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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미라지나이트 입니다..
요몇일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어제오늘은 급기야 눈이오더군요.. 서른아홉해를 살면서 4월중순에 눈발이라니.. 별일을 다 봅니다. 역시 말세인가..?
시답지않은 소리는 그만두도 계속해서 2차대전 영국군 장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드디어 영국군 장비중 공격력 하나는 최강이라 불리웠던 무적의 전차라 불리던 티이거도 한방에 보낼수 있었던 강펀치를 가진 전차 파이어플라이 (FIREFLY)를 소개합니다.
지난번에 타스카사의 파이어플라이를 소개했는데 이어 오늘은 드래곤사의 #6182번 M4A4 FIREFLY VC 를 소개합니다.
M4 서먼전차의 변종!! 강력한 펀치를 가졌던 파이어플라이 (firefly)
[파이어플라이가 장비한 영국제 17파운드 포는 보통의 APCBC탄을 쏘면, 1,000미터 이상에서 티거의 정면을 뚫을 수 있었으나 이 포는 탄도변화가 심해 명중률이 극히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어찌되었던 티거전차를 원거리에서 격파할수 있는 전차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독일군은 포신이 긴 셔먼전차는 보는즉시 우선 격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이를 막기위해 연합군은 위장을 하던지 포신 부분에 백색 페인트를 칧 포신을 짧게 보이게 하려는 노력등 각고의 노력을 하기에 이른다]
전설의 호랑이 사냥꾼!! 미하일비트만 (Michael Wittmann)
1914년 4월 22일 ~ 1944년 8월 8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무장친위대 소속 군인. 가장 많이 적 전차를 격파했던 전차병 중 한 명이자, 전설적인 티거 에이스로 유명하다.
[미하일 비트만 중위는 티거를 이용 혁혁한 전과를 올린 티거에이스로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한뒤 비트만의 2중대가 전장에 도착한 다음날인 1944년 6월 13일, 비트만은 숙영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인 빌레르-보카즈(Viller-Vocage)에서 6호 전차 티거I 한 대로 영국 7기갑사단의 선봉 전차부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주어 그 이력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그는 티거 한대로 적진에 침투해 무려 25대의 각종 전차와 장갑차를 때려부수었다]
최종 계급은 SS대위로, 그가 격파한 전차 수는 138대이고 대전차포는 132문이었다. 독일군 전차 에이스 순위에서는 5위[1]지만, 대전차포와 합계를 내면 1위. 사실 전차보다 대전차포가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기 때문에, 그런 대전차포를 130문이나 때려잡았다는 점에서 2차 세계대전 최고의 전차 에이스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2]
[히틀러로 부터 백엽검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는 모습]
본격적인 활약은 독소전쟁 중인 1941년 7월 우만 포위전에서 LSSAH사단 소속으로 당시 탑승차였던 3호 돌격포 A형으로 6대의 T-26 경전차를 격파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1942년 초까지 돌격포를 타고 싸우다가 부상으로 후송, 완쾌 후 사관후보생 과정을 거쳐 42년 겨울에 3호 전차 전차장으로 전선에 돌아왔다. 이후 사단에 티거 중전차소대가 배치되면서 소대장으로 선발, 43년 2월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티거 에이스로서의 활약을 시작했다. 티거 소대는 곧 중대로 확대, 제1SS전차연대 13중대로 명명되어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으로 일련의 활약을 거듭했으며, 비트만은 13중대 3소대장으로서 43년 중반~44년 초반을 보냈다. 특히 44년 1월의 체르카시 포위전에서 비트만은 단 3주 만에 50대에 달하는 적 전차를 격파, 100대 격파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의 공적으로 44년 2월에 중위가 되었다.
[그가 보카빌레주에서 홀로 25대의 적 전차와 장갑차를 때려부셨다는 그의 전차의 위장을 재현한 레플리카의 모습]
원래 13중대는 1943년 10월에 제101SS중전차대대로 개편이 예정[3] 되어 있었으나, 급박한 전황 때문에 제대로 개편이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체르카시 포위전이 끝난 후 독일로 이동, 본격적으로 대대 재편성을 받았다. 이때 비트만은 2중대장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44년 4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에 머물렀고 결국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전장으로 이동했다.
