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식 시몬 신부님
십자가를 기꺼이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십자고상을 통해 많은 은총을 받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실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대못으로 생살을 꿰뚫을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 같고, 지금의 이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이 커 보일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 마음이 고통에 짓눌릴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위로를 받고 십자가에서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신자들도 십자가를 중히 여기기는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몸체가 있는 십자고상이 아니라
몸체가 없이 십자나무만 있는 십자가를 모신다고 들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보다 부활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으니 더 이상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아니라 부활하신 후 예수님 몸체가 없는 십자가를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십자고상이 나무나 돌 등 물질의 하나일 뿐이지 십자고상 자체가 예수님은 아닙니다.
십자고상은 예수님을 상징할 뿐이지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무나 어떤 재료로 만든 십자고상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고상이 표시하는
내용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이 이미 부활하여 십자가에 안 계신다는 이유로 몸체 없는 십자가만을 주장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체를 십자가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몸체 없는 십자가만을 만들어 사용한다면
인간의 감성과 정서를 모르는 데서 나온 처사 같습니다.
인간은 오관을 가진 육체적 존재이므로 오관을 총 동원해서 느끼고 깨달을 때 훨씬 더 강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물건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사형도구이므로 보기만 해도 혐오감을 주는 끔찍한 물건입니다.
거기에다 못 박힌 처참한 몸체까지 함께 있다면 더 실감나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청각적인 효가 있습니다. 흑백사진보다 칼라사진이 더 실감나고 평면사진보다 입체사진이 더 실감나고
정지한 영상보다 움직이는 동영상이 더 실감나는 것처럼 몸체 없는 십자가보다 몸체가 있는 십자가가 훨씬 더 실감나고
더 큰 느낌을 주고 더 큰 감동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몸체 없는 십자가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몸체 있는 십자가를 만들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 예수님의 이 십자가를 언제부터 소중히 여기며 공경하고 모셨을까? 문헌에 보니까 아주
오래전부터인데 성녀 헬레나가 골고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양옆의 두 도둑의 십자가를 발견했답니다.
성녀는 황제인 아들 콘스탄틴 대제에게 요청하여 예루살렘에 성당을 건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안치하였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해오다가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인 들에게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탈환한 이후 니체아
공의회에서 십자가 공경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헤라클레오 황제가 주님을 따르고자 화려한 의관을 갖추고 손수 십자가를 메고 골고타에 오르려
했으나 웬일인지 발걸음이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답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보이지 않는 줄에 매인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뜻하지 않은 광경에 즈카리아 주교는 “ 옛날 그리스도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헌 옷을 두르고
십자가의 길을 올라 가셨습니다.
그런데 폐하는 금관과 화려한 차림을 하고 계십니다.
아마 이것이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인가 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두터운 황제는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허술한 옷차림을 하고 다시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바, 아무
일없이 다시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사형도구였습니다.
심장이나 급소를 찔러 쉽게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양 손발을 뚫어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갈 때 까지 극도의
고통을 당한 후에 죽게 하는 사형방법으로서 십자가의 고통은 고통의 극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화려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장식도 아니라 혐오스런 물건일 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그 십자가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한낱 장식품으로 사용합니다.
목걸이로 귀걸이로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는 것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우리 신자들이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그들과 달라야합니다.
십자가를 사치와 장식에 사용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봄으로써 주님의 구원은혜를 감사하고 우리의 죄를
뉘우치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져야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길로 들어섰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를 하나씩 내주면서,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하신 다음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습니다.
십자가를 진지 하루 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 드렸습니다.
주님은 그 제자의 등을 두드려 주시며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그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왜 저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주셨습니까?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이라고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그 제자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러니까 제자가 반문했습니다. “그럼 똑같은 무게의 십자가를 앞사람은
아주 쉽게 옮겼는데, 저만 힘들게 졌다는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무겁다고 탓하지 마라. 내가 준 십자가는 사랑을 하면서 지면 무게가 가벼워지고 불평하면서 지면
무게가 무거워지는 십자가란다.
네 십자가가 더 무거웠던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널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네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 준거야.
그래서 힘들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거지”
맞습니다. 자신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면서도 십자가가 무겁다고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기는커녕 자신의 십자가가 무겁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힘들고 어렵게
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불평을 하면서 마지못해 진다면 그런 십자가는 우리를 괴롭힐 뿐 신앙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지면서 오히려 자신의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푼다면 자신의 십자가도 가벼워질 뿐 아니라 그 십자가는 큰 은총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고통 받는 이웃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이 없는 편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통이 오면 불평하면서 그 고통을 거부하지만 오히려 고통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불평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려 애쓰는 모습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만이 고통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알아서인가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불평을 늘어놓을 때는 불 뱀에게 물려죽었지만 불평을 후회하면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린 구리 뱀을 바라볼 때는 죽다가도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러시아의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 차례의 강도 상해죄를 저지른 두 명의 범죄자가 한 수도자의 도움으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수도자에게 자신들의 모든 범죄를 고백하고, 어떻게 배상하면 좋을지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수도자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성지순례를 할 것을 권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