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의 어느 교회에 말썽꾸러기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의 부모는 그 교회의 장로님 이었지만, 그 소년은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다른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려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 성격도 무척 난폭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아이를 멀리하고 경계했다. 그런데 그 아이의 그런 모습을 아파하던 주일학교 여선생님이 어느 날 옷 한 벌 사들고 소년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 아이는선생님을 향해 난폭스러운 말을 하면서 그 옷을 갈기갈기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이 일로 선생님은 엄청난 충격과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우리들도 어린이들을 지도하거나, 전도현장에서 이와 유사한 일을 당하는 때가 있다. 그래서 그 여선생님은주일학교 부장을 찾아가 ‘이제 더 이상 그 아이를 맡을 수 없다’ 말했다. 그러나 주일학교 부장은 오히려 그 선생님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선물들을 사들고 소년을 찾아갔지만, 그것들도 역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은 여선생님에게 “저 아이는 구제불능이며, 더 이상 사랑을 쏟을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 여선생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제자를 찾아가서 권면하면서 눈물로 호소했다. 그래서 결국 선생님의 헌신에 감동된 소년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성장해서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그 소년이 바로최초의 중국 선교사였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이다. 모리슨은 청나라 가경황제 12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33년 전, 기독교 선교사로서는 첫 번째로 중국 땅을 밟았다. 모리슨은 중국에서 27년 동안 사역하면서 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중국어 사전도 출판했다.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성경을 이용해서 유명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가 중국에서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할 수 있었다.
모리슨이 번역한한문성경은 우리나라 선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866년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는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 성경을 들고 미국 상선 제너널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군에 의해서 배는 불타고 토마스 선교사는 “야소 야소”를 외치면서,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 성경을 대동강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던지고 순교를 당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가 던진성경책을 회수하는 일을 맡았던 평양 안주골의 주사였던 박영식은 한문으로 된 성경책을 모조리 뜯어서 자기 집의 도배지로 사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신의 방에 누워있을 때 온통 방안에 도배된 성경책의 내용을 읽으면서 감명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그는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하였는데, 이 교회가 바로 평양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이다. 바로 이 널다리골 교회가 부흥이 되면서 후에 장대현교회로 개명하였는데, 이 교회에서 한국교회는 물론이고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1907년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