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시모음 35편
☆★☆★☆★☆★☆★☆★☆★☆★☆★☆★☆★☆★
《1》
가스 밸브를 열며
정끝별
이십 년 전 일이다 첫딸을 낳은 직후였고 강의를 마치고
강사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독신의 선배가 독설을 날렸다
오랜만 시인!
엄마는 절망할 수 없다는데
절망 없는 시인의 시는 안녕할까?
그때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할 일은 많았고 시 쓸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맙소사 둘째까지 낳고
둘째가 성년이 되는 날
천돌에 봉인해두었던 그 말을 꺼내들었다
나를 향해 있었다
눈부시게 벼려져 있었다
날을 향해 기꺼이 달려갔다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절망 따위
이제 그만 엄마여도 돼
☆★☆★☆★☆★☆★☆★☆★☆★☆★☆★☆★☆★
《2》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
《3》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정끝별
쭉쭉 뻗은 봄솔숲 발치에 앉아
솔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부러진 가지의 풍장을 보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와 함께 무너지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를 붙잡고 있는 저 살아있는 가지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살아있는 가지 어깨가 처져 있다
살아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살아있다는 것은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한 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마음에 송진이 짙다
☆★☆★☆★☆★☆★☆★☆★☆★☆★☆★☆★☆★
《4》
강그라 가르추
정끝별
한밤을 가자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 밤을 맨발로 달려가자 모든 죄를 싣고
검은 야크의 눈에 서른 개의 달을 싣고
강그라 가르추를 가자 가다 갇히면
덧창문 안으로 강된장을 끓이며 몇 날 며칠
오랜 슬픔에 씨앗만 해진 두 입술로
뭉쳐진 밥알을 나누며 숨죽이며 가자
얼음 냄새 밴 발꿈치를 어루만지며
몇 날 며칠을 가자 버리고 도망 온 것들이
가랑가랑 뜨물처럼 갈앉는 꿈에서야
눈보라에 튼 붉은 뺨을 씻으며
처마 밑 고드름 녹는 소리에
겨울 순무의 푸른 귀가 돋는 곳으로
가자 도망 온 것들이 그리워지는 곳으로
가까스로 도망 온 도망갈 곳으로 가자
강그라지듯 가자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너라는 천산산맥 나라는 만년설산을 넘어
가도 가도 강그라 가르추를 다시 넘어
☆★☆★☆★☆★☆★☆★☆★☆★☆★☆★☆★☆★
《5》
강릉 점집
정끝별
쉬운 일이 없어 나는 숨어듭니다
그러다 문득 왜 이리 쉬운 일이 없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끝내 지나 기어이 넘어 달마처럼 동쪽으로
한 줄 수평선에 닿은 엉망진창 끝에 다다라
해가 뜨고 달이 뜨는 일만큼이나
물은 지치지 않고 바다에 이른다는데
숨어들어서라도 지지 않는 길을 찾는다는데
겨울바람에 길을 물으며 강릉 천변을 헤맬 때
거두지 못한 빨래처럼 깃대에 매달려 펄럭이는 卍
소란한 바람에 휘청이는 풍차라면
잠깐 놀란 돛이라면 주저앉은 닻이라면
물 반 卍 반인 강릉 천변에서 나는
쉬운 일이 없어 숨 쉴 수도 없는 나를 숨겨주기로 합니다
