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바라크 대장과 바라크 주둔 부대다! 저 녀석들은 정통 교육을 받
은 놈들이다. 엘핀이나 두컨처럼, 임기응변으로 공격하니까 임기응변으
로 맞대응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다.
[퍽!]
"아악!"
난 항상 밉살맞은 웃음을 짓던 엘핀의 얼굴을 발로 차주었다. 그리고 개
구멍으로 뛰어가며 소리질렀다.
"진짜 암살자부대를 만들어 쳐들어 올테니, 그때를 위해서 흑신술로 손
가락이나 제대로 붙여놓아 보시지!"
물론 내가 말하는 암살자 부대는 늑개와 매로 이루어진, 정통 밤의 사냥
꾼 부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암살자 부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앗! 뭐냐!"
"아악!"
바라크 부대의 뒷편에서 알 수 없는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아주 잠
시, 그러니까 엘핀이 한대 얻어맞았다가 고통도 잊고 상체를 일으켜서 바
라크 부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사이에...
바라크의 대장까지 푹 하고 쓰러져 버렸다. 물론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하지만 내 귀에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인간의 숨소리가 공기를 가르
면서 내는 소리가...
"그 사람은 죽이지 마!"
곧바로 쓰러진 두컨의 곁에 모여들었던 그 소리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
와 동시에 내 곁으로 한 숨소리가 스쳐 지나가면서, 엘핀의 고개가 툭 떨
어졌다.
고통에 쓰러졌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엘핀의 목만 땅바닥에 떨어졌다
는 소리다.
"네가 손가락까지 베고 발로 얼굴도 찬 사람이니까, 죽여도 될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렇지...요. 그리고 당신들이 있다면 엘핀이 없어도 윈덤의 경기병 정
도는 문제가 없겠지요."
"물론, 그것은 우리가 카라피탈의 전선에 서 있을때의 이야기지."
두컨은 다행히도, 흑신술의 부작용인지 땅바닥에 엎어져서 조용히 있었
다. 그래서 그들의 검에 목숨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들은 사람인가? 혹시 나무막대기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놓
고 흑신술로 움직이게 만든 일종의 우드 골렘 아니야?
"우린 사람이다. 너에게 친절하게 대할 이유가 충분한 사람이지. 그런
표정 짓지 말았으면 한다."
"저...어리게 보이죠?"
"물론이다."
"그러면 어린이가 해맑은 눈으로 질문 하나만 할께요. 어떻게 그렇게 깡
마를 수가 있지요?"
물론 그들은 사람이다. 얼굴도 있고(검은 복면으로 다 가려서 눈만 나
와 있지만) 몸도 있고(잠시 신체학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들
은 살아있는 해골 표본 같았다), 서 있고, 팔의 끝이라고 짐작되는 두
끝 부분에서 검날도 길게 나와 있고(저게 소문으로만 듣던 실검이라는 것
인가? 하도 얇아서 잘 안 보인다).
"젊은이가 호기심에 불타는 눈으로 질문 하나만 하마. 어떻게 밤의 사냥
꾼 일족이 본토에 와 있는 것인가?"
"그야, 뭐 방금 목 날아간 녀석의 말에 따르자면 영광의 쿠리오가 보내
서..."
"우리도 영광의 개새끼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그쪽의 말이 하도 가만가만, 조용해서 나는 쿠리오의 성이 개새끼인줄
로 잠시 착각했었다.
"이것이 다...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에게는 너희 일족이 신이 있
지."
"아,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있...지요."
복4중창단. 이제부터 이게 나의 신의 이름이다.
"우리 검에 목숨 바친 사람들에게도 옛날의 신이 있다..."
"빛 말이지요?"
"그래, 푸른빛 검. 그의 인도는 이렇게 신묘하고 오묘하다."
우리 신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푸른빛 검도 그렇게 멋진 이름은 아
니지만 복4중창단보다 훨씬 좋다! 그러고보니 암흑박쥐라는 이름이 있
었...는데 그 암흑박쥐가 진짜 그들일까?
"너는 암흑박쥐의 인도를 받고 있겠지."
그렇다니까 그렇다고 믿어야겠지.
"숲쪽으로 나갔던 동굴의 개척자들과 나무의 천사들은 다 암흑박쥐께서
처리하신 모양이다. 밤은 깊고, 준비할 것은 많으니, 잠시 바라크의 불
을 밝히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겠지요."
