 연결된 육계도다. 즉 원래는 섬이었는데 바로 옆으로 흐르는 춘천천의 영향으로 퇴적작용을 하여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지금도 옛날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동백섬 주위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서 그 길을 따라 바다와 숲이 만드는 절경과 함께 멀리 광안대교, 오륙도, 달맞이 고개 등을 보면서 동시에 섬 곳곳에 있는 최치원의 해운대석각, 황옥공주 전설이 깃든 인어상, 누리마루 APEC하우스 등도 볼 수 있다.
누리마루
동백섬 끝자락에 위치한 옛 2005 APEC 정상회의 장소로, 한때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지금은 시민에게 개방되어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과 함께 해운대의 명소이다.
아시아·太平洋(태평양) 經濟(경제) 協力體(협력체)
뉴질랜드의 기
대한민국의 기
러시아의 기
말레이시아의 기
멕시코의 기
미국의 기
페루의 기
베트남의 기
브루나이의 기
싱가포르의 기
오스트레일리아의 기
인도네시아의 기
일본의 기
중화민국의 기
중화인민공화국의 기
칠레의 기
캐나다의 기
파푸아뉴기니의 기
필리핀의 기
홍콩의 기
UN기념공원
부산광역시 남구 문서 참조
오륙도
문서 참조.
광안대교(廣安大橋, 영어: Gwangan Bridge)
광안대교(廣安大橋, 영어: Gwangan Bridge) 또는 다이아몬드 브릿지(영어: Diamond Bridge)는 부산광역시에 위치한 다리이며 부산광역시도 제77호선의 일부이다. 이 다리는 수영구 남천동 49호 광장과 해운대구 우동 센텀시티를 연결하는 대한민국 최대의 해상 복층 교량이다.
映畫(영화)의 殿堂(전당)
영화의전당(映畵의殿堂, Busan Cinema Center)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센텀시티에 위치한 부산국제영화제 전용관으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 나아가 세계적인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국제영화제의 전용관 건립을 갈구한 영화인들의 열망과 아시아의 대표적인 영화·영상 도시를 지향하는 부산시의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되어 2011년 9월 29일에 탄생하였다. 2005년 국제 지명 현상 설계 공모에 쿱 힘멜브라우, 버나드 츄미, MVRDV, 스티븐 홀, 에릭 반 에게라트, 하이키넨-코모넨, 텐 아키텍토스가 참여하였으며, 그중에서 오스트리아 쿱 힘멜브라우의 디자인이 선정되었다. 쿱 힘멜브라우가 기본 설계를, 희림건축이 실시 설계를 하였고 한진중공업이 시공했다. 애칭으로 두레(함께 모여)와 라움(즐거움)을 조합한 "함께 모여 영화를 즐기는 자리"라는 의미인 두레라움(Dureraum)이라고도 불린다.
달맞이고개
달맞이는 釜山(부산)광역시 海雲臺(해운대)구 中東(중동)에 위치한 臥牛山(와우산) 중턱에 있는, 中東(중동)과 松亭洞(송정동) 사이를 잇는 고갯길이다. 차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데, 길을 따라서 벚꽃과 소나무 그리고 冬栢(동백)숲이 어우러져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도 인기가 많다.
특히 밋밋하게 길이 뻗은 것이 아니라, 15번 이상 굽어지는 길이라 , 지속적으로 풍경이 변하는 것도 매력이다. 때문에 벚꽃철에 이곳에 차를 끌고가면, 길이 아니라 주차장이 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도중에 청사포로 빠지는 길목이 있다.
바다에 뜬 달을 보기 좋은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하고 있지만, 명확한 명칭기록이나 구전은 찾을 수 없다.
고갯길 중에서 海雲臺(해운대)海水浴場(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쪽은 부산의 부촌 중 하나이다. 山(산)稜線(능선)을 따라서 건축된 가지각색의 고급주택은 이미 1980년대부터 釜山(부산)의 富村(부촌)으로 자리를 잡았고, 오션뷰와 함께 달맞이 길을 따라 심어진 벚꽃길은 아름답기로 아주 유명하다.