긴 숨을 몰아쉬고 엎어진 김에 쉬어가기로 합니다
물처럼 卍처럼 쉬워지기로 합니다
출처 : 월간 《현대시》 (2022년 8월호)
☆★☆★☆★☆★☆★☆★☆★☆★☆★☆★☆★☆★
《6》
개미와 꿀 병
정끝별
부주의하게 살짝 열어둔 꿀 병에
까맣게 들앉았네 개미떼들
어디서 이렇게 몰려들었을까
아카시아 단꽃내가 부르는
저 새까만 킬링필드
꿀에 빠진 개미떼를
몸에 좋다고
뚝, 떠먹는
저 오랜 숟가락들
꿀 병에 꽂힌 숟가락을
청춘의 가는 손가락에 쥐어주는
저 시린 입술
☆★☆★☆★☆★☆★☆★☆★☆★☆★☆★☆★☆★
《7》
곡우(穀雨)
정끝별
산안개가 높아지니 벌레가 날아들었다
어치가 자주 울었고 나도 잠시 울었다
빛 짙고 소리 높고 기척 멀어졌다
질 것들 가고 날 것들 오면 잊히기도 하겠다
발 달린 것들 귀가 쫑긋해지고
발놀림도 분주해져 바깥 기웃대겠다
밥그릇에 밥풀도 잘 달라붙고
꽃가루에 묻어온 천식도 거풍되겠다
계절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간다
오는 서쪽 비에 가슴이 먼저 젖었으니
가는 동쪽 비에는 등이 먼저 마르겠다
저물 녘이 자주 붉고 달무리도 넓어졌다
이제 젖은 발로 마른 길 갈 수 있겠다
☆★☆★☆★☆★☆★☆★☆★☆★☆★☆★☆★☆★
《8》
기나긴 그믐
정끝별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가
비스듬히 머리 괴고 누워 포도알을 떼먹으며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며 몇 날 며칠 디스커션하는 거
내 꿈은 그런 향연이었어
누군가와는 짧게
누군가와는 오래
벌거벗고 누운 그랑 오달리스크처럼
공작새 깃털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살짝 돌아서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팜므의 능선들
그 파탈의 능금을 깨물고 싶었어
누군가에게는 싸게
누군가에게는 비싸게
오 마리아의 팔에 안긴 지저스 크라이스트!
누군가의 품에 그렇게 길게 누워
나 다 탕진했노라 쭉 뻗은 채
이 기립된 생을 마감하고 싶었어
누군가는 하염없이 울고
누군가는 탄식조차 없고
검은 관 속에 누운 노스페라투 백작처럼
그날이 그날인 이 따위 불멸을 저주하며
첫닭이 울 때까지 아침빛에 스러질 때까지
내 사랑의 이빨을 누군가의 목에 꽂고 싶었어
누군가처럼 목욕탕에서 침대에서
누군가처럼 길바닥에서 관속에서
다시 차오를 때까지
☆★☆★☆★☆★☆★☆★☆★☆★☆★☆★☆★☆★
《9》
동물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정끝별
소 눈이라든가
낙타 눈이라든가
검은 동자가 꽉 찬 눈을 보면
내가 너무 많은 눈을 굴리며 산 것 같아
남의 등에 올라타지 않고
남의 눈에 눈물 내지 않겠습니다
타조 목이라든가
기린 목이라든가
하염없이 기다란 목을 보면
내가 너무 많은 걸 삼키며 사는 것 같아
남의살을 삼키지 않고
남의 밥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펭귄 다리라든가
바다거북이 다리라든가
버둥대는 짧은 사지를 보면
나는 내가 너무 긴 죄를 짓고 살 것 같아
우리에 갇혀 있거나 우리에 실려 가거나
우리에 깔리거나 우리에 생매장 당하는
더운 목숨들을 보면
우리가 너무 무서운 사람인 것만 같아
출처 : 월간 《현대시》 (2021년 5월호)
☆★☆★☆★☆★☆★☆★☆★☆★☆★☆★☆★☆★
《10》
두부 이야기
정끝별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쏟아진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처럼 시작된다
비긋는 늦여름 저녁 식탁에 놓일 숟가락 개수를 결정해야 해,
그게 라스트신이거든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으깨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낼수록 순해진다
