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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IV
-①미래주의,②오르피즘,③표현주의,④러시아 아방가르드,⑤데 스틸과 신조형주의,⑥다다이즘,⑦순수주의,⑧바우하우스,⑨초현실주의,⑩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IV 목차
31.속도를 노래하라, 미래주의(futurism) - 전통과 단절하고 기계 문명과 속도를 찬미하다
32.오르피즘(Orphism) - 음악과 시, 원색으로 표현하다
33.표현주의 - 색과 형태 단순화… 인간 내면의 불안·공포 표현
34.러시아 아방가르드- 러 ‘볼셰비키 혁명’ 발단… 사회주의 시각 반영
35.데 스틸과 신조형주의 - 기하학적 추상예술 그룹…디자인·건축에 큰 영향
36.다다이즘-나를 빼고 모든 것을 부정하다- 반예술적 태도 지향…예술가 역할·가치에 의문 제기
37.순수주의 - 개성적 요소 모두 배제한 ‘기계미학’ 표방하다
38.바우하우스 - 미술과 디자인 재결합…예술과 산업 융복합 이끌어
39.초현실주의 - ‘내 안에 나 있다’ 꿈·무의식 세계를 탐구하다
40.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 두차례 세계대전 겪으며 부조리한 세상을 인식한 예술, 메시지 담는 대신 몸짓과 질감에 빠져들다
31 속도를 노래하라, 미래주의(futurism)
- 전통과 단절하고 기계 문명과 속도를 찬미하다
:아방가르드,구성주의,다다이즘,선언문,소음주의 음악,다이나미즘,큐보 퓨처리즘,
소용돌이파
‘혁신’과 ‘현대’에 가치 둔 미래주의
- 공업화 늦었던 이탈리아서 일어나 스스로 이름 짓고 자체 이론 규정
전쟁 찬양 광기 파시즘과 연결 -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사라져 - 다다이즘·러시아 구성주의에 기여
미래파는 역동성, 속도, 불안한 현대 도시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역동성과 속도를 표현한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자전거 타는 사람’.
입체파는 혁명이었다. 사실주의 이후 등장한 거의 모든 미술사조가 전통적인 평면 회화의 한계를 극복해 회화의 본질을 탐구할 때 입체파의 새로운 방식으로 대상을 묘사할 때 드러나는 개방성으로 인해 1910년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즈음 ‘혁신’과 ‘현대’에 가치를 둔 미래파는 전통적인 예술 개념 대신 기계 시대를 찬미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때 입체파의 면 분할은 획기적인 발상이었고, 이내 이들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독특하고 역동적인 비전을 만드는 데 중점을 뒀다. 따라서 기차·자동차·비행기 같은 새로운 기술뿐만 아니라 유리와 철의 등장과 함께 변화하는 새로운 도시풍경도 이들에게는 새로움이었다.
1899년 9월 19일 자 독립신문은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에 철로가 부설되고 처음 영업을 시작한 것을 보도하면서 “화륜거의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 연기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리”라고 했다.
미래파에게 새로운 기술이란 이 기사처럼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철도와 자동차는 교통수단을 넘어 시공간을 초월하는 도구로 전통사회에 일격을 가하는 획기적인 기계였다. 따라서 이들은 속도와 폭력 그리고 노동계급 모두 변화를 진전시키는 방법이자 수단으로 인식했으며, 모든 영광을 집단에 돌렸다. 또한 이들은 건축·조각·문학·연극·음악, 심지어 음식까지 넓고 다양한 분야를 포함했다.
세베리니 피갈의 ‘댄서’.
속도는 물론 폭력까지 변화 수단으로 인식
미래파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이유는 유럽 문화의 원류라는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 내내 반도 통일에 시간을 보내면서 공업화가 늦었던 이탈리아에 증기기관과 자동차는 한국인들의 놀람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고루한 전통에 매달려 허송세월했다는 반성을 전제로 통일을 이루고 공업화를 서두르던 이탈리아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고 힘찬 것, 달리는 것에 대한 찬미를 통해 새로운 아방가르드(Avant garde)를 자처했던 미래주의는 결국 무솔리니(1883~1945)의 파시즘(Fascism)과 연결돼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1차 대전 후 다시 활기를 띠면서 세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다다이즘(Dadaism)과 러시아 아방가르드(Russian avant garde)라 부르는 러시아 구성주의에 크게 기여했다.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 아르누보 등 새롭고 다양한 미술운동의 성과가 이탈리아에 전해진 것은 30여 년이 지난 1905년경이다. 따라서 유럽 문화의 종주국인 이탈리아는 새로운 서유럽 미술을 극복할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런 탓에 미래주의는 스스로 미학을 만들기 시작했고 모든 전통과 가치, 제도를 거부한 매우 급진적인 운동이었다. 미래주의는 여타의 미술운동이 비평가나 반대파에 의해 조롱조의 명칭을 얻은 것과 달리 스스로 이름을 짓고 자체 이론을 문학적 형태로 규정했다.
그들의 이런 입장은 1909년 2월 ‘피가로’지에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1876~1944)가 쓴 선언문이 실리면서 공식적으로 탄생한다. 이후 많은 예술집단이 탄생할 때마다 내놓는 소위 ‘선언문’이란 새로운 전통도 이때 시작됐다.
마리네티, 미래주의 ‘선언문’ 발표
마리네티는 선언 후 곧바로 움베르토 보치오니(1882~1916), 카를로 카라(1881~1966), 자코모 발라(1871~1958), 세베리니(1883~1966)와 작곡가 루이지 루솔로(1885~1947)와 함께했다. 마리네티는 모든 오래된 전통, 특히 정치적·예술적 전통에 대해 열정적인 혐오를 드러냈다.
그는 “우리는 과거를 원치 않는다”며 “미래파는 젊고 강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열정적인 민족주의자들인 동시에 과거와 모방을 거부하고 독창성을 중시했다. 또한 그들은 대담하고 폭력적인 광기 어린 집단이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문학은 골치 아픈 정체성, 황홀경과 수면 상태를 찬양했다. 우린 공격적인 움직임, 열정적 불면증, 레이서의 활보, 대담한 도약, 따귀, 주먹질을 찬양한다”는 선언문을 통해 이런 급진적인 태도를 밝혔다.
따라서 이들은 “우리는 전쟁(세상의 유일한 위생학), 군국주의, 애국주의, 무정부주의자들의 파괴행위를, 그것을 위해 죽는 아름다운 이상주의를, 여성 경멸을 찬양한다”고 밝혔다.
루솔로는 “오늘의 음악은 더욱 불협화한, 귀에 비정상적으로 울리는 음의 결합을 추구하며 이윽고 전차나 자동차, 군중이 내는 소음을 이상적으로 구성시키는 편이 ‘에로이카’나 ‘전원 교향곡’을 듣는 것보다 더 흥미롭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소음주의음악(bruitism)을 실천에 옮겼다.
미래파 화가들은 독창적인 스타일과 주제를 개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이들은 1910~1911년에 분할주의(Divisionnisme) 기법을 이용해 빛과 색을 점과 줄무늬로 표현했다.
그러나 1911년 세베리니가 파리를 방문해 입체파 화가들을 만난 후 그 영향으로 작품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역동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수용했다. 이들은 기억과 현재의 인상 그리고 미래의 기대를 결합하는 ‘동시성’과, 방향성을 위한 ‘힘의 선’을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활용했는데 1914년 밀라노 그룹과 피렌체 그룹 간의 갈등으로 인해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보 판나기의 ‘빠른기차’.
대담하고 폭력적인 광기 어린 집단
전쟁을 불사했던 급진적인 미래주의 화가들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참전했는데 보치오니는 전사한다. 전후 마리네티는 미래주의의 불씨를 살려냈고 이는 1940년대 중반까지 지속됐다.
그 후 미술사가 조반니 리스타(1943~ )는 1910년대 초기 미래파를 조형적 다이나미즘(Plastic Dynamism), 1920년대 미래파를 기계적인 미술(Mechanical Art) 그리고 1930년대를 대기미학시대(Aeroaesthetics)로 구분했다.
특히 1차 대전 직후 고안된 에어로페인팅(Aeropainting)은 동양의 부감 투시처럼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광경을 그려 매우 독특한 양식을 만들었다.
러, 역동성·속도·불안한 도시생활 주제로
이런 속도와 움직임, 방향성에 바탕을 둔 새롭고 급진적이며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일군의 화가들은 러시아에도 나타났다. 이들을 러시아 미래파 또는 러시아 입체파라고 부르는데 문학과 미술에서 커다란 변화를 이끌었고 그 중심에는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가 있었다. 그는 다비드 불뤼크(1882~1967), 라리오노프(1881~1964), 곤차로바(1881~1962), 말레비치(1878~1935)와의 교류를 통해 영감을 주고받으며 성장했다.
이들은 하나의 혼성양식에 입체주의와 미래파를 결합한 레제의 초기 입체주의 회화와 닮은 큐보 퓨처리즘(Cubo-Futurism)을 따랐다. 이는 1913년 아리스타크 렌툴로프(1882 ~1943)가 파리에서 돌아와 모스크바에서 처음 전시할 때 채택됐다.
러시아의 미래주의도 입체파 형태에 운동을 결합한 작품으로 역동성, 속도, 불안한 현대 도시생활을 주제로 삼았다. 이후 1917년 혁명 후 일부 화가들은 죽고 일부는 이주하면서 세가 약해졌다.
이런 영향으로 영국에서는 소용돌이파(Vorticism)가 등장한다. 1913년 말 에즈라 파운드(1885 ~1972)가 혁신적인 이론들의 혼란 속에서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을 새로운 하나의 종합체로 만들어내기 위해 소용돌이치는 회오리 같은 힘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모든 예술적 창조는 감정적인 돌풍의 상태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보치오니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31 속도를 노래하라, 미래주의(futurism) - 전통과 단절하고 기계 문명과 속도를 찬미하다 / 국방일보, 2019, 9.4.
