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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오직 주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야고보서는 초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서간입니다. 거듭되는 박해 속에서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목숨 걸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라는 가르침,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 과부들과 고아들, 병자들을 배려하자는 권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 혹독한 박해 시절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오늘 첫 번째 독서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가슴에 사무칠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요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아주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아름다운 명문장입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야고보 서간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경고장입니다.
오로지 이 세상 일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 영혼이나 생명, 차원 높은 가치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 순식간에 사라져갈 지위나 명예, 권력이나 재산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장입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 세상 안에서,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다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세상 모든 확실성은 오직 주님께만 기인합니다.
때로 엄청나고 대단해 보이지만,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 참으로 덧없습니다. ‘한 줄기 연기!’ 참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팍팍하게 살아서도 안되겠습니다.
가끔 거룩한 수녀님들 피정을 동반할 때마다 꼭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피정 첫날 앞에서 바라보면 수녀님들 얼굴이 엄청납니다. 비장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번 피정을 통해서 반드시 성녀가 되고야 말겠다는 표정, 내 기도로 온 세상을 다 구원하겠다는 표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부탁을 드립니다. “인생을 너무 그렇게 전투적으로도 살지 마십시오. 인생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삶을 만끽하시오. 피정도 기쁘게, 영적 생활도 기쁘게 하십시오.”
찰나 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 삶의 우여곡절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로 인한 끔찍한 기억이나 트라우마로 인한 괴로움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은 긍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고통을 겪어보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얻지 못할 소중한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우리네 일상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알게 되는 깨달음. 고통은 우리네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도구라는 깨달음. 고통은 잠시지만 고통을 넘어서는 데 따르는 은총과 축복은 영원하다는 깨달음.
나이를 조금씩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나이에 반비례해서 좋은 것들은 점점 줄어들고, 결코 원치 않았던 것들이 슬슬 친구처럼 찾아옵니다. 병고나 노화나 그로 인한 부작용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는 지금과는 다른 측면의 기쁨을 추구해야 할 때로구나. 그것은 영적 생활 안에서의 기쁨, 포기와 물러섬 안에서의 기쁨,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의 기쁨, 그 기쁨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을 기쁨이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르코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자아와 포용력
‘좋은연애연구소’ 소장인 김지윤 강사가 상대를 이해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이 체험한 것을 이야기 한 것을 들었습니다.
김지윤 소장이 결혼하여 6년 정도 지나서였다고 합니다.
소장은 여자임에도 좀 털털하고 직설적입니다.
반면 그의 남편은 매우 꼼꼼한 편이라고 합니다.
설거지와 빨래 모두 남편이 잘 도와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어떤 옷들이나 수건은 빨래바구니에 다 넣지 않고 밖으로 삐져나와 걸쳐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6년이나 보아오다가 남편에게 왜 이런 것들은 바구니에 온전히 다 집어넣지 않고 밖으로 나와 지저분하게 걸쳐놓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남편의 자상한 대답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어 젖은 옷이나 수건은 밑으로 쌓이게 되면 냄새가 나기 때문에 걸쳐서 건조시키는 거야.”
저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빨래를 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젖은 러닝에 곰팡이가 생긴 적이 있어서
그 방법을 써서 잘 압니다.
그러나 김지윤 소장이 놀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결혼하기 이전에 친구 부부가 사는 집에 몇 달 동안 얹혀 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냄비가 화장실에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의 집 사정이라 그 냄비가 왜 화장실에 엎어져 있는지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는데 결국 그 집 남편이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며 그 냄비가 왜 일주일 동안이나 화장실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아내는 “네~ 치울게요~”하고 냄비를 치웠습니다.
그냥 가정살림에 무관심한 여자였던 것입니다.
어쩌다 들고 들어왔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그 곳에 두었던 것을 치우지 않은 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김지윤 소장은 자신에게 묻습니다.
‘만약 내 남편이 내 친구와 결혼했다면 내 친구는 남편이 빨래를 통에 완전히 넣지 않는 것에 대해 영원히 묻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구나.