매 순간의 물과 불 앞에선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준다
몽글한 웅얼거림과 뜨거운 울먹임이 뒤섞여 엉겼다가
무명 보자기에 걸러지면서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 아니면 꿈이라 할까
담담한 눈빛과 덤덤한 낯빛으로 맞이하는 밥상에서
만만찮은 희망으로 만만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콩밭 매는 마음과 콩밭에 간 마음을 쓸어 담아
써 내려가야 갈 너의 한밤이 희고 깊다
밤새 이야기는 그렇게 쏟아지고 불려져
아침의 너는 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출처 : 시집 《모래는 뭐래》중에서
☆★☆★☆★☆★☆★☆★☆★☆★☆★☆★☆★☆★
《11》
두부하기
정끝별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술술 샌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로 시작된다
라스트 신은 비가 내리는 늦여름의 저녁 식탁,
숟가락 개수와 메뉴를 결정해야 해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러 들어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내야 순해진다
어쨌든 매순간의 물과 불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래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 올려준다
뜨거운 장마를 불러오는 건 떼 구름이다
울렁이는 웅얼거림과 어처구니없는 울먹임이
먼 곳의 몸짓처럼 떼 지어 엉겨 떠올랐다가
젖은 무명 보자기에 싸여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이나 꿈이라 할까
그리하여 조금 더 담담한 목소리와
조금 더 묵묵한 표정으로 맞이할 저녁 식탁에서
오늘도 만만한 희망으로 만만찮은 서사를 완성하려는,
한 번도 네게 말 걸지 않고 콩밭만 매던 말과
한 번도 널 마음에 담지 않고 콩밭에 간 마음이
네가 써 내려가야 갈 흰 밤처럼 깊다
그런 밤 어김없이 술술 새는 이야기 씨들이
부드러운 망각처럼 불려지고 있다 퉁퉁하다
출처 : 《시와 함께》(2021 봄호)
☆★☆★☆★☆★☆★☆★☆★☆★☆★☆★☆★☆★
《12》
둥지새
정끝별
발 없는 새를 본 적 있니?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에 쉰다지
낳자마자 날아서 딱 한번 떨어지는데
바로 죽을 때라지
먹이를 찾아 뻘밭을 쑤셔대본 적 없는
주둥이 없는 새도 있다더군
죽기 직전 배고픔을 보았다지
하지만 몰라, 그게 아니었을지도
길을 잃을까 두려워 날기만 했을지도
뻘밭을 헤치기 너무 힘들어 굶기만 했을지도
낳자마자 뻘밭을 쑤셔대는 둥지새
날개가 있다는 걸 죽을 때야 안다지
세상의, 발과 주둥이만 있는 새들
날개 썩는 곳이 아마 多情의 둥지일지도
못 본 것 많은데 나, 죽기 전 뭐가 보일까
☆★☆★☆★☆★☆★☆★☆★☆★☆★☆★☆★☆★
《13》
디폴트값
정끝별
얼마나 오래 혼자인가요?
얼마나 오래 말을 해본 적이 없나요?
얼마나 오래 날짜와 날씨와 요일과 요즘을 잊나요?
얼마나 오래 거울에서 얼굴을 보지 않나요?
얼마나 오래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나요?
얼마나 자주 자기를 웃어넘기나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말과 눈빛에 베이나요?
얼마나 자주 이가 상할 정도로 이를 악무나요?
얼마나 자주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얼마나 자주 칼날에 혀를 대보나요?