32.오르피즘(Orphism) - 음악과 시, 원색으로 표현하다
:점묘주의, 분할주의, 칼리그램, 신지학, 절대정신, 강신술, 비학, 패치워크
그리스 신 오르페우스 이름서 유래 - 대표화가 들로네, 화려한 색채 사용
입체주의 기하학적 구성 바탕 시적인 부드러움과 동적 특성 담아
완전한 추상화에 근접한 회화 완성
로버트 들로네의 ‘붉은 에펠탑’.
입체파는 고딕이나 르네상스에 비하면 순간의 미술운동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폼페이를 집어삼킨 베수비오 화산 폭발만큼이나 대단했다. 그러나 입체파는 색채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때 오르피즘은 생명의 창조적 진화를 설파한 앙리 베르그송(1859 ~1941)의 “순간을 측정하려고 시도한 순간, 순간이 사라지는” 지속(la duree)이라는 철학적 사유와 시간, 경험에 대한 상징주의, 추상에 대한 시적 실험 등이 융합된 학제적인 시스템 아래서 발생했다.
오르피즘이란 말은 아폴리네르(1880~1918)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리스 신 오르페우스(Orpheus)의 이름에서 빌려 왔다. 그는 추상적 음악의 음계와 하모니를 색채로 표현해 현실을 떠나서도 감정과 경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오르피즘은 서로 무관하거나 대비되는 부분들을 임의적이고 부적절하게 병치했을 때 구성의 요소들이 논리적 혹은 관습적 방식보다는 오히려 충돌과 대비를 통해 상호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글자로 그림을 그리듯 시어들을 배열해 일정한 형태를 만드는 칼리그램(Calligrammes)으로 이어졌다.
오르피즘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문학·음악·조형 예술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개념 중 하나였다. 오르피즘은 다양한 인식의 표현,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즉각적인 직관, 혹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연속된 사건들에 대한 순간적이며 집중된 직관을 의미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현재’라는 심리적인 개념을 미술과 문학에까지 적용했다.
특히 들로네(1885~1941)는 화려한 색채와 시간, 경험을 포용하는 완전한 추상화에 근접한 회화를 완성했다. 그는 쇠라의 점묘주의(Pointillisme), 분할주의(Divisionisme) 대신 대비되는 원색의 점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탐구하며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성에 주목했다.
그는 이렇게 동시주의(Simultanisme)를 실천하면서 색을 면으로 처리하고, 색의 톤으로 공간을 암시하는 오르피즘(Orphism)을 주창한다. 프랑스 화가 들로네와 그의 아내 소니아 들로네(1885~1979), 체코의 쿠프카(1871~1957)가 중심이 됐다.
클레의 ‘시작’.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을 입체파의 분파로 생각했다. 하지만 들로네가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를 입체파로 취급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물론 컬러 차트와 같은 들로네의 작품은 이미 쇠라나 시냐크에 의해 예견됐던 일이다.
색과 색의 대비를 통해 들로네는 역동성과 화면의 공간감을 표현하는 한편 음악적인 율동, 리듬감을 표현할 수 있는 추상화로 발전시켜나갔다.
쿠프카는 음악과 영적 체험을 표현하고자 신지학(Theosophy)과 절대정신(Absoluter Geist)에 기초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그림으로는 표현되는 비구상적인 색채 구성으로 음악적인 소리 같이 공명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19세기 말 주요 미술 개념 중 하나로 쿠프카는 ‘색채의 현기증’이 나는 작품으로 완성했다. 칸딘스키(1866~1944), 몬드리안(1872~1944), 클레(1879~1940), 미국의 아서 도브(1880~1946) 등도 색면 대비를 통한 음악적 회화에 빠져들었다.
소년 시절, 강신술 사자로 알려졌으며 비밀 종파를 이끌던 마구 제조인 밑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던 쿠프카는 영매의 능력이 자신에게 처음 나타나자 강신술(Spiritualism)과 비학(Occultism)에 흥미를 느꼈고 후에 만난 신지학은 신비주의로 이어지면서 그의 전 생애를 지배했다. 오르피즘을 주제로 했던 이들은 모두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 음악을 주제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지학은 오늘날 병적인 이성주의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에는 가장 지성적인 신비주의로 인식됐다. 쿠프카는 유럽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해 이를 과감하게 작품에 도입한 작가로 음악에서 유추된 운율과 리듬을 시각적인 미술 작품으로 표현해낸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특히 그는 야수파 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무지개색을 주로 사용해 들로네보다 앞서 거의 완전한 추상에 도달했다. 하지만, 들로네는 이미 유명한 화가였고, 쿠프카는 체코에서 온 낯선 이름 탓에 들로네가 완전 추상에 먼저 도달한 화가라고 알려졌다.
파리 인근 퓌토에 살았던 그는 자크 비용, 글레이즈(1881~1953) 등과 전위적인 입체파들의 모임이었던 ‘황금분할’에 가세했다. 이들은 오르피즘의 영향을 받아 1912년 열린 살롱 드 라 섹션 도르에 입체파 풍의 작품과 함께 오르피즘이 반영된 작품도 출품했다.
칸딘스키의 ‘구성VII’.
아폴리네르는 1913년 발표한 ‘입체파의 4단계’에서 오르픽 큐비즘(Orphic Cubism)을 논하면서 “입체파에서 새로운 입체파가 나온다. 오르페우스의 통치가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쿠프카는 아폴리네르식 구분에 반발해 “1911년 그리스의 다른 모든 문화 시스템을 무시하고 나만의 추상적인 회화적 방식인 오르피즘을 창작했다”고 주장하면서 오르피즘에 자신을 포함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유난히 피카소를 라이벌로 생각했던 들로네는 쿠프카와 같은 영적인 계기는 없었지만, 색채를 풍부하게 사용해 추상적 형태의 표현적 특성을 강화함으로써 입체주의의 기하학적인 구성에 시적인 부드러움과 동적인 특성을 불어넣고자 했다.
입체주의를 새로운 양식으로 변환시켜 화단에서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려 했던 들로네는 쿠프카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대상을 단순화하고 그 대상에 입체주의의 장점을 살려 다시점을 통해 대상을 보는 듯 그 시점마다 보이는 다른 면들을 다양한 색면들 사이로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통한 효과가 나도록 한 것이다.
이로써 추상은 큰 발전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이후 조화를 이룬 색은 느린 움직임을, 조화롭지 못한 색은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면서 색채 대조비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후 등장하는 키네틱 아트의 기초가 됐다.
들로네의 아내 소니아는 ‘패치워크’ 기법을 패션에 끌어들이는 등 예술과 산업의 협업을 이끌었다. 소니아 들로네의 ‘글로리아 스완손을 위한 드레스’ 일부.
또한 소니아 들로네의 시에서 디자인에 이르는 폭넓은 움직임은 패션과 장식, 섬유예술로 이어지면서 예술과 산업의 협업에까지 이르게 된 것도 큰 변화이자 성과다. 소니아는 당시 전위적인 예술가들의 댄스홀이자 모임 장소였던 발 불리에(Le Bal Bullier)에 나가 친구들과 함께 ‘동시 드레스(Simultaneous dresses)’를 만들기 시작했다.
1913년에 처음으로 여러 색상, 무늬, 소재, 크기, 모양의 작은 천 조각을 서로 꿰매 붙이는 패치워크(Patchwork) 기법으로 드레스를 완성했다. 이는 미술을 실생활로 끌어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드레스는 더 이상 세련된 방식으로 드리워진 재료가 아니라 살아있는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1차 대전 당시 포르투갈로 피난 갔던 소니아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카사 소니아(Casa Sonia)’란 부티크를 열었고 전후 파리로 돌아와 발레 의상과 드레스 등을 만들면서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오르피즘은 1차 대전으로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그로 인한 변화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생명력이 긴 운동이다.
[사진=필자 제공 ]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32.오르피즘(Orphism) - 음악과 시, 원색으로 표현하다 / 국방일보, 2019, 9. 4.
33 표현주의 - 색과 형태 단순화… 인간 내면의 불안·공포 표현
: 다리파, 청기사파, 보릅스베데그룹, 낭만적 풍경화, 유겐트슈틸, 신즉물주의
자연 재현보다 주관 표현 중시 - 확실한 선·단순한 색채 활용 - 창조자로서 예술가 역할 강조
비이성·반서구·반전통 이념 추구 - 역사적으로 불안한 시대 주로 등장
독일 ‘다리파’ ‘청기사파’ 유파 지칭 - 대표화가 에밀 놀데·칸딘스키
에밀 놀데의 ‘황금송아지 주변의 춤’. 바이에른주컬렉션 소장
그로츠의 ‘베를린 거리’. MET 소장
산업혁명은 인간에게 풍요와 여유를 가져다 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대량살상이 가능한 기계, 신무기가 전쟁에 동원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상 초유의 대규모 피해를 초래했다. 이런 전쟁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상실감과 허무함은 끝이 없었다.
세기말의 불안과 공포, 신비주의는 독일 게르만 특유의 민족적 정서에 편승해 ‘뜨겁게’ 타올랐다. 이들에게 자연의 재현은 더는 화가들의 일이 아니었다. 대신 작가의 주관, 개성, 생각과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선으로 형태를 강조하고 색채는 원색 위주의 단순한 평면을 지향했다. 작가들의 감정 상태가 작품의 주제가 됐고, 이는 아주 강력하게 묘사·표현됐다.
표현주의는 자연의 재현보다 주관의 표현을 중시했다. 선에 의한 확실한 형태와 단순하고 평면화된 색채로 ‘마음의 상태’를 아주 강렬하게 묘사하고 표현했으며 대상의 형태를 뒤틀어 변형했다. 특히 부조화와 분열을 그렸고 인간의 심적인 내부세계의 가장 모순적이며 가장 폭력적인 면을 드러냈다.
표현주의는 반자연주의적인 경향의 미술이다. 특히 창조자로서 예술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몇 가지 강한 원색을 사용해 색채 대비 효과를 지향했다. 또 색과 형태가 긴밀한 형식 속에 단순화되고 극단적인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과 심적 상태가 반영된 탓에 관객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표현주의란 용어는 어떤 특정한 예술의 유파나 양식을 지칭하기보다는 ‘비이성’을 추구해 ‘반서구’적인 태도와 ‘반전통’적인 이념을 갖는 일반적인 경향을 지칭한다. 표현주의는 그림의 내용, 즉 ‘문학성’을 추구해 형태의 완성보다 내용주의 미학에 기초해 감정과 이념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조형적 완성도보다는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작가의 내면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중시한다. 대개 역사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표현주의적 양식이 등장했는데 내면의 심리를 묘사하는 적극적인 태도가 표현주의의 중심을 이뤘다.