물론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개구멍은 여기서 다섯 걸음. 하지만
그쪽은 대충 들어봐도(숨소리를) 100명이 넘어보이니, 눈만 돌려도 목이
날아갈 것 같다. 뭐, 나를 죽인다고는 안하고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
으니, 일단 생명은 건진 셈이므로 같이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
을 듯 하다.
"...제가 들어야겠지요?"
나도 나무막대기로 바위를 지탱하려는 무모한 사람은 아니다. 어쩔수 없
이 내가 두컨을 들어매고 검은 옷을 입은 검사들을 따라 바라크로 걸어갔
다.
"그 사람은 자는가?"
"깊이...잠들었겠지요. 흑신술의 부작용은 막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교육을 제대로 받은 명가의 후예 답다. 수도에 계신 아버님 걱정
이 들겠지."
"솔직히...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이제부터 우리 반란군의 포로다. 반란군은 단숨에 이 바
라크를 점령했고, 너를 포함한 모든 병사들은 습격당했다. 살아남은 것
은 너와 저 몸집 큰..."
"두컨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트지라고 불러주세요."
그의 눈매가 약간 올라갔다. 아니, 촛불이 조금 흔들려서 그림자가 흔들
린 모양이다.
"두컨과 아트지 뿐. 그리고 반란군은 두컨과 아트지를 인질로 붙잡고,
이 바라크를 점령한 후에 바라크 너머에 있는 영지의 안전을 위협하며 카
라카스에 대항한다. 되었는가?"
"예. 명쾌간결합니다."
"저, 쿠던?"
"두컨이요."
"그래, 두컨은 흑신술의 부작용때문에 진짜 인질이 되어야 하겠지만, 너
는 다르다. 외견상으로는 인질로 취급해주마. 하지만 너는 지금부터 이
바라크의 밤의 주인이다."
"... ..."
"절대 안전을 보장하지. 너 없이는 이 바라크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
킬 수 없다. 물론 너의 일족의 고향인 저 너머의 영지도 점령할 수 없
고. 우리들의 최종목표는 윈덤과 카라카스 사이의 이 산맥에 완충지대의
역할로 전형적인 전투국가를 만드는 것."
"... ..."
"더 이상 우리같은 사람들이 생겨서는 안된다. 너는 동의하는가?"
나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우리같은 사람들이 생겨서
는 안된다는 말. 마음이 잔잔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마음이 잔잔하게 움
직이지 않았다고 쳐도, 내가 이 무시무시한 검객들에게서 도저히 도망칠
수 있을것 같지는 않다.
"아직 모자란 것이 많다. 특히 식량 문제인데, 우리들은 어차피 먹을 것
이 별로 없다."
밤의 사냥꾼 일족의 정통 후예, 쉽게 말해 식인종을 앞에 두고 뼈만 남
은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까 상당히 해석이 오묘해진다. 내가 갑자기 식인
종 식량창고에서 잡혀온 포로들 중에 먹을 것을 고르는 사람같이 느껴졌
다.
"우리는 잘 먹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 물론 그렇게 알아들었습니다."
탁자 위에 놓아둔 촛불이 약간 흔들렸다. 검객부대 대장의 웃음이 촛불
을 약간 흔들었기 때문이다.
"잘 먹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물론 쿠리오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
씀이겠지요."
"머리 또한 똑똑하군. 어차피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들이 자
급자족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너인데...앞으로 이 바라크로 수많은 반
란군이 모여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식량문제는 큰 문제가 된다."
"숲은 넓고, 동물은 많습니다. 시냇물에 담궈둔 열매와 산나물은 좋은
향기가 나지요."
"좋다. 믿음직스럽다."
"그리고 아직 옛 삶을 그리워하는 밤의 사냥꾼 일족이 많습니다. 서부
전선을 돌아다니면서 많이 만났지요. 그들도 든든한 아군이자 후원자가
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을 총지휘하는 것은 바로 너다. 알겠지? 야생의 카라지안."
"제 소문이 그렇게 널리 퍼졌습니까?"
"아무리 귀족가의 후예라고 해도, 병사에서 좌대장까지 2년만에 승격하
는 무인은 보기 힘들다. 사실 좌대장 자리도 억지로 한 단계 내려간 것이
지."