얼마나의 해저를
산 채로 파고들어 저를 묻고 적을 묻다
두 눈이 불거지고 온몸이 투명해져 스스로 빛을 낼 때면
눈물에 부력이 생기고
가슴에 부레가 차올라
마침내 심해의 바닥을 치고 솟아오른다 언제나 너는
출처 : 시집 《모래는 뭐래》중에서
☆★☆★☆★☆★☆★☆★☆★☆★☆★☆★☆★☆★
《14》
막고 품다
정끝별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자나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그러니까
미당이 알아봤다는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네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고 갇힌 물 다 푸라네
길이 막히면 길에 주저앉아 길을 파라네
열 마지기 논둑 밖 넘어
만주로 일본으로 이북으로 튀고 싶으셨던 아버지도
니들만 아니었으면,을 입에 다신 채
밤보따리를 싸고 또 싸셨던 엄마도
막고 품어 일가를 이루셨다
얼마나 주저앉아 막고 품으셨을까
물 없는 바닥에서 잡게 될
길 막힌 외길에서 품게 될
그 고기가 설령
미꾸라지 몇 마리라 할지라도
그 물이 바다라 할지라도
☆★☆★☆★☆★☆★☆★☆★☆★☆★☆★☆★☆★
《15》
모래는 뭐래
정끝별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
모래는 몇천 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
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
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
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
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
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
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
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
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
설마 모래가 너일까?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출처 : 시집 《모래는 뭐래》중에서
☆★☆★☆★☆★☆★☆★☆★☆★☆★☆★☆★☆★
《16》
묵묵부답
정끝별
죽을 때 죽는다는 걸 알 수 있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거야?
죽을 때 모습 그대로 죽는 거야?
죽어서도 엄마는 내 엄마야?
때를 가늠하는 나무의 말로
여섯 살 딸애가 묻다가 울었다
입맞춤이 싫증나도 사랑은 사랑일까
반성하지 않는 죄도 죄일까
깨지 않아도 아침은 아침일까
나는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흐름을 가늠하는 물의 말로
마흔넷의 나는 시에게 묻곤 했다
덜 망가진 채로 가고 싶다
더이상 빚도 없고 이자도 없다
죽어서야 기억되는 법이다
이젠 너희들이 나를 사는 거다
어둠을 가늠하는 흙의 말로
여든다섯에 아버지는 그리 묻히셨다
제 짐 지고 제집에 들앉은
말간 물집들
☆★☆★☆★☆★☆★☆★☆★☆★☆★☆★☆★☆★
《17》
물을 뜨는 손
정끝별
물만 보면
담가 보다 어루만져 보다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무엇엔가 홀려 있곤 하던 친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북한산 계곡물을 보며
사랑도 이런 거야, 한다
물이 손바닥에 잠시 모였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물이 고였던 손바닥이 뜨거워진다
머물렀다
빠져나가는 순간 불붙는 것들의 힘
어떤 간절한 손바닥도
지나고 나면 다 새어나가는 것이라고
무심히 떨고 있는 물비늘들
두 손 모아 떠 본 적이 언제였던가
☆★☆★☆★☆★☆★☆★☆★☆★☆★☆★☆★☆★
《18》
밀물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
《19》
바다코끼리 이야기가 아니다
정끝별
빙하가 녹는 머나먼 북쪽 어디쯤
해안가로 수십만 무리가 몰려온다
해안마저 잃고 살기 위해 절벽을 오른다
한 몸 누일 곳을 찾아 기어오른다
지느러미를 팔다리 삼아
기다란 송곳니를 지렛대 삼아
배밀이 구걸을 하듯
더 기어오를 수 없는 절벽 끝은
찰나의 유빙, 착시의 바다, 그때
허공에 지느러미를 펼친다
옥상에서 난간에서 사지를 펼치듯
절박이 절벽을 부르고
착시가 착각을 부른다
내장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퍽퍽 떨어지는 옆으로 줄지어 오른다
모두가 바다로 가는 길인 줄 안다
☆★☆★☆★☆★☆★☆★☆★☆★☆★☆★☆★☆★
《20》
바람을 피우다
정끝별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기공을 한다 했다
몸을 여는 일이라 했다
몸에 힘을 빼면
몸에 살이 풀리고
막힘과 맺힘 뚫어내고 비워내
바람이 들고나는 몸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의 몸이 가장 열려 있다고 했다
닿지 않는 곳에서 닿지 않는 곳으로
몸속 꽃눈을 끌어올리고
다물지 못한 구멍에서 다문 구멍으로
몸속 잎눈을 끌어올리고
가락을 타며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렇다면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란
바람을 부리고
바람을 내보냄으로써
저기 다른 몸 위에
제 몸을 열어
온몸에 꽃을 피워내는
그러니까 바람을 피우는 일 아닌가
☆★☆★☆★☆★☆★☆★☆★☆★☆★☆★☆★☆★
《21》
봄의 화단에서
정끝별
아파트 화단에 앉아 꽃씨를 심는다
다섯 살배기 흙손가락에서 피어나는 봄흙의
귓불에선 아직도 말간 배냄새가 난다
,나도 씨였죠?
