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53
7월16일[연중 제1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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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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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M0OH1jSPYo
(이승현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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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씨앗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오래전 아무것도 모르면서 형제들과 이런저런 농사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뙤약볕에 일하다 보니, 지나가던 동네 노인들이 수시로 멈춰서시고는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여.’라며 훈수를 뜨시는 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때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풍성한 수확에 기뻐도 했지만, 투자한 모종이나 줄기 값도 못 건진 때는 속도 많이 상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우리 한명 한명을 눈여겨보신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끽하라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라고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평생 울적하게 살면서,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얼마나 슬퍼하실까? 걱정입니다.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는 씨앗 자루를 손에 들고 작년 추수 이후로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채 널려 있는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립니다. 다음에 쟁기질을 합니다.
씨앗의 운명은 쟁기질이 끝난 후에 결정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에서는 아무런 수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굶주린 새들이 즉시 날아와서 쪼아 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 역시 해가 떠오르면서 오래 가지 않아 메말라 죽어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덤불이 훨씬 더 빨리 자라면서 연약한 싹을 질식시켜 버리기에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라는 놀라운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 한 알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우선 작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씨앗 안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씨앗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기보다는 발아되기를,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기를, 썩어 없어지기를, 그래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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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xf6G1Wro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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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깊게 보고자 하시는 말씀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군중들에게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귀’가 당신의 비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태 13,34 참조) 예수님은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이해하기 쉬워지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마태 13,13 참조) 예를 들어 꿀이 없는 세상에 꿀을 맛본 사람이 있다면 그 꿀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 꿀은…. 마치 꽃처럼 향기롭고, 태양처럼 따사롭고, 사탕처럼 달곰하며, 엄마 품처럼 포근한 맛이 납니다.”
비유는 이렇듯 이미 다른 차원의 것을 경험한 사람이 자신의 체험까지 오게 만들기 위한 수단입니다. 마치 원시인처럼 살아가는 어떤 섬에 그들이 문명의 세계로 나아올 수 있도록 놓아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이것이 말씀이고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자신들의 세상보다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이 더 유익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리를 건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말씀을 해석하려 들지 말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아 아무 쓸모 없는 황무지와 같은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게으른 두 아들에게 엄청난 크기의 땅을 반씩 나누어 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받은 땅속엔 내가 공평하게 나누어 묻어 둔 나의 모든 유산이 있단다. 그것을 찾아내어 행복하게 살아라.”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두 아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각자의 땅을 열심히 팠습니다. 하지만 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고된 노동 끝에 아버지에게 속았다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는 땅을 헐값에 팔아 방탕하게 소진하였습니다. 결국 병에 걸려 외롭게 죽어갔습니다.
둘째는 달랐습니다. 역시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땅을 파다가 밭의 돌을 다 걷어 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씨앗을 뿌리니 엄청난 수확을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황무지이지만 비옥한 땅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돈도 많이 벌었고 행복한 가정도 꾸렸습니다.
왜 아버지의 말에 대한 두 아들의 생각이 달랐을까요? 첫째는 비유 말씀을 해석하려 들었고 둘째는 비유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어떤 말씀을 해석하거나 분석하려는 시도는 내가 그 말씀을 한 분 위에 선다는 뜻입니다.
더 똑똑한 사람이 덜 똑똑한 사람의 말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을 귀가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말씀을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이들은 자아를 긍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아는 뱀입니다. 뱀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뱀이 요구하는 ‘가져라’, ‘먹어라’, ‘높아져라’라는 명령이 행복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반대되는 하느님의 요구는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 “이리 나와라!”(요한 11,43)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문밖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길과 같은 사람은 자아를 긍정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아예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은 들었다가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가시밭과 같은 사람은 돈 걱정 때문에 결국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부모님 말씀에 순종할 줄 압니다. 그 말씀만이 자신을 어른으로 성장시켜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믿기 때문에 부모의 말을 분석하기보다는 순종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십일조 봉헌’이 신앙인으로서 들을 귀가 있다는 첫 번째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서부터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봉헌하면 가시밭과 같이 될 일은 없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주님의 가시밭이었기 때문에 멸망하였습니다.