다리파, 독일 사회의 도시적 병폐 고발
특정 유파로서 표현주의는 독일의 ‘다리파(Die Brucke)’와 ‘청기사파(Der Blaue Reither)’를 지칭한다. 독일 표현주의는 당시 아카데믹한 미술로 받아들였던 인상주의와 보릅스베데(Worpswede)그룹의 낭만적 풍경화, 독일어권의 아르누보 형식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전달해 자신과 사물의 본질과 관계하는 개인적인 입장을 강조했다. 때로 이런 태도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 표시가 됐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예술가는 전체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행동한다는 기본 신념 아래 이들은 당시 독일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도시적 병폐를 미술을 통해 고발하고 비판하며 사회를 개선해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은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와 초기 입체파의 기법과 중세 독일 목판화의 거칠고 들쭉날쭉한 형태, 원시미술의 낭만성을 차용했다. 이들은 인상주의를 사물의 외양에 관심을 두는 ‘피상적이며 기계적이고 표면적인 미술’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은 사물의 내면의 깊이를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표현주의는 기법적으로 선적인 것, 얼룩진 것과 사실적인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 중 선적인 그림이 주류를 이루는데 특히 키르히너(1880~1938) 등 다리파 그림에서 많이 나타난다.
내용 면에서는 놀데(1867~1956)의 종교적인 주제, 페히슈타인(1881~1955)과 키르히너 등의 유토피아적인 주제, 신즉물주의의 딕스(1891~1969)나 그로츠(1893~1959)의 사회비판적인 주제, 베크만(1884~1950)과 마르크(1880~1916)의 상징적 주제, 코코슈카(1886~1980)의 비관적인 인간 심리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구분된다.
개성보다 집단 중시…공동작업 선호
독일 표현주의는 1905년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키르히너, 헤켈(1883~1970), 놀데, 뮐러(1874~1930) 등 건축을 공부한 이들을 주축으로 펼쳐졌다. 다리파로 불린 이들은 전통적인 미술교육을 거부하고 순수한 상태로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다리파는 중세 길드 조직처럼 공동작업을 선호해 개성보다는 집단을 중시했다. 특히 키르히너는 표현주의와 다리파의 미학에 관한 글을 통해 그룹을 리드했다. 1905년에 목판화에 새긴 선언문을 통해 이들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짓는 다리 역할을 자처했다.
이들은 빈민계층에 대한 동정, 부르주아 중심의 낡은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 사회정치적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다리파는 프랑스 야수주의와 비슷한 강렬한 원색과 고의적인 형태의 변형이 특징이지만 11~13세기 중세고딕의 조각과 스테인드글라스의 전통을 살려 형태를 왜곡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표현 기법으로 차별화를 이뤘다.
원시미술과 프랑스의 신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의 영향도 컸다. 여기에 매우 빠른 스트로크와 그림을 삼켜 버릴 듯한 태도로 작업했다. 이들은 약 8년 동안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70여 회의 전시회를 통해 자신들의 표현주의적인 열정을 드러냈다.
회화 그 자체를 목표로 삼은 칸딘스키
다리파가 공동작업과 과격한 사회 비판으로 다소 급진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청기사 그룹은 형태와 내용을 조화시키면서 화려한 원색의 화면을 펼쳐갔다. 이들은 예술의 영적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평범한 것을 초월하고자 했다.
이 모임의 주역은 당시 독일에 살았던 러시아 출신의 화가 칸딘스키(1866~1944)였다. 칸딘스키의 목표는 회화 그 자체였으며 그는 그림을 통해 즉흥적으로 정신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음악 같은 그림을 그리려 했다. 그의 이런 정신적인 것을 지향하는 태도는 ‘절대’ 혹은 ‘추상’이라는 회화를 탄생시켰다.
청기사파가 자신들의 예술에 관해 공식적으로 선언한 바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미학과 예술에 대한 입장은 칸딘스키가 1910년에 펴낸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Concerning the Spiritual in Art)’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정신을 화면에 표현함으로써 현실적인 형체를 버리고 순수 추상화를 탄생시키는 미술사적 혁명을 실천에 옮겼다.
청기사들은 색과 형태가 구체적인 영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이념 아래 뭉쳤다. 따라서 추상화로의 이동은 부분적으로 형태와 색상을 그림 내에서 별개의 요소로 근본적으로 분리하거나 현존하는 대상에 비자연적인 색을 적용한 결과였다.
이들은 추상적인 시각적 형식에 대한 독특한 접근 방식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그림과 음악의 유사성에서 찾았다. 따라서 이들은 작품 제목도 구성, 즉흥, 연습곡(Etudes)이라고 붙였다. 그들은 음악이 유형적이거나 비유적인 표현이 없는 추상 미술과 일맥상통한다고 봤다.
또한 색과 소리 그리고 기타 자극을 감지하는 감각의 교차 또는 ‘유니온(Union)’이라는 개념을 탐구했다. 이들은 여러 도시를 순회하는 전시를 통해 많은 지지자를 모았고, 현대 미술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또 에드워드 뭉크(1863~1944), 앙소르(1860~1949), 오스트리아의 분리파인 클림트(1862~1918)는 물론 러시아 아방가르드(Russian avant-garde)와도 교류하면서 1920년경에 이르도록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33 표현주의 - 색과 형태 단순화… 인간 내면의 불안·공포 표현 / 국방일보, 2019, 9. 25.
34. 러시아 아방가르드- 러 ‘볼셰비키 혁명’ 발단… 사회주의 시각 반영
: 신원시주의, 광선주의, 입체 미래주의, 절대주의, 구성주의, 콜라주,
포토몽타주, 다이아몬드 악당, 당나귀 꼬리, 생산자 미술
유럽서 복귀한 작가들 가세로 촉발
학문·예술 등 급격한 변화 불러 무→유 창조 ‘비정형적 추상’ 주력
‘사회주의 이념의 바벨탑’이라는 ‘타틀린 타워’가 구성주의 대표작
회화·조각은 부르주아 미술 간주 - 건축·무대미술 등으로 범주 넓혀 -스탈린 개입으로 ‘쇠락의 길’로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위한 디자인’.
칸딘스키의 ‘무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인류 역사는 20세기를 맞으면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정치는 물론 경제·과학·사회·문화의 급진적 혁신은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까지 변화시켰다. 그래서 어떤 이는 20세기를 일러 “의욕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때로는 무시무시한, 하지만 항상 매혹적인 그런 세기였다”고 회고했다.
20세기를 격동의 세기로 이끈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국의 해체, 그리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상군을 거느렸던 러시아 제국의 ‘개혁보다는 혁명이 필요’한 상황에서 레닌을 주축으로 한 다수파 볼셰비키들은 1917년 역사적인 10월 혁명을 성공시켜 부르주아적인 전제 정부를 몰아내고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했다. 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인 동시에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을 타파한 최초의 혁명이었다.
이런 혁명은 사회뿐만 아니라 교육·학문·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다. 특히 미술 분야의 변화는 러시아 제국과 소련 사이, 즉 1890~1930년에 절대주의(Suprematism), 구성주의(Constructivism), 러시아 미래주의(Russian Futurism), 광선주의(Rayonnism), 입체적 미래파(Cubo-Futurism), 러시아 포멀리즘(Russian Formalism), 신원시주의(Neo-primitivism) 등으로 나타났다. 이를 통칭해 러시아 아방가르드(Russian avant garde)라 한다.
이 중심에 섰던 화가들은 주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출신이 주를 이뤘다. 말레비치(1878~1935), 엑스터(1882~1949), 타틀린(1885~1553), 칸딘스키(1866~1944), 불뤼크(1882~1967), 아키펜코(1887~ 1964) 등이다.
물론 이전부터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1차 대전으로 유럽에 나가 활동했던 작가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촉발됐다. 특히 칸딘스키는 10월 혁명 이후 1920년 3월 모스크바에 세워진 새로운 소비에트의 미술교육기관 ‘잉크유케이(INKhUK·Institute of Artistic Culture)’의 설립과 프로그램을 편성을 맡았다.
그는 이곳에서 인간의 지각과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예술형태 및 회화·조각·음악·시·건축·무용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 연구 프로그램을 실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비정형적 추상은 사회적 혁명에 버금가는 미술의 혁명을 실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새로운 권력이 된 볼셰비키들은 미술 역시 완전히 무에서 새로 출발하기를 원했으며 부르주아 문화를 뛰어넘는 사회주의 문화를 만들려는 시도가 더욱 실험적이면서 구체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대표 작가 말레비치의 기하학적 추상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예술이 주제를 초월해야 한다고 믿었고, 형태나 색의 진실이 이미지나 서사보다 ‘최고’로 다뤄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주의’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가 대상이 되는 추상적인 미술을 택했다. 이런 실험은 1910년 결성된 ‘다이아몬드 악당(Jack of Diamonds)’ 그룹의 가장 급진적인 멤버들로 구성된 ‘당나귀 꼬리(Donkey’s Tail)’ 멤버들이 1912년 전시를 열면서 본격화했다.
그 후 1915년 말레비치 등 13명의 작가가 마지막으로 개최한 ‘마지막 미래 미술 전시회’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리면서 하나의 유파로 자리 잡았다. 이때 출품된 그의 ‘검은 사각형’이나 시인 마야콥스키(1893~
1930)의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는 정말 기존 예술들이 정신이 번쩍 나도록 따귀를 때렸다.
말레비치와 함께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이끈 한 사람은 타틀린(1885~1953)이다. 그는 ‘구성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말레비치와 입체적 미래파 운동을 함께 하던 그는 1913년 파리 방문 이후 근본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기존의 오브제나 물체를 새롭게 구성하는 3차원적인 건축적 작업을 탐색한다. 1921년 타틀린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코민테른 즉 제3인터내셔널 공산주의 회의에 헌정할 기념비를 의뢰받았다.
