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출판물에는 '신실하다'라는 단어는 전무한데, 이곳만 '충실하다' 대신 '신실하다'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한글 번역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일관성이 부족한 듯하다. 파수대 해설 본문에서는 여호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봄으로써 강한 믿음을 기를 수 있다고 하였지만 이는 편향된 생각이다. 깊이 생각하는 자체는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한 방법이지 그 자체가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지적 능력, 곧, 이해력, 추리력, 판단력과 같은 사고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며, 이는 곧 사물을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믿음은 그것이 기독교이든 또 다른 종교이든 지적 증명이 아닌 상상에 불과한 것들이다. 상상이 사실과 일치할 수도 있지만 불확실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에 의한 인식은 정확한 인식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을 정확도에 따라 세 종류로 분류하여 본다면 그것은 1종인식이라 할 수 있다. 1종 인식은 주로 감각적 인식이며, 전문(傳聞), 풍문(風聞), 한 두번의 경험과 같은 것들이므로 증명되지 않은 지식들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해서 정확한 근거가 부족하다면 아무리 생각한 들 그것은 상상에 기반한 1종 인식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믿음'이라는 것은 의심이 항상 내포되어 있는 것이며, 단순히 약간의 확률적 기대만을 가지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복권이 당첨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확실한 확률을 근거로 인생의 운명을 죄지우지할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한 짓이다. 이러한 불확실한 판단에 근거해서 자기의 인생을 맡기는 것은, 태어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메뉴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교육과 환경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냉철하게 생각해본다면 우리에게는 인생의 메뉴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이다. 이러한 이성을 사용하여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을 관찰하고 사고하게 되는 것이다. 사고에 의한 판단이 정확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추론 과정이 정확해야 하며 전제가 확실해야 한다. 이 두가지를 바탕으로 해서 우리에게는 정확한 인식이 자리잡게 된다. 따라서 먼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정확한 추리력을 사용해야 하며 적어도 자신에게 만큼은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어떤 사실이 진리이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입증된 진리는 단지 믿음이 아니라 사실이며 단순히 미래에 다가올 희미한 희망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사실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행동이 일어나게 된다. 불확실한 믿음에 의해서는 의심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이 행동이 일정하지 않다(약 1:6). 야고보가 말한 '오직 믿음'이란 상상에 의한 추리가 아니라, 팩트 확인에 의한 정확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한 인식을 능동적으로 얻으려 해야 하며 단순히 어떤 사람의 말이나 해설을 통하여 주입되는 수동적 지식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확인하여 훌륭한 것을 굳게 잡으라'는 사도의 말의 의미를 되짚어 보야야 한다. 그중 기본적 사실은 하느님이 계시는가, 계시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이상적 사회는 정말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두고 정확한 추리를 해야 한다. 이 정확한 추리를 통하여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그에 따라 우리 인생의 방향은 결정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