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옛님의 정취. 그 향기를 따라 원문보기 글쓴이: 선과
도산면 서부리 산59-7 . 고운사의 말사이다. 도로변에서 이정표를 발견하고 정류소에 계신 촌부에게 거리를 문의했더니 바로 아래라며 빨리 가서 공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노보살님의 한 말씀에 보광사 절집 분위기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좁은 소로를 진입하여 스님을 찾았더니 보살님께서 나의 방문 목적을 알고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법당으로 안내하며 스위치를 올린다.
디지털안동문화대전에는 보광사 사적이 일부 기록되어 있다. 보광사는 "안동시 예안면 동부리의 수몰 지역에 있었다. 1962년경 당시 지역 주민들의 공동 발의로 건립이 추진되었고, 주민 서영균이 밭 1322.32㎡를 기증하여 부지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1977년 이건할 당시 같은 지역인 도산면 동부리로 선정하였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사찰을 이건할 때 김일선이 도산면 동부리에 있는 토지 3305.8㎡를 기증하였다고 한다.
원통전 관음보살에서 복장유물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적한 절집이었으나 지금은 찾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관음보살을 찾아오는 신심 돈독한 보살님도 계시지만 경향각지에서 옛님 답사 목적으로 방문하는 답사객들도 이어진다 고 한다.
보광사 관음보살좌상은 살찐 상호, 삼도가 뚜렷하고, 높은 보계 정교성과 화려함을 두루 갖춘 보관, 이국적이면서도 우아한 귀족풍의 얼굴모습, 단정하고 엄숙하면서도 안정된 신체비례, 간결하지만 탄력 넘치는 옷주름의 표현, 정교하게 장엄된 영락 장식이 가슴 어깨 무릎에 표현되었다. 오른 다리를 왼다리 위에 편안하게 올렸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었으며, 왼손 역시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맞대고 무릎 위에 올려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조성발원문이 전하지 않아 시주자,금어, 조성시기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안동 봉정사목조관음보살좌상(1199년 제작 추정)과 많은 면에서 유사하지만 양감이 강조된 이국적인 얼굴 모습과 당당해진 불신, 간략화된 무릎 주름 등은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1280년 하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1274년경),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13세기 후반, 1362년 하한) 등과 유사하다고 한다. 따라서 보광사 관음보살상은 한국 불상의 13세기 전반과 중반을 잇는 고리인 셈으로 13세기 고려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보관은 금속판을 투각해 만들었으며 세밀하고 정교한 넝쿨문과 화염보주 등을 새겼다.
복장유물.범서총지집...사진출처/문화재청
복장유물...출처/문화재청
조사당시 대부분의 복장 유물은 이미 도난된 상태였으나 무릎과 머리쪽에 들어있던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는 10종 194점에 이르는 복장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다. 복장전적 중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과 ‘범서총지집(梵書摠持集)’의 인출시기는 불상 조성시기인 13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데, ‘보협인다라니경’은 1007년 총지사(摠持寺)에서 간행한 목판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주목된다. 또한 ‘범서총지집’은 1150년 평양 광제포에서 선사 사원(思遠)이 교정하여 개판한 간행기록이 있어 서지학·밀교사상·다라니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며, 지질 및 판각술은 고려 인쇄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경전류도 대개가 고려시대 인본들로 가치가 있다.
복장유물 중 ‘저고리’는 현전하는 예가 드문 고려시대의 저고리로 복식사 및 직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관음보살 조성사찰과 관련 한국민족문화 백과에는 근처 용수사에 봉안되었던 보살상으로 추측하고 있다.(용수사 개창기 비문은 앞의 용수사 답사기를 참고하길 바란다)
"관음보살상은 이 절에서 가까운 안동 용수사에서 30~40년전 쯤에 옮겨왔다고 전하고 있어, 이 보살상의 조상배경에 대해서는 용수사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용수사는 의종(1148~1170년 재위)의 후원으로 중수된 사찰인데, 1187년 용수사가 완공되고 나서 의종의 추선을 위한 원찰이 되었다. 보광사 관음보살상의 복장에서 의종대에 개판된『범서총지집』(1150년)이 다량 발견된 점은 이 보살상과 용수사를 중창한 의종과의 관련성을 뒷받침될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의종은 관음신앙에 심취하여 그 재위 연간에는 다른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수의 관음보살상이 조각과 회화로 제작, 유포되었고, 1151년에는 개경의 장인으로 하여금 침향목으로 관음상을 만들게 하여 봉안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최선이 지은 용두산용수사창건비에 의하면 1165년 용수사에 목조도금상이 조성되었고, 이 상의 존명은 알 수 없으나 의종과의 연관성에서 생각할 때 관음보살상이라고 생각되므로 현존하는 보광사 관음보살상과도 연결지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한 보광사 상의 재료가 향목이라는 점은 의종이 개경에서 침향목의 관음보살상을 조성한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미타 부처님도 관음보살과 함께 이전하면서 옮겨왔다고 전한다.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원통보전 중정. 주지스님의 아이디어로 팔정도와 법륜을 상징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관음보살를 뵙고 나오니 공양하고 가라며 발길을 붙잡는다. 도저히 뿌리칠 분위기가 아니어서 요사에 들려 스님께 인사 드리고 다과를 대접 받았다. 다른 절집은 몰라도 보광사는 관음보살 촬영을 허락한다고 했다. 불보살을 많이 알리는게 좋은 일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님과 보살님 두 분이 나가는 길이 좁아 염려된다면서 중정까지 배웅하시며 차가 빠져나가는 것을 내려다 보시어 코끝이 찡해왔다. 그런저런 연유로 보광사는 내 기억의 한자리를 오랫동안 차지 할 절집으로 남을 것 같다.(답사하실 님들은 도로변 주차장에 주차하길 권한다, 도보로 5분이면 충분하다)
2014.02.08 |
첫댓글 와우~ 멋진 관음상이십니다. 정말 이국적이시네요. 보관의 색감이 조금 달라 더욱 세련돼 보이십니다. 뒷 탱화와의 조화가 또한 빼어나 보입니다.
보광사 가족들은 정도 많으시네요. 읽는 저도 코끝이 찡할 정도입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
화려한 관음상으로 빛납니다
관세음보살_()_
관음보살님 보관이 화려합니다.
재미있게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