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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조명
푸른 점 외 4편
정승화
충남 부여 출생. 2006년 「문학21」 등단. 시집 「무릎 시계」, 「꽃의 배꼽」. 제4회 「한국시인상」 수상.
자물통 하나로 지켜질까
잠군 후 바다에 던진다고 지켜질까
어느 날 물었지
목덜미의 푸른 점에 대해서.
사실 그것은 점이 아니야
이를테면 나비가 뺨을 통과하다 들킨
붓꽃의 비밀장소 같은 거야
또 한 때 붉은 기타 몸뚱이를 몰래 빠져나온
못된 악보의 푸른 상처지
가끔 그 비밀장소에서 푸른 상처와 입을 맞추곤 해
그리고 자물쇠를 채운 뒤 바다에 번져 버려
일종의 꽃잎 따기 놀이야
꽃잎 개수를 미리 세어 놓고
사랑한다 안 한다를 점치지
백발백중 사랑한다로 꽃잎은 장렬히 전사해
목덜미의 푸른 점을 보면서
풀어져 도망간 사랑을 이야기 하지
하지만 푸른 점이 목덜미를 물고 있는 한
진행 중인 거야
푸른 점은 흔적이 아니라 상처야
그 비밀장소에서 아직 붓꽃의 맥박소리가 들리거든
그 동안은 상처라고 불리는 거야
드디어 맥박소리 비밀장소를 빠져 나갈 때
그때 흔적이라고 말해주겠어
흔적은 마음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거든
뾰족한 겨울에 찔려 눈(雪)이 내리는 것처럼
화장(火葬)
무릎에서 물소리가 나지 않았다 맞지 않은 뼈들이 충돌하는 사이 촉수가 몰려들었다 무릎에 문고리를 달아 넣었다 물의 살이 말라가면서 다리를 절었다 붉은 물결은 혀와 입술, 손톱과 발톱까지 물들이고 이내 눈물로 쏟아졌다
엄마, 눈에서 검은 물이 나와
얘야 그래서 비스듬히 기울어진 눈을
맞추면 안 된단다 얼굴을 쓰다듬다보면
방향도 잃게 되지 그곳은 풍향계가 거꾸로
돈단다 그리고 시계가 거꾸로 서 있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물들이 손바닥으로 걸어 다니고 직립
보행은 하지 않는단다 모두 등판으로 걷지 때로
다정한 먼지로 가득 찬단다 그런데 얘야, 이제
그만 너의 목젖을 돌려주겠니
물의 살이 말라갔다 목이 서늘해지고 거꾸로 도는 풍향계가 보였다 사라졌다 끼익 쇳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절룩거리다 끼룩거리다 깃털 뽑힌 까마귀가 방향을 잃고 쏟아졌다 화장을 고치고 문을 다시 달았다
붉은 여자
콧등을 쓰다듬던 물 칸나는 더 붉어지고 그런 칸나의 등줄기로 숨어드는 저녁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여자, 초승달 뜨는 밤 눈썹을 베끼다 몰래 꽃의 신음을 본 날부터 연한 눈동자로 말귀를 알아듣는다 먼지만큼이나 가벼운 여름에 태어난 여자
말라가는 저녁 곰팡이가 핀다 발목 잘린 곰팡이가 자궁을 꺼내 놓고 번식 한다 서툰 이름을 지어 주고 쉽게 쉽게 먹혀버린 그늘의 부스러기, 폭염에 들뜬 혀를 들키지 않으려 단조로 인사를 건낸다
고장 난 밤을 고쳐드릴 게요
그 밤에는 장맛비 대신 폭설이 내리죠
먹구름을 박박 문질러도 끝내 멀쩡한 구름은 돌아오지 않아요
먼지보다 가벼운 여자가 먹어 치웠거든요
그 후로 배가 부르기 시작했어요
의사가 고칠 수 없는 숲을 지나 지네발만큼이나
여러 개의 구멍을 가진
외나무다리를 건너 신선도를 알 수 없는 의자에 앉았지요
옷은 입지 않았어요
중지에 힘을 주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4B연필을 쥔 남자를 향해 다리를 꼬고 있어요
어떤 증상인지 자꾸 머리가 붉어지고 허리가 가늘어지기 시작했죠
그리고는 다리가 하나로 달라붙기 시작했어요
손이 사라지고 목이 사라지고 다리가 사라지고
짧은 머리와 기다란 몸뚱이와 갈라진 혀만 남기고 사라졌어요
허물을 벗고 양면거울을 들여다보는 물오른 여자, 비늘 하나에 별 하나씩 감추고 반짝이는 여자, 물렁한 뼈를 움직이며 물 칸나 곁에 누워 흐른다 연한 눈동자를 오래 들여다보며 잠깐 꽃치마를 입었었던 붉은 여자
키스
- 구스타프 클림트
벚꽃에 가만히 스며들면 나비 발목이 만져진다
그 종아리를 지날 때 입술자국이 흐릿하게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어지럼증을 느끼다가
잠든 날, 종일 발바닥에 묻은 꽃가루에
눈을 다치고 발이 푹푹 빠졌다
푹푹 빠진 발을 묶어 두고 깊게 간섭한다
벚꽃과 나비 발목이 오래 한 몸으로 잠드는 걸
지켜보며 태몽을 꾼다 말랑한 눈동자끼리
뒹굴자 풀섶 강물은 4분의 3박자로 흐르고
나비 발목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튼튼해졌다
로빈새 눈동자를 닮지 않은 분홍돌고래,
태몽은 아직 탯줄을 자르지 못하고 떠나온 땅,
그래서 아직 고래에 속한다 숱한 꽃의 배꼽을
통과한 나비의 말랑한 발자취, 훔쳤던 노래를
다시 태내에 돌려준다 노래를 부르다 발등을 밟고
일어선다 걷다가 뛰다가 조금씩 숨이 차오르다
날았다 구겨진 꼬리를 다림질하는 잠의 바닥
저녁이 순식간에 덮치자 가만 가라앉은 별빛이
강가를 떠돌았다 빛이 닿는 곳마다
잠 부스러기가 떨어지다 제 몸의 무게로
몰려다니며 체형을 바꾼다 체형을 바꾸는 일은
눈 안의 수분을 덜어낸다 분홍고래 지문,
그 지문에서 흘러나온 땅을 밟으며 마른 눈이
팽팽해진다 팽팽한 눈을 문지르자 피득 피득 입이
지워진다 시선을 빼앗긴 동공이라던가 동공을 핥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읽는 봄밤,
마술피리
마술피리를 불어줘요
가시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입안이 헐어요
꽃의 혈관에 지쳐 쓰러진 가여운 작은새를
위해 사탕 같은 노래를 불러줘요
눈동자 속에 감춰둔 낙서가 보이도록