나무토막에 계속 불을 지피면 그 안에 있든 물이 빠져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 내면의 안 좋은 욕구들을 솎아내기를 원치 않으면 아무리 성령의 불이 내리더라도 그 사람 안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려는 마음을 갖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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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매일 올리는 묵상 글 때문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번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갈 때였습니다. 성지순례 가이드께서 제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팬데믹 때입니다. 신부님이 매일 올려주는 복음 묵상 글이 제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성지순례 온다는 것을 알고 밀라노 두오모 성당의 미사를 애써서 잡아 주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복음 묵상 때문에 위로를 받는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 만나는 분이지만 마치 오랜 친구처럼 반가웠습니다. 형제님 덕분에 밀라노 두오모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 미사에 우간다에서 온 신부님이 함께 미사를 하고 싶다고 하여서 공동 집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로마에서 공부를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가기 전에 밀라노에 잠시 들렸고, 마침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에 함께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매일 올린 복음 묵상 글이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3가지의 주제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 씨, 토양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씨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능력과 재능을 강조할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람,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 말을 잘 하는 사람, 외모가 준수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환경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 화목한 가정에 태어난 사람, 부유한 집에 태어난 사람, 부모가 늘 다투는 집에 태어난 사람, 가풍이 있는 집에 태어난 사람, 태어나면서 고아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씨는 싹이 나지 못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좋은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나쁜 토양에 씨를 뿌릴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결실을 맺기 어렵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말을 할 때는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쁜 마음으로,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감기약을 파는 사람이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심하게 하면 그 약을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강론을 하는 사제는 본인이 하는 강론을 삶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신자들은 사제의 강론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말은 그럴싸하지만 삶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나무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고, 우리가 걸어가는 발자취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우리들의 말과 행동입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은 토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린다면, 시련과 고통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가 전한 말씀이 열매 맺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기도하고, 확신에 차서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비록 척박한 토양이라도 하느님께서는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순교의 시대에도 교회는 찬란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풍요로운 시대에도 교회는 활력을 잃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고,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토양이 아닙니다. 그 토양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마음과 결심입니다. 내가 말씀으로 무장하면 복음의 씨앗은 꽃이 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이 가물고, 채소가 병이 들면 양수기를 가지고 물을 대기도 하고, 약을 치기도 하고, 우리들의 정성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키우고 많은 소출을 얻도록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시기와 질투의 바람과 함께 내리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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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1-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오늘과 다음 주일 전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 비유는 알아들으려 하는 자세, 삶 속에 실천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배에서 비유를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렇게 군중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는 모습은, 아마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보다는 그분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즉 제사보다는 잿밥에 있었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이 비유의 말씀은 팔레스티나 상황에서 사실에 근거한 비유의 말씀이다. 그 지방의 환경이 그렇다. 조그만 땅덩어리, 돌투성이인 밭들, 농사를 짓기 위해 가시덤불을 헤치고 만든 좁은 길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거친 땅이지만 모두 죽어버리지는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씨를 뿌렸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제자들의 믿음을 더해주시고자 하신 비유이다. 이는 그래서 믿음에 대한 비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씨를 뿌리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많은 씨앗이 실패하더라도 결실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당신 제자들에게 확신시키려 하신다. 그분의 사명은 씨뿌리기에 비교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역사 속에 이미 시작되었고, 그 나라의 구원 힘은 힘차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인 자세이다. 복음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우선 신자들이었지만, 자신들이 기쁘게 들은 복음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일치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최대의 결실을 낼 수 있는 땅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18-23절).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으로부터 가시덤불과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에 이르기까지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설명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각별한 정성으로 보호되지 않는다면 시들어 죽는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피상적이고, 세상 이익에 대한 애착 등에 집착되어있을 때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19절) 사람들과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23절) 사람들로 구분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23절)의 열매를 맺는데, 이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다. 이 깨닫는다는 것은 지적으로나 신학적 통찰력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올바로 깨닫는 것이다. 이제 그 말씀이 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밭에 있는 모든 돌과 잡초 가시덤불을 없애는 수고를 하여야 한다. 이 수고가 없으면 수확은 실패할 것이다. 수확이 실패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그 말씀을 바로 받아들여야 할 땅, 즉 우리 각자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비와 눈의 의미는 그 말씀의 풍부한 생산력과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힘을 말한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 본질적으로 지닌 변화와 쇄신의 능력이다. 하느님 말씀의 능력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인간들의 차원을 넘어서 또는 그 반대의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룰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또 우리의 마음에 맡겨진 생명의 씨앗이 결실을 보지 못할 수 있으므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밭이 중요하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모든 만물이 생겨 나온(창세 1장) 태초의 그 말씀의 찬란한 영광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도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무릅써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 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 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18.22-23).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에 걸쳐 모든 사람에게 전해진다. 그들에게서 그 말씀이 결실을 거둘 수 있으려면 먼저 신앙을 가진 우리들의 삶을 통한 결실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신앙을 가진 나에게서 결실을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결실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밭에 있는 자갈이나, 잡초, 가시덤불 같은 장애가 되는 것들을 모두 없앨 수 있는 ‘수고’가 기꺼이 따라야 한다. 그 수고가 없이는 결실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뿌리내리는 데 방해가 되는 세상과 세상의 이익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은 좋은 토양으로 준비된 우리 마음과 우리의 삶 속에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태 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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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18-23)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신앙인의 신앙생활 모습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는, 믿기를 거부하고 구원받는 일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2) 이 비유는 마지막 심판 때의 상황에 대한 비유입니다. 지금은 ‘좋은 땅’이더라도 중간에 변절하거나 타락하면 나쁜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심판 때에 ‘나쁜 땅’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전에는 좋은 땅이었다고 변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나쁜 땅’이더라도 회개해서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좋은 땅’으로 심판대에 선다면, 그 사람은 ‘좋은 땅’입니다.