내가 그것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은 나의 문제였지만 내 친구는 관심도 없었을 수 있었겠구나.
내 문제였는데 남편의 문제라고 생각해왔었구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내가 만들어내고 나만의 문제들임에도 계속 보편화 시키면 상대의 고유한 문제로 만들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모세 때 모세의 영을 70원로에게 나누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70원로에 속하지 않은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도 영을 받아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와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즉 예언을 하고 있는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에게 문제가 아니고, 그들을 시기하는 여호수아가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자신의 문제를 남의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포용력이 크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그리스도교 종교 안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불교는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이고 천주교도 모든 종교에 대해 우호적인데 일부 개신교만 모든 종교에 대해 약간은 거부적인 소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가르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자신 안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천주교에 투영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 자는 당신을 지지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반대한 적이 없고 예수님처럼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함께 지지하는 동료요 형제로 여겨야 하는 것이 오늘 복음에 맞는 자세가 아닐까요?
사실 ‘내’가 커지면 남을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은 작아집니다.
우리는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넓은 포용력을 지닌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못 하게 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때 예수님은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관대함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한다면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 자비의 이끄심을 받아 그분께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넓은 의미에서 사랑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한 ‘형제’이고 한 편이다. 교회 밖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도 가짜는 얼마든지 있다.
하느님은 명백하게 알지 못하지만, 아마 이것은 우리의 착각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양심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에 맞는 삶을 통하여 인간을 위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즉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름은 갖지 않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런 사람이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 참된 예수님의 제자이다. 이들을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무조건 편견으로 대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협력자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알게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여야 할 선교이다.
우리는 가끔 죄인에게는 벌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교회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이방민족으로 여기고, 걸림돌이 되는 지체를 교회로부터 떼어 내라고 한다. 이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 가라지를 솎아냄으로써 교회의 평화를 해친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의 일치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오류에 눈먼 그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나 다른 종교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우리를 거슬러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분열과 평화와 진리를 거스르는 교설을 비판하고 금지하는 것이다. 분단과 분열을 일으키고 평화를 거스르는 면에서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고 결국 흩어버리는 자들이다.
하여간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며, 우리에게는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인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현존하는 살아있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습이기에 사랑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러기에 사랑 안에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한 인터넷 방송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18세 이하의 청소년 절반이 경제적 능력만 된다면 성형수술을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많은 청소년이 자기 신체 대한 불만족 그리고 여기서 오는 불안이 있음을 보여주는 설문조사였습니다.
사실 성형수술로 얼굴을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웃지 않는 얼굴을 웃는 얼굴로 바꾸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물론 얼굴 뼈 수술을 하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웃고는 있는 것 같은데 부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따라서 웃는 얼굴은 인공적인 성형이 아닌 본인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웃지 않는 사람은 대체로 너그럽지 못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분위기가 전달되어서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분위기를 보입니다. 그 상대방을 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입니다. 고스란히 나에게 다시 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내가 먼저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상대방의 얼굴을 통해 웃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아주 간단한 진리인데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자기는 원래 그렇다면서 스스로 철벽을 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에는 많이 웃었습니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계속 웃었습니다. 아주 썰렁한 농담에도 폭소를 터뜨립니다. 사랑하면 세상의 밝은 모습만 보게 되어서 웃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르면서도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두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지금으로 치면 어떤 사람일까요? 성당에 다니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들이 성당 다니지 않는다고 무조건 반대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처럼,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모두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해서 인상 쓰고 배척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이 전혀 없다는 생각으로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나의 뜻과 다르다고, 나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거리를 두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야 했습니다.
오늘의 명언: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실패를 두 번 하면 성공할 수 없다(조지 버나드 쇼).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9,40)
교회의 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
판단과 균형이 깨져서
혼란스러워진다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이성으로
경직되고
분열되기보다는
융통성 있는 포용으로
모두가 함께 하기를 바라신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살고
실천하는 이들을 좋아하십니다.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도 성장이 있고
발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적은 이런 삶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더 많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기적을 알아차리는 센서가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이들에게만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도 기도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은
나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 말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8-40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