"그렇...지요."
"나의 할 말은 끝났다. 일찍 자라. 너의 내일 할 일을 말해주마."
나는 눈을 빛냈다.
"...바라크 부대 시체 처리좀 해다오. 물론 너의 야성이 완전히 깨어나
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제 야성이 깨어봤자 당신들에게 무슨 수로 대항하겠습니까."
"우리 부대 정식 명칭은 '베는 바람'이다."
"예. 저, 당신은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까?"
"...닉이라고 불러라."
"호칭 필요..."
"없다."
나는 닉에게 목례를 하고 방금 전까지 바라크 대장실이었던 방을 나왔
다. 베는 바람 부대원들은 각자 방을 정하고 자는 모양이었다. 내 발걸음
은 자연스레 방금 전까지 내가 자던 방으로 향했다.
그들이 나에게 시체처리를 맡길 줄 알았다(그들이 직접 나서서 시체가
먼지가 될때까지 칼로 다대기를 치는 방법도 꽤 고려해볼만한 방법이지
만). 뻔히 예상되는 일.
그리고 나는 눈을 번득였다.
이성은 나에게 바르게 살라 하고
감정은 나에게 갈증을 채우라 한다.
"머리 아프게 되었군. 너에게 약속한 것이 있건만."
"지금 당장 자연으로 완전히 돌아오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약
속을 지키겠다."
"너를 품에 안겠다."
"다시 우리의 품으로."
복4중창단, 아니 암흑박쥐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금 수면에 빠져
들었다.
무엇인가 허전하다.
분명히 지금 밖에는 태양이 떠 있을 것이다. 눈이 밝다.
그럼에도...그럼에도.
평소 같았으면 다가올 잔인한 손길, 내 겨드랑이 털을 하나씩 뽑아내던
바로 그...
아, 엘핀은 이제 없지.
세수를 하면 좀 나아지려나. 무엇인가 정리되지 않은 혼란과, 갈증, 그
리고 착각 같은 환상들이 내 머릿속에 가득하다. 꿈 치고는 상당히 박진
감이 넘쳤던 것 같은데.
옷을 대충 입고, 방문으로 다가가다 보니 화살이 하나 바닥에 꽃혀 있었
다.
"... ..."
밤에 나는 신발과 발의 마찰음을 들었다. 그리고 암살자들은 나를 공격
했다. 겨우 일개 밤의 사냥꾼에게 공중전에서 밀리다니, 그들은 분명 엘
핀의 나무의 천사 부대는 아닐 것이다. 나무 위에서 개미도 맞춰 잡는 화
살이 나를 비껴나갈리 없다. 그래, 그들은 엘핀의 부대를 가장한 윈덤의
암살자들이야. 어제 엘핀이 가르쳐 준 대로.
"엘핀?"
내 기억대로라면, 내 방 바로 앞 방으로 두컨이 들어갔었고, 엘핀은 굳
이 한 방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었다. 하지만 그 방에 아무도 없는 것
을 보니 내 기억이 틀렸나보다. 하긴, 전선에서 살 비벼대며 함께 죽음
과 삶을 가르며 다녔던 친구인데 굳이 떨어진 방을 잡을 이유가 있을까?
나는 내 바로 옆 방으로 들어갔다.
"... ..."
하지만 그 방은 시트도 개키지 않은, 즉 사람이 잤다는 흔적이 전혀 없
었다. 적어도 방금 전 그 방에는 엘핀이 항상 눕고 나면 뿌려져 있는 금
발도 몇 가닥 침대에 놓아져 있었던 것 같은데. 난 내 바로 앞 방, 그러
니까 두컨이 들어갔던 방으로 갔다.
"... ..."
그 방은 정말로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듯이 보였다. 다만, 벽 한쪽의 옷
장의 문이 약간 벌어져 있고, 그 곳에서 무엇인가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
을 봐서 보통 방 같지 않았다.
다가가서 옷장 문을 열어보았다. 옷장 뒷편의 벽 대신에, 아래쪽으로
쭉 뻗은 계단이 나타났다. 무엇인가 새어나오던 것은 그 계단 벽에 붙은
횃불에 흔들리는 옷들의 그림자였다.