3) 이 비유는 신앙인들을 네 종류로 분류한 비유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가운데에서 몇 가지를 대표적인 예로 든 것뿐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네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종류대로 분류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편견과 차별로 이어지고, 남을 함부로 심판하는 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4) ‘내 안에’ 좋은 땅과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이 모두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동시에 ‘내 안에’ 공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좋은 땅이 드러나다가 다른 상황에서는 길, 돌밭, 가시덤불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5)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길이 될 때도 있고,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될 때도 있고, 좋은 땅이 될 때도 있습니다. 좋은 땅이었다가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이 되기도 하고, 정신을 차려서 다시 좋은 땅으로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상태로 끝나는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내 마음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회개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교만한 일입니다. 마지막에 회개할 시간이 있을지 없을지는 전적으로 주님의 권한에 달린 일입니다. 나중에 회개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태평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 ‘나중에’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자만심과 방심도 어리석은 교만입니다.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이라는 말씀에서 ‘깨닫지 못하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깨달음’이 아니라, ‘실천하지 않으면’이라는 뜻입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고, 또는 믿는다고 말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는 경우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고 말합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 즉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는, “마귀에게 말씀의 은총을 빼앗긴다.”인데, 믿는다고 생각만(말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는 것은 마귀가 바라는 대로 사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떠나서 마귀 편에 서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21절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다.”라는 말씀은,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 있지 않다.”라는 뜻인데, 성당에서는 신앙인 같은데, 세속 생활을 할 때에는 전혀 신앙인 같지 않게 사는 것을 뜻하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환난이나 박해 때에 금방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돌밭’이나 ‘길’이나 사실상 같은 경우입니다.> 22절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처음에는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또는 처음에는 믿는 대로 실천한다고 하다가,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생각이 신앙생활을 잘하려는 생각보다 더 커서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바람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초심을 잃어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도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걱정할 일들이 생겨서 걱정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래도 숨이 막힐 정도로 걱정만 하고 있는 것은 믿음을 잃어버린 모습이고, 그것은 잘못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믿는다면, 걱정할 일이 생겼을 때 주님께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옳고, 믿음과 기도로써 걱정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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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독특하게 해설이 달려 있습니다. 씨는 말씀을, 씨가 뿌려진 땅은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땅은 네 종류로 나누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같은 씨, 곧 같은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받아들여지거나 영향을 주고 열매 맺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과 ‘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가장 먼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나는 어떤 땅인가?’입니다. 나는 어떻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오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신비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주로 쓰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나 듣는 것에 둔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기꺼이 받아들여 말씀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사람은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말씀에 따라 살아가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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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이승현 베드로 신부님]
<생명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뿌려진 씨는 길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에도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씨는 뿌려진 상황에서 각자 노력하다가 서로 다른 결과를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 설명하셨듯이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씨가 뿌려진 곳곳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 이 좋은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비유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 말씀 선포자의 열정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씨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뿌려질 수 있는 것은 씨뿌리는 사람이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이런 모습을 무모하다고 또는 비효율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모든 이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기를 바라는 말씀 선포자의 열정 때문이며,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가 정한 '농민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농업·농촌·농민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우려하여 1994년에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시작하였으며, 교회 공동체가 기도하며 마음을 모으기 위해서 1996년부터 7월의 세 번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농민 주일은 농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식탁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고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탁과 마주해야 합니다. 매일의 식탁을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이의 노력이 필요하며, 그 첫 자리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노력하는 농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힘겨운 상황에 서도 농민들은 생명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 농업의 영세함이나 허약함을 이유로 농업을 포기하고 무역 활동을 통해서 우리의 식탁을 차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식탁은 경제적인 문제로만 효율의 문제로만 따질 수 없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생명의 문제는 생명의 논리로 접근해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이 결과에 두려 위하지 않고 자신이 맡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에 충실하였듯이, 농민들도 씨를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는 농사일에만 충실합니다. 그 충실함의 바탕에는 생명에 대한 희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생명에 대한 사명을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하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농민들의 생명을 향한 열정이 우리의 식탁을 지키고 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처럼 포기하지 않는 이 땅의 농민들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도시와 농촌, 도시민과 농민은 서로에게 생명을 내어주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비유에서 포기하지 않는 씨 뿌리는 사람과 좋은 땅이 만나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보았듯이, 도시와 농촌이 생명을 위해서 협력해야 합니다. 농민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위한 활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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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권오준 베네딕토 루치아노 신부님]
<박사 손자병법>