지금은 90년대에 비하면 그 이름값이 떨어졌지만, 여기에 있던 食堂(식당)가들도 대부분 고급식당가였다. 꽃등심과 같은 비싼 메뉴를 파는 집도 많았고, 양식당인 “A”식당은 부산을 대표하는 양식당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도 고급식당들이 많다.
釜山(부산)에서 海雲臺(해운대)를 관람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海雲臺(해운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건 기본이고, 冬栢(동백)섬과 함께 멀리 있는 광안대교와 黃嶺山(황령산) 통신탑의 조명도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걷는 것도 좋지만, 드라이브코스로도 최상의 길이다. 해운대에서 송정으로 넘어갈 때에, 중간에 빠져 송정터널로 들어가지 말고, 달맞이길로 끝까지 송정으로 들어가면 드라이브코스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원래는 海雲臺(해운대)에서 송정으로 넘어가는 길이었지, 관광지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韓國戰爭(한국전쟁)이 끝나고서 海雲臺(해운대)가 美軍(미군)의 休養地(휴양지)로 사용되자, 달맞이고개는 美軍(미군)들의 골프장으로 사용된다, 이 골프장은 당시까지만 해도 國內(국내)에 있던 유일한 골프장이었다.
60년대까지 미군이 사용한 달맞이고개는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발이 된다.
현재 달맞이고개의 주 도로인 달맞이길이 1969년 11월 7일에 착공하여, 1970년 7월 28일에 완공되면서, 울퉁불퉁하던 달맞이길은 현대화가 된다. 동시에 물자이동이 쉬워지면서, 달맞이고개의 발전은 본격화가 된다.
1975년부터 美國(미국)에서 대외원조를 담당하는 AID(국제개발처) 돈으로 주공 AID아파트 45동, 2060가구가 들어섰다. 이때부터 달맞이고개는 본격적으로 부촌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고,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고급빌라와 고급음식점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래도 90년대까지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섞여살던 곳이었다. 부자들은 오션뷰가 보이는 집에 살았고, 돈이 없을수록 바다와 달맞이길과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2000년대부터 진행된 재개발로 인하여, 과거에는 서민이 살던 지역에도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오션뷰를 확보한다. 동시에 집값도 오르면서, 지금은 완전히 부촌이 되어버렸다.가장 큰 관광거리는 海雲臺(해운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오션뷰이다. 특히 밤에 오르면, 해운대의 야경과 함께 광안대교의 夜景(야경)을 같이 볼 수 있는 명소 중 하나이다. 특히 달맞이길을 따라서 벚나무가 심겨져 있는데, 이 때문에 벚꽃철에는 사람이 미어터진다. 그리고 중간의 산책로도 잘 구비되어 있어, 산능성이를 따라 올라가는 것도 재미이다. 또한 고급주택가를 구경하면서 그 사이에 있는 길을 돌아다는 것도 매력이라면 매력.
또한 많은 갤러리가 있어, 각 갤러리를 방문하여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도 매력이다. 또한 건물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특이한 디자인의 건물 그 자체를 감상하는 재미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는 해월정과 해마루 전망대이다. 아예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을 목적으로 지어진 정자이기에, 가장 뛰어난 경관을 확인할 수 있다. 해월정은 海雲臺(해운대)를, 해마루 展望臺(전망대)는 청사포 및 송정을 감상하기에 좋다.
우리나라에서 推理文學(추리문학) 全用(전용) 圖書館(도서관)으로는 처음으로 개관한 곳이자 동시에 유일한 추리문학전용도서관인 추리문학관도 위치한다. 추리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필수 방문지.대중교통이 좋은 편은 아니다.
마을버스인 부산 버스 해운대2번, 부산 버스 해운대7번, 부산 버스 해운대10이 운행하며, 일반버스는 운행하지 않는다.
