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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박물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직원이 14일 사내에 있는 대한민국 1번 도크 상징 조형석을 지나가고 있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
- 영도 현 한진重 자리에 1937년 첫 철강조선소
- 2010년 아라온호까지 조선산업 성장 산증인
- 재벌기업은 물론이고 남선창고·동명목재 등 부산서 산업화 이끌어
- 역사적 건물 허무는 등 과거 기억 억지로 지워 도시 위상 추락 자초
변방의 작은 도시 부산은 10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 근대화를 이끄는 '마중물' 역할을 해왔다. 1905년 부산과 서울을 잇는 경부선 철도 개통 및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관부연락선 운항이 계기가 됐다. 향토사학자 주경업 씨는 "경부선 건설의 근본 목적은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수탈 정책을 뒷받침하고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지만 국토의 공간과 시간 단축이라는 부차적인 효과를 누리게 됐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조선 1번지
한진중공업이 2010년 국내 처음 건조한 쇄빙선 '아라온호'. |
지난해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309일에 걸친 고공 크레인 농성과 '희망버스'로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는 상징적인 기념비가 있다. 'THE 1st SHIPBUILDING DOCK IN KOREA SINCE 1937'이다. 국내 최초의 철강조선소 한진중공업이 2007년 12월 창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도조선소 내 '대한민국 1번 도크' 자리에 설치했다. 아래에는 '대한민국 조선 1번지 KOREA'S CAPITAL OF SHIPBUILDING 한진중공업'이라고 적혀 있다.
이곳은 1937년 조선중공업(주)이라는 이름으로 철강조선소의 효시가 됐고, 1945년 대한조선공사로 회사명이 바뀌었다. 1989년에 이르러 한진중공업이 탄생했다. 1938년 한국 최초의 철강화물선 건조에서부터 2010년 한국 최초의 쇄빙선인 '아라온호'까지 우리나라 근대화의 산증인이다.
한진중공업 측은 부산을 떠나지 않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지만 만에 하나 영도조선소를 폐쇄하고 필리핀 수비크조선소로 옮길 경우 노동자의 생존 터전은 물론 우리나라 최초의 철강조선소라는 상징성도 사라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부산 시민 모두 한진중공업이 옛 명성을 되찾기를 염원하고 있다.
한진중공업보다 50년 앞서 1887년(고종 24년) 일본인에 의해 목선조선소 다나카조선소가 세워져 근대식 선박이 처음 건조됐다. 당시 조선소 자리인 대평초등학교에는 이를 기념하는 '한국 근대 조선발상 유적비'가 있다.
■삼성 LG 재벌기업 부산서 태동
영도 대평초등학교에 있는 '한국 근대 조선발상 유적비' 안내문. 위의 둥근 사진은 1887년 건조된 목선 형태의 근대식 선박. |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산이 근대화의 선봉에 선 것은 조선 분야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현재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재벌 상당수가 부산에서 태동했다.
LG화학은 락희화학이라는 이름으로 1947년 부산 서대신동에 세워졌다. 당시 '동동구리무' 화장품을 생산했다. 그리고 1954년 연지동에 락희화학공업이라는 근대식 공장이 들어서면서 LG화학의 초석을 닦았다. 현재 연암기념관과 LG사이언스홀이 연지동 옛 공장터에 건립돼 당시의 기억을 부산 시민과 공유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최초 제조 시설이자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현재의 CJ제일제당은 1953년 부전동 동천 변에 제일제당공업(주)라는 이름으로 부산 1공장을 설립해 한국에서 처음 설탕을 생산했다. 현재 옛 제일제당 공장 자리에는 포스코 더샵센트럴스타 주상복합건물이 건립됐다.
이와 함께 남선창고(명태고방·1900년) 백산상회(1914년) 일영어무공업사(1923년) 동명목재(1925년) 부산방직공업(1934년) 같은 기업들이 부산에서 태동해 1960~1970년대 부산의 목재·철강·섬유·신발산업을 이끌었다.
■근대화의 '마중물' 도시 위상 추락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자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근대화의 마중물 역할을 해왔던 부산이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시대적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산업적 측면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다른 원인도 있다.
근대화를 이끌었던 부산, 많은 기업과 노동 현장, 동동구리무를 비롯한 당시 삶의 흔적이 차츰 부산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부산은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것을 덧씌우며 '잡종성'(하이브리드)을 추구하고 있다. 잡종성은 본래의 정체성 위에 새로움을 더해 생성되는 법이다. 부산이 지향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들어선 옛 부산시청사,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조선방직(주), 철거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영도다리, 아파트 같은 고층 건물이 들어선 재벌의 효시가 됐던 공장터, 한때 주력산업이었으나 지금은 쇠퇴해버린 섬유·신발·화학·조선산업, 부산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었던 백제병원, 한국 최초의 근대식 상수도시설인 성지곡수원지….
박재환 부산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보존하고 후대에 보여줘 역사와 장소가 지닌 의미를 깨닫게 하지 못했던 것이 부산의 위상 추락의 또다른 요인으로 꼽힌다"고 지적했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 없는 미래 또한 없기 때문이다.
# '조방'은 조선방직의 줄임말
- 최초의 근대 면방직공장… 日 수탈의 대명사이기도
조방 낙지, 조방 귀금속상가, 조방앞 버스정류장, 조방로….
일제강점기 동구 범일동 조선방직 공장 여공들이 일을 하고 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제공 |
부산 시민들은 동구 범일동 도시철도 1호선 범일역, 평화시장, 자유시장, 부산시민회관 일대를 '조방'이라고 부른다. 젊은 세대들은 '조방'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조방은 1917년 일본인에 의해 설립돼 1921년부터 1968년까지 가동된 국내 최초의 근대적 면방직공장 '조선방직(주)'을 줄여서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방직은 당시 26만4000㎡(8만 평)의 드넓은 대지에 2300여 명의 '여공'들이 거의 4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실내온도와 시끄러운 기계소리,풀풀 날리는 먼지 속에서 주야 교대로 기계를 돌려댔다. 피곤에 지친 여공들이 기숙사로 돌아오더라도 한 방에 13명이 생활해 닭장처럼 좁은 데다 자유로운 출입마저 차단돼 '감옥' 같았다.
동구 범일동의 '조방'이라는 이름을 단 음식점 간판. 김동하 기자 |
조선방직은 조선 여성 노동자의 착취를 발판으로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갔다. 원로 소설가 이호철의 장편소설 '소시민'에도 정결한 인물 정옥이가 조선방직의 먼지 속에서 폐병을 얻어 죽는다. 이같은 열악한 노동 조건은 일제에 항거하는 노동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됐다. 조선방직 노동자들은 '중락회(衆樂會)'를 결성해 1930년 총파업에 돌입했다.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파업에 실패한 뒤 일부 여공들은 스스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김희재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제 강점기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규모가 큰 조선방직은 부산지역 제조업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일제 자본가에 맞서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총파업을 벌인 역사적인 공간"이라며 "일본이 세운 공장, 수탈기지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비석이나 표지판 하나 남아 있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공동취재= 양이문 부산대 사회학 박사과정 수료
공동기획= 국제신문·대안사회를 위한 일상생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