작년에만 30여 회 강의했던 생태 정의 실천 교리 교육을 올해도 변함없이 열심히 다니고 있다. 그날도 어떤 본당에 교육하러 가서는 주임 신부와 교육 내용에 대해 미리 이야기를 나누는데,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그 신부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런 말을 한다. 가끔 내 능력을 보고는 깜짝 놀랄 때가 있다고. 마치 신학교에서 시험을 채점할 때 확연히 구별되는 공부 잘하는 학생의 답안지를 보듯. 높은 이해도와 명확한 구성, 정리에 능통하고 핵심을 간략하게 잘 설명한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남의 것이 아닌 완전히 내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배운 것도 들은 것도 없고 그냥 내가 궁금한 것들을 또 내가 실제로 하는 것들을 말하는 것뿐이고 몇 년 안 되는 아프리카 밀림 한복판의 체류 생활 중에 원시 농경 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의 삶을 보고 깨달은 무언가가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 어렵게 눌러놓은 자만심을 박사님께서 이리 살려 주시니 이제 그런 립서비스는 그만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손자병법 이야기를 하며 마치 내가 그 손자병법의 본래 주인공과 같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손자병법은 손무가 기술했지만, 그 내용은 손 무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손무도 오자서라는 장수가 이미 현장에서 체득해서 실제로 하는 것들을 이론으로 정리만 한 것인데, 내가 바로 그 오 무슨 장수 같다는 것이다. 이론을 공부했거나, 이미 정리된 이론에 내 것을 갖다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산 것들이 나중에 이론이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철학책을 들여다보는데, 지금까지 회자되는 당대의 철학자 중에도 이론을 설파한 철학자와 삶으로 살아낸 철학자로 나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흔히 철학 하면 머릿속에 금방 떠오르지도 않을 고차원적 단어들만 무수했는데, 그중에도 자기 고민을 직접 삶으로 살아 타인에게 영향을 철학자의 해답도 최고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떤 교육이든 마치기 직전에 꼭 말하는 것이 있는데, 알게 된 사실과 내용에 대해 고민하고 함께 아파했다는 것을 실천한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무언가를 알게 되고 그래서 생각이 바뀌었다면 지속적으로 실천해야만 그게 진짜 변화인 것이다. 여기저기서 난무하는 찬미받으소서. 지속 가능. 탄소 중립, 재생 에너지 등등의 단어들을 쉽게 접하다 보니 무언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착각도 금물이다. 사람들 모아 놓고는 반생태적인 물티슈나 나눠 주고 겉으로는 지구 지키기 선포식이라는 행사에 쫓아다니는 것을 생태적 삶으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 생태적 삶은 남이 뭘 어떻게 하 는가. 본당이 어떤 분과를 만들고, 국가가 어떤 시스템을 갖추는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내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삶으로 살아가는 것은 내 것이다. 이론이나 시스템은 남의 것이거나 남에게 설명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나의 삶 중의 하나만큼은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과 자극을 주고 있으며, 또 그것이 이론으로 정립이 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우쭐함을, 박사 학위를 가진 후배 신부가 어쩌고저쩌고 말한 손자병법 이야기를 통해 잔뜩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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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안동⟫ 말씀의 샘
[안동교구 안영배 요한 신부님]
<희망의 결실을 맺는 농촌>
오늘 복음 말씀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길에 떨어진 씨는 새가 먹었고,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진 씨는 말라 타버렸으며,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숨이 막혀버렸습니다. 하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의 수확을 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이 비유는 복음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 모두가 복음의 가르침대로 변화되지는 않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고, 생각과 말에 그치는 사람도 있으며, 매일 망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마음에 새기며 사는 사람이 세속화된 사회를 살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재물과 출세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현명한 판단과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으로 거듭난 사람이라야 하느님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매여있지만 자유로운 사람, 세상에 속해있지만, 하느님 나라 가치를 찾는 사람, 하느님을 모시면서 이웃과 생명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백 배의 결실을 보는 좋은 밭이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제28회 농민주일입니다. 장마와 국지성 폭우 등 자연재해로 피해를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후 문제로 인한 직접적 피해자는 누구보다도 바로 농민입니다. 지난겨울의 가뭄. 올봄의 냉해 등 격화되는 이상기후 현상으로 생산력은 떨어지고 생산비는 끊임없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 마당에 내려간 것은 쌀값밖에 없다는 농민들의 한숨 소리가 깊어집니다.
지난봄 쌀 가격을 보장해 주고 안정적으로 식량자원을 확보하는 최소한의 장치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해마다 농지가 줄어들고 고령의 농민이 농업을 연명해 가는 현실에 쌀 생산량이 급증한다는 주장을 수긍할 수 없습니다. 쌀이 남아돈다고 하면서도 왜 매년 40만 톤가량을 의무 수입하고 있는지, 국내산 쌀보다 더 높은 수입쌀의 시중 가격이 물가 안정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 식량자원 확보에 민감해지는 국제 사회. 그러나 우리의 쌀 자급률은 92%에 그치고 있으며 식량 자급률은 20% 초반까지 떨어졌습니다.
개발과 성장이라는 맹신에 사로잡혀 살아왔고 농업 또한 규모화와 산업화를 요구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기후 위기, 농촌소멸이라는 사태를 겪고 있습니다. 농업이 지닌 공익적인 가치를 재인식해야 합니다. 식량안보, 생태환경을 지켜가는 농업, 생태적 감수성을 체험하는 농촌이 되기 위해 농민들의 삶은 보장되어야 합니다. 모든 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가치의 우선순위를 이제는 새롭게 설정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눈으로 농업을 바라보고 신앙인의 마음으로 농민을 안아줍시다. 생명의 터전인 농촌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백 배로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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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제주⟫ 말씀
[제주교구 황태종 요셉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 사람>
교구 성모의 밤과 묵주기도의 밤이 예정되면 자연스레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야외에서 진행되는 행사의 향방이 하늘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날씨를 주셔서 행사가 큰 무리 없이 진행되면 주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 행사 진행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 하늘을 원망하는 마음도 갖게 되고 참석하신 분들을 바라보며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의 계획이 어려움을 겪게 될 때, 모든 일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주 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짐을 더 분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농부들이 고랑을 파고 이랑을 세우지만, 비를 내려 땅을 부드럽게 하시며 고랑에 물을 대시고 이랑의 새싹들에 게 복을 내리시어 한 해를 풍요롭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늘과 땅에 의지하여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대학에서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소에서 실험하는 이들보다 비록 많은 것을 알지 못하여도 하느님이 우리를 먹이시는 아버지이시며 우리 모두를 살게 하시고 돌보시는 주님이시라는 가장 중요하고 분명한 한 가지 진리와 지혜를 얻게 됩니다. 어쩌면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시는 당신의 사명을 씨뿌리는 농부에 빗대신 것 같습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지혜롭지 못한 것은 모든 것이 과학의 공식이나 인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과가 떨어질 때의 물리법칙을 알고 있는 이들이 정작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언제 떨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는 이들은 건설 현장에서 노동한 경험이 없기에 실상 발전소가 설계대로 안전하게 지어지기 어렵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원자력 발전소의 시스템을 설계하는 이들은 그 시스템을 운용하는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합니다. 더구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보는 전문가들은 원자력 발전만 생각하지, 수만 년 동안 차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원자력 폐기물을 영구히 처리할 곳이 지구상에 없다는 분명한 사실은 보지 못합니다. 동물들도 한 번 걸려들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덫에는 다시 걸려들지 않으려 하거늘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며 척도라 자부하는 인간은 체르노빌의 참사와 후쿠시마의 비극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음에도 당장 눈앞에 매달려 흔들리는 돈다발의 미끼에 현혹되어 죽음의 덫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반드시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리신 사명을 완수하게 하심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부당하게 꿰찬 인간이 하느님의 주권, 곧 이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임을 깨닫고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참 주인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돌보는 청지기 자리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음하며 탄식하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인 말씀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리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드립시다. 사라지고 말 재화들의 무게에 다져져 길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헛된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욕망이 돌덩이처럼 박혀 있는 마음에서 그 돌들을 뽑아냅시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들의 덤불들을 우리 마음에서 걷어버리고 우리의 마음을 씨 뿌리는 농부이신 주님께 온전히 내어 드립니다. 그러면 하느님 말씀 이 우리 마음에 뿌리내리고 자라나 모든 인류와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 안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교의 일치로 쪼개지고 닫힌 세상에서 해방되어 하나이고 열린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의 기쁨을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 욕망에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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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조민철 스테파노 신부님]
<약자에 대한 관심이 절실한 시기>
신앙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성경은 시종일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우리 인간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한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해야 그 나라가 도래할 것인지 예수님은 말씀뿐 아니라 온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대자연의 신비와 질서, 뭇 생명의 아름다움을 다양하게 보여 줍니다. 그럼에도 프로그램 제목이 말해 주듯 초점은 또 있습니다. 동물들 사이에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먹이사슬, 일련의 쫓고 쫓기는 생생한 긴장감이 그것입니다.
