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설초당 그림 권세변: 한 조각의 기억 향설해《 香雪草堂》图卷世变: 一片记忆香雪海
2022년 01월 06일 09:42 시나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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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계·광서정 李鸿裔 跋 · 光绪丁丑
이씨 발문 《향설초당가》《소린유시(蘇隣遺詩)》에 저술되었으며, 전명은 《향설초당가(香雪草堂歌)는 서포준기년장칠십수(西浦準奇年丈七十壽)》이다.광서 3년(1877년) 판준기(潘準 七)의 70세 때 이홍계(李鴻裔)가 축수(祝壽)했다.서령이 시문을 권하자 이 씨는 특히 기(記) :서포세백 칠질대수 경구(經句)를 장구(長句)하여 신(伸)성향의 정성으로 옛사람이 글을 먹고 태복(太僕) 시복(始 ()이 입집(入集)하였으므로 득수(得壽)한 이유를 서술하여 축복(祝福)의 말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초당을 찬양하는 것은 사실상 반씨의 덕행과 절개를 찬양하는 것이며, 시가의 방점은 사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4년 뒤인 1880년 이홍계는 또 다른 대희(戴熙)의 『산거도(山居圖)』 권을 보고 다시 축수가를 권후에 베꼈다.
장위발·선통신해 章钰 跋 · 宣统辛亥
유우후와 판쥔치 공동의학생인 장옥은 유호광서 원년에 지은 향설초당기(香雪草堂記)를 베꼈다.또 판지유가 어떻게 유협에서 하소기의 전액을 얻었는지와 이홍계의 《초당가》를 적고 학일을 구걸하여 그림을 그렸다.장옥발(章玉跋) 후 1권을 합장하여 《향설초당제2도(香雪草堂第二圖)》로 정했다.유위(兪樾)의 《향설초당기(香雪草堂記)》는 《소주역대명원기(蘇州歷代名園記)》 등 곳곳에서 저술되고 있다.
양종희발·민국기아직 杨钟羲 跋 · 民国己未
양종희와 반계유들은 모두 청말이다.장서가. 양씨는 반준기후학으로 서포대선배라고 발기를 하였는데, 시문은 1920년 11월 25일자 동방잡지 24호간·문원·시에 "서포선배 향설초당도권위령자계유제32운"이라는 제목으로 저술하였다.오언장률에 "字자( 标字)로 逊자( 逊字)로 逊자( 逊字)로 何자(图字)로 何유루문파려(兪樓文斐), 이수구(李叟句)의 앙상블로 남북조 시대의 유명한 사매시인 허손(何孫), 명대 강동재자 구린(龜麟)을 썼지만, "하, 구, 유, 리"의 배합은 그가 보는 권본이 여전히 구학일(龜鶴逸)의 그림임을 암시한다.
장음추발·1969 蒋吟秋跋 · 一九六九
장씨는 본 권의 제발 중 마지막이다.증인, 그래서 그 발문은 이 권의 자초지종을 정리하기 위한 것입니다.주로 정축지추(丁丑之秋)인데, 이 권력겁은 권중고화(卷中古畵)를 잃어버리고 정정로(程亭老)가 그린 것을 발견하였는데, 부장지(附裝池)로 인하여 권에 상감하였다가 도배를 하자 잔해물이 완벽이 되었다.판지유의 부탁으로 장음추보록정정로화(章音秋補錄程亭露畵)가 발중한 판쥔치(潘準 《)의 '산거시(山居詩)' 원작 7율 3편이다.시문은 반준기(潘準 《)의 《서포집(西浦集)》에 저술되었으며, 세 편의 시는 《편모(編慕)》《해중제( 上仲弟) 숙간(宿間) 상지감운루(上之監雲樓)》《장하신숙초당(長夏信宿草堂)》을 원제로 하였다.
이로써, 우리 서령을 빗질해 봅시다.권발문이 제공하는 정보: 由此,我们梳理一下西泠卷跋文提供的信息:
1854
함풍 2년, 반준기축향설초당은 등위산중에 있다.처 왕씨와 함께 이곳에 은거하다.송양이 보필한 『사매화권』을 얻어 사매각을 만들어 저장하였다.
(서령권장옥사유우광서원년찬 《향설초당기》)
(판준치 서포집·망실)왕의인행략(王宜人行略): 여축실 등위산중(鄧尉山中)을 향설초당(香雪草堂)이라 한다.전당대문절공은 호산해은도를 쓰기 위해 춘추가일, 삼림유랑, 시조변성, 쾌락, 여재화, 약종, 벼매는 일을 몸소 하였다.'노처도 은거락을 풀고 요를 옮겨 입산할 것을 재촉한다'고 한다.
1856
함풍병진, 정정노가 반준하다.기작 「산거도」 「서포 노인 산거시」를 병제하다.
(서령권정노화발)
1860
함풍 10년, 태평천국군이 공격하다.쑤저우를 차지하여 판쥔치(潘準 携)가 가족을 거느리고 상해로 도망쳤다.