"두...컨? 어디로 간거지? 잠도 안 자고."
나는 그 계단으로 내려가려다가, 상황 파악 잘하고 똑똑한 엘핀부터 찾
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보다는 암살자가 바라크를 공
격해왔다는 것을 먼저 대장님에게 알려야 되는 것이 먼저다. 암살자 두목
인 엘핀의 손가락은 내가 잘라버려서, 그 두목은 장기인 활을 쓰지 못하
는 완벽한 무저항 상태라는 것, 아니 무저항도 더 이상의 무저항 상태일
수 없는, 목이 떨어져 나간 시체...
엘핀은 이제 없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달렸다. 내 방으로 달렸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깨진 창문이 보인다. 밖으로 아스라히 비쳐오는 태양이 느껴진다.
나는 곧장 깨진 창문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뛰어내렸다.
건초더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말들이 매어져 있는 마굿간이 있을 것
이고. 말들은 늑개들의 좋은 식량이 되지 않을까? 독수리들이 엘핀과 바
라크 부대원들의 시체에 모여들테니, 이번 기회에 독수리도 조련해보는
것이 좋을 듯도 싶고.
아니, 그것보다 먼저 어제 이 바라크를 점령해버렸던 그, 뭐더라? 맞
다, 베는 바람 부대의 명령을 이행해야 한다.
엘핀의 몸에 남아 있는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셔서, 나의 갈
증을 해소하는 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은, 늑개들을 불러서 저 바라크 부대원들의 시체를
성 밖으로 치우는 일이다. 어제 닉이라는 사람은 분명히 내게 명령했다.
나는 대답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엘핀은 죽으니까.
하지만 엘핀은 죽었는데?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저 멀리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다. 나는 발길을 돌렸다. 닉을 찾아내야
한다. 찾아내서, 어제 밤에 일어났던 일을 두컨에게 설명하도록 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드리언 영지 정찰2조의 대장은 두컨이니까. 그리고 바라
크 대장님이 죽은 것은 두컨의 망치에 맞았기 때문이다. 아니, 엘핀의 화
살이 팔에 스쳤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밉살스럽게도 엘핀은 한 방에 보
내기 위해 화살에 독을 발라놓았던 것 같다. 내 팔이 쓰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 저기 닉이 보인다. 흠, 몰랐는데 닉은 몸에 딱 달라붙는 녹색 옷을
좋아하나보지? 그것도 그의 부하 전원이 다 똑같은 옷으로 몸을 아예 둘
렀네. 이봐요, 닉! 어제 나에게 무엇을 시키셨죠?
"죽일거야야야야야야야앗!"
아, 나는 알지요. 엘핀은 분명히 나에게 화살을 날렸어요. 두컨은 망치
를 휘둘렀지요. 하지만 그것은 당신들의 적이었던 윈덤의 경보병들을 해
치우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런 엘핀의 목을 한번에 잘라버리다니, 당신
은 나보다 칼이랑 더 친한가 봐요. 역시 푸른빛 검의 수호를 받기 때문인
가요?
"저, 저 녀석을 막아!"
"죽이면 안된다! 공격하지마!"
"모두! 죽인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악!"
시체에 내려 앉아 있던 매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
래, 머리 위에서 내려 꽃히는 벼락같은 저 발톱!
엘핀! 너의 복수를 해주마! 이 윈덤의 암살자들은 내가 해결할테니, 너
는 빨리 부대원들을 구하러 숲으로 뛰어!
그리고 돌아올 때, 영혼이 얽혀버린 두컨을 위해서 우둠나무 즙 달여오
는 것 잊지 마!
"으아우우우우우우!"
열려져 있는 대문으로 늑개들이 뛰어들어올 것만 같다. 순식간에 연병장
은 매와, 늑개들로 가득찬다.
이곳은, 밤의 사냥꾼의 땅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주인은 암흑박쥐다!
"늑개들을 죽여선 안된다! 매도 물론!"
"하, 하지만!"
"저런 느린 공격도 못 피해서 어떻게 베는 바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저 녀석의 퓨리즘이 풀릴때까지 피해만 다녀야 한다!"