,이 씨도 쑥쑥 자랄 거죠?
한껏 치켜올린 입술이 나팔꽃처럼 둥글게 피어나고
꽃씨를 품은 봄흙을
다독이는 살빛 떡잎이 둘
타클라마칸 고비의 황사를 견디며
지구의 저 저 저 모퉁이를 견디며
씨에서 잎으로 꽃으로 몸 바꾸며
,나이테처럼
,쑥쑥 높아지는 키의 눈금들이
,해님에게 가는 계단이래!
꽃씨를 묻은 플라스틱 화분을 안고
계단을 오르는 위태로운 흙물 엉덩이를 보며
목숨을 피우려는 모든 것들은
저리 온몸으로 뒤뚱이며 오르는 것이구나
바람에 휘청,
넘어진 피와 멍이 너의 꽃이고 잎이었구나
저 계단에서
잠시 붙잡고 선 난간이 너의 뿌리였구나
☆★☆★☆★☆★☆★☆★☆★☆★☆★☆★☆★☆★
《22》
불멸의 표절
정끝별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대는 저 장다리꽃을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자리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를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닝닝 허공에 정지한 벌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했던 당신의 새벽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픈 매듭을 베껴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의 당신 몸을 표절할래
첫 나뭇가지처럼 바람에 길을 열며
조금은 글썽이는 미래라는 단어를
당신도 나도 하늘도 모르게 전면 표절할래
자, 이제부터 전면전이야
☆★☆★☆★☆★☆★☆★☆★☆★☆★☆★☆★☆★
《23》
사랑의 병법
정끝별
네가 나를 베려는 순간 내가 너를 베는 궁극의 타이밍을 일격(一擊)이라 하고
뿌리가 같고 가지 잎새가 하나로 꿰는 이치를 일관(一貫)이라 한다
한 점 두려움 없이 열매처럼 나를 주고 너를 받는 기미가 일격이고
흙 없이 뿌리 없듯 뿌리 없이 가지 잎새 없고
너 없이 나 없는 그 수미가 일관이라면
너를 관(觀)하여 나를 통(通)하는 한가락이 일격이고
나를 관(觀)하여 너를 통(通)하는 한마음이 일관이다
일격이 일관을 꽃피울 때
단숨이 솟고 바람이 부푼다
무인이 그렇고 애인이 그렇다
일생을 건 일순의 급소
너를 통과하는 외마디를 들은 것도 같다
단숨에 내리친 단 한 번의 사랑
나를 읽어버린 첫 포옹이 지나간 것도 같다
바람을 베낀 긴 침묵을 읽은 것도 같다
굳이 시의 병법이라 말하지 않겠다
☆★☆★☆★☆★☆★☆★☆★☆★☆★☆★☆★☆★
《24》
세상의 등뼈
정끝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
《25》
소금 인간
정끝별
돌도 쌓이면 길이 되듯 모래도 다져지면 집이 되었다
발을 떼면 허공도 날개였다
사람도 찾아들면 소금이 되었고 돌이 되었다
울지 않으려는 이빨은 단단하다
태양에 무두질된 낙타 등에 얼굴을 묻고
까무룩 잠에 들면 밤하늘이 하얗게 길을 냈다
소금길이 은하수처럼 흘렀다 품었다
내보낸 길마다 칠할의 물이 빠져 나갔다
눈썹 뼈 밑이 비었다
모래 반 별 반, 저걸 매몰당한 슬픔이라 해야할까?
