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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부요하신 주님
로마서 10:9-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성령강림 후 열두 번째 주일이다. 이젠 교회학교 여름행사를 잘 마쳤다. 여러분의 사랑과 응원에 감사드린다. 특히 전미미와 선미미들의 수고가 컸다. 연합 여름성경학교에 가보니 색동교회 선생님들이 모두 참석하여 크게 돋보였다.
마지막 여름 행사인 ‘시골 생활’은 사정상 어린이들이 모두 불참하여 하마터면 무산될 뻔하였다. 다행히 비록 하루로 일정은 축소했으나 모두 8명의 어른들이 동참하여 흐믓한 나들이가 되었다.
보은 이정호-김옥 집사님의 환대는 물론, 예정대로 성찬주 빚는 시범행사를 하여 매우 의미 있었다.
돌아오면서 ‘시골 생활’의 주인공 두 분의 넉넉한 마음과 부요한 삶의 태도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들하였다. 색동가족 모두 상상할만하고, 또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1)
오늘 제목은 ‘모두에게 부요하신 주님’이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부터 노년에게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부요하신 주님이시다.
수도자 안셀름 그륀은 ‘50가지 예수 모습’이란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인간의 얼굴을 부여하신 분이다”라고 하였다. 바로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바로 모두에게 부요하신 사랑의 모습이었다. 분명한 것은 바로 예수 안에 부요한 삶이 있다. 예수님은 스스로 풍성한 삶, 부요한 인생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로마서 9-11장은 사도 바울이 자기 백성 유대인을 향해 하는 말이다. 바울은 조상의 종교인 율법의 종교와 새로운 신앙인 믿음의 종교 사이에서 분명히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가 지닌 믿음의 부요함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먼저 자기 민족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율법에 열심이 있는가를 인정하였다. 유대인은 그 열심이 넘쳐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앞으로 달려가다가 오히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고 말았다.
유대인의 실패는 바로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롬 10:2)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노력은 열심이란 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멀리서만 찾았다고 안타까워하였다.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율법은 멀리 있어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입과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롬 10:8).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늘 ‘자기 의’를 고집하였다. 결국 잘못된 열심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르게 된 것이다.
율법은 모두 613개이다. 사실 누구든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그런데 유대교는 이런 율법 위에 더욱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웠다. 안식일 규정만 하더라도 결코 지킬 수 없는 세세한 의무규정을 만들어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훼손하였다.
이렇게 잘못된 지식은 더욱 상황을 그르치게 만들었다. 잘 알지 못하니 좋은 열심도 아무 소용이 없다. 신앙에는 지식이 있지만, 그 지식으로만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심리(心理)를 알아야 하고, 사물의 이치를 밝히려면 물리(物理)를 터득해야 하듯이, 영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얻으려면 영에 대한 원리인 영리(靈理)를 깨달아야 한다.
기본은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만약 앎이 없는 믿음은 의심이 다가올 때 흔들린다. 무조건적 믿음은 쉽게 믿음을 훼손할 수 있다. 과장된 믿음은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알지 못하면 용감하고, 무식하면 못할 일이 없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무지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다.
이제 바울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유대교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값없이 주시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행함으로 공적을 쌓으려고 한 까닭에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2)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죄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율법은 그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율법을 지키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사실 사람이 무슨 재주로 죄의 올무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왔다면, 그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길을 가야 한다. 인간의 길이 막혔다면, 이젠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가야 한다. 그 길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
장 칼뱅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첫 단계는 자신의 의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의를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존 브로크만이 쓴 <지난 2000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란 책이 있다. 여기에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121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인쇄술, 전기, 비행기, 컴퓨터, 인터넷 등이다.
놀랍게도 대단한 발명품 사이에 아주 보잘 것없는 물건이 하나 끼여있는데, 바로 지우개다. 지우개 때문에 인류의 기록문화가 극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우개가 없었으면 미술가, 시인, 음악가의 작품들이 현재와 같은 완성도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인 인간도 마찬가지다. 실수투성이인 인생을 하나님이 용서와 사랑으로 지워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죄의 얼룩과 저주로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우개는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새롭고, 아름다운 삶을 다시 살게 하는 지우개,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용서와 사랑의 지우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발견품이 될 것이다.
유대교는 이러한 지우개를 알지 못했다. 아니 보잘것없이 여겼다. 그들은 돌에 새긴 율법이란, 결코 지울 수 없는 열심을 추구했기에 자기 종교의 벽을 높이 쌓고, 자기 종교에 깊이 파묻히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수락하고, 은혜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내 삶을 하나님을 향해 여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기본이 되는 신앙고백을 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9).
그 내용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이고, 둘째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믿는 이라면 응당 예수님을 닮아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교가 본질에서 벗어나 타락할 때는 언제나 예수님의 삶에서 벗어날 때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교회라면 가장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닮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3)
‘모두에게 부요하신 주님’에서 본래 ‘주님’은 무슨 뜻일까? 신약성경에서 ‘주님’을 가리키는 헬라어는 ‘퀴리오스’이다. ‘퀴리오스’는 로마 황제를 부를 때 쓰는 공식 칭호이다. 또 헬라의 신들의 이름 앞에 붙이는 신적 명칭이다.
유대교 70인 역 헬라어 성경은 하나님의 히브리 이름 ‘여호와’를 ‘퀴리오스’로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가리켜 ‘퀴리오스’ 즉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황제나 다른 신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을 구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높고 위대한 자리를 예수님께 돌리는 사람이고, 그 앞에 순종과 경배를 드리는 사람이다. 곧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는 유일하신 분으로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일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과거에 살아나셨다는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것도 믿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관해서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신앙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알아봤지만, 그 분이 주님인 줄 알고 나서는 평생 나의 주님을 전하는 증인이 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입으로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유대인에게 율법이 아닌 다른 길을 가리켜 주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율법이 걸림돌이 되어 그들은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새로운 언약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난 주간 ‘톨레레게’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새 언약은 민족적인 차별이나 문화적인 차등을 두지 않는다. 모두에게 부요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온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출신이나, 신분이나, 국적이나, 직업이나, 어떤 것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에게 부요하시기 때문이다. 지난 주간 ‘바울 앤솔로지’ 말씀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사도 바울은 촉구합니. 하나님이 이렇게 부요하신 하나님의 선물을 주셨으니 너희 유대인은 완고한 율법주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옹졸하고 편협한 고집을 버리고, 부요한 믿음을 소유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요함’은 헬라어로 단지 규모가 풍성하다는 의미와 함께 ‘자비하다’와 ‘은혜롭다’의 뜻을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에게 부요하신 주님이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2).
사람에게는 두 개의 통장이 있다. 적금(積金)통장과 적심(積心)통장이다. 현금을 모으는 적금통장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담아 두는 적심통장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님은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고 하셨다. 역으로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도 있는 법이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의 통장이 있는가? 그 부요한 삶을 즐기면서 사는가?
사랑의 통장, 웃음의 통장, 이해의 통장, 봉사의 통장, 기쁨의 통장, 감사의 통장, 인내의 통장.. 그 부요함을 따진다면 적금통장은 적심통장과 결코 비교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을 담아 두는 적심통장은 참 부요함을 보장해 준다.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라. 나를 위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 들여라. 날마다 때마다 예수 이름을 부르며 삶을 긍정하라. 내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Yes’(예수)하고, ‘예술’(예수)하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믿음은 풍성한 생명을 얻고, 부요한 삶을 살게 하는 위대한 선물이다. 영리(靈理)의 핵심은 ‘마음으로 믿는 일’이다. 이것이 나를 구원한다.
하나님의 선물을 언제나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의 자녀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