당연히 포악하고 잔인하다 싶은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다만 인간 사회가 아닌 동물 세계의 일들이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도 그런 동물적 본능이 더 심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재물과 지위, 정보나 법 등의 권한을 가진 이들이 민주주의 제도와 장치라는 보편적 테두리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권력자들 때문입니다.
공권력이란 것을 사회 전체 공동선을 위해 쓰여야 할 공공의 자산이라고는 전혀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민주주의 시대에 있을 수 없는, 독재 시대나 가능할 법한 ‘공권력의 사유화’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명백한 거짓과 범죄에 대해서 수사는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을 만큼 용감(?)해졌습니다. 한편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시민단체, 언론사, 노동자들에게는 응징하듯 힘으로 내리누릅니다.
부자들의 세금은 줄여주고, 그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농민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예산은 대폭 삭감합니다. 급기야 바다 생태계 전체를 오염시키고, 어민들의 삶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일본의 핵폐수 해양투기까지 앞장서서 지지해 주는 어처구니없는 행태의 연속입니다. 국민들 대다수가 아무리 반대해도 눈치 볼 것 없이 으레 당당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단호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과 고관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거나 세도를 부려서는 안 된다(마르 10,42-43 참조)는 것입니다. 진정 높은 사람이 되려거든 섬기는 사람이 돼라(마르 10,43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도 세상 질서에 심취해 있는 지도자들을 향해서도 ‘불행한 위선자’라고 질책하십니다.(마태 23장 참조)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힘의 논리들, 가난한 이들에게 드리워진 소외와 억압을 걷어내는 데 다시 함께 노력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사회의 약자들 중에 하나인 농민을 위하여 기도하는 스물여덟 번째 농민주일입니다. 지난 1996년 제1회 농민주일에 힘입어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서울대교구 우리농을 시작으로 교구마다 우리농이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전주교구 우리농은 1998년 설립)
다시 말해 가톨릭농민회가 중심이 된 소농들의 생명농업을 교회가 관심을 갖고 함께 발맞춰 온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탄소중립과 생태환경이 시대적 화두가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약자를 향한 교회의 관심과 공동의 집을 위한 생명농업이 더 커져나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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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호철 바오로 신부님]
《희망이 되기를 기도하며》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너의 하늘을 보아> 전문
박노해 시인의 이 시를 천천히 암송하다 보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희망’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희망’입니다. 먼저 제1독서를 살펴보면, 비나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헛되이 하늘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땅을 적시어 비옥하게 하고 생명을 움트게 하여, 사람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처럼, 하느님 말씀도 공허하게 사라지지 않고, 선포되는 순간 그 말씀의 뜻이 시작되고 마침내는 완성됩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이러한 확신과 믿음은 제2독서에서 ‘희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이 시대에서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며, 그 뜻 안에는 모든 피조물이 구원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희망은 완성되어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로마 8,21)를 얻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씨뿌리는 사람’은 ‘하느님’이시고, ‘씨’는 ‘하느님 말씀’이며, ‘씨가 뿌려지는 토양’은 바 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라는 전제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네 유형의 토양은 하느님 말씀에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과 ‘희망을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길’이라는 토양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 말씀에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돌밭’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 살아가고 싶지만, ‘돌’이라는 ‘삶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 말씀에 대한 ‘희망’이 점차 사그라져 가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희망’이 말라버리는 사람이 이에 해당합니다.
‘가시밭’은 하느님 말씀에 ‘희망’을 두는 것보다, 현세의 가치에 ‘희망’을 두는 마음 상태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만, 성전 문을 나가면, 이내 세상의 것들에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좋은 땅’은 하느님 말씀에 ‘희망’을 두는 상태로 생명력이 가득한 마음 상태입니다.
항상 하느님 말씀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 하느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여 하느님 말씀이 가지는 ‘희망’을 몸소 다른 이들에게 베풀고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이에 해당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를 포함한 여러분은 ‘돌밭’이나 ‘가시밭’의 사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하늘이신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우리 삶을 희망 가득 차게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좋은 땅’이 되어 서로 서로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를 이 시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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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임성호 베네딕도 신부님]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오늘은 농민 주일입니다. 7월의 뜨거운 하늘과 데워진 바다로 인해 촉발된 급격한 기후변화와 기후위기는 참으로 사람과 온 생물을 위태롭게 합니다. 특히 생명을 지키는 농민, 농부들은 더욱 힘겹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농부(게오로고스 땅 + 일하는 이)’로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농부이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릴 적에는 양부이신 요셉 성인의 직업에 따라 목수의 일을 도왔고, 공생활 중에는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이시면서 농부라는 신원을 밝힌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는 마치 농사일과 같이 씨를 뿌리는 것과 같기에, 그 일을 제대로 하고 돌보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농부의 삶에 헌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라고 하시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습니다.(창세 1,22-31 참조)
농부는 땅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계절에 따라 땅을 기름지게 하며, 씨앗을 뿌리고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응하며 온갖 양식을 돌봅니다. 그러면 농부들이 지닌 능력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씨 뿌리는 능력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는 이들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첫 하늘이 열리고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씨는 땅에 뿌려져 자랍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협력하고 의지하여 씨를 뿌립니다.