그는 이에 사회주의 이념의 바벨탑이라는 ‘타틀린 타워’, 즉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비’를 통해 사회주의 이념을 구현한 현대적이며 기능적이고 역동적인 정부청사 건물을 제안한다.
타틀린의 이 타워는 총 400m 높이에 유리와 철을 사용하고 중앙에 유리로 된 원통형·피라미드·입방체가 서로 다른 속도로 회전하도록 구상했다. 이런 그의 구상은 실은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가 미술을 대하는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초기 아방가르드의 주역 중 하나였던 타틀린은 10월 혁명을 수용해 “내 온몸은 창조적이며 사회적이고 교훈적인 생활에 젖어들었다”고 말했다. 미술은 이제 순수한 미보다는 산업과 생산, 인민의 삶에 봉사하는 미술, 디자인이 중요하게 취급됐다.
이렇게 혁명정부는 회화와 조각을 부르주아 미술로 간주해 부정하면서 철과 유리 등 공업재와 그 생산물을 사용하는 미술의 사회적 효용성을 강조해 건축·디자인·무대미술 등으로 범주가 넓어졌다. 타틀린 타워도 이런 변화의 산물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작가 중 혁명정부의 미술정책에 봉사하는 실용파와 순수조형파로 분리된다.
실용파는 알렉세이 간(1893~1942)의 ‘구성주의 선언’(1922)에 바탕을 둔 미술의 산업과 일체화를 실천에 옮긴 생산자 미술(Productivist art)을 주창했다.
이에 로드첸코(1891~1956)와 그의 아내 스테파노(1894~1958) 등이 합세해 “예술가도 노동자이며, 새로운 것들을 디자인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순수미술을 포기하고 그래픽 디자인, 사진, 포스터, 정치적 선전물에 전념했고 실용적이며 인민의 삶에 기여하는 디자인에 몰두했다. 이들은 콜라주(Collage)와 포토몽타주(Photomontage) 작업과 사진을 통해 구성주의 디자인을 완성한다.
한편 1919년경부터 이들과 결별하고 추상적인 공간과 리듬의 탐구를 추구했던 나움 가보(1890~1977)와 그의 형 페브스너(1886~1962) 등은 여전히 순수조형을 추구했다.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삶과 예술을 일치시켜 사회주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1939년 형식주의·극좌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이들을 대체하며 소멸한다.
아방가르드 예술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억압하지도 않았던 레닌과 달리 이후 등장한 스탈린은 예술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사회주의 혁명의 도구로 민중이 수용할 수 있는 작품을 중시했다.
이렇게 스탈린주의와 불화를 빚기 시작해 1934년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차 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창작 원칙으로 선포되면서 아방가르드 예술은 사라지고 전후 미국 미술에 많은 족적을 남긴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34 러시아 아방가르드- 러 ‘볼셰비키 혁명’ 발단… 사회주의 시각 반영 / 국방일보, 2019, 10. 8.
35. 데 스틸과 신조형주의 - 기하학적 추상예술 그룹…디자인·건축에 큰 영향
: 신지학, 신플라톤주의, 형체해체론, 바우하우스, 다다이즘, 원과 사각형 운동
몬드리안, 구성 A, 1920, 유화, 90x91㎝, 로마근현대미술관.
1917년 10월 되스부르크에 의해 출간된 『데 스틸』 제1호 표지. 디자인은 빌모스 휘사르가 맡았다.
카페 라베트(Cafe L Aubette, Strasbourg)의 내부.
되스부르크의 ‘원소주의’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해 건축과 미술이 완전하게 통합된 예로 꼽힌다.
되스부르크, 시간과 공간의 구축 II, 1924, 트레이싱 종이에 과슈 연필 잉크, 47x40.5㎝,
티센미술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드러난 인간의 잔인함과 이로 인한 참상을 극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여망과 노력이 나타났다. 영어의 스타일(Style)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 ‘데 스틸(De Stijl)’ 운동도 그런 노력의 하나다.
데 스틸 운동에 동참한 이들은 예술 관람으로 사회적·정신적인 구원을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다. 하지만 이것이 실현될 수 없는 ‘환상’임을 자각하면서 데 스틸 운동은 종말을 맞는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과 시도는 모더니즘의 바탕이 되는 동시에 미술의 전통과 방법론을 일신하는 계기가 됐고, 건축과 디자인 등 삶에 바탕을 둔 미술을 실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데 스틸 운동이 시작된 1917년 네덜란드는 정치·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경험했다. 사회분열의 원인이었던 구교와 신교 간의 종교적 앙금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기독교 보수주의 세력 간의 타협(Pacificatie van 1917)으로 일부 해소됐다. 또 선거권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면서 혁명적인 의회정치를 통해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 자유와 민주를 대표하는 ‘개방과 관용의 나라’ 네덜란드가 탄생한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은 예술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군의 미술인들은 ‘미래의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형성해 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중립을 유지했던 네덜란드의 예술가들은 1914년 이후 네덜란드를 떠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당시 국제적인 미술의 중심인 파리와는 동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적인 변화의 요구를 감지한 화가 되스부르크(Theo van Doesburg,1883~1931)는 『데 스틸』이란 잡지를 창간하고 새로운 미술 운동을 펼치기 위해 다른 예술가들을 찾아 나섰다.
되스부르크를 중심으로 더 나은 희망이 있는 미래, 진보와 긍정, 재미에 대한 믿음 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뭉쳤다. 여기에 적극 동참한 화가로는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이 있다. 그는 신지학(Theosophy)과 데 스틸의 조형적 이념과 철학적 배경을 공식화한 쇤매커(M.H.J. Schoenmaekers,1875~1944)의 신플라톤주의에 기반한 미술이론을 펼치면서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를 펼쳐나갔다.
몬드리안은 칸딘스키가 주창한 ‘반(反)자연의 재현’에 착안해 고흐와 고갱의 색채와 공간에서 추상성, 세잔의 사물의 구축적 표현, 확대된 입체파에 보이는 조형적 표현의 가능성 등을 접목시킨 완전한 추상을 시도했다. 그는 입체주의의 형체해체론을 더욱 발전시켜 대상의 구조적 파악을 통해 기하학적인 선과 단순한 색채의 순수한 관계를 보여주는 극단적 추상론을 전개했다.
금욕적이고 절제됐으며 심각한 면모를 지닌 신조형주의의 기본 이념 역시 새로운 조형성의 탐구를 지향했다. 구체적인 형태를 재현하기보다는 형태의 원초적이며 보편적 관계, 즉 ‘수직, 수평의 비대칭적 관계’만을 끝까지 고집하며 순수를 지향했다.
특히 되스부르크는 『데 스틸』이라는 잡지에서 유토피아적 이상에 기초한 정신적 조화를 추구하는 넓은 의미의 예술 개념을 채택하고, 이를 동조하는 예술가들을 규합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렇게 그는 몬드리안과 건축가 제이콥 오우트(JJP Oud,1890~1963), 빌모스 휘사르(Vilmos Huszar,1884~1960) 등 건축가와 화가들을 모아 데 스틸 운동을 펼쳤다.
데 스틸 운동은 시각예술을 넘어 다양한 예술적 장르를 포함하는 종합예술을 지향해 건축, 도시계획, 산업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음악과 시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미학을 숙성시켜 나갔다. 이들이 생각했던 예술은 인간의 삶에 유용한 예술이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대두된 실업, 노숙자,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의 사회문제와 새로운 경제 시스템은 건축가, 작가, 화가, 디자이너에게 큰 고민을 안겼다. 이들은 산업화 이후의 건축재인 유리, 콘크리트와 철재를 사용해 노숙자와 빈곤한 이들을 위한 주택 개발 등의 새롭고 긴급한 아이디어들을 구했다.
따라서 이들은 새로운 도시주의를 반영한 도시 계획과 유토피아를 구현하려는 아이디어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화한 세계에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고 표현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추상미술을 지향한 이들뿐만 아니라 칸딘스키나 말레비치, 한스 아르프(Hans Arp,1886~1966)도 그즈음 추상미술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몬드리안이나 되스부르크, 일리야 볼로토프스키(Ilya Bolotowsky,1907~1981)와 같은 데 스틸 화가들은 리트펠트(Gerrit Rietveld,1888~1964), 오우트 등 건축가들과 함께 직선과 사각형, 삼각형, 원 등을 기본으로 이들로 구성된 순수한 형상을 표현했다. 대부분의 도형들은 기본적인 삼원색으로 칠해졌으며, 대칭보다는 비례와 균형, 순수한 색의 대비를 통해 화면의 균형을 찾으려 했다.
‘예술은 미적 정제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인간의 마음을 순수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추상적인 형태로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해 ‘자연스럽거나 구체적인 표현’을 위한 신조형주의 이념을 추구했던 몬드리안은 데 스틸 운동과 같지만 또 다른 신조형주의(Neo Plasticism)를 전개했다.
신조형주의에는 판 데어 렉(Bart Van der Leck,1876~1958), 반통겔루(Georges Vantongerloo,
1886~1965), 건축가 아우트 판 토프(Robert van t’Hoff,1887~1979), 윌스(Jan Wils,1891~1972) 등이 함께했다. 이들은 색채와 선의 순수한 관계를 주장하면서 그 순수성을 보편성과 연계해 회화, 조각, 디자인, 건축 등을 같은 원리로 통일시키고자 했다.
특히 몬드리안은 지금까지의 미술, 건축, 디자인과 구분하고 차별화하기 위해 1920년 ‘신조형(Nieuwe Beelding)’이란 명칭을 사용했고, 1925년 『신조형(Neue Gestaltung)』이란 책도 발간했다.
데 스틸 운동은 미술에서 형태와 색상, 가장 기본적인 선, 기본적인 원색만 사용하는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했다. 예를 들어 데 스틸 운동은 수직과 수평선만 사용해야 했지만 되스부르크는 수직과 수평선이 만들어내는 회화에 부족한 역동성을 부여하기 위해 대각선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구성의 기울기를 허용하는 ‘원소주의(Elementarism,1924~1931)’를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몬드리안은 데 스틸 운동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신조형주의와 바우하우스(Bauhaus), 구성주의, 다다이즘(Dadaism) 예술가들과 교류하던 모흘리 나기(Laszlo Moholy Nagy,1895~1946)와 아우트 등이 1927년 창간한 잡지 『110』이 이들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면서 이들은 1930년대 초까지 꾸준하게 회화와 조각, 디자인, 건축에 많은 영향을 끼치며 20세기 추상미술운동의 중심을 이뤘다.
