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는 오래간만에 수성못을 걸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며 걷는 알찬 시간입니다.
복생캠프에서 하지 못한 ‘창세전에서 종말까지’의 종합강의를 다 듣게 하셨습니다.
듣고 또 듣는 복음이 얼마나 귀한지요!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저의 부정성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자격 없는 자,
오늘도 주의 이름을 힘입어 아버지와 아들이 계신 곳으로 나아갑니다.
그곳의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0.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21.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22.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24. 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25. 네 마음에 그의 아름다움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26.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27.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28.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29.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그를 만지는 자마다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30. 도둑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둑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하지는 아니하려니와
31. 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주게 되리라
32.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33.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34. 남편이 투기로 분노하여 원수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35. 어떤 보상도 받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
(본문 주해)
20~24절 : 길을 가든지 자든지 깨어 일을 할 때에든지 언제나 주의 명령을 기억하라고 한다. 그것이 그 사람 앞에 등불이며 빛이며, 이러한 훈계와 책망이 생명의 길인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또 이러한 지혜의 말씀이 음녀에게 빠지지 않도록 해 준다는 말씀은 이미 2장에서 보았다.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잠2:16)
이것은 잠언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말씀이다.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갈 때 그 삶을 인도받는 유일한 길은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는 일인 것이다.
25~28절 : 음녀의 아름다움에 홀리면 가산을 탕진하는 것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다.(이후 음녀는 ‘창녀’의 의미가 아니라 ‘남편이 있는 여자’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행, 간음, 통간이라는 것은 마치 불을 품에 품은 것과 같고 숯불을 밟고 있는 것과 같으니, 당연히 옷이 타고, 발이 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29~35절 : 도둑이 배가 고파 도둑질을 했다면 ‘오죽 했으면....’이라는 정상 참작의 여지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도둑질을 들키면 율법에서는 소는 다섯 배, 양은 네 배이다(출22:1).
그런데 본문에서 일곱 배라고 하는 것은 온전하게 다 물어내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남의 아내를 도둑질하는 자이니 배가 고파 도둑질한 것과는 차원이 달라 영혼을 망치게 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그 이유는 그 남편의 투기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묵상)
음녀나 이방여인은 주로 창녀를 의미하며, 오늘 본문은 특히 다른 남자의 아내와 통간하는 것에 대해 ‘몸과 영혼이 죽는 일’임을 강조한다.
이 모든 유혹-음행과 간음-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곧 지혜의 말씀이니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걸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음행과 간음은 성적인 타락을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세상의 것과 연합되어 그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잠언에서 이토록 ‘음행’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 ‘음행의 미혹’이란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얼마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게로 말하면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그것이다.
이 땅에서 내가 가지는 바램들을 속속들이 살펴보면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 가지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에 참으로 당당하게, 소리지르면서까지 기도했던 것이 다 여기에 속한 것이었으니....
다 무지의 소치이다.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고자 한 것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을 몰랐다.
그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몰랐다.
아들의 십자가는 나의 죄를 대속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 땅을 살아갈 때 날마다 순간마다 의지해야 하는 보혈의 은혜라는 것을 몰랐다.
내가 기도해야 할 것은 그 은혜를 받고도 정결하게 살지 못한 삶을 회개하는 것과 십자가에 더욱 온전히 연합되어야 할 것임을 몰랐다. 오히려 떼 내어 버려야 할 것들-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그렇게 달라고 달라고 간청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니 참 기가 막힌다.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해요. 그렇지만 다른 남자와도 연애하고 싶으니 허락해 주세요.’ 하고 남편에게 간청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음란한 아내가 그래도 귀하다고 다시 찾아가서 데리고 온 호세아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와 주셔서 진리의 세계로 인도해 주셨다.
그리고는 알게 해 주셨다.
보혈 흘려 나를 구원하여 생명을 주신 이유는, 아들의 생명의 삶을 살고 또 그것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란 것이다.
생명의 삶이란, 예수 믿는 자로서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 남을 열심히 도우며 사는 정도가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는 삶인 것이다. (주님과 교제하지 않고 행하는 선은 결국 자기의를 주장하는 바리새인의 꼴이 되기 십상이다. 자기의가 가득한 이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주님과의 교제는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 음행했던 마음을 회개하고, 그것들을 음란한 마음으로 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혜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일이다.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지혜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는 일이다(21절).
이제 그토록 원했던 땅의 것을 구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고, 위의 것을 바라보는 자가 된다. 끊임없이 못 박는 이유는 끊임없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땅을 몸으로 살고 있는 동안 죄의 세력이 언제나 주위를 맴돌며 나의 연약함과 부정성을 틈탈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말씀 앞으로 나아가 나의 죄성과 연약함과 부정성을 다 덮어 정결케 하는 보혈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그동안 저질렀던 간음과 음행에 진절머리를 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내가 이루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것을 알기에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할 뿐이다.
(묵상 기도)
주님,
음행하고 간음하던 자입니다.
그런 자를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 날마다 더러움에 오염됩니다.
그리고는 음란한 현장을 기웃대며 살아가는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
거듭거듭 정결함을 받게 하십니다.
보혈의 은혜가 아니면 주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치열한 생명의 삶을 살아내게 하시니
주님의 기쁨이 저에게 전달됩니다.
아기가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드디어 알아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저의 기쁨이 됩니다.
주님,
묵상을 시작할 때면
이 말씀으로 어떻게 기뻐 춤추게 될까 짐작도 안 되지만
아니, 오히려 갑갑한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주님은 틀림없으십니다.
음행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보혈의 정결한 옷을 입혀주시니
이 흰옷을 입고 오늘도 페리코레시스의 춤을 춥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