지하철 해운대역이나 장산역에서 해운대 2번, 7번, 10번 버스를 타면 달맞이고개로 온다.
다만 달맞이고개의 핵심코스인 달맞이길은 대중교통이 통하지 않는다. 마을버스는 철저히 주택가로만 다니기에 장산역에서 출발하면 우성빌라 및 추리문학관 정류장에서, 해운대역에서 출발하면 해월정 입구 정류장에서 내려서 달맞이길로 걸어오는 것이 좋다.
가장 좋은 것은 택시 및 자가용 그리고 렌트카이다. 海雲臺(해운대)해수욕장 쪽에서 택시 타면 거리 자체는 가까워서 요금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15곡도라고도 부른다.
특히 좌동진입로에서부터 해운대진입로가 꽉 막힌다.
지금은 네임밸류도 다른 가게에 역전 당했고, 가게의 크기도 줄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다른 가게들이 세들어 사는 모든 장소가 다 “A”식당의 것이었다. 압도적인 오션뷰와 함께 당시 서울에도 꿀리지 않을 인테리어와 경양식이 아닌 정통양식당이라는 상품은 부산에서 최상의 지위를 자랑했는데, 이 식당이 달맞이고개에 위치했다는 것 자체가 달맞이고개의 위상을 동시에 대변했다.
60년대의 달맞이고개의 寫眞(사진)을 보면, 당시의 산이 다 그렇듯 민둥산이다. 다만 나무가 거의 없을 뿐 풀은 있어서 황토색 민둥산이 아니었다.
참고로 68년까지 달맞이고개가 위치한 臥牛山(와우산)의 20만평 정도의 땅이 三聖(삼성) 李秉喆(이병철) 前(전) 會長(회장)의 것이었다. “作家(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
달맞이고개”
海雲臺溫泉(해운대온천)
해운대온천(海雲臺溫泉)은 부산에서 동북방 18 km 지점 해운만안 사빈(砂濱)에서 涌出(용출)하는 溫泉(온천)이다. 배산임해(背山臨海)의 지형이므로 풍경이 아름답고 해수욕장이 있는 등 호조건을 갖추고 있다. 천온 45∼50 의 알칼리성 단순식염천이며 라듐분이 약간 포함되어 있다. 新羅(신라) 때부터 알려졌으나 부산항의 개항 후 동래온천과 같이 일본인에 의하여 개발되었다. 8·15 광복 후 이 지역이 부산시에 편입되고 교통이 편리해지자 급속히 발전되어 도시화하였다. 더욱이 여름철이면 인근 해수욕장에 해수욕객이 운집하여 인파를 이룬다.
新羅(신라)時代(시대) 구남온천으로 불렸으며 新羅(신라) 51대 眞聖女王(진성여왕)이 어릴적에 天然痘(천연두)를 앓아 海雲臺(해운대)에 와서 溫泉浴(온천욕)을 하고 씻은 듯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알칼리성 단순식염온천으로 라듐분이 함유되어 피부병, 요통 고혈압, 류머티스, 빈혈 소화기질환 등 각종 성인병에 효험이 있으며 現在(현재) 中東(중동), 牛洞(우동)지역 1.4km2는 溫泉(온천)地區(지구)로 指定(지정) 管理(관리)하였다가 解除(해제)되었다.
해운대온천(海雲臺溫泉)은 釜山(부산)에서 동북방 18 km 지점 해운만안 사빈(砂濱)에서 용출하는 溫泉(온천)이다. 배산임해(背山臨海)의 지형이므로 風景(풍경)이 아름답고 해수욕장이 있는 등 호조건을 갖추고 있다. 천온 45∼50 의 알칼리성 단순식염천이며 라듐분이 약간 포함되어 있다. 新羅(신라) 때부터 알려졌으나 釜山港(부산항)의 開港(개항) 후 東萊溫川(동래온천)과 같이 日本人(일본인)에 의하여 開發(개발)되었다. 8·15 光復(광복) 후 이 지역이 釜山市(부산시)에 편입되고 交通(교통)이 便利(편리)해지자 급속히 發展(발전)되어 도시화하였다. 더욱이 여름철이면 인근 海水浴場(해수욕장)에 해수욕객이 雲集(운집)하여 人波(인파)를 이룬다.