이후 신조형주의는 1930년 프랑스의 ‘원과 사각형(Cercle et Carre)’운동과 함께 미국으로 이식됐으며 1940년 몬드리안의 미국 방문 후 미국에서도 많은 예술가들이 이 이념에 동참했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35. 데 스틸과 신조형주의 - 기하학적 추상예술 그룹…디자인·건축에 큰 영향 / 국방일보, 2019, 10. 16.
36. 다다이즘- 나를 빼고 모든 것을 부정하다 -
반예술적 태도 지향…예술가 역할·가치에 의문 제기
: 반예술, 레디메이드, 초현실주의, 아상블라주, 콜라주, 포토몽타주, 메르츠, 망막미술
1차 대전 시기 카바레 볼테르서 시작
유물론적·민족주의적 태도에 바탕 - ‘레디메이드’ ‘아상블라주’ 기법 사용
일상 물건, 특수한 예술품으로 전환 - 선택·분리·창조의 관계 보여줘
마르셀 뒤샹의 ‘샘’. 필자 제공
슈비터즈 메르츠의 ‘회화 32 A’. 필자 제공
증기기관 발명과 산업혁명으로 인류의 생활은 급속도로 발전했고, 중산층이 증가하면서 근대주의(Modernism)의 틀을 갖춰 갔다. 동력과 철강 산업의 발달은 군비를 확충시키는 힘이 됐다. 여기에 날로 증가하는 민족주의적 성향, 식민지 확대, 군사적 이익을 위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동맹 체제 탄생으로 세계대전은 이미 잉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세계 질서의 판을 새로 짜는 결과를 낳았다. 유럽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화폐 발행으로 버티며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지만, 미국은 이를 계기로 경제 대국이 됐다.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실업이 급증했고, 전쟁으로 빈 남자들의 일자리는 여성들이 메웠다.
이는 이후 많은 국가가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계기가 됐고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1차 대전은 ‘잃은 사람은 많아도 얻은 이는 없는 전쟁’이 되고 말았고 파괴와 유혈은 유럽의 문명적 우월성과 자부심을 흔들었다.
공연 예술·시·회화 등 여러 분야서 나타나
이런 혼란의 시기, 무정부주의적인 문학과 예술운동인 다다이즘(Dadaism)은 1차 대전(1914~1918)이 한창이던 1916년 전쟁의 포화로부터 안전한 중립국 스위스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에서 시작됐다. 휴고 볼(1886~1927)과 에미 헤닝스(1885~1948)가 설립한 카바레 볼테르에는 양코(1895~1984), 리하르트 휠젠베크(1892~1974), 트리스탄 차라(1896~1963), 장 아르프(1887~1966) 등이 함께했다.
다다이즘은 입체파·미래주의·구성주의·표현주의 등 다른 전위 운동과 함께 공연 예술은 물론 시·사진·조각·회화·콜라주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났다. 유물론적이며 민족주의적인 태도에 바탕을 둔 다다이즘은 베를린·하노버·파리·뉴욕·쾰른을 비롯한 많은 도시에서 등장했으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초현실주의가 등장하면서 쇠락할 때까지 다다이즘의 아이디어와 미술에 대한 태도는 현대와 현대미술의 바탕이 됐다.
다다이즘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 아름다운, 예술적으로 기쁜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봤다. 또 부르주아적인 감성을 뒤집어 놓으며 사회와 예술가의 역할, 예술의 목적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다다이즘은 예술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는 운동으로 부르주아 문화의 모든 규범을 부정하는 반예술(Anti-Art)적 태도를 지향했다.
따라서 그들은 “다다는 반(反)다다다!”라고 외쳤다. 이들의 아지트인 카바레 볼테르는 소설 『캉디드(Candide)』를 통해 조롱과 풍자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소설가 볼테르(1694~1778)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다.
이들의 반예술적 경향은 카바레 볼테르에 모이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창작의 기회를 부여하려는 태도로 나타났다. 이는 전통적인 예술작품의 모든 규범에 반하는 것으로 예술적 과정에서 예술가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방법이 됐다.
다다이스트들은 이미 만들어진 일상적인 물건, 기성품들을 선택해 예술품으로 만드는 레디메이드(Ready Made)기법이나 아상블라주(Assemblage)를 사용했다.
그들은 이런 뜻밖의 방식을 통해 예술적 창조와 예술의 정의, 예술의 사회적 가치 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철저하게 예술의 본질에 대한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키고자 했다. ‘반예술의 기수’ 뒤샹에 의해 ‘가려 뽑힌’ 레디메이드는 이후 사회적·예술적 맥락에서 ‘다시 고쳐 보기’ 혹은 ‘다시 이름 지음’의 관계와 대응됐다.
이는 작가의 선택이 곧 작품이 되면서 일반적인 물건이 특수한 예술품으로 전환되는 선택과 분리, 창조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런 경향은 1916년 제작된 언더우드 타자기 비닐 커버를 직접 선택한 뒤샹의 ‘여행용 접는 의자’에서 잘 나타난다.
‘다다’ 잡지 발간, 반전메시지 담은 전시회도
사실 ‘다다’라는 용어의 어원도 다양한데 어느 날 휠젠베크가 사전에 임의로 나이프를 밀어 넣은 결과 칼끝에 닿은 단어가 다다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다다란 용어는 프랑스어로 ‘어린이용 목마’의 구어체 용어다. 하지만 유치함과 부조리에 대한 다다이스트들의 태도를 드러내는 한편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사용했던 모든 단어가 다른 것을 지칭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취리히의 다다이스트들은 『다다』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반전·반예술의 메시지를 담은 전시회를 전개했다. 차라는 ‘갤러리 다다’를 열어 전시회를 독려하는 한편 프랑스와 이탈리아 작가들에게 편지를 보내 동참을 호소했다. 1918년 전쟁이 끝나면서 취리히에 모였던 작가들이 각자 고국으로 돌아가자 운동은 더욱 확산됐다.
취리히의 다다는 1919년 4월 ‘다다 4-5’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음악은 소음, 문학은 동시성, 미술은 우연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다이스트 차라’는 다다이스트 행사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을 분노하게 만드는 추상 미술의 가치에 대한 보수적인 연설로 시작해 불협화음 가득한 음악을 연주했다.
행사는 군중들이 소품을 파괴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낭독으로 이어지면서 ‘폭동’에 가까워졌다. 차라는 “폭동의 성공의 열쇠는 청중의 개입으로, 참석자는 단순히 예술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에 관여하게 됐다. 이것은 전통 예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라며 이를 ‘다다이즘의 마지막 승리’로 규정했다. 이후 차라는 파리에서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을 만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이론을 공식화했다.
베를린 그룹, 다다 중 가장 반정부주의적
1917년 독일로 돌아온 휠젠베크는 베를린의 ‘클럽 다다’에서 활동하며 바더(1876~1955), 크로스(1893~1959), 회흐(1889~1978), 하우스만(1886~1971)과 함께 다다이즘을 실천했다. 이들은 전쟁과 정치가를 풍자하는 만화와 콜라주, 포토몽타주를 통해 정치적인 경향이 짙은 작업을 전개했다.
이들과 거리를 뒀던 슈비터즈(1887~1948)는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하노버에 자리를 잡고 ‘메르츠’라는 자신만의 형식으로 다다이즘을 다뤘다. 또 쾰른에선 아르프가 에른스트(1891~1976), 바르겔트(1892~1927)와 합류해 콜라주 실험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들은 반부르주아와 무의미한 예술에 중점을 뒀다.
파리에서는 ‘취리히 다다’의 소식을 접한 브르통과 아라공(1897~1982), 폴 엘뤼아르(1895~1952) 등이 1920년 5월 ‘다다 페스티벌’을 열었고, 『르 카니발(Le Cannibale)』 등의 잡지를 내며 시위와 전시 공연을 이어갔다.
1915년 전쟁의 피난처였던 뉴욕에 도착한 뒤샹(1887~1968)은 다다라는 명칭과 일정 거리를 뒀지만 다다와 맥을 같이하는 예술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유쾌한’ 피카비아(1879~1953)를 만나 끔찍한 유머와 약간의 아이러니로 세상의 권위를 조롱하고 기존 예술의 가치를 비난했다. 뒤샹과 피카비아는 마음보다 눈에 호소하는 ‘망막미술(Retinal art)’을 부정했다.
만 레이(1890~1976)는 미국의 우드(1893~1998), 로쉐(1879~1859), 스티글리츠(1864~1946)의 ‘291 갤러리’, 아렌스버그 부부(Walter and Louise Arensberg)의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반예술활동을 전개했다.
다다 중 베를린 그룹이 가장 반정부주의적이었고 뉴욕이 가장 반예술적이었으며, 하노버 그룹이 가장 보수적이었다. 폭넓은 영역에서 활동한 다다는 그 이후로도 파장이 가장 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36. 다다이즘-나를 빼고 모든 것을 부정하다- 반예술적 태도 지향…예술가 역할·가치에 의문 제기 / 국방일보, 2019, 10. 16.
37. 순수주의 - 개성적 요소 모두 배제한 ‘기계미학’ 표방하다
: 데 스틸, 절대주의, 구성주의, 바우하우스, 새로운 정신, 독일 공작연맹,
유겐트스틸, 아르데코, 모듈 기계미학
레제의 ‘담배 피우는 사람’. 구겐하임미술관
오장팡의 ‘정물, 접시’. 에르미타주미술관
20세기 미술의 가장 큰 변화는 재현과 모방이라는 전통을 벗어던지고 추상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많은 작가는 자연이나 대상을 최대한 단순화한 형태로 분해하고 평면화를 통해 화면의 시각적 착시에 의한 깊이를 제거해 버렸다. 이런 시도는 종합적인 입체파가 점차 장식적으로 변화해 가는 것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유럽 여러 곳에서 동시적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의 순수주의(Purism)와 이미 살펴본 네덜란드의 데 스틸(De Stijl), 러시아의 절대주의(Suprematisme)와 구축주의(Constructivism) 그리고 바우하우스(Bauhaus)의 구성주의 등은 이런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이들은 각자 출발점은 다르지만, 전통적인 미적 감상의 대상에 기계와 기계적인 효과를 포함했다. 특히 실용주의적인 태도로 삶과 예술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며 시대정신의 하나인 기계미학을 따랐다.