빛나는 날에 휘파람을 불었고
뜨거워진 이마 안쪽에 가여운 작은 새를 풀어 놨어요
마지막 꽃대궁에 매달린 민들레홀씨처럼
혼자서 성냥을 그어 촛불을 켜던 날
탱자나 무꽃은 쌀 튀밥처럼 가시의 행간에서
저절로 부풀어 올랐고
접혀진 모서리에서 잠시 발목을 말리고 있어요
안쪽 문으로 들어오세요
가시의 바깥은 위험해요
리본을 달아 놓을게요
잠시 새들은 침착하고 탱자꽃 잠든 사이
아무도 모르는 음표 하나 가져다 놓을 게요
피리소리에 맞춰 발목을 움직여 봐요
제 그림자에 놀란 고양이처럼 움직이는 거예요
달의 뒤편이라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 어서 오세요
햇살이 차곡차곡 퍼지기 전에
입안이 다 헐어지기 전에
접혀진 바람의 모서리가 펴지기 전에
빛을 가두다 외 4편
정승화
빛이 네모 안에 갇힌다
밖에서 잠긴 문처럼 어둡다
어떤 밤은 잘 써진 문장처럼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고
허상에서 출발한 내면이 되었다
쓸데없는 허기가 내린 지난밤의 충돌은
어떤 향기도 지닌 적 없는
밤에게 돌아가고자 했던 달빛의 순한 숨소리였다
다음 장면이 준비되었다
암전이 내린 오래 전의 질문과 밤의 풍경은
어느 새 조금씩 서로의 틈을 내어 주면서 나뉘고 있었다
작은 사선의 돌멩이도 짐승의 털가죽 하나로
겨울이 온전했던 동굴에서 더 짙어지는
천일 전의 내면은 찍히지 않는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더 이상 다른 풍경이 담기지 않았다
그래서 비슷한 다른 막도 없다
발견되지 않거나 발견될 수 없었던 어제들은
허상이 주는 존재하지 않은 특별함이다
살갗에 박힌 점 하나는
밤이 놀다 잊어버린 어둠의 조각,
그 점을 보면서 그 밤을 회상할 수 있는 아침은
읽다 만 페이지를 남겨 두고 있었다
떠나 온 곳은 알지만 돌아갈 곳을 정하지 않은
미지의 계획이 두근거릴 때 지난 분침에
무어라 말을 걸어 보는 향기를 얻고
검은 여행자를 불러 들였다
허상이 주는 허상, 쓸데없이 뺨이 붉어진다 밤의 한가운데에서.
어떤 열락
처음, 저절로 오는 저녁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들이 닥칠 열락(悅樂)이 되었다 유일하게 부린 욕심이었다 마치 오래 숨겨둔 고인 숨결을 고백하듯 저절로의 순간을 자백했다
호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의 칼날처럼 거침없이 열락의 들숨과 합류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온 듯 한 밤이 너무나 어두워서 두 개의 눈을 별처럼 지켜 세우고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깜박거리는 속눈썹은 이끼 같은 뒷모습까지 일일이 챙겨 두었다
때로 우울이 따스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인사, 밤을 훌쩍 뛰어 넘은 시차 반대편에서의 기다림, 새로운 열락이 되었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건드린 문장이 건드릴 내일이 열락의 반대말이 되어 밀폐된 문장안에 갇혀 도망치는 새의 발목을 보았다 그 새는 부드러움을 가장한 가장 앙칼진 목소리를 가졌다 또한
대지에 오래 서 있을 수 없어 날개를 가졌다 끌어 올린 말을 허공에 뿌리기 위해 오래 날았다 그리고 종려나무 위에 가라앉았다 그것이 새의 열락, 나무는 수염을 기르고 신발은 신지 않았다
묶이다 는 땅의 소속이고 나무는 자신의 중심을 그 아래 숨겨 두었다 나무에 세 들어 사는 새가 아니면 저절로 오는 저녁의 자백을 들을 수 없고 쉽게 들키지 않는 심장이 뱉은 농담(濃淡)의 무늬를 몸에 새길 수 없다
끌어안은 문장을 혀끝에 퍼 올린다 출발이다 서툰 문장이 서걱거리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다 그러나 신기루 같은 대답이 들려올까 잔뜩 긴장했다
말대꾸는 암전이다 어쩌면 지나가는 행인 1이나 2, 확대된 동공만 소란스럽다 다정하거나 상냥한 얼룩은 늘 나중에 오는 까닭에 자전하는 주어를 품고 공전하는 열락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장미와 선셋
새벽녘, 몰살당했던 밤이 다시 어둠을 해산하는 늦은 오후,빈틈없이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옆선이 허벅지까지 아슬하게 트인 롱스커트를 입은 여자를 덩굴장미 몸을 기댄 담장 아래로 불러낸다
행방이 묘연한, 가려운 내일을 긴 손톱으로 줄을 내어 긁어대는 여자는 친절하게 부릅뜬 서쪽의 별 같은 소리를 지른다
선셋, 뜻밖의 목울대를 가졌다 밤을 무릎 위에 앉히고 흥분하는 속눈썹 사이로 다 벗은 어둠을 훔쳐보며 장미가 품었던 낮 동안의 밝음을 우아하게 지르밟는다 그리고
우린 절찬연애 중이예요
장미가 내 입술에 풀어 놓은
황홀한 노을을 좀 보세요
장미를 끌어안을 동안
가시는 내 혈관을 빨고 있어요
그리고는 어둠과 붉음을 섞어
조용히 사라지는 거예요
내 이름 속으로 말예요
내 이름은 선셋이라니까요
세 발짝 떨어져 있던 여자가 담장을 넘어 장미의 붉음을 훔칠 때 초록을 움켜쥔 가시는 끝내 빨아들인 혈관은 내놓지 않았다
어둠이 싫어요
여자에게 빨아들인 혈관엔 별이 있어요
밤 동안 그 별에게 빨대를 꽂고
빛을 빨아올릴 거예요
꺾인 달처럼 창백해질 때까지요
우린 결코 절찬연애 중이 아니예요
원나잇이죠 다만 그것을 매일한다는 게 포인트예요
마지막 장미는 건방진 말을 뱉었다
선셋, 당신은 오늘도 직선으로 죽을 테고
어둠 곁에선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나와는 다르게 말예요