(판준치 서포집·망실)《왕이인행략》 도적이 성에 이르러 산속을 함락시키더라도 크게 어지러워하고, 자잘한 꼬리를 유랑하며, 상해에 피신하고, 친히 조락되고, 기쁨이 날로 적어, 병에 걸리기 좋다.》
1863
계해, 향설초당 여주인즉시판처 왕이인이 전란으로 병사하다.
1864
갑자춘에, 판준기는 초당으로 돌아온다.달을 보양하다.
1865
하소기는 소에 도착하여, 판준기를 경유하였다.향설초당에 많은 양의 제화가 남아 있다.
(서령권두 "향설초당")"사자는 이때 제목이었을 것이다)
1867
판준기 60세 후에 정식으로 향을 피우다.설초당의 '서포'를 호로 삼다.
(옛날 정정로 화권에서는 아직도 불리고 있다.반씨는 포충인형(抱沖仁兄)으로, 반씨는 향설초당 현판 낙관을 스스로 포충거사(抱沖居士)로 삼았다.허사오키, 위우후는 이를 '간연'이라고 부른다.)
1876
광서병자, 각성 22년.。
유휘가 《향설초당기》를 저술하다.대희와 산거도 합성도.
(서령 권장옥은 유우호를 베껴 썼다.향설초당기(香雪草堂記):선생은 산거도(山居圖)를 병기(兵記)하여 장권(長卷)을 냈고, 범시(凡詩)는 모두 산중에 왕래한 저자로 사랑하여 읽었다.초당의 승리는 대략 보인다.
1877
광서정추, 이홍계위위반준기칠십 대수경부 장구 「향설초당가」.
(서령권 이홍계발)
1900
판지유는 구협에서 하소기를 얻었다.「향설초당」 어, 이홍계 「수서포노인칠십소작초당장가」. 묵채가 새롭다.
광서경자, 학일보도를 구걸하다.。
1911
선통신해
장옥록유휘 《향설초당기》하소기 향설초당 어, 이홍계 향설초당 장가, 구학일도와 합장했다.
1919
민국기미
양종희가 시를 지어 그것을 쓴 것은, 그 소견이다.학일도를 생각해야 한다.
1937
왜구가 중국을 침공하여 소성이 함락되다.이 권력겁. 권중고화(卷中古畵)가 찢겨 없어지고, 하, 이 서적이 남아 있다.
판지아이들이 총알의 잔해를 정리하고, 발견하다.정로(庭老)는 판쥔치(潘俊 所)의 《산거도》를 제작하였는데, 부장지(富裝池)로 인하여 권에 박아 두어 표구하자 잔물이 완벽으로 돌아왔다.
1969
장음추 장발 상세 서술 화권득실을 합성한 경위와 함께 판준기 산거시 원작 7율 3수를 보록했다.
사람이 정원명인을 하나로 묶다.
화원 초당에 대하여, 선비들은 줄곧이래로 유토피아에 가까운 상상을 하고 있다.본관은 휘주 대부촌(大阜村)이며, 반이준(潘赫俊)은 삼송당(三松堂)을 짓고, 반준기(潘準 再)는 향설초당(香雪草堂)을 다시 짓고, 4대 반조음(潘祖陰)에 우희재(喜喜齋)를 짓고, 반조와 함께 죽산당(竹山堂)을 짓고, 6대 반승후(潘承厚) 형제가 보산루(寶山樓'서포(西浦)'라는 기의 육십세 입호를 따르며 마치 인생의 다른 단계를 알리는 듯 열린 정원에서 개체의 즐거움을 유지하며 일출예법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축원실천의 실제 동력이다.
벼슬길에 허송세월하여, 오직 초당만이 자기를 돋보이게 하였다.신(身)의 문화자본. 기록대로 황비열(黃 的烈) 가문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향설초당(香雪草堂)에는 서화 외에 고서(古書)의 선본(善本)이 따로 있다.초당화원은 주인 자신을 상징하고, 초당의 공간을 재구성하여 동호인 간의 교류와 표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물론 입지가 정확하다는 것은 슬기롭고, 위치가 적절하다는 주인의 표정은 이미 여기에 있다.
서령권 이홍계 발기선같이 보기반준기 70세 때 많은 사람들이 축수하고 노래하는 것은 반씨의 덕행과 절개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므로 초당이 아닌 사람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혹은 초당이 곧 사람이요, 사람이 곧 초당이다.
반준기 및 소주 반씨에 대하여가족, 서령박장에 익숙한 여러분은 강남 예문 가족에게 낯설지 않습니다.(서령정박소주 '귀반'과 판준치 소장)
청나라 소주의 사대 거성으로 삼다하나, 귀반이라 불리는 반씨 가문은 비록 장사가 잘되었지만, 가문의 오랜 계략을 위해 꾸준히 공명을 구하여 4대 백년의 공을 쌓고, 상인들이 일약 비녀세가가 되었다.