낙타도 사람도 한때 머물렀으나
바람의 부력을 견디지 못한것들의 백발이 생생하다
한철의 눈물도 고이면 썩기 마련,
한 번 깨진 과욕은 바닥이 마를 때까지 흘러나오기 마련,
내가 머문 이 한철을 누군가는 더 오래 머물 것이다
머문만큼 늙을 것이다
알몸으로 태어나 맨몸으로 소금산에 든 자여,
마지막 시야를 잃은 고요여, 머리를 깨뜨려라.
모래로 흩어지리니,
세상 절반을 품었던 두 팔, 없다.
가죽 신발 속 절여진 발, 흔적도 없다
☆★☆★☆★☆★☆★☆★☆★☆★☆★☆★☆★☆★
《26》
살구꽃이 지는 자리
정끌별
바람이 부는 대로
잠시 의지했던 살구나무 가지 아래
내 어깨뼈 하나가 당신 머리뼈에 기대 있다
저 작은 꽃잎처럼 사소하게
당신 오른 손바닥뼈 하나가 내 골반뼈 안에서
도리 없이 흩어지고 있다
꽃 진자리가 비어간다
살구 가지 아래로 부러진 내 가슴뼈들이
당신 가슴뼈를 마주보며 꽃 핀 자리
한 잎 뺨 한 잎 입술 한 잎 숨결
지는 꽃잎도 저리 인연의 자리로 쌓이고
문득 바람도 피해간다
누구의 손가락뼈인지
묶였던 매듭을 풀며 낱낱이 휘날리고 있다
하얗게 얼룩진 꽃 그늘 아래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부쳐준 오래된 편지 한 장을 읽으며
☆★☆★☆★☆★☆★☆★☆★☆★☆★☆★☆★☆★
《27》
속 좋은 떡갈나무
정끝별
속 빈 떨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
《28》
은는이가
정끝별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
《29》
저녁에 입들
정끝별
한 이불에 네 다리 내 다리를 꽂지만 않았어도
서로에 휘감기지도 엉키지도
그리 연한 속살에 쓸리지도 않았을 텐데
한솥밥에 내남없이 숟가락 숟가락을 꽂지만 않았어도
서로에 물들지도 병들지도
그리 쉽게 행복에 항복하지도 않았을 텐데
한 핏줄에 제 빨대들을 꽂지만 않았어도
목줄도 없이 묶인 채 서로에 뱉어지지도
무덤에조차 그리 무리지어 눕지 않았을 텐데
한 우리에 우리라는 희망을 꽂지만 않았어도
두부에 파고드는 미꾸라지처럼 서로에 기어들지도
뚜껑 닫힌 지붕에 그리 푹푹 삶아지지도 않았을 텐데
☆★☆★☆★☆★☆★☆★☆★☆★☆★☆★☆★☆★
《30》
저린 사랑
정끝별
당신 오른팔을 베고 자는 내내
내 몸을 지탱하려는 내 왼팔이 저리다
딸 머리를 오른팔에 누이고 자는 내내
딸 몸을 받아내는 내 오른팔이 저리다
제 몸을 지탱하려는 딸의 왼팔도 저렸을까
몸 위에 몸을 내리고
내린 몸을 몸으로 지탱하며
팔베개 돌이 되어
소스라치며 떨어지는 당신 잠에
내 비명이 닿지 않도록
내 숨소리를 죽이며
저린 두 몸이
서로에게 밑간이 되도록
잠들기까지 그렇게
절여지는 두 몸
저런, 저릴 팔이 없는
☆★☆★☆★☆★☆★☆★☆★☆★☆★☆★☆★☆★
《31》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의 후예
정끝별
해초인 줄 알고 어미새가 삼킨
찢어진 그물을 아기새가 받아먹고
토해내지 못하고
물고기인 줄 알고 어미새가 삼킨
라이터와 병따개를 아기새가 받아먹고
소화하지 못하고
오징어인 줄 알고 어미새가 삼킨
하얀 비닐봉지를 아기새가 받아먹고
일용할 양식으로 일용한 죽음의 배식
빙하 조각처럼 유유히 해안에 도착한