두 번째는 땅을 돌보는 능력입니다. 농부는 온갖 생물을 내는 땅을 돌보는 이들입니다. 땅은 온갖 생물을 내고 열매를 냅니다. 돌봄은 농부의 마음 전부입니다. 돌봄을 통해 농부는 땅과 친교를 이루고, 그 만남의 결실을 우리에게 생명으로 줍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하느님 뜻의 시작이 단적으로 창조 질서임을 보여줍니다. 세상에 많은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땅에 관한 창조 질서를 보전하는 소중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농부에게 맡기셨습니다.
‘친교의 해를 맞아, 피조물과 함께’를 살고 있는 우리도 농부들이 지닌 그 능력을 회복했으면 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농부이시기에 우리도 농부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처럼 우리도 농부의 소명과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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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간수 하지 않으면 잃어버립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말씀으로 늘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이 시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뿌린 씨가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그리고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농사법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갈릴래아 농부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던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밭을 갈고 두둑을 만든 다음 씨를 뿌리지만 팔레스티나에서는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 이해를 갖고 보면 알아듣기가 쉬울 것입니다. 비유에서 나오는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부류의 다른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 중에는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는 배움이 많거나 자기의 가치관이 뚜렷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에 관해 얘기하려고 하면, ‘좋은 사람이나 믿으면 되지. 나에게는 얘기하지 마라’하는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아주 완고한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딱딱한 흙덩어리로는 도자기를 빚을 수 없습니다. 물렁하게 반죽을 해야만 도자기를 빚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딱딱한 생각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부드러운 생각을 가져야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혹 들어도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듣고 맙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귀를 열어달라고 기도합시다.
창세기 2장16-17절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말고 해야 할 것은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길에 떨어진 씨앗을‘새가 와서 먹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3장 19절에는 길에 뿌려진 씨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부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누구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야단을 맞은 적 있잖아요.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다면 언제 악한 사람이 되느냐? 그야말로 사탄이 되느냐?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길바닥 같은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두 번째의 사람은 돌밭과 같은 울퉁불퉁한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그 마음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여 신앙이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시련, 갈등이 있으면 성당을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이야?’하며 상처를 받고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의지가 약해서 결심을 하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가도 자신이 손해를 보거나 고통을 겪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죠. 신앙생활은 때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돼. 생색도 안 나는 일을! 굿은 일을 ….서운한 소리 들으면 금방 성당 안 나와요, 내가 왜 저런 미운 사람을 바라봐야 하냐고…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을 바꿔놓죠. 앙갚음을 하는 데 얄미울 정도로 사랑으로 앙갚음을 해요.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고 더 잘해줘요. 먹고 떨어져라!가 아닙니다.
세 번째는 가시덤불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재물이나 세상 것들에 대한 유혹 때문에 신앙의 정신대로 나누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은 꼬박 꼬박 지키고 자기의 건강이나 취미생활에는 충실하지만, 단체활동이나 봉사활동 할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아직 세상이 중심이 되어서 매사를 자기 위주로 계획하고 시행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걱정이 많아요, 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니까 쓸데없는 데 머리를 많이 써야 합니다. 가시덤불의 특징은 금방 자라나는 겁니다. 뽑아도 뽑아도 금방 큽니다. 그래서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소유, 지배, 권력, 명예욕은 뽑아도 뽑아도 쑥쑥 자라요.
네 번째의 부류의 사람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실천해서 선한 열매를 맺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은 어느 땅에 속하는 것 같습니까?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예, 좋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좋은 땅 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영, 숨을 불어넣어 주셨는데 나쁜 땅이 어디 있어요, 다 좋은 땅인데 가꾸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씨앗을 주시는 겁니다. 열매를 직접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가꾸어야 하는 거죠.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어우러져서 수확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열매는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대로입니다.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게 하듯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이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반드시 뜻하는 바를 이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여러 번 김을 매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추수를 기대합니다. 열매를 거둘 때 한없는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생이라는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두게 됩니다. 많이 심고 잘 가꾸는 이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고 가꾸지 않는 사람은 적게 거두며 아무것도 심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속담에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였습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내 마음의 밭을 제대로 가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돌밭, 가시덤불의 상태에서 듣기 때문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 푀멘)
주님께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9)고 하셨습니다. 귀 있는 사람이란 ‘말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 이해하는 사람, 경청하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가 귀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숙달된 자동차 정비사는 차의 소리만 들어도 어디에 고장이 있는가를 알아냅니다. 훌륭한 지휘자는 수많은 악기 소리 중에서도 잘못된 음을 금방 잡아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있었을까 미루어 짐작합니다.