잔느레와 오장팡 『입체주의 이후』공동 출간
순수주의는 입체파(큐비즘)가 시작되고 10여 년 뒤 등장했다. 훗날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로 더 잘 알려진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1887~1965)와 오장팡(1886~1966)은 입체파의 새로운 변종인 순수주의를 주창했다. 이들은 1918년 불규칙적인 인상 대신 순도 높고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강력한 아름다움을 주장한 『입체주의 이후(Apres le Cubisme)』라는 저서를 공동으로 출간하면서 순수주의의 틀을 세웠다.
두 사람은 1920년 ‘새로운 정신’이란 의미의 『에스프리 누보(Esprit Nouveau)』라는 잡지를 창간, 개성적 요소를 모두 배제한 구성적이며 기하학적 조형이야말로 진정한 새로운 시대를 반영하는 회화라고 주장했다.
잔느레와 오장팡은 이 잡지를 통해 1920년대의 새로운 미학을 훌륭하게 설파해 나가면서 기계미학을 표방한 순수주의를 펼쳐나갔다. 이들은 “새로운 정신으로 활기가 넘치는 위대한 시대가 시작됐다. 새로운 정신이란 명확한 개념에 의해 좌우되는 건설적이고 종합적인 정신이다”라는 기본적인 원리를 토대로 사회 및 문화적 세력이 ‘질서로 돌아오는 것’을 강조했다.
추가 장식 없는 고대 고전 형식 기본 삼아
순수주의는 모든 것을 기하학적인 각도와 모양의 관계로 축소했으며 통합을 강조했다. ‘순수한 형태’의 본질은 표현적인 것이 제거된 것으로 그림은 물론 디자인·건축을 포함한 모든 양상의 예술에 적용됐다. 이들은 추가 장식이 없는 고대의 고전적 형식을 기본으로 삼았다. 순수주의는 청교도적 철학이 대중적인 형태와 결합한 것 같은 형식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휩쓴 대공황과 전쟁으로 인한 사회 및 인구의 변화는 고전과 주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아방가르드 대열의 선봉에 섰던 예술가들은 이상적인 신체와 차분하고 균형 잡힌 구성을 선호하게 됐고, 특히 건축은 이런 움직임에 앞장섰다.
형식의 단순화, 합리주의 건축 사상 기틀 돼
화가들은 자신들의 일상에서 소재를 택해 현재의 가장 단순한 아름다움을 예술의 형태로 다듬어냈다. 비교적 수명이 짧았던 순수주의는 1925년 파리 장식과 산업 공예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르 코르뷔지에의 ‘새로운 정신관(Pavillon de l’ Esprit Nouveau)’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전시회는 아이러니하게도 르 코르뷔지에의 순정한 기하학과는 전혀 다른 아르데코(Art deco)가 출범하는 계기가 됐지만 르 코르뷔지에는 오장팡, 레제(1881~1955), 후안 그리스, 자크 립시츠(1891~1973)와 함께 순수주의를 펼쳤다.
이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부르주아적 표지와 같았던 과장된 표현을 거부했다. 특히 르 코르뷔지에의 형식의 단순화와 변조에 대한 입장은 이후 미술과 건축, 디자인, 도시계획과 건설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국제적인 합리주의 건축 사상의 기틀이 됐다.
세부 요소 없는 기본 형태 지향
순수주의는 오장팡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1915년 아폴리네르(1880~1919), 막스 야콥스(1876~1944)와 함께 잡지 『엘랑(L’ Elan)』을 창간했다. 그리고 이듬해 ‘큐비즘에 관한 주석(Notes sur le cubism)’을 통해 순수주의 개념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입체파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미술사학자 케네스 실버의 “입체주의의 방법과 수단은 구식이다. 불확실성, 동시성, 시간과 공간의 가변성 대신에 순수주의자들은 이를 안정적이고 튼튼한 것으로 대체할 것”이라는 의견을 따랐다.
그는 1917년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이자 화가인 잔느레를 만나 그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권했다. 오장팡은 1922년까지 그림을 그렸는데 프리즘의 신조는 모든 외적 요소를 제거하고 세부적인 요소가 없는 기본 형태를 지향했다. 그들은 세잔의 모든 사물은 구와 원통, 원뿔로 환원된다는 원리에 충실하고자 했다.
절대적이며 기본적 형태에 집착한 오장팡
오장팡이 그린 최초의 순수주의 회화는 ‘물병(Le Carafe, 1918)’이었다. 이 그림은 러시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하던 세르게이 샤르슈느(1888~1975)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순수주의를 어느 한 조각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술회했다. 오장팡은 스스로 자신의 순수주의 시절을 ‘진공청소 시기’라고 말할 정도로 절대적이며 기본적인 형태에 집착했다.
후세의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인 캐럴 엘리엘은 “순수주의는 감성을 위한 완벽한 은유다. 그들은 실제로 껍질을 벗기고 깎아내 과잉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미술, 건축, 디자인과 도시계획 등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이 그 전체 안에 존재했다”고 평가했다.
표준화된 디자인·규격화된 가구 생산
잔느레에서 이름을 바꾼 르 코르뷔지에는 독일의 독일공작연맹(Werkbund)에서 공부하면서 헤르만 무테지우스(1861~1927)의 산업과 예술의 결합인 유겐트스틸(Jugendstil)을 통해 현대에 적합한 표준화된 디자인과 이를 통한 대량생산을 목표로 하는 독일 스타일을 체득했다. 또 브루노 파울(1874~1968)에게서 규격화된 가구(Typenmobel)를 기본 모듈로 삼고 이를 조립해 다양한 가구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독일의 전자제품 회사인 아에게(AEG)의 예술감독이자 현대 및 산업 디자인의 개척자인 페터 베렌스(1868~1940)에게서는 공장 건축과 사원 주택, 제품 디자인의 고전적 명쾌함과 기계공업 시대의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가능성을 익혔다.
르 코르뷔지에의 순수주의는 독일공작연맹의 ‘예술의 전체 작업’에 대한 옹호와 모든 예술, 도시계획 및 건축, 베렌스의 ‘기계 미학’에 적용된 디자인의 총합이다. 순수주의는 프랑스 계몽주의와 독일공작연맹의 실용주의의 종합이다.
순수주의는 엔지니어 중심으로 현대 공학의 도덕·심미적인 미덕에 기대 자연의 물리적 법칙을 준수하는 아름다움의 이유인 기계가 기능하는 일종의 합리주의적 우주론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주의자들은 이런 오브제 형식을 모든 예술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37. 순수주의 - 개성적 요소 모두 배제한 ‘기계미학’ 표방하다 / 국방일보, 2019, 10. 30.
38. 바우하우스 - 미술과 디자인 재결합…예술과 산업 융복합 이끌어
: 아르누보, 유겐트스틸, 분리주의, 미니멀리즘, 시각예술, 공작교육, 형태교육
1919년 독일서 설립된 조형학교 - 독창적 수업 방식·커리큘럼 큰 반향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된 후에도 - 유럽과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현대 미술·디자인 분야 리드
예술 영혼 깃든 실용적인 물건 창조 - 창작과정 과학처럼 새롭게 개념화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우하우스 전화기’.
그로피우스의 데사우 바우하우스.
조셉 알버스의 ‘사각형에 대한 경의’. 사진=필자 제공
올해로 100년이 됐다. 현대건축과 미술, 삶과 예술을 통합해 모더니즘을 실천에 옮긴 바우하우스(Bauhaus)는 1919년 독일이 군주제를 청산하고 세운 공화제의 바이마르공화국에 설립됐다.
이후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예술학교로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비록 13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술과 사회, 기술에 대한 교육과 그 새로운 접근 방식은 향후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우하우스는 영국의 아트 앤 크래프트(Art & Craft) 운동과 아르누보(Art Nouveau), 그리고 유겐트스틸(Jugendstil), 빈의 분리주의(Secession)를 포함해서 순수예술과 응용예술의 결합을 통해 이 둘의 평준화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창의성과 산업·제조기술을 결합해 새로운 삶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다.
사실 초기 바우하우스는 독일의 전통적이고 낭만적인 중세 길드조직을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예술과 산업의 융복합이라는 명제에 매달리면서 바우하우스는 매우 독창적인 동시에 중요한 성과를 낳게 된다.
특히 아주 독특한 커리큘럼과 독창적인 교수법을 지닌 독보적인 교수들은 바우하우스가 폐교된 후에도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현대 미술과 디자인, 산업을 이끌어 갈 혁혁한 기록과 인재를 양성했다.
20세기 초 바우하우스는 현대산업이 양산하는 제품들의 비루함·비천함을 인식하고 전후 불안한 시대에 예술성이 박탈된 일상의 삶을 유지하는 제품들에 대한 두려움마저 느꼈다. 따라서 바우하우스는 미술과 기능적 디자인을 재결합해 예술 작품의 영혼이 깃든 실용적인 물건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바우하우스는 여러 가지 방식의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포기하고, 주제를 지적·이론적으로 해석하며 접근해 나갔다.
이에 따라 예술과 디자인의 다양한 측면들은 융합되고, 르네상스 시대에 정착된 예술의 계층 구조가 평준화됐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조각과 그림 같은 순수미술의 하위개념처럼 평가받던 공예,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 직물 및 목공예를 같은 반열에 뒀다.
따라서 바우하우스는 순수미술이 아닌 기능적인 공예와 실용적인 산업디자인에 가장 영향력 있고 지속적인 족적을 남겼다. 특히 마르셀 브로이어(1902~1981), 마리안 브란트(1893~1983) 등은 가구와 생활용품 디자인 분야에서 1950~1960년대에 이미 세련된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초석을 닦았다.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와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 같은 건축가는 반듯하고 매끄러운 기능주의 건축을 이끌었다. 이들은 각종 문제나 실험을 ‘미술’이 아닌 ‘시각예술’이란 관점에서 봤으며, 창작의 과정을 역사나 문학 같은 인문학보다 과학처럼 새롭게 개념화했다.
