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산성에서 내려온 후 홍산면 소재지 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태봉산성에서 마을을 바라보니 그곳에 몇몇 관아 유적이 있기 때문에 그걸 보고자 해서였다. 정확한 길도 잘 모르면서 무작정 내려가서 살펴보다가 문득 한 건물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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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객사의 입구. 풍판이 없는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홍산객사는 홍산면 북촌리에 있으며 골목길 따라 위치해 있어 왠지 정겨운 느낌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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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 마을 골목길 돌담을 따라 한 채의 한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맞배지붕에 풍판이 없는 문이 기자를 맞아주고, 그 옆에 안내 표지판이 있어서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은 바로 홍산객사였다.
이 홍산객사(鴻山客舍)는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된 것이다. 객사란 조선시대 관청의 손님이나 사신이 유숙하던 건물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궐패(闕牌)를 안치해 놓는다고 하는데, 궐패란 임금과 궁궐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조정과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임금께 예를 드리기가 어려운 형편 때문에 이러한 궐패를 두어 받들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궐패에다가 예를 올리고 제사를 하는 것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행해졌는데, 이를 망궐례(望闕禮)라고 한다. 이 망궐례는 1896년에 대한제국이 창건되면서 폐지되었다고 한다.
이 홍산객사는 불탄 지 9년 만인 조선 현종 4년인 1838년에 당시 군수였던 김용근(金龍根)이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 홍산객사는 목수 20여 명이 5개월 동안 연인원 4000명의 인부와 함께 건립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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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덕교비. 홍산객사 앞마당에 몇개의 비와 함께 있다. 만덕교지비라는 제액이 쓰여 있다. 만덕교라는 다리를 놓으면서 세운 비인데, 현재 만덕교는 홍수로 인해 무너졌다가 다시 세웠다.(충청남도기념물 제 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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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 객사 내로 들어가면 몇 개의 비석이 보인다. 그 중에서 하나가 만덕교비(萬德橋碑)로서 충청남도기념물 제3호이다. 이는 홍산천에 놓았던 만덕교를 기념하기 위해 숙종 7년인 1681년에 세운 비석이다. 다리는 객사에서 동쪽으로 200여m 떨어진 농경지 수로에 위치한다고 하는데, 이것까지 마저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만덕교라는 이름은 '만인에게 덕을 끼친다'라는 데에서 유래하였으며, 1946년 큰 홍수로 부서졌고 일부 석재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홍수 이후로는 마을 빨래터로 쓰였으나 최근에 돌다리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만덕교비는 1946년의 홍수로 홍산초등학교 앞에 이건하였다고 하나, 최근에 다시 홍산객사 앞마당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만덕교비는 이수와 비신, 즉 비 머리와 비 몸체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용과 구름의 모양이 새겨져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다리 건설에 물자를 댄 인물과 석공, 야장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비 신엔 가로로 만덕교지비(萬德橋之碑)라고 쓰인 제액(題額)이 있어 만덕교비임을 말해준다. 비문은 진사 이복형(李復亨)이 짓고 글씨는 우정구(禹鼎九)가 썼다하며, 이 만덕교비는 홍산 지역의 교통로와 하천의 흐름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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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객사. 객사 중에서는 꽤 큰 편에 속하는데, 가운데의 정당은 맞배지붕이다. 양쪽의 건물인 익실은 서로 대칭이 아닌 비대칭이라는 점이 재미있는데, 동쪽은 대청마루, 서쪽은 온돌방이다.(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 9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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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 이제 홍산객사를 살펴보자. 홍산객사는 1동의 건물로서 규모는 제법 큰 편에 속한다. 자세히 보면 3채의 건물이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보이는데, 가운데의 것을 정당, 양쪽의 것을 익실(翼室)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익실이 있는 건물이 좌우대칭임에 비해, 홍산객사의 가장 큰 특징은 좌우가 비대칭이라는 점에 있다. 동쪽 익실은 대청마루이며, 서쪽 익실은 온돌방인데 이렇게 해 놓음은 계절에 따라서 편하게 쓰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정당과 익실의 구분을 정당의 지붕을 높임으로 하였는데, 맞배지붕을 하고 약간 더 높여 놓았다.