당신의 드러난 허벅지는 내일까지 기억할 게요
그리고 그 롱스커트는 내가 보관하겠어요
당신인 척 미행하고 싶은
세레나데가 있거든요
밤을 앉혔던 무릎은 미궁에 빠졌다 밤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바깥
- 꿈
점령당한 고백이 시든 꽃으로 꽃병에 꽂힐 때 가위에 잘린 꿈들은 잠의 바깥에 서 있다
어제 꽃이 흘린 핏기 없는 한숨은 몸을 보인 적 없는 바람보다 빨리열병을 앓는다 뒤를 지우고 앞으로만 걷는 뜨거운 침묵을 읽는다 그 침묵 안 문장은 `꿈의 마침표를 던져라` 왼쪽 눈에 새벽의 눈빛을 새긴 모종(某種)의 바람이 분다
가질 수 없지만 처음부터 내 것인 것, 본 적이 없지만 사랑한 것, 온 적 없지만 떠난 것, 조각난 꿈들이 쌓여 있는 곳, 그 잠이 날마다 나를 낳으며 붉은 왕관을 쓰고 있었다 문은 아직 닫히지 않은 채였다
그 사이에서 빠져나온 수취인 불명의 편지는 결국 오지 않았다 누구나 다 거쳤던 몽고반점 같은 상처를 안고 몇 번쯤 나쁜 꿈을 꾼 날처럼 울다 깨기를 반복했다 그 잘린 꿈의 바깥을 꽃물이라 불렀다 눈뜬 안녕이 수면의 통로를 건넌다
심장에 들다
당신의 짙푸른 심장을 들어야겠어요
심장은 오랫동안 혀를 다듬었을 거예요
그늘 속에 감춰 둔 당신의 그림자는 내가 가져갈게요
그늘과 그림자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당신의 닭볏을 같은 무게가 알려줬어요
내게로 와요
나는 12월 오후 4시경의 햇살처럼 은밀하고 자작해요
그림자를 숨겨 두기 딱 좋은 룩스 값을 가졌거든요
그곳의 밝기는 위로가 앉았다 일어난 자리처럼 포근해요
내 말을 믿어도 좋아요
떠난 문장이 남긴 마지막 온기 같은 거죠
비포장도로의 먼지 같은 포옹으로 사로잡지 않을 거예요
누설되지 않은 신의 언어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동공을 보호하겠어요
포장지는 필요 없어요 틀림없어요
먹다 남은 오후 같은 날들은 여기서 접자니까요
간이역에 핀 봉숭아 닮은 날에 당신을 내게 던져서 가라앉혀요
아름다운 날의 절반이 건너 갈 거예요
그러면
내 심장에 세워 둔 문장들이 몸을 일으켜
당신의 심장을 칭칭 감고 꽃을 피워대겠죠
내가 막 낳은 튼튼한 새벽을 지나 꽃비 날리는
오후에 당신의 심장을 들춰줘요 부디
척박한 땅에서 자란 나무처럼 질긴 사랑을 줄게요
손가락 끝에 아직 잠들어 있는 문장들을 삼키며
꽃의 곁에서 죽은 나비처럼 완벽해질 거예요
어지럼증은 억지로 구겨 넣은 종이처럼 수많은
면에 가둬두고 당신의 유일한 구멍에 빠뜨려 달란 말이지요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정승화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을 들여다봄과 동시에 타자에게 공통된 질문을 던져 그 답을 이끌어내고 제시하는일이다. 나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왜 쓰려하는가 어떤 시를 쓰려하는가. 저항과 소통의 분배는 공평한가. 시의 기능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시인은 시를 왜 써야 하고 시의 쓰임새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시의 목적은 타자에게 말 걸기이며 시는 한사람으로 출발해 다수에게 희망과 파괴의 힘을 주고 질서와 부정을 야기하며 꺾기지 않는 의지를 심어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는 공범자를 만드는 까닭이다. 미사여구를 통해 신랄한 비판과 신랄한 비판 속에 오염되지 않은 위로를 동시에 주면서 적인지 동지인지 애매한 판단력으로는 함정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그러므로 시인은 시대적 배경 또한 제대로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어둠에 휩싸여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지 몰라 두려워하는 타자의 상처에 기꺼이 동참하여 아직 내일이 남아 있는 그들 존재 가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깨달음을 주어야 한다. 정제된 절박한 희망을 발견하고 아직 상처 받지 않은 내면을 찾아내어 자신만의 꽃대를 세워 봉오리를 피어내도록 인도해야 한다. 어떤 시대에서든지 시의 위로는 생존에 대한 죽음의 대비책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의 주인은 타자가 되어야 한다. 장석주 시인이 말한 절망이 깊어 더 이상 절망할 수 없을 때 희망은 온다`라는 문장을 굳이 인용하여 말하자면 시인은 세상의 절망과 가장 근접한 자리로 내려가 생명이 깃든 문장으로 자신을 치유하면서 나로부터 시작된 극복의 감동을 타자에게 환원시켜 희망을 향해 걸음을 뗄 수 있도록 잠복된 용기를 줘야 한다. 사랑을 모르는, 절망을 모르는, 이별을 모르는 손끝에서 나오는 문장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시인은 지독히 앓아내야 한다. 혹시 아는가. 절망을 거둬낸 그 한사람이 세상을 변혁시킬지……
좋은 시는 좋은 시를 텍스트 삼아 여러 번의 모방을 통해 모반이 이뤄질 때 탄생한다. 그 때 쓰고자 하는 사물이 지닌 고유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시인의 내면을 소실시켜 사물을 통해 얻는 특별한 의미가 설득력을 발휘할 때, 시는 비로소 소통이고 항쟁이며 가장 극적인 낭만을 연출할 수 있다 이때 어떤 상징적 사물을 내세워 설득하는 사이의 여백은 춤이고 노래이다.