‘집을 짓는다’는 의미의 ‘Haus Bau’라는 말을 치환해서 바우하우스라 명명한 이 새로운 개념의 조형학교는 1919년 바이마르에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 설립됐다. 1915년 처음으로 작센공예미술학교를 인수한 그는 4년 후 바이마르 미술아카데미와 합병해 급진적이면서 새로운 디자인 학교를 세웠다.
그는 개념적인 측면에서 창조적인 기계화, 교육개혁, 고급 및 응용 예술의 재결합과 함께 러시아 구성주의를 즉각적이며 스타일리시한 방식으로 적절하게 사용해 1910년대 바우하우스의 기술과 예술의 병합이란 테제를 실천하는 데 차용했다.
물론 바우하우스는 개교 당시 아르누보 스타일에 기반을 뒀지만 그로피우스는 학교에 공예와 실용미술을 존중할 것과 중세시대의 섬세하고 장인정신에 빛나는 수공예적 태도로 복귀할 것을 제안했다. 아무튼 바우하우스는 미술은 물론 오늘날의 산업, 그래픽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인테리어 디자인과 건축 등 모든 예술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바우하우스의 차별점은 수업 내용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의 새로움에 있었으며 그 바탕은 장인정신이었다. 바우하우스의 커리큘럼은 매우 독창적이었다. 처음 6개월은 예비 또는 ‘기본 코스’를 수료해야 했다.
요하네스 이텐(1888~1967)이 강의를 맡은 기본 코스의 주 내용은 디자인의 기본이었다. 그는 촉감과 공간감, 구성의 감각을 가르치는 새로운 교육법을 발전시켰고 이런 분석적인 방법을 통해 학생들이 체험하면서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각자의 창조력에 눈뜨도록 했다.
이를 이수하고 나면 3년 과정의 ‘공작교육(Werklehre)’과 ‘형태교육(Formlehre)’으로 옮겨갔다. 이 과정은 공예와 기술에 중점을 둔 실용적인 워크숍 위주의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공작교육은 공장에서 실기를 통해 기술을 습득했으며, 형태교육은 관찰법, 표현법, 조형론 등을 훈련했다.
이후 스위스 태생의 폴 클레(1879~1940)와 슐레머(1888~1943), 라이오넬 파이닝거(1871~1956), 칸딘스키(1866~1944), 모홀리 나기(1895~1946)가 교수진으로 합세했다. 이들의 추상화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바우하우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919년 그로피우스에 의해 출범한 바우하우스는 초기에 공예학교 성격을 띠었으나 1923년경에 이르면서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라는 성과에 대해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이즈음 소위 바우하우스의 새로운 교과과정도 완성됐다.
하지만 이내 환란이 다가왔다. 1925년 경제적 불황과 우파의 출현, 정부의 압박 등으로 폐쇄 위기를 맞은 바우하우스는 데사우(Dessau)시의 호의로 현대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새로운 캠퍼스를 지어 ‘시립 바우하우스’로 자리한다.
이 시기를 데사우 시기라 하는데 이때 비로소 건축과를 신설하고, 바이마르 시절 길러낸 졸업생들이 교수로 참여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또한 새로운 생산방식에 따른 디자인의 도입은 물론, 공업화를 추구해 실제로 산업과 미술의 이상적인 만남을 실현하게 됐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떠나자 스위스 건축가 한스 마이어(1889~1954)가 2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바우하우스의 형식적인 면을 부정하고, 인민에 대한 봉사가 디자인의 본질이자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주장은 데사우시와 불화로 이어졌고 그는 바우하우스를 떠났다.
그후 1930년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가 부임했다. 하지만 나치의 탄압으로 데사우에서 쫓겨났고 베를린으로 이주해 사립 바우하우스를 설립했으나 나치는 1933년 이마저도 폐쇄하고 말았다.
그 후 나치즘과 파시즘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바우하우스에 참여했던 많은 예술가들은 유럽을 탈출했다. 1937년 그로피우스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 디자인대학원에서 강의하면서 미국과 영국에 국제적인 양식이 자리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해 미국에 도착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시카고의 일리노이공과대학에 자리 잡고 시카고 건축을 이끌었다. 모흘리 나기도 시카고 디자인연구소를 맡아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실천에 옮겼다. 1933년 미국에 건너온 조셉 알버스는 블랙 마운틴대학의 회화과 교수로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3년 바우하우스는 울름(Ulm)에서 바우하우스의 학생이었던 막스 빌(1908~1994)이 울름 디자인 학교의 초대 교장이 돼 부활한다. 그는 산업현장과 함께 연구하고 협업하는 연구소로서의 대학의 기능을 강조했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38. 바우하우스 - 미술과 디자인 재결합…예술과 산업 융복합 이끌어 / 국방일보, 2019, 11. 06.
39. 초현실주의 - ‘내 안에 나 있다’ 꿈·무의식 세계를 탐구하다
: 꿈의 해석, 이드, 자아, 초자아, 정신분석학, 데페이즈망, 프로타주, 데칼코마니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영향…상상력의 힘 억압하는 합리주의에 저항
다다이즘 예술파괴 운동 보완·발전…초현실 탐구해 표현 혁신 꾀해
포토몽타주 등 발전시키고 데칼코마니 등 창조해 미학적 외연 확대
살바도르 달리·르네 마그리트·막스 에른스트 등 주요 작가로 활동
살바도르 달리, 시간의 기억, 1931, 유화 뉴욕 현대미술관(MoMA)
20세기 초 등장한 바우하우스나 데 스틸, 절대주의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드(Id)에 기반한 자아, 또는 초자아에 기반한 무의식의 세계에 잠재된 에너지를 통해 진정한 자아로 진실된 현실을 이끌어 내려 했다.
이들은 일상의 사물을 이용하거나 혹은 무의식적인 표현을 가능케 하는 기법을 통해 우울하고 비논리적인 장면이나 세상에는 없지만 상상 속에 존재하는 생물이나 풍경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전후 예술계를 접수했던 합리주의와 문학적 리얼리즘을 무시하고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의 정신분석학을 강력하게 수용해 상상력의 힘을 억압하는 합리주의에 저항했다.
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1818~83)의 영향으로 정신세계가 일상세계에서 모순을 드러내고 혁명을 촉발할 수 있는 힘을 가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개인적인 상상력을 낭만주의 전통과 접목시켜 일상에서 계시를 찾아내려 했다. 그래서 초현실주의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에서 내키는 충동에 따라 치기 어린 행동을 했으며 신화 또는 원시주의와 미신 같은 신비주의에도 관심을 가졌다.
초현실주의는 다다에 많은 빚을 지고 출발했다.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취리히 다다에 참여했다가 파리로 돌아온 일련의 작가들은 다다이즘의 예술파괴운동을 수정 보완하는 동시에 발전시키면서 비합리적인 꿈의 세계, 초현실을 탐구해 표현의 혁신을 꾀했다. 특히 인간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들은 1924년과 1929년, 두 차례에 걸쳐 ‘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ealisme)’을 통해 자신들의 예술적 목표와 미학을 천명하면서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나치가 독일을 지배하고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 현대미술의 기틀을 마련한다.
막스 에른스트, 유명한 코끼리, 1921, 유화, 125.4x107.9㎝ 런던 테이트갤러리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의 기초를 마련한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은 초현실주의를 ‘순수한 상태의 정신적 자율주의’로 정의했는데 이를 통해 말이나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1924년 처음으로 ‘초현실주의 제1선언’을 발표했고, 이것은 곧 초현실주의자들의 행동 강령이 됐다.
이듬해 이런 미학과 기법으로 뭉친 일군의 작가들이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 전시회가 최초의 초현실주의 전이었다. 참여작가로는 막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조르지오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 앙드레 마송(Andre Massion·1896~1987), 호안 미로(Joan Miro·1893~1983),
장 아르프(Jean Arp·1886~1966), 만 레이(Man Ray·1890~1976) 등이 있었고 그룹에 가입하지 않은 피카소, 폴 클레, 이브 탕기(Yves Tanguy·1900~1955),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1904~1989), 지오반니 자코메티(Giovanni Giacometti·1901~1966) 등이 세를 보탰다.
특히 브르통은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무의식에 접근함으로써 이성과 합리성을 우회해 또 다른 실체에 다가가고자 했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모든 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창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자동기술법(Ecriture automatique)’에 크게 의존했다.
르네 마그리트, 인간의 조건, 1933, 유화, 100×81㎝ 워싱턴 미국국립미술관
초현실주의자들은 의식의 세계가 아닌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했다. 그래서 ‘수면의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 미학이나 윤리의 통제를 받지 않는 순수한 원시적 상태, 선입견 없고 고정관념 없는 상태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 인간의 의식 아래에 존재하는 원시적인 무의식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했다.
초현실주의란 ‘내 안에 나 있다’라는 말로 규정할 수 있다. 1차 대전이 일어나자 근엄하고 자애로운 동물임을 자처했던 인간들이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광기에 휘둘리면서 야수로 돌변했고 많은 이들이 인간의 양면성 또는 이중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무의식과 꿈, 착각, 해학과 같은 것의 심리학적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과학으로 인간을 규명하고자 했던 많은 시도 중 하나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 나타났다.
그는 1899년 펴낸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을 통해 꿈과 무의식이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봤다. 특히 섹슈얼리티, 욕망, 폭력의 복잡하고 억압된 내면을 드러내 유효한 계시로 정당화하면서 초현실주의자들에게는 일종의 계시처럼 받아들여졌다.
또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보다는 속수무책인 일들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그의 제자인 카를 융(Carl Jung, 1875~1961)이 등장해 개개의 이드, 자아, 초자아의 배후에 있는 어떤 ‘힘’, 즉 ‘집단 무의식’의 존재를 주장했다. ‘신비주의’를 표방한 융은 프로이트를 넘어서면서 스승과 결별하지만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미학적 범위를 넓혀주는 계기가 됐다.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프로이트와 입체주의에도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특히 다다이즘의 공간과 형태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는 초현실주의의 상상적·비현실적 공간에 비중을 두는 공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초현실주의 회화의 경우 때로는 추상적이며 때로는 사실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달리는 꿈이나 편집광적 환각 증세를 그림으로 그리는 ‘편집광적 비판분석 방법’을 고안해서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유형을 창조했다.