우리의 귀는 어디에 훈련되어있습니까?어떤 사람은 영어, 수학, 과학에 관한 말은 잘 알아듣는데 하느님께 관한 말씀에는 문맹인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밝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어두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듣지 않아도 될 것들은 얼마나 잘 듣고 또 많이 아는 줄 몰라요, 연예인 이름을 줄줄 외우고 그의 경력, 활동..등등. 언제 무엇을 했는지 까지…스포츠, 신문, 잡지는 꿰차고 앉아 있으면서도 성경말씀에는 아주 깡통인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배움이 많지 않은 분인데도 성경 말씀을 장, 절까지 외우고 그 뜻을 잘 알아듣는 분도 계십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정말 귀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느님 말씀을 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부제 서품식에서 복음서를 수여하는데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읽는 바를 믿으며, 믿는 바를 가르치고,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말씀의 씨앗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믿고 가르치고 실행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이 귀 있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큰 은혜가 주어져도 받아들이고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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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에 대림 특강을 위해 호주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북반구에 살고 있었던 제가 적도 이남인 남반구에는 처음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차이가 있을까 싶어서 별 준비 없이 호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도착과 동시에 새롭고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한국과 전혀 다른 계절 체험이었습니다. 한국은 12월이라 추운 겨울인데, 호주는 너무 더운 한 여름이었습니다. 남반구와 북반구 날씨가 정반대라고는 들었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막연하게 아는 경험과 실제로 경험해서는 아는 것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해서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막연하게만 사랑의 주님, 평화의 주님, 일치의 주님이라고 말할 뿐, 이런 주님을 체험하는 곳에는 가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성경을 읽지 않으니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쫓으며 사니 일상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주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실제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창 시절 수학 문제 풀던 것이 기억납니다. 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문제를 직접 풀어주십니다. 그러면 그 뒤에 이 문제가 시험에 나오면 저절로 풀게 될까요? 배운 문제를 자기가 직접 풀어봐야 시험 문제의 답을 맞힐 수 있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이지만 우리 역할에 따라 주님을 더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 말씀, 주님 뜻을 직접 실천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냥 온갖 부정적인 마음으로 불평불만만 하면서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지요.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땅의 마음을 갖추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길에 뿌려지고, 돌밭에 뿌려지고, 가시덤불에 덜어진 마음과 같았습니다. 좋은 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냥 버려집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냥 듣기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직접 몸으로 따라야만 실제로 구원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농부는 좋은 땅에 씨를 뿌리지, 나쁜 땅에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 가득하신 주님께서는 나쁜 땅의 모습을 갖춘 우리의 마음에도 당신 말씀의 좋은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직접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합니다. 이 여러 가지 언어란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겸손, 가난, 인내 그리고 순종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이들을 실천할 때 그 실천을 통하여 여러 가지 언어를 말하게 됩니다(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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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과 나>
마태오 13,1-2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그분과 나>
나 없이
그분 아무 것
아닌 듯
나 없이
그분 아무 것
할 수 없는 듯
기꺼이
그분 나에게
당신 맡기시네
내 안에서
당신 활짝 피리라
나를 믿으시고
내 안에서
당신 곱게 영글리라
나를 바라시며
내 안에서
당신 맘껏 누리리라
나를 사랑하시니
내 안에 그분 없이
나 아무 것
아니기에
내 안에 그분 없이
나 아무 것
할 수 없기에
기꺼이
나 그분을
목숨처럼 품으리라
내 안에서
그분 활짝 피시도록
그분을 믿으며
내 안에서
그분 곱게 영그시도록
그분을 바라며
내 안에서
당신 맘껏 누리시도록
그분을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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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 농부農夫처럼 희망, 사랑,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이들은 누구일까요? 저는 주저없이 농부와 어머니라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닮고 싶다면 어머니같은 마음으로, 농부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오늘은 제28회 농민주일입니다. 농민주일하면 생각나는 복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은 농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농사를 통해 농부 아버지를 닮았을 예수님입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박현동 아빠스의 담화문도, 또 가톨릭 신문의 두면에 할애된 농민주일 특집도 시의적절했습니다. 담화문중 일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체의 대량학살을 가져오는 산업농업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농업을 선택함으로 모든 생명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가톨릭 농민회원들은 현재의 어려움에도 ‘땅을 지키고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생태사도로서 굳건히 살아가길 희망한다.”
생태사도의 소명을 지닌 농민들이요 특집도 생태사도로서 활약중인 농민들에 대한 기사도 참 풍부했습니다. “땅 살리고 지구 살리는 유기농”이란 제하에 “잡초도 벌레도 함께 사는 게 결국 우리를 살리는 길이죠.”라는 기사도 좋았고, “여름보다 뜨거운 사람들-농민”. “뙤약볕 아래 구슬땀 흘려가면서도 창조질서 지켜내는 생태사도들”이라는 기사도 풍부했습니다.
어찌 농민만 생태사도입니까? 기후위기로 인해 지구와 인류의 미래가 불확실한 세상, 모두가 지구를 살리고 땅을 살리고 농촌을 살리는 생태사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식사시 이런 생태사도들인 농민들의 노고를 까맣게 지낸 일들이 참 부끄럽게 생각되었습니다. 특히 성사를 주관하는 사제들, 주방에서 식사를 챙겨주는 사람들은 농사에 힘쓰는 농부들의 노고를 늘 기억하여 그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을 살리는 참 중대한 일 셋이 성사聖事, 식사食事, 농사農事임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한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농부 아버지를 닮은 예수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씨뿌리는 사람처럼, 예수님처럼 살면 됩니다.
첫째, 희망입니다.
참으로 삶의 농부들인 우리들은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기에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낱말이 절망입니다. 절망이 진짜 대죄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묵묵히 씨뿌리는 일의 과정에 충실할 뿐입니다. 보십시오. 길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속에도 떨어져 실패인 듯 하지만 결국은 성공인생으로 드러나니 바로 다음 대목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예순배, 어떤 것은 서른배가 되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지인사대천명의 자세요 고진감래의 인생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한결같이 끊임없이 씨뿌리는 삶에 충실할 뿐입니다. 실제 농사의 80%는 하느님이 하신다는 우리 농부 수사님들의 고백입니다. 저역시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날마다 이렇게 씨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강론을 써서 나눕니다. 희망의 사도 바오로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경속에서도 살게하는 힘이 희망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희망 역시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화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땅 농사는 일년이지만, 삶의 농사는 평생입니다. 평생 삶의 농사꾼인 우리들입니다. 내 삶의 자리가 꽃자리입니다. 자리 탓할 것 없습니다. 참된 삶의 농부는 피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길이든 돌밭이든 가시덤불이든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다하는 삶입니다.