아하, 퓨리즘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전사들 중에 가끔 극한상황
에 몰리거나, 하여튼 뭔가 머리가 돌아버릴 일이 있으면 보통 이상의 능
력을 발휘하면서 미쳐버린다는. 하지만 그것은 정말 심각한 상태의 미치
광이 전사들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들었는데?
이봐, 닉! 난 정상이라고! 나는 당신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
그 얇은 몸에, 피는 과연 몇 그릇이나 들어있는지를 말야.
"아아악!"
하지만 역시 부대 이름에 바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유를 알 것 같
다. 늑개고 매고, 나의 검이고 그들의 몸을 스치기조차 한 적이 없다. 아
니, 내가 지금 수련할 때가 아닌데.
"니이이이이익!"
그래, 나는 지금 한가하게 검술 연습 할 때가 아니다. 빨리 닉에게 가
서, 내게 내린 명령이 과연 엘핀의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먹는 것
인가를 알아봐야 한다. 시간이 없다. 빨리 엘핀에게 돌아가야 한다. 엘핀
은 개구멍에 있을 것이다.
"엘피이이이이인!"
늑개들도, 매들도 나를 뒤따라온다.
"저 녀석을 따라가! 숲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해라!"
하늘로부터는 매의 수호를 받고, 땅으로부터는 늑개들의 수호를 받는 나
는 밤의 사냥꾼.
늑개들의 등을 베고 잠들며, 매들의 발톱에 매달려 날개를 빌리는 나는
밤의 사냥꾼.
엘핀, 많이 기다렸지? 조금만 기다려. 내가 목을 붙이고 붕대를 감아줄
게. 잠깐만, 붕대를 어디에 뒀더라...
"... ..."
"...하지 마?"
엘핀의 눈이, 아무래도 나보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그의 입에서
흘러내린 핏자국도 상당히 아름답다.
목이 마르군.
엘핀의 먼지 얹은 얼굴을 들어올렸다. 손으로 툭툭 털어내니, 살아 생전
의 아름답고 곱던 피부가 나타나온다. 녀석, 어머니를 닮아서 남자 주제
에 피부는 두컨이 뽀뽀하려고 덤벼들 정도였지.
이제는 내가 뽀뽀해줄 차례로군. 그것도 진하게. 나는 엘핀의 입술에 입
술을 마주 대었다. 차갑다. 하지만 난 따뜻하게 해주는 방법을 안다. 난
이로, 엘핀의 입술을 가만히 깨물었다. 피는 항상 따뜻한 법이야.
내 혀를 조금씩 적셔주는 비릿한 향기가 풍겨온다.
그래, 바로 그 단검이야. 석양에 담궜다가 꺼낸 단검에 뭍어있는 윈덤
의 경보병 대장의 허벅지 피였어.
나의 갈증을 해결할 것은 그것이 아니었어. 나의 갈증을 해결하는 것은
엘핀이 손수 짠 우듬나무 즙이야.
큰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우듬나무 즙을 따르고, 두컨이 마시다가
푸읍 해버린 에브리데이 선데이 남은 것을 섞는다.
그래도 지금 이 피맛에는 따르지 못할걸?
"쭈웁..."
딥키스를 이렇게 하는 것이었던가? 잘 모르겠는걸. 어쨌든 지금 너무 기
분이 좋다. 갈증을 해결한다는 것은, 좋은 일인걸!
"끼잉..."
난 엘핀과의 마지막 키스를 훼방하는 늑개의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녀
석은 어느새 한쪽 무릎 꿇은 내 곁으로 와서 내 허벅지에 얼굴을 비벼대
고 있었다.
"어, 너구나."
밤색 눈의 녀석. 너는 너무 어려. 그럼에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이
유가 뭐니?
녀석은 붉은 혀를 내밀어 내 입주위를 핥아주었다. 간지러워!
"하핫, 그만해!"
난 녀석을 안고 땅바닥을 뒹굴었다. 질척한 것이 등에 뭍은 것 같다. 하
지만 그 향기마저 알싸하고 기분좋게 느껴진다.
당연하지, 사람의, 그것도 내가 사랑하고 증오하는 엘핀의 피인걸.
"하핫, 하하핫, 하하하하...하하..."
"닉 중대장님, 퓨리즘이 풀어진 것 같습니다."
"조금 있으면 잠들 것이다. 잠들면, 두컨이라는 사람이 누워있는 방에
데려다 놓도록.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