어떠한 자체적 노력을 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일단은 직접적 체험을 권유하고 싶다 여행은 혼자서 떠나는 것이 좋고 미술관 가기, 공연보기, 책읽기, 내면 들여다보기, 사물관찰하기, 그리고 남의 시를 패러디 해 보기를 들 수 있겠다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반복해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손은 몸 밖에 나와 있는 뇌`라고 말했다 어느 순간 손이 저절로 시를 쓰는 체험을 하게 될 때 쯤 시인이 의도하는 대로 타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시에 원칙은 없지만 주관성에서 출발하여 객관성을 끝마무리에서 획득해야 한다. 그리하여 타자로 하여금 시의 내면에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는 그리고 수동에서 능동적으로 삶과 죽음을 발견해 낼 수 있는 시라고 말하고 싶다 의식의 흐름이 되새김질 되는 시를 만들어낼 수 있을 때 역시 글쟁이에서 시인이란 명찰을 달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여전히 어렵고 나는 아직도 시를 잘 모른다.
은유의 도도한 신경망, 애매성
—
이동희
시인, 문학박사.
*몇몇 문우들과 기차여행을 하며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방담을 하다가, 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남녀 문인들이 어울려 하는 여행이니, 심각한 탐구보다는 그저 지나가는 말로, 혹은 농담 섞인 정의로 시를 난도질하거나, 혹은 시의 무용성 - 무력함에 대하여 자괴적인 정의들을 남발하는 그런 자리였다.
그러다 필자도 대책 없이 그 대화에 끼어든다는 것이, 어쩌다 그랬다. “문학은 거짓말이지, 뭐 대수겠어!” 그래 놓고도 아차 싶었다. 이 무책임한 방담의 자리에서 어쩌자고 그런 무모한 말을 던진단 말인가? 내 발등을 이미 내가 찧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여류시인이 내 말이 십리도 가기 전에 말고삐를 낚아채고 나섰다. “그건 아니지요, 거짓말은 아니다, 뭐!” 이제는 수습이고 뭐고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문학개론서의 첫 페이지를 보여줄 수도 없고, ‘허구적 진실’이네 뭐네 하면서 내달리는 말에 재갈을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달리는 기차 바퀴의 소음에 내 말이 묻히기를 기다리며 얼버무렸던 기억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나를 들쑤시곤 한다. 참말과 거짓말, 참말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거짓말, 혹은 거짓말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 참말 같은 거짓말, 거짓말 같은 참말……. ‘거짓말’ 대신에 ‘허구(虛構)’네, ‘픽션(fiction)’이네 하며 귀에 익은 말발을 띄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며 씁쓸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진실인 무(無) 앞에서 이 영광스러운 거짓말들을 선언하면서, 나는 물질의 그 광경을 내게 부여하고 싶소. 이러한 것이 내 서정적 책자의 설계도이며 아마도 그 제목은 ‘거짓의 영광’ 아니면 ‘영광스러운 거짓’이 될 거요.> - (오정국 『현대시 창작시론』 에서)
이 글은 1866년 말라르메가 카잘리스에게 보낸 편지글의 일부이다. 말라르메는 「에로디아드」를 집필하면서 시어와 본질을 집요하게 탐문했는데, 그 결과 ‘무(無)’와 ‘공허(空虛)’라는 두 개의 심연 같은 절망에 빠진다. 결국 말라르메는 언어를 통해 바라보는 현실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 공허 속에 완벽한 형태의 본질이 숨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이 할 일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시의 형태로 바꾸어 기술하는 단순한 운문 작가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봤다. 말라르메는 ‘절대 진리’ 앞에서 ‘영광스러운 거짓말’을 시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난해함’을 지니고 있으며, 그는 고의적으로 이해되고 해명되는 시를 거부했다. 시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전달하기보다 작품 고유의 다의성(多義性)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시를 쓰는 ‘정신의 순수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애매성(曖昧性 - ambiguity)은 시에 내린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했다. 시의 난해성이 바로 이 애매성에서 비롯한다고 하면서, 흔히 듣는 독자들의 불만이 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이다.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의미만 지시하도록 동원된다면 시의 난해성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의 형태를 지닌 것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흔히 대중가요의 가사가 그렇다. 직정적이고, 단순 간결하며, 감정을 토로하는 언사는 필연코 난해성의 그것과는 한참 거리를 둔 형식이다. 대중가요-유행가가 담고 있을 대중적 공감의 가치를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난해성만을 대상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더구나 시가 쉽게 읽히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인 애매성으로 시를 모호한 말장난의 수준으로 평가 절하하기도 하는 것이 시를 대하는 일반 독자들의 대세다. 그러나 시에 애매성이 없다면, 그래서 시가 궁극적으로 다의성의 산물이라는 지향성을 외면한다면, 시정신의 순수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들은 하나의 시어에, 한 행의 시구에, 한 절의 시연에 ‘정신의 순수성’을 집약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코 ‘다의성’의 숲을 조성하려 애쓰는 것이다.