문제는 나한테 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아무리 씨앗이 좋아도 토양이 나쁘면,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밭같은 마음밭이라면 결코 그 좋은 말씀의 씨앗도 자라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모르 파티Amor fati’, 내 운명의, 책임의 십자가를, 내 삶의 자리를 뜨겁게 항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한결같이 사랑의 수행에 항구할 때 길도, 돌밭과 가시덤불의 박토도 옥토로 변할 것입니다. 악한 자의 유혹도, 환난이나 박해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도 너끈히 이겨냅니다. 이런 사랑의 수행에 항구할 때 서서히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모되어 마침내 풍요로운 수확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배, 어떤 사람은 예순배, 어떤 사람은 서른배를 낸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한결같이 진실, 성실, 절실, 충실한 삶이었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만이 보이는 곳에서 사랑의 열매들 잘 익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주님 사랑은 말씀 사랑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입니다. 사랑의 수행은 바로 말씀 수행입니다. 참으로 말씀을 경청하고 동화하면서 내 마음밭도 서서히 옥토로 변할 것입니다. 이런 사랑 역시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화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불신불립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합니다. 믿음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입니다. 백절불굴의 믿음, 칠전팔기의 믿음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바로 믿음의 전사입니다. 한결같은 믿음을 위해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필수전제조건입니다.
참으로 씨뿌리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궁극의 사랑을 두기에 이런 항구한 기다림의 믿음, 인내의 믿음입니다. 희망과 사랑, 믿음이 하나로 결속되어 있음을 봅니다. 무엇보다 희망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철석같은 믿음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바로 이런 말씀에 대한 철석같은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빛이며 생명이요 영입니다. 이런 말씀사랑과 말씀공부와 말씀실천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옥토의 마음밭이 되게하고 날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성인이 되게 합니다.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하느님 공부, 말씀 공부요 말씀 공부중에 날로 깊어지는 믿음입니다.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이 심은지 14년이 되는데 하늘 높이 자란 아름드리 믿음의 나무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내적성장도 이렇습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말씀 수행과 함께 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이런 믿음 역시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화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 농부처럼 희망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이보다 더 좋은 영약靈藥도 없습니다. 참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늘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날입니다. 무엇보다 말씀공부에 말씀실천에 항구한 평생학인이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씨뿌리기 복음 선포적 삶에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마음밭을 비옥하게 해주시고 풍성한 말씀의 열매들을 수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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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13,3)
<겸손의 덕!>
오늘 복음(마태13,1-23)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오늘이 농민주일인데, 이 비유를 '농부의 비유'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농부들은 늘 흙과 씨름합니다. 좋은 결실을 내기 위해 땅을 벗 삼아 살아갑니다. 씨가 뿌려지는 땅을 고르고 또 고르면서,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 땀을 흘립니다. 이렇게 땅을 벗 삼아 살아가는 이들은 대체로 마음이 순하고 겸손합니다. 땅이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써야 하고, 특히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 땀 흘리는 농부처럼 애써야 한다는 메시지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관한 '말씀의 씨'가 매일 뿌려지고 있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 매일 '복음의 씨'를 뿌리고 계십니다. '내 마음의 밭'이 좋은 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내 마음의 밭을 좋은 땅이 되게 하는 삶입니다.
때가 되면 사라지는 세상 가치들에 파묻혀 있거나, 겸손의 덕을 멀리하고 욕심과 교만 속에 파묻혀 있으면,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도 보이지 않고, 매일 뿌려지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나와 상관없는 공허한 나라가 되고 맙니다.
하느님의 땅이요 공동의 집인 지구가 몹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어디는 물 폭탄을 맞고, 또 어디는 폭염과 가뭄과 추위에 떠는 기후변화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을 잘 다스려야 하는 인간의 욕심과 교만이 낳은 결과입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잘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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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2iVLx-11X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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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 3)
농부는
씨앗으로
농사를
시작합니다.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며
많은 열매로
자라납니다.
씨앗을 통해
드러나는
무한한 사랑과
뜨거운
하느님의
생명력입니다.
풍성한 식탁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연을 대하는
마음이 곧
하느님을 대하는
농부의 참된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 밭에
무엇을
뿌려야 할지를
뜨겁게
성찰합니다.
땅을 일구듯
마음을 일굽니다.
이미 가장 좋은
씨가 우리
마음의 밭에
뿌려졌습니다.
말씀의 씨는
마음과 함께
자라납니다.
마음이 있는
자리가 말씀이
자라나는
씨앗의
자리입니다
마음이 죽으면
씨앗도 죽습니다.
좋은 씨앗은
마음을 속이지
않습니다.
씨앗의 시간은
씨앗을 뿌린
농부의 시간이
됩니다.
신앙의
씨앗 또한
이와같습니다.
믿음으로
오늘을
써 내려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씨앗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씨앗은 목숨을
내걸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씨앗과 함께 한
농부의 시간에
감사드립니다.
농민들이
땅을 일구듯
우리 또한
마음의 밭을
일구는
참된 신앙이길
기도드립니다.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씨앗을 안고
마음을 안고
가십니다.
말씀의
씨앗을 읽고
마음을 익히는
은총가득한
주일 아침입니다.
어떤 씨앗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야 할지를
이제야 압니다.
그것은 말씀의
좋은 씨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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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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