거대한 스티로폼 더미에 갇혀
깃털 하나 펴지 못하고
쓰레기로 꽉 찬 폐기물이 되었다
찍찍 스티로폼 소리를 내며
죽어서도 썩지 못하고
출처 : 계간 《시와 정신》(2021년 여름호)
☆★☆★☆★☆★☆★☆★☆★☆★☆★☆★☆★☆★
《32》
춤
정끝별
내 숨은
쉼이나 빔에 머뭅니다
섬과 둠에 낸 한 짬의 보름이고
가끔에 어쩜에 낸 한 짬의 그믐입니다
그래야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내 맘은
뺨이나 품에 머뭅니다
님과 남과 놈에 깃든 한 뼘의 감금이고
요람과 바람과 범람에 깃든 한 뼘의 채움입니다
그래야 점이고 섬이고 움입니다
꿈만 같은 잠의
흠과 틈에 든 웃음이
짐과 담과 금에서 멈춘 울음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두 입술이 맞부딪쳐 머금는 숨이
땀이고 힘이고 참이고
춤만 같은 삶의
몸부림이나 안간힘이라는 겁니다
☆★☆★☆★☆★☆★☆★☆★☆★☆★☆★☆★☆★
《33》
한 집 눈물
정끝별
생에 그늘이 될 만한 집 한 채는 있어야 해요
집은 나 한 집 하기 나름인걸요
도장에 미장, 섀시하고 조명 바꾸고
버티컬 건 후 유리창까지 닦아준다
황홀한 집에 빠진 나 한 집
집이 기침을 하면 나 한 집 약 먹는다
집이 오줌 누고 싶어하면 나 한 집 똥 눈다
집이 술잔을 들면 나 한 집 담배를 피워 문다
집이 단추를 풀면 나 한 집 속옷까지 벗는다
집이 심심해하니 나 한 집 아이 낳아준다
집은 날로 의기양양 나 한 집 업신여기고
나 한 집 더럽히고 나 한 집 깔아뭉개고
너 나가 너 나가 다 나가 나 한 집 내치네
집을 쫓아다니느라 빚더미에 오른 나 한 집
나 한 집 옹골차게 등쳐먹는 잔인한 집에
내쫓긴 가엾은 나 한 집시
☆★☆★☆★☆★☆★☆★☆★☆★☆★☆★☆★☆★
《34》
호퍼가 그린 그림
정끝별
사다리꼴 지붕에 사각 벽에 사각 창에 있다
머리카락이 없고 눈이 없고 입이 없다 윤곽선만 남아
창턱에 두 팔을 걸치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일곱 살 그림마다 사다리꼴 지붕 아래 사각벽에
사각 창을 그려넣곤 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때처럼
세 번 만나고 헤어지자는 말에 스무 살 짝사랑이 말했다
사랑은 제 눈에 들앉은 들보라고
네가 바라봐줘야 너를 들어올릴 수 있다고
결혼식 전날 기혼의 막내 오빠가 말했다
사랑이란 나의 너를 위해 세상에 쌓는 담이라고
허물어지지 않으려면 스스로가 벽이 되어야 한다고
현관의 나 홀로 신은 홀로임을 반성중이다
어제 입술로 오늘 마시는 말술이 마술이다
왼손에 사각턱을 괴고 사각 창에 갇힌 내가 말했다
일흔 살에 잘한 일이 일곱 살 사다리꼴 지붕아래
반성중인 신을 사들이고 마술을 살아낸 거였으면 좋겠다고
신이 있다면 내가 그린 그림에 있다고
마술이 있다면 그 그림에 찍어놓은 내 입술자국에 있다고
사라에 갇힌 호퍼가 말했다 사각의 유리창안에서
☆★☆★☆★☆★☆★☆★☆★☆★☆★☆★☆★☆★
《35》
밀물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 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