** 정승화의 시들을 통독하면서 이런 - [정신의 순수성을 집약하기 위해서 다의성의 숲에 들었다] - 는 생각은 더욱 깊어갔다. 스스로 내놓은 <대표작>과, <신작>이라며 선보인 작품들, 그리고 그의 시집 『무릎시계』와 『꽃의 배꼽』을 대하면서, 이 시인이 시정신의 본질인 ‘다의성’에 충실히 바탕을 깔고 있으며, 그런 맥락을 통해서 그윽한 시세계의 숲을 조성하려 한다는 점을 직관할 수 있었다. 그러자니 자연스럽게 그의 시들은 애매성( ambiguity)의 숲에서 헤매는 듯했으며, 그러자니 그의 시에 드러나는 난해한 표정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의 길에 제대로 들어선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난해한 시를 대하는 눈길은 기본적으로 두 갈래라고 본다. 하나는 시인 자신이 숨겨놓은 다의성의 세계이며, 또 하나는 독자의 체험이 그 다의성의 숲에서 길을 잃고 있는 경우일 것이다. 앞의 길은 시의 본질로 볼 때 필연적 결과이며, 뒤의 길은 독자가 시를 받아들이기에는 체험이 빈곤한 데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복잡하고 헛갈리는 숲길이라 할지라도, 들어가는 길에 세워진 표지판과 나가는 길을 암시하는 방향표만 잘 따라간다면 숲에서 길을 잃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하긴 어떤 시인은 시의 난해함을 꼬집는 독자가 시의 해설을 요구하자, 이렇게 대답했다지 않는가. “이 시를 쓸 때는 나와 하느님만 알았는데, 지금은 하나님만 알고 있다.”
시의 애매함도 그렇다. 무슨 난센스 퀴즈풀이도 아니고, 무슨 암호를 해독하듯 대하는 것도 시를 감상하는 태도는 더구나 아니다. 시가 보여주는 애매함과 모호함의 행간에는 반드시 시인이 숨겨 놓은 미학의 단서가 있기 마련이다. 아니 시인이 숨겨두었다기보다는 시어의 행간이 스스로 미학의 미로를 만들어나가는 형국이 바로 시가 의도하는 표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완성된 한 편의 시는 시인 정신의 집합체이자, 시정신의 에센스가 농축된 세계다. 정승화 시의 표정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시를 읽는 즐거움이다. 이것을 제대로 발견하고, 발견된 미학의 실체에 공감하는 독자들은 시가 장치해둔 애매성의 미로 찾기에서 쾌재를 부를 것이며, 미학의 실체 찾기에 실패한 독자들은 시의 난해성을 탓하며, [시 읽기의] 출구전략에 골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시의 운명이자, 시인의 처지이며, 독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를테면 다음 작품에 마련된 [시의] 숲길을 함께 탐색해 보자니 그렇다. 앞에서 언급했던 다의성을 미학적 단서-표현의 함축미를 통해서 어떻게 시정신이 다의성의 세계를 무성한 숲으로 만들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혹은 더 나아가 미학의 즐거움에 공감할 수도 있었다.
자물통 하나로 지켜질까
잠근 후 바다에 던진다고 지켜질까
어느 날 물었지
목덜미의 푸른 점에 대해서.
사실 그것은 점이 아니야
이를테면 나비가 뺨을 통과하다 들킨
붓꽃의 비밀장소 같은 거야
또 한 때 붉은 기타 몸뚱이를 몰래 빠져나온
못된 악보의 푸른 상처지
가끔 그 비밀장소에서 푸른 상처와 입을 맞추곤 해
그리고 자물쇠를 채운 뒤 바다에 던져 버려
일종의 꽃잎 따기 놀이야
꽃잎 개수를 미리 세어 놓고
사랑한다 안 한다를 점치지
백발백중 사랑한다로 꽃잎은 장렬히 전사해
목덜미의 푸른 점을 보면서
풀어져 도망간 사랑을 이야기 하지
하지만 푸른 점이 목덜미를 물고 있는 한
진행 중인 거야
푸른 점은 흔적이 아니라 상처야
그 비밀장소에서 아직 붓꽃의 맥박소리가 들리거든
그 동안은 상처라고 불리는 거야
드디어 맥박소리 비밀장소를 빠져 나갈 때
그때 흔적이라고 말해주겠어
흔적은 마음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거든
뾰족한 겨울에 찔려 눈雪이 내리는 것처럼
- 정승화 「푸른 점」 전문
이 작품의 서사적 맥락은 명확하다. 시의 입구에 세워둔 표지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서울 남산이나, 청춘남녀가 많이 방문하는 관광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다. 청춘 남녀가 서로 사랑을 약속하며, 그 징표 혹은 서약을 적은 쪽지 [기록한 메시지가 없다 해도, ‘자물쇠’ 자체가 이미 맹약한 메시지에 대한 불변의 상징물이 된다]를 붙인 자물통을 난간에 채워두고는 그 열쇠를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 [바다]에 던지는 일이다.
‘다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맹약을 해제할-사랑의 맹세를 깨뜨릴-잠군 언약을 열 수 있는 수단 [열쇠]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행위다. 열쇠 [변절의 수단]이 없으니, 자물쇠는 열 수 없고, 그러니 우리 사랑의 약속 또한 깨뜨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자물쇠-열쇠’에 담아 두는 것이다.
이때 청춘 남녀의 순결한 사랑의 약속을 하찮은 쇠붙이에 얹어서 기대하느냐고 힐난하지는 말자. 얼마나 자주, 얼마나 쉽게, 얼마나 식은 죽 먹듯이 깨뜨려지고 있으면 쇠붙이에 기대어 지키려 하겠느냐고, 오히려 결의를 지지해 주자. 하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그 말뿐이다.”고 했겠는가? 그러므로 깨드려질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랑의 약속을 단단히 지키려는 청춘 남녀의 순결한 행위로 보아 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행위가 지니고 있을, 사람의 내밀하고 깊은 곳[심연]에 잠재되어 있을 마음결에 대한 다의적인 해석이요 그림이 바로 이 작품이다. 시를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가는 필자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참 한심한 짓거리를 하고 있구나!’ 자책하는 심정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아니고서는 이 작품이 마련하고 있는 다양성의 숲에서 헤쳐 나올 수 없기에 하는 노릇이다.
필자의 진술이 좀 비켜나가는 것 같지만, 불가(佛家)의 관점으로 보면, 지혜를 얻는 방법은 직관(直觀)이거나 분석(分析)이다. 분석이야 동원할 수 있는 온갖 자료 [특히, 언어]를 총동원해서 나누고 가르고 찢고 바수어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 보이는 방법-즉 객관적 방법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에 좋다. 그러나 직관은 그렇지 않다. 사유(思惟) - [언어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극히 주관적인 터득이며, 또한 그렇게 깨달은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언어화하기가 매우 난감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미학의 길은 분석적 방법이 아니라, 바로 직관의 세계인 것을 … ! 이렇게 직관하는 방법으로 이 시에 다가가면 매우 다양한 숲길에 놓인 다채로움이 우리를 황홀하게 한다.
