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 하느님의 신비, 그 신비 담은 인간의 신비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에게서 파견되고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자의 수난과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였고, 오순절에
성부와 성자에게서 파견되신 성령의 강림 사건으로 전례력상 부활 시기를 마쳤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이로써 하느님의 세 위격이 다 계시되었기에,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에 교회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경축합니다.
‘위격이 다른 세 분이 같은 하느님 한 분’이시라는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철학적, 신학적 개념들이 동원됩니다.
‘위격’(persona)과 ‘본질’(natura, essentia, substantia)이라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학문적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 어떠한 설명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절대 신비’이고 ‘지고의 신비’입니다.
이해 불가능한 신비인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저 신학자들의
관념적, 학문적 대상이 아니라 실은 우리 모두에게 깊이 연관되어 있는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바로 이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육화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지상의 존재이긴 하지만, 순전히 지상적인
존재인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는 성삼위로부터 오고 성삼위의 모상에 따라 구성되고
역사의 삼위일체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위로부터 형성되어
위에서 오고(oriens ex alto), 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 역시 삼위일체 신비가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피부로 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으로 이 삼위일체 신비가
우리 인간 존재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음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의 깊은
신비를 지니신 분이시기에, 하느님을 우리가 온통 다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런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닮아 창조된 인간이기에, 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역시
‘존재의 신비’를 품고 있고,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담고 있는 ‘신비의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국적이나 피부색, 재력, 능력, 건강이나 사회적 지위 등등과
무관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있는 그대로 소중하고 존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고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신비 중의 신비인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으며, 지엄하신 하느님의 신비 속에
잠기는 거룩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 깊은 하느님의 신비를 품고 있는 우리 인간
존재의 존엄함을 묵상해 보는 시간도 가져 봅시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 그래서 때로는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
가족과 이웃 한 분 한 분이 실은 하느님의 이 깊은 신비를 담고 있는
소중하고 존엄한 존재임을 깊이 묵상해 보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글 :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 서울대교구장
낮에 졸린 것이 '병'인지 몰랐어요.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4월,
30대 초반의 한 청년이 몸에 힘이 빠져 쓰러지는 증상으로,
멀리 경상남도 남해에서 수원에 있는 성 빈센트 병원 수면센터까지 찾아왔습니다.
청년은 동네 의원부터 거주 지역의 큰 병원, 서울의 대학병원 등을 찾았었는데,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필자의 기면병(嗜眠病∙Narcolepsy)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던 마산의
한 의사에게서 기면병이 의심된다며 성 빈센트 병원을 추천받았다고 합니다.
청년은 6개월 전부터 웃을 때, 화날 때, 농담을 주고받을 때, 그리고 걷다가도
무릎과 몸에 힘이 빠져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낮에 심하게 졸린 증상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수면다원검사’와
‘다중수면잠복기 검사’를 시행했습니다. 결과는 예상대로 심한 기면병이었습니다.
‘기면병’은 낮에 심하게 졸린 병입니다. 일상생활도 힘이 들 정도로 너무 졸려서
몸에 힘이 빠지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를 ‘탈력발작’이라 합니다.
이 청년은 탈력발작 증상으로 인해 쓰러졌던 것인데,
희소병인 기면병을 진료해 본 경험이 없다면 진단을 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동안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1999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기면병 센터에서는 ‘기면병은 뇌에서 생성되는
하이포크레틴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이 부족해서 생기는 병’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당시 필자는 스탠퍼드 대학 기면병 센터 방문 교수로 있었는데,
이 인연으로 귀국 후 하이포크레틴에 관한 후속 연구를 스탠퍼드 대학의
미뇨 교수와 함께 진행해 여러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또, 언론을 통해 기면병을 알리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수많은 기면병 환자가 성 빈센트 병원 수면센터를 찾기 시작했고,
현재는 1,200명 이상의 환자가 진료 받고 있습니다. 또, 기면병 환우협회 결성,
아시아 기면병 학회 창립, 수많은 기면병 연구논문 발표 등 기면병에 대한 인식 및
제도 개선을 위한 그동안의 노력은 2018년도 가톨릭중앙의료원의 영성구현
우수상을 받는 영광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낮에 졸린 것이 병인지 몰랐어요.
우리 애가 게을러서 그렇게 잠을 많이 자는 줄만 알았지요.”
기면병 진단을 받은 한 아이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기억에 오랫동안 남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증상이 병인지도 모른 채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온 환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이 길을 걷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인도와 은총 덕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최근에는 신약에 대한 임상 시험 결과, 치료 효과가 좋아서 환자들의 기대가 큽니다.
하지만 치료에도 불구하고 심한 증상이 지속돼 일상이 어려운 환자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기면병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높은 관심이 절실히 필요함을 진료실에서 매일매일
체험하며, 기면병 환자들의 더욱 나은 삶을 위해 하느님의 이끄심을 믿고 따라가 봅니다.
글; 홍승철 갈리스도 –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수면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