판준치, 판세황의 아들.반조 음족숙(陰族淑) 도광(道光) 25년에 진사하여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를 선출하였다.반씨 가문은 과명으로, 혹은 사공(事功)으로, 또는 소장(所藏)으로, 시사로, 또는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두툼하게 쌓아올렸다.비록 판쥔치처럼 벼슬아치에서 물러났다 하더라도 우리는 말년에 다시 반궁을 돌아보며 회고한 장문(長文)에서 족속 자제들의 과장연첩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1854년, 반씨는 사직하고 영예롭게 돌아갔다.향. 향설초당. 정자 위에 치(致)가 있고, 샘돌이 깊으며, 화목부소(花木扶疏)가 있는데, 위후는 "곡원(曲園)은 그것에 비하여 실로 자갈에 비하여 옥연(玉淵)"이라고 자탄한다.미생삼우세월조춘(微生三右世朝春)은 이미 사람을 지나쳐 재난 후 무탈(無脫)한 것이다. 반씨는 삼송당(三松堂), 서포(西浦), 향설초당(香雪草堂) 사이를 유람하며, 속세를 근절하고, 인간도 부유하고, 그 시간에 대한 깨달음은 역사의 시간축(時間軸)과 가족(家族)의 심정(心路)을 중첩하여 서술하고 있다.
판쥔치 막내아들 판지유근대 장서가 반목선(潘穆先, 1871~1963)이다.호는 소포, 호는 검려, 관호북포정사 조마는 지부에 올랐다.선조 반혁준(潘赫俊), 반준기(潘準 等) 등이 세가(世家)의 유서를 이어받아 명장서가(名藏書家)이다.오대징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니, 선비 향기가 세상에 가득하다.또한 양한초당장서처(養閑草堂藏書處)가 있어 삼송당(三松堂)의 헌책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 황비열(黃烈烈)의 교본(校本)·제발선본(題跋善本)이 백여 종에 지나지 않는다.그 장서는 왜구의 중국 침략 전쟁에서 파괴되었다.
판준기어갑인건성초자제향설초당(낙관포충거사) 潘遵祁 于甲寅建成之初自题香雪草堂(落款 抱冲居士)
이 현판은 반씨 후손이 기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쑤저우 대학 박물관에 숨다.
역사의 '화용도'
그림의 "뫼비우스 고리"
향설초당은 여러 세대를 기록하였다.운명의 궤적, '향설초당' 도권은 매번 재구성, 표구, 완벽, 곧 역사의 수레바퀴를 휘젓는다.유정을 떨쳐 버릴 수 없고, 마음의 절정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본문에서 서령한 바와 같이, 서령 《향설》.초당권은 역사의 손을 거쳐 못을 꾸민 것이다.제목, 그림, 발자는 전혀 알 수 없고, 이 작품을 기획하고 미리 설정할 수도 없다.기존의 장권과 달리 서령권은 역사적인 이유로 초당공간이 가지고 있던 시간적 기억을 깨뜨려 리셋을 거듭했고, 초당건물을 경전화하는 과정에서도 반씨는 일맥상통하여 그 집안의 문화구성을 완성시키려 노력했다.핵심 가치의 사수이자 강남 가족 문화자원의 계승적 관계를 보여준다.
여러분이 잘 아셨는지 모르겠네요대작가 진충실 장편소설 '백록원' 집필에는 역사 글쓰기와 문화 기억 문제가 담겨 있다.허자동은 백록원의 '후설적 역사서술 구조'를 독자들에게 제시했는데, 이는 대역사 서술을 넘어선 '민족비사의 글쓰기'다.우리는 '향설초당'의 그림 뒤에 어른거리는 대사, 예를 들면 태평천국전란, 일본침략전쟁, 혹은 도함지교, 봉건왕조의 종말과 같은 대역사적 배경, 그러나 등위산의 향설초당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듯하면서도 나름대로 역사를 들여다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판준치에서 외조의 이름을 빌려 이매하다.부부를 만들고, 부부를 잘 알고, 부자가 전해 내려오고, 전란을 겪으면서 이 그림의 서로 다른 부분이 서로 다른 시간에 현존을 잃었고, 다른 시대의 문화인들은 초당의 역사와 역사 속의 초당을 기록, 복창하였다.한편, 여러 세대들은 언어의 관례를 따랐고, 그 장발과 베끼기(전권경록)는 특별한 의식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손길은 마치 화용도 놀이를 하듯이 서로 다른 시대의 서사를 서로 시시적으로 병진하여 교차하는 뫼비우스의 고리를 이루었다.함께 지킨 말의 신조가 두루마리를 이루고, 기억만 남아 있다면 그 힘은 그리움을 만든다.
향기로운 눈바다와 기억의 바다.사족의 정혼을 감상하기 위하여 하늘을 이어 보신다.
매년 이른 봄
쑤저우 광푸 등위 기슭
매화 트릭
기세가 눈바다 같다.
또 한 바퀴다
기억과의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