‘목덜미의 푸른 점’에 대한 비밀이다. 시적 화자 스스로도 같은 맥락에서 부정하기를, “사실 그건 점이 아니야/ 이를테면 나비가 뺨을 통과하다 들킨/ 붓꽃의 비밀 장소 같은 거야”라고 에둘러 독자의 시선을 돌려놓는다. 혹은 “한 때 붉은 기타 몸뚱이를 몰래 빠져나온/ 못된 악보의 푸른 상처지”라고 첨언하기도 잊지 않는다.
절묘한 사랑의 흔적 남기기이며, 기발한 관능의 미학이다. 아마도 [틀림없이] 이 시를 착상하고 시상을 다듬을 무렵에 시인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화 <키스>를 감상하고 있었을 것이다.(바로 이어서 이 작품에 대해서도 언급하겠다)사랑의 언약을 다시는 풀 수 없는 자물쇠에 채워두는 행위와 사랑의 격정에 휩싸인 남녀가 관능의 절정에서 몸부림치며 풀어내는 환희의 순간을 포착한 클림트의 그림 [키스]와 정승화의 시 [키스]가 필자의 감상의 심연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연인의 목덜미에 사랑의 흔적 [kiss mark]을 남기는 행위나, 연인들이 사랑의 맹세 [자물쇠]를 채우는 행위는 결코 다르지도 않으며, 결코 생소하지도 않다. 그러니 ‘나비가 통과하다 들킨’ 흔적이며, 붉은 기타 몸뚱이를 빠져나온 ‘못된 악보’의 푸른 상처가 되고 만다.
‘사랑’이라는 추상의 개념을, 그 무엇으로도 드러내 보여줄 수도 없고, 그 어떤 방법으로도 손에 쥐어 줄 수 없는 ‘사랑’의 격정을 이 시의 화자는 ‘연인의 목덜미에 자물쇠’를 채우는 방법으로 그녀내고 있다. 시가 아니고서, 시가 지닌 애매성과 다의성의 숲이 아니고서 어디에서 이렇게 통합된 미학의 세계를 추체험할 수 있을까, 추상의 관념 세계에서 주저하고 있을 ‘사랑’을 음악의 세계로, 혹은 회화의 시법으로 독자들의 미감에 들려주고 [청각] 보여주며 [시각] 이를 형상화한다. 정승화 시가 지니고 있는 미학적 매력이며 시를 읽는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클림트의 그림처럼] 연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는 행위나, [정승화의 시처럼] 사랑의 언약을 자물쇠 채우는 일은 다르면서 - 다르지 않다. 사랑의 행위가 그런 것이며, 삶의 진리가 그런 것이다. 목덜미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는 연인의 팔이 도무지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언제나 사랑은 “일종의 꽃잎 따기 놀이” 아닌 것이 없다. 우선은, 사랑의 열정이 쇠붙이마저 뜨겁게 달굴 때까지는 “백발백중 사랑한다로 꽃잎은 장렬히 전사”하고야 말겠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렇다. 자물쇠에 채운 사랑의 언약은, 그것을 풀어헤칠 수 없는 열쇠마저 바다에 던져버린 사랑의 맹세는 ‘푸른 점’ 같은 상처 [흔적]을 남기고 “뾰족한 겨울에 찔려 눈(雪)이 내리는 것처럼” 흘려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그렇다. 변하지 않을 사랑을 언약하며 당최 자물쇠를 채우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사랑의 상처 [푸른 점]마저 내 보일 수 있는 시정신의 맥박소리를 소중히 챙기면서 삶의 전선에 내리는 차가운 눈물-혹은 겨울을 음미해 보자는 것이다. 애매하고 난해한 듯하지만, 그가 조성한 다의성의 숲에서 바라보면 사랑이 이렇게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것임을 새삼스럽게 음미하는 일은 소중하다.
***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작품 「키스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렇게 전개된다.
벚꽃에 가만히 스며들면 나비 발목이 만져진다 그 종아리를 지날 때 입술자국이 흐릿하게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어지럼증을 느끼다가 잠든 날, 종일 발바닥에 묻은 꽃가루에 눈을 다치고 발이 푹푹 빠졌다
푹푹 빠진 발을 묶어 두고 깊게 간섭한다 벚꽃과 나비 발목이 오래 한 몸으로 잠드는 걸 지켜보며 태몽을 꾼다 말랑한 눈동자끼리 뒹굴자 풀섶 강물은 4분의 3박자로 흐르고 나비 발목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튼튼해졌다
로빈새 눈동자를 닮지 않은 분홍돌고래, 태몽은 아직 탯줄을 자르지 못하고 떠나온 땅, 그래서 아직 고래에 속한다 숱한 꽃의 배꼽을 통과한 나비의 말랑한 발자취, 훔쳤던 노래를 다시 태내에 돌려준다 노래를 부르다 발등을 밟고 일어선다 걷다가 뛰다가 조금씩 숨이 차오르다 날았다 구겨진 꼬리를 다림질하는 잠의 바닥
저녁이 순식간에 덮치자 가만 가라앉은 별빛이 강가를 떠돌았다 빛이 닿는 곳마다 잠 부스러기가 떨어지다 제 몸의 무게로 몰려다니며 체형을 바꾼다 체형을 바꾸는 일은 눈 안의 수분을 덜어낸다 분홍고래 지문, 그 지문에서 흘러나온 땅을 밟으며 마른 눈이 팽팽해진다 팽팽한 눈을 문지르자 피득 피득 입이 지워진다 시선을 빼앗긴 동공이라던가 동공을 핥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읽는 봄밤,
- 정승화 「키스 - 구스타프 클림트」 전문
이 작품에서 결구는 “클림트의 키스를 읽는 봄밤,”으로 마치고 있다. 그러나 이 말-[결구, 마쳤다]는 필자의 진술은 틀렸다. 왜냐하면 이 시는 [쉼표-,]로 종지부 [마침표-.]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직 시적 진술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며, 아직 할 이야기가 있다는 암시이며, 아직 읽어야 할 대목이 더 남아 있다는 의도를 그렇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줄임표[……]라면 또 모르겠다. 할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일단 여기에서 줄이겠다는 글쓴이의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키스’라는 사랑의 행위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은, 봄밤의 훈풍 속에서라면 짐작하지 못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봄은 가을과는 다른 계절이다. 더구나 ‘밤’이라 하지 않는가?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 ‘봄’이며, 그 봄의 정서가 가장 농밀한 시간대가 바로 ‘밤’이기 때문이다. 봄밤은 그러니까 생명이 비로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때이며, 사랑이 무르익는 계절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은 산문적 행태를 지니고 있다. 4연으로 구성된 자유시의 태(態)에 산문정신을 개입시키려는 의도가 잘 함축되어 있다. 산문시의 핵심은 미당(未堂)선생도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처럼 ‘언어의 대표량’(서정주 『시창작론』)을 시적 진술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언어의 대표량이란 언어 [시어]의 효과적인 구성을 통해서 정서나 사상의 보편화, 일반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작품 「키스」는 앞에서 지적한 시적 진술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비록 산문의 태를 지녔지만, 언어 배치의 묘를 통해서 난해성의 난제를 독자 스스로 극복하도록 인도하고 있으며, 애매성의 숲에서 미학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어느 대목을 잘라서 독립시켜도 ‘키스’를 통한 관능적인 성애(性愛)의 극치를 온건하고 개성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보편성의 획득이야말로 시가 영속될 수 있는 불가결의 요소가 아니던가!