[포신에 새겨진 100대가 넘는 화려한 전과들 미하일 비트만 대위에게는 4명의 다른 승무원들이 있엇으며 그들의 환상적인 호홉으로 수퍼에이스로 등극할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같은날 모두 전사하게 된다]
비트만의 2중대가 전장에 도착한 다음날인 1944년 6월 13일, 비트만은 숙영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인 빌레르-보카즈(Viller-Vocage)에서 6호 전차 티거I 한 대로 영국 7기갑사단의 선봉 전차부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주어 그 이력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4] 빌레르-보카즈 전투에서의 눈부신 활약에 아돌프 히틀러는 직접 그를 관저로 불러 공적을 치하하고 백엽검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하였다. 또한, 이 공적으로 대위로 승진하게 된다.
[그의 탑승차량중 하나인 205번 차량 비트만과 그의 부하들은 하나늬 티거전차에만 탑승한것이 아닌 최소 3대이상의 각기 다른 티거 차량이 목격되고 있다]
이후 대대는 계속 전투에 참여했으나 비트만은 특별히 추가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대대의 전력은 계속해서 감소했다. 그러다가 1944년 8월 8일, 대대 지휘전차인 007호에 탑승하고 캉 남쪽 Saint-Aignan-de-Cramesnil 부근에서 캐나다 제4기갑사단과 교전을 벌이면서 최후의 전과인 전차 3대 격파를 기록하지만, 그 직후 적의 공격을 받고 비트만을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전사하였다.
[영웅의 최후.. 호랑이도 밀물같이 달려드는 적의 전차 앞에서는 불멸할수 없었나 보다. 피격후 유폭으로 차체와 포탑이 날아간 그의 전차로 그의 최후가 얼마차 처참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그에게 일격을 가한 것이 누구냐는 데에는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의 설이 분분하다. 캐나다군 파이어플라이 전차의 협공설, 영국군의 공격기 호커 타이푼의 지상공격 로켓 피탄설 등이 있으나, 현재는 파이어플라이의 공격에 의한 피탄, 전사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이 전투의 전개 당시 비트만은 부상을 입고 후송된 대대장 대신 대대장 대리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 전투의 경과를 두고 전차장으로서는 유능했으나 중대장으로서나 대대장으로서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최후에 탑승했던 차량으로 알려진 007번 차량의 모습]
어쨌든 전사한 비트만과 동료들의 유해는 전사한 곳 근처에 가매장되었으나 전후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이장하지 못했고, 1983년에 프랑스 연구자 에릭 르페브르와 그의 동료들에게 발견되어 라 캉브의 독일군 전몰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영웅의 묘.. 전사한 비트만과 동료들의 유해는 전사한 곳 근처에 가매장되었으나 전후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이장하지 못했고, 1983년에 프랑스 연구자 에릭 르페브르와 그의 동료들에게 발견되어 라 캉브의 독일군 전몰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이 사람 뿐이 아니라, 나치 독일의 수많은 에이스들은 대부분이 씁쓸한 최후를 맞이하여, 아랫것들이 X빠지게 고생해서 엄청난 업적을 이뤄봐야 윗대가리가 멍청하면 말짱 황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 [1] SS만으로는 1위이다. [2] 하지만 육군이 아닌 SS소속이었던 이유로 오토 카리우스와는 달리 현재 독일육군의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3] 당시 SS는 기갑군단 직할 독립중전차대대를 편성하기 위해 각 사단의 중전차중대를 차출해서 대대로 확대 개편할 예정이었다. [4] 이 전투에서 27대의 전차를 격파했다.
출처 엔하키미러 http://mirror.enha.kr/wiki/%EB%AF%B8%ED%95%98%EC%9D%BC%20%EB%B9%84%ED%8A%B8%EB%A7%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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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스 및 외형
2. 내용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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