이러한 객사 같은 건물을 흔히 관아건물이라고 한다. 주로 동헌이나 객사 등이 이에 포함되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들이 다수이다. 고려시대의 건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남아있더라도 거의 불교건물이다. 그나마 관아건물과 관련해서 남아 있는 게 국보 51호인 강릉 객사문 정도이다.
이 홍산객사와 홍산동헌, 홍산형방청 등은 이번에 국가사적 지정을 신청하였다. 문화재청에서 이번에 관아건물들을 국가사적으로 승격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이에 상태가 양호한 부여 홍산 지역의 여러 건물들을 신청한 것이다.
국가사적과 지방유형문화재는 그 급에서 차이가 있고, 그만큼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것을 말해준다. 부여 측에서도 이런 점에서 이 홍산 지역의 관아건물에 자신감을 갖고 있기에 신청할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도 보존상태가 뛰어나다.
지난 7월 31일, 결국 부여 홍산 지역의 관아건물들은 사적으로 지정되는 게 확정되었다. 그만큼 이곳의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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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 파편. 객사 뒤에는 이런 도자기 조각들이나 기와 조각들이 무수히 많다. 이러한 것들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그 당시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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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 홍산객사 뒤편에 가면 또 다른 문화재를 볼 수 있다. 바로 자기편과 기와편이다. 별거 아니게 돌멩이처럼 차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런 소소한 것도 살펴보다 보면 재밌다. 자기편은 역시 다수가 백자편으로써 개중에는 대량생산의 흔적이 보이는 것도 있다. 그 흔적이라는 것은 자기에 붙어있는 모래들이다. 이 모래는 그냥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어도 조선 후기에 들어 대량생산이 이루어지기에 생기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의 수요가 많아지자 이를 많이 만들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즉 자기들을 서로 겹쳐서 가마에 넣고 굽는데, 이게 5단, 7단 등으로 높게 쌓아져서 넣게 된다. 그럼 마지막에서는 이렇게 서로 겹쳐진 자기들을 떼어내야 하는데, 그냥 아무런 장치도 없이 넣을 경우에는 마지막에 잘 떼어지지 않거나 떼다가 부서지는 경우가 당연히 있을 수도 있다.
이때 모래 등을 서로 사이에 넣어 두면 떼어 낼 때 좀 더 용이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편들을 보면 저런 흔적이 자주 남고는 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도지미라는 것도 있다. 일명 개떡이라고도 하는 도지미는 도자기를 구울 때 땅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밑에 대는 흙받침이다. 문화재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볼 때 그냥 그 자체만을 보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문화재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한번 생각해보면서 문화재를 접하면 어떨까? 도자기를 보면서 도지미와 가마를 생각해보고, 금동으로 된 아름다운 장신구를 보면서 이를 만들던 장인들과 도구 등을 생각해보면 좀 더 생각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하물며 사람도 그 사람 자체만 보지 말고 그 주위를 같이 바라본다면, 기존에는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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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춧돌.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밖에 들보도 자연 그대로를 쓴 경우가 있는데, 재미있게도 그렇게 자연 그대로를 쓴 들보 등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과 비교해서 금이 덜 가있다. 이를 통해 조상들의 자연과의 조화와 슬기를 동시에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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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대 |
| 천천히 홍산객사를 둘러보다 보면 재미있는 게 많이 보인다. 아니, 이는 어찌 보면 홍산객사만의 특징이 아닌 우리나라 건축 문화재의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로 자연 그대로를 이용했다는 것인데, 들보나 기둥의 주춧돌을 보면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여럿 보인다.
이는 인위적인 가공을 하지 않고 자연과 벗 삼아서 조화되기를 바랐던 조상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는데, 신기하게도 이런 가공되지 않은 게 더 오래간다고 하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관아건물이 아닌 사찰건물, 심지어는 궁궐에서도 종종 보이는데, 이러한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홍산객사 같이 관아건물은 어쩌면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전통건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건물들에 관심을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한번쯤 둘러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