그렇게 예가 될 만한 표현들을 무작위로 인용해도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키스’라는 사랑의 행위, 그 사랑의 절정을 형상화한 클림트의 회화의 세계,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 [보편화 - 일반화]할 수 있는 키스의 정감이 비로소 시적 진술을 통해서 인식 [공감각]의 대성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 벚꽃에 가만히 스며들면 나비 발목
- 그 종아리를 지날 때 입술자국이 흐릿하게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 종일 발바닥에 묻은 꽃가루에 눈을 다치고 발이 푹푹 빠졌다
- 푹푹 빠진 발을 묶어 두고 깊게 간섭한다
- 벚꽃과 나비 발목이 오래 한 몸으로 잠드는 걸 지켜보며 태몽을 꾼다
- 말랑한 눈동자끼리 뒹굴자 풀섶 강물은 4분의 3박자로 흐르고
- 나비 발목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튼튼해졌다
- 태몽은 아직 탯줄을 자르지 못하고 떠나온 땅,
- 숱한 꽃의 배꼽을 통과한 나비의 말랑한 발자취
- 훔쳤던 노래를 다시 태내에 돌려준다
- 노래를 부르다 발등을 밟고 일어선다
- 구겨진 꼬리를 다림질하는 잠의 바닥
- 저녁이 순식간에 덮치자 가만 가라앉은 별빛이 강가를 떠돌았다
- 빛이 닿는 곳마다 잠 부스러기가 떨어지다
-체형을 바꾸는 일은 눈 안의 수분을 덜어낸다
- 분홍고래 지문
- 팽팽한 눈을 문지르자 피득 피득 입이 지워진다
- 시선을 빼앗긴 동공이라던가
- 동공을 핥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읽는 봄밤,
산문의 형태를 자유시의 몸짓으로 바꾸어만 놓아도 시행 하나하나가 모두 은유의 물고기가 되어 팔짝거리며 수면 위로 솟구치는 형국이다. 다만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키스’의 관능적 환희가 동어 반복적으로 이어짐으로써, 독자들이 미의 눈부심에 질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산문의 태를 유지하려 한 것이 아닌가, 의도적 낯섦으로 애매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로 읽혔다.
그러나 시행들이 모두 키스를 형상화한 클림트의 회화작품을 언어화한 듯이 보이지만, 실은 그 반대의 경우로 읽어야 시 읽기가 완성될 것이다. 시정신의 핵심은 바로 다의성에 있으며, 그 다의성은 애매성을 획득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음을 이 글의 모두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클림트가 보여주는 회화적 키스를 감상하는 일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저 ‘직관’의 차원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직관’은 [그림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느끼고 감동을 받겠지만, 그 공감과 감동의 실체가 무엇인가는 막연할 뿐이다. 즉 내면의 깨달음이나 미적 감동을 언어화해서 삶의 전선에서 유효하게 재생산할 수 없다는 점이 직관의 한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승화의 시는 바로 그 직관의 미학으로 언어 배치의 묘를 살리고, 또한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언어화할 수 없는 감정선感情線을 절묘하게 연결하고, 접속하고, 단절하고, 생경하게 하여-즉 독자들의 언어화의 전류와 이어준다는 것 [일반화 - 보편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승화의 시 「키스」를 위에서 행갈이를 하듯이 낱낱이 분별한 것은 그 하나하나의 표현들이 바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느낄 법한, 혹은 사람마다 다를법한 관능적 쾌미[快美 혹은 快味]를 매우 절묘한 진술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표현 기법 역시 정승화 시가 지향하는, 다의성을 통한 시정신의 옹호라는 본질에서 멀지 않다고 보인다. 만약 이 작품을 난해한 읽을거리로 치부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것 역시 이 시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시가 난해한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체험에서 미학적 사유가 부족할 수도 있음을, 독자들에게 인상 지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학의 지향점이 그런 것이 아니던가, “내가 이렇게도 아름다움에 문맹이었던가?”를 심각하게 돌아보게 하는 계기-그게 바로 미학이 지향하는 바라 할 수 있다.