일부는 연체동물을 연상시키는 모호하고 암시적인 돌발적 이미지를 통해 보는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또 다른 것을 떠올리거나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런 작가로는 아르프를 비롯해 에른스트, 마송, 미로 등이 있다. 이들을 유기적 초현실주의 또는 상징적 초현실주의라고도 부른다.
초현실주의의 또 다른 한 축은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미지들을 원래로부터 벗어나게 존치시켜 역설적이고 충격적인 구도로 재결합시킴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부분에 일부 동의하게 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 경우 대개 관람객은 부조리한 것들의 조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한다. 이런 작가로는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1898~1967), 달리, 폴 델보(Paul Delvaux 1897~ 1994) 등이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뒤샹의 오브제나 다다이즘의 콜라주, 포토몽타주 기법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비현실적인 가상의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기법 즉 ‘우리가 알아야 할 현대미술의 모든 기법’을 개발해서 작품에 도입했다.
이들은 우리가 유치원 시절 미술 시간에 해 보았던 ‘프로타주(Frottage·동전이나 표면이 거친 물체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연필로 문질러 이미지를 얻는 기법)’나 오스카 도밍게즈(Oscar Dominguez, 1906~1957)가 즐겨 사용했던 ‘데칼코마니 (Decalcomanie·종이의 한 면에 물감을 칠하고 이를 맞대었다 떼어 얻는 상호 대칭적인 이미지로 우연의 효과가 잘 드러남)’, 그리고 ‘데페이즈망(Depaysement·당연히 있어야 할 곳이 아닌 낯선 곳에 어떤 물체를 가져다 놓아 그 장소 자체를 낯선 곳으로 만드는 기법)’ 등을 창조해서 미학적 외연을 더욱 확대해 나가면서 현대 미술을 더욱 깊은 미궁으로 끌고 들어갔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39. 초현실주의 - ‘내 안에 나 있다’ 꿈·무의식 세계를 탐구하다 / 국방일보, 2019, 11. 13.
40.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 두차례 세계대전 겪으며 부조리한 세상을 인식한 예술, 메시지 담는 대신 몸짓과 질감에 빠져들다
:형태에서 마티에르(Matiere)로, 얼룩주의(Tachism), 다른 미술(Art autre),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 제스처 페인팅(Gesture Painting), 질료회화(Matter art),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드리핑(Dripping), 포어드(Poured), 색면추상,
올오버 페인팅(Allover Painting)
생각하는 주체로서 인간보다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로 생명의 긴장감을 질감으로 표현
물감 뿌리거나 붓는 잭슨 폴락, 색면 강조 바넷 뉴먼 등이 대표작가
전쟁 이후 경제 중심축 이동과 함께 현대회화 중심 유럽서 미국으로 이동
잭슨 폴락, 가을의 리듬(No 30)
바넷 뉴먼, 숭고한 영웅
인간의 이성이 광기로 가득 차 세상이 모두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갔던 험난한 시절이 지나면서 의외로 독일 표현주의나 다다정신을 수용해 ‘차가운 추상’이라 불리는 기하학적인 경향의 그림이 전면에 등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이고 이성적인 경향에 대응해서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강조하는 동시에 색채에 중점을 두는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주의적 추상예술이 나타났다.
이후 다시 전대미문의 재앙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인간은 스스로가 가슴과 머리가 분리된 부조리한 동물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다다이스트들이 주창했던 ‘반미학’은 20세기 미술사 전체를 관통하는 용어로 자리한다.
특히 이 시대의 예술은 더 이상 정신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감각적 매체가 아니며 전통적인 미술의 기반이었던 ‘사물의 재현’도 아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림은 내용보다는 형식, 메시지보다는 형태와 색채 그리고 마티에르 즉 질감만 화폭에 남았다.
전쟁의 상처는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팠지만 그 전쟁을 일으키고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도 인간이었다. 이런 불합리한 세상은 전쟁 전의 부조리극처럼 부조리한 일로 사람들은 이런 인간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추상이나 구상에 관계없이 정형을 넘어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not merely the thinking subject),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체자(Master)로서의 인간이라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e)적 태도로 생명의 긴장을 질감으로 화폭에 직접 담아내고자 하는 미술운동이다.
이런 미술운동은 1940~195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는데 이를 유럽에서는 ‘비정형’이란 의미의 ‘앵포르멜(Informel)’,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라고 명명했다.
추상미술의 시대로 접어든 20세기 초 40여 년간은 본질적으로 기하학적인 입체파(1907~1914), 절대주의(Suprematism, 1913~1918), 구성주의(Constructivism,1914~1920s), 소용돌이파(Vorticism,1913 ~1917), 광선주의(Rayonnisme, 1912~1915), 오르피즘(Orphism,1912~1914), 데 스틸(De Stijl, 1917~1931)과 바우하우스(1919~1933)가 주도했던 시기다.
하지만 앵포르멜은 기하학적인 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추상회화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됐다. 표현적이고 제스처(Gesture)적이며 혁신적인, 따라서 미리 정의된 형태나 구조가 없는 예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했다. 특히 독일 태생으로 파리에서 활동했던 볼스(Wols,1913~1951)의 작품을 두고 비평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1909~1987)가 극단의 극단(Extreme Tendencies)을 주창하며 명명해 일반화했다.
이후 1951년 10월, 1952년 6월에 폴 파세티 화랑(Galerie Paul Faccetti)에서 열린 두 번의 ‘앵포르멜의 의미(Significants de l’Informel)’전과 1952년 12월 같은 화랑에서 열린 ‘다른 미술(Un art autre)’전을 통해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앵포르멜은 얼룩주의(Tachism), 다른 미술(Art autre),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 제스처 페인팅(Gesture Painting), 질료회화(Matter art)로도 통한다.
이 전시에는 포트리에(Jean Fautrier,1898~1964),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 아펠(Karel Appel, 1921~2006), 부리(Alberto Burri, 1915~1995), 마튜(Georges Mathieu,1921~ ), 리오펠(Jean Paul Riopelle,1923~2002), 앙리 미쇼(Henri Michaux, 1899~1984), 아르퉁(Hans Hartung, 1904~1989), 술라주(Pierre Soulages, 1919~ ) 등이 참여했다.
유럽에서 발생한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뉴욕에서도 나타났다. 소위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가 그것이다. 유럽에서는 1919년 독일의 헤어초크(Oswald Herzog,1881~1941)가 처음 이런 말을 사용했고, 1929년 전설의 미술관장 알프레드 바 2세(Alfred H Barr Jr.,1902~1981)가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을 이렇게 불렀다. 이후 로젠버그(Harold Rosenberg,1906~1978)가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 명명했지만 이 표현은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은 ‘자기표현과는 무관함’, ‘비개인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실상과 모순되지만 가장 흔하게 사용된다. 이런 범주의 화가로는 물감을 뿌리는 드리핑(Dripping) 또는 물감을 붓는 포어드(Poured ) 기법을 사용했던 잭슨 폴락(Paul Jackson Pollock,1912~1956), 제스처를 중시하며 즉흥적 행위(Formless improvisation)에 의존한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1970), 스틸(Clyfford Still, 1904~1980), 바넷 뉴먼(Barnett Newman,1905~1970) 등 색면을 강조하는 색면추상(Color-Field Abstract) 화가 등이 있다.
이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지만 모두 ‘그려진 것’과 ‘그림의 바탕’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 화면을 전부 덮어 여백이 없는(Allover Painting) 점, 화면을 바라보는 시점이 너무 많거나 아니면 아주 없다는 점, 그리고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행동 즉 몸짓을 중시하는 그림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서정적인 색면추상의 루이스(Morris Bernstein Louis,1912~1962)와 금속조각의 대부 스미스(David Smith, 1906~1965)로 이어진다.
초기 추상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전 선구자로는 한스 호프만(Hans Hofmann, 1880~1966)과 고르키(Arshile Gorky,1904~1948)가 있다. 고르키가 자유롭고 섬세한 선과 흐르는 듯 물감을 사용해 유기적인 생물체를 연상시키는 그림을 그렸다면 호프만은 역동적이고 뚜렷한 질감을 나타내는 추상적인 붓놀림을 사용하면서 전통적인 화면구성에 매달렸다.
1950년대 미국 미술의 중심이자 세계 미술의 핵이 된 이 미술운동은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경제의 중심축이 미국으로 이동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현대회화의 중심을 파리로부터 뉴욕으로 옮겨 놓는 역할을 했다. 물론 이들이 20세기 미술의 중심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경제대국 미국이 가진 돈의 힘도 한몫했지만 한편으로는 냉전시대 공산주의·사회주의와는 다른 개인주의·자유·순수성 같은, 당시 ‘자유세계’의 가치와 맥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추상표현주의의 배후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작전이 개입됐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작전보다는 작업에 대한 열정과 대상을 버리고 작품을 천착하는 순수 조형의지가 더 컸기 때문에 오늘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배경에는 전후 미 중앙정보국이 피카소나 달리 등 서유럽의 저명 화가들과 문화인들이 가세한 소련과의 ‘문화전쟁’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던 현실이 있다.
미국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문화전쟁’의 핵심으로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끌어들여 소련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미국미술을 진흥해 사상적·문화적 우위를 세상에 과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치적인 배경이 있어서 지원을 한다 해도 관객들과 교감할 수 없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추상표현주의는 인간의 ‘살아있음’을 확인시키는 살아있는 예술이 되고 있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40.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 두차례 세계대전 겪으며 부조리한 세상을 인식한 예술, 메시지 담는 대신 몸짓과 질감에 빠져들다 / 국방일보, 2019, 11.20.
[출처]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Ⅵ -①미래주의,②오르피즘,③표현주의,④러시아 아방가르드,⑤데 스틸과 신조형주의,⑥다다이즘,⑦순수주의,⑧바우하우스,⑨초현실주의,⑩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