脚注(각주)
1.↑ 해운대구 문화관광과 (2010년 1월). 《매력있는 세계일류도시 해운대》. 해운대구청.
수영사적공원(水營史蹟公園)
수영사적공원은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역사 공원으로, 경상좌수영성지에 마련되어 있다. 수영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했던 수군 군영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자리로 현재는 수영동 수영교차로에서 북쪽으로 200m 거리에 있다.
수영사적공원(水營史蹟公園)은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역사 공원으로, 경상좌수영성지에 마련되어 있다. 수영 사적 공원은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했던 수군 군영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자리로 현재는 수영동 수영교차로에서 북쪽으로 20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수영사적공원은 경상좌수영성지와 수영성 남문 내외에 조성된 부산광역시의 공원이다. 수영 사람들의 혼이 담겨있는 역사와 교육의 장으로 부산의 해양민속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유적 공원이다.
이곳은 수영교차로에서 북쪽으로 200m 거리에 있는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했던 수군군영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자리로 수영이란 지명도 수군절도사영의 준말이었는데 현재의 지명으로 굳어졌다.
공원 안에는 시 지정 유형문화재인 경상좌수영성 남문, 시 지정 기념물인 25의용단을 비롯한 수영야류 등 무형문화재 3종, 좌수영 성지 곰솔, 푸조나무 등 천연기념물 2종, 안용복 장군 사당 등 비지정 문화유적 5종이 있으며, 이를 보존·관리하고 있는 (사)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가 있다.
뒤로는 산세가 수려한 금련산이 있고 앞으로는 광안리해수욕장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해의 명승지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어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수영이란 지명도 수군절도사영의 준말이었는데 현재의 지명으로 굳어졌다.
수영공원은 조선시대 남해안의 4군영을 관할했던 수군총괄 군영인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던 자리로써 현재는 성은 없고 성지 관련 유적만 수영공원에 남아 있다. 이 공원 안에는 25 의용단을 비롯한 사당 및 충혼탑 유형문화재 3종과 수영 야류 등 무형문화재 3종, 수영동 곰솔, 푸조나무 등 천연기념물 2종, 안용복장군 충혼탑 등 비지정문화재 5종이 있으며 이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수영민속예술관이 있다.
특히 왜인들에게 독도가 우리땅임을 확약받아온 안용복장군 충혼사당 및 충혼탑을 비롯하여 송씨할매당, 할배당 등 수영 사람들의 혼이 담겨있는 역사와 교육의 장으로 부산의 해양민속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 문화유적 공원이다.
수영사적공원은 부산 수영구와 경상좌수영성지와 함께 대표하는 시민들의 휴식처, 관광을 해오고 있다.
文化財 指定(문화재 지전) 文化財(무화재)
첫댓글 이승철 ~ 화 2020-12-15 오전 12:58 ~ 옛날 노래를 들으면 너무나 좋습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이승철 ~ 화 2020-12-15 오후 6:07 ~ 追憶이 그립습니다.
이승철 ~ 화 2020-12-15 오후 6:54 ~ 양 선생님 옛날 사진도 좋았고, 젊었을 때는 映畵 俳優보다 더 잘났습니다. 愛人들이 많이 있었겠네요 ? 저는 작은 키에 못생겨서 愛人이 없었습니다.
지금와서 늙은 할망구 친구라도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꼬치가 안 선지 몆년되어 성관계는 못하고, 여자와 남자끼리 친구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저는 15살 때 부터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는데 옛날 사진이 없습니다. 참 부릅 습니다. 좋은 追憶이 되겠습니다. 축하 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