**** 앞에서 보인 두 편의 시만으로도 정승화 시세계에 대한 탐구로서 부족하지 않다고 보인다. 다만 <신작>이라며 선보인 다섯 편의 작품에서 한 편만 더 언급해 보기로 한다.
점령당한 고백이 시든 꽃으로 꽃병에 꽂힐 때 가위에 잘린 꿈들은 잠의 바깥에 서 있다
어제 꽃이 흘린 핏기 없는 한숨은 몸을 보인 적 없는 바람보다 빨리 열병을 앓는다 뒤를 지우고 앞으로만 걷는 뜨거운 침묵을 읽는다 그 침묵 안 문장은 `꿈의 마침표를 던져라` 왼쪽 눈에 새벽의 눈빛을 새긴 모종(某種)의 바람이 분다
가질 수 없지만 처음부터 내 것인 것, 본 적이 없지만 사랑한 것, 온 적 없지만 떠난 것, 조각난 꿈들이 쌓여 있는 곳, 그 잠이 날마다 나를 낳으며 붉은 왕관을 쓰고 있었다 문은 아직 닫히지 않은 채였다
그 사이에서 빠져나온 수취인 불명의 편지는 결국 오지 않았다 누구나 다 거쳤던 몽고반점 같은 상처를 안고 몇 번쯤 나쁜 꿈을 꾼 날처럼 울다 깨기를 반복했다 그 잘린 꿈의 바깥을 꽃물이라 불렀다 눈뜬 안녕이 수면의 통로를 건넌다
- 「꿈」 전문
<신작>으로 선보인 다섯 작품 중 어느 것을 들추고 보아도 사유의 정밀함과 개성적 표현을 엿볼 수 있다. 사실 문학 작품의 진실은 바로 그 ‘사유 [생각]과 표현 [아름다움]’에 있음을 인식한 결과로 보인다. 누구나 하루 세 끼라는 생물학적 삶을 살지만, 누구나 생각의 세 끼를 먹지는 않는다. 누구는 입을 머리보다 더 앞에 두기도 하고, 누구는 몸을 정신보다 먼저 챙기기도 한다. 그러나 시는, 시정신은 그것을 한사코 거부한다. 시심은 입에 들어가는 음식의 출처를 따지고, 몸에 달게 되는 훈장의 색깔을 가리려 한다. 사유의 깊이와 미학적 선택은 시정신이 추구하는 두 날개요 벼리다.
이 작품 역시 그런 시정신을 추구하면서 다의성을 숲을 조성하려는 미학적 사유로 가득하다. 그러자니 자연스럽게 난해한 숲길이 놓이게 되었으리라. 이런 숲길을 헤쳐 들어가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운문의 맥락을 산문 스토리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시를 음미하는 정도는 아니겠지만, 무난한 해석의 날개를 달 수 있다.
4연의 의미맥락은 선명하다. 1연에서는 ‘잠의 바깥’에서 함축되기 전의 모습을 담은 옷자락이 펄럭거린다. 이런 시적 진술의 발원지는 당연히 ‘가위에 잘린 꿈’과 ‘점령당한 고백’에 닿아 있다. 당연하게도 ‘바깥’을 형성하는 의미와 미학의 단서들을 엿보게 하는 장치요, 배치다. ‘바깥’은 필연적으로 ‘안’을 상정하게 한다. 나의 바깥은 나의 안을 떠나 있는 상태다. ‘안-잠’은 그러므로 평화와 안식의 공간이요, ‘바깥-불면’은 그러므로 불안과 불행의 공간이다. 순결한 고백이 점령당한 처지의 ‘나-시적화자’는 당연하게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처지의 바깥 신세가 된다.
안과 바깥은 ‘내편과 네 편’으로 편 가름하게 되고, 흑과 백으로 편파성을 선호하게 되며, 다름과 틀림을 혼동하게 하고, 정의와 불의를 뒤섞어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서 2연에서 ‘절망과 좌절’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당연하게도 시를 읽는 절차이기도 하다. “‘꿈의 마침표를 던져라’”고 권유받게 된다. 그런 권유의 출처 역시 “왼쪽 눈에 새벽의 눈빛을 새긴 모종의 바람”이었음을 뒷받침한다. 숲길에 놓인 방향표요, 길안내인 셈이다. 왼눈박이 세상에 두눈박이가 들어간 꼴이라고 할까? 아니면 모두가 ‘당연지사요!’할 때 ‘아니올시다!’한 격이라고나 할까? 이럴 때 역시 다수의 ‘안’이 되지 못하는 자는 언제나 소수의 ‘바깥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 삶의 진실-보편성과 일반적 현실이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절망-좌절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3연에서 전환의 밧줄-희망의 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은 아직 닫히지 않은 채였다”고 했다. 우리가 아직은 절망할 수 없는 것은 “~…처음부터 내 것인 것, ~…사랑한 것, ~…떠난 것, ~…조각난 꿈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내 삶을 지탱하는 본질적 요소들이다. 이 소중한 삶의 버팀목들이 ‘바깥’에 버려져 있을지라도, 아직은 ‘붉은 왕관’을 쓰는 나의 ‘잠-안’이 있는 한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희망은 어디까지나 희망이다. 누구에게나 당도해야 할 새 희망의 메시지 [수취인 불명의 편지]는 당도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희망의 메시지는 우리의 본질 [몽고반점 같은 상처]로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삶의 버팀목들이 비록 ‘바깥’에 내쳐진 형편일지라도 좌절하기에는 이르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 아닌가! ‘잘린 바깥’이 ‘꽃물’이라고 부르며, ‘눈뜬[불면의] 안녕’일지라도, 우리가 소원하는 통로 [수면(水面) 혹은 수면(睡眠)]을 건너가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시문학은 기본적으로 메타포(metaphor)의 맥락에 장치되어 있을 난해의 협곡을 지나가지 않고서는 이해의 평원에 닿을 수 없다. 그 협곡에는 지뢰처럼 혹은 함정처럼 애매성(ambiguity)이 험악한 모습으로 놓여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지뢰밭을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헤쳐나아가야 하며, 그 함정에 짐짓 빠져보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서는 ‘사유와 미학’의 진실에 이를 수 없다. 그게 시문학의 운명이다.
정승화 시세계를 거칠게 조명해 봤다. 대표작과 신작을 중심으로 보다 많은 작품을 거론해 볼지라도 닿게 될 해석의 지름길은 다채로운 것이었다. 그렇게 난해함과 애매성의 장치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바로 ‘시정신의 순수성’을 지키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른 경지가 바로 다의성으로 점철된 심오한 시의 평원이다. 정승화의 시를 관통하는 벼리 역시 여기에서 멀지 않음을 눈여겨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