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그리스 희극과 웃음: 아리스토파네스<구름>
<바쿠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16세기>
머리는 왕관 같이 쓰고 있는 것이 바로 포도 넝쿨이다.
디오니스소스 다른 이름으로는 바커스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로마 신화에서는 박카스 라고도 부른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신 사이에 태어나게 된 신이다.
제우스의 본 처 격(아내)인 헤라는 제우스가 세멜레에 대하여 질투를 하게 되어 제우스를 속여 제우스가 번개의 모습으로 나타나 세멜레를 타 죽게 만든다.
디오니소스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인 세멜레는 죽고 없었던 것이다.
제우스는 세멜레의 몸 속에서 6개월된 자기 아들을 꺼내고 이 아이를 헤라 몰래 자신의 넓적 다리 살을 가르고 안에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4개월 뒤에 아이가 다 자란 뒤에 꺼내 제우스는 헤르메스에서 헤라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서 길러 줄 것을 부탁하고 헤르메스는
니사 산의 깊은 동굴에 사는 요정들에게 맡겨진다.
이 아이가 바로 포도주의 신, 술의 신,, 디오니 소스,, 다른 말로 박카스 라고 부르는 신이다.
디오니소스(Dionysos), 다른 말로 바커스(Bacchus)
디오니스소스는 산 속에서 요정들과 표범들과 뛰어 다니면서 자랐고 6살 쯤 되었을때 산을 가다가 포도 덩굴에서 우연히 포도를 맛보게 되고,이 포도 덩굴에 막대기를 감아 주어서 덩굴이 잘 자라게 해 주어, 포도밭을 만들게 되었다.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다가 바구니에 넣어 방구석에 넣어 났는데 시간이 지나자
포도 향이 강해 지면서 술이 되었다고 한다.
디오니소스는 헤라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처음부터 헤라가 광기를 불어 넣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니게 되고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열광적인 "디오니소스 축제"가 생겨 나게되고,
특히 여성들이 담쟁이 덩굴을 감은 지팡이를 흔들면서 야수를 때려 죽이는 광란적인 것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후일 연극의 기원이 되었다고도 한다.
1,희극이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적어도 기원전 6세기 이후, 풍요와 풍작을 의미하는 신 디오니소스(포도의 신, 풍요와 환각의 신)를 기리는 축제가 있었고, 이 축제에는 참여자들이 노래를 부르며 디오니소스 신전 주변을 따라서 도는 풍습이 있었다. 풍작이 들면, 기쁜 노래를 불렀고, 흉작이 들면, 슬픈 노래를 불렀는데,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며 행렬을 벌렸고, 이러한 축제는 이미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 사회의 정례적인 행사로 굳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4년에 한번 씩 나흘간에 걸쳐서 거행되었고, 이 축제의 첫날에 5가지의 희극이 공연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디오니소스 축제 때에는 사람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환각에 이를 정도로 광란적인 노래와 춤을 추었고 또 염소의 머리를 탈로 쓰고 가장행렬을 벌였다. 탈을 쓴 남자들은 취기에 들떠서 발기한 남성을 내보이기도 했으며,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은 수레를 타거나 걸어서 디오니소스 신전 주위를 돌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런 노래를 komos라 했고, 노래를 동반하는 희극적 유희를 komodie(comedy)라 불렀다. 희극 작가들은 번거롭고 어려운 일상사를 비웃으면서 인간적인 것을 밝은 빛으로 조명하려 한것으로 보인다.
겨울이 와서 포도나무가 생기를 잃으면, 그리스 사람들은 디오니소스 신이 죽었다고 해석했고, 봄이 와서 다시 포도나무가 푸르러지면, 디오니소스가 부활한다고 해석했다. 축제를 벌이며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전설을 노래로 불렀던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포도의 풍작을 기원한 것인데, 포도 수확이 나쁠 때에는 축제를 위해 제물로 바친 염소가 디오니소스와 동일체라 해석했고 디오니소스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때 숫염소의 슬픈 신의 모습을 tragos라 했고, 이러한 슬픈 노래를 Tragodie라 불렀다.
디오니소스를 찬미하는 성가는 대개 지휘자와 참가자들이 서로 주고 받는 형식의 즉 교창의 형식을 띠고 있었는데, 이를 Dithyrambus라고 했다. 희랍어로 Di는 둘을 의미하는데, 연극이 오늘날 배우들의 대화로 이어지는 근거가 여기에서 마련된다. 이것은 연극이 대화로 되어 있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작가 아리스토파네스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50년-380년,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희극작가로, 기원 430년428년 무렵 전문적인 희극이론을 배워, 이를 작품 창작에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구름>(기원전 423년), <평화>(기원전 421년), <새>(기원전 414년),<개구리>(기원전 405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보자면, [심포지온]에서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를 고대 그리스 희극의 대표자로 평가할 정도였다.
그의 작품은 모두 44편이 있는데 그 가운데 11편이 현존한다. 그는 주로 당시의 동시대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희화화하고 비웃기 위해 희극을 썼는데, 특히 소크라데스와 당시의 궤변론 철학이 주된 타깃이 되었다.
작품 성향: 강한 시대 비판적인 특징을 띠고, 작품이 매우 투쟁적이다.비판의 대상은 주로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동시대의 주요 인물, 예를 들면 소크라데스, 유리피데스들이었고, 또 기원전 5세기에 있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도 그의 비판의 대상이었다. 평화를 원하지만 시국은 전쟁으로 이어짐을 비판하는 내용이 그의 작품의 중요한 주제를 형성하는데 이런한 내용은 그의 작품 평화(421)에 잘 나타나 있다.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가 하늘로 날아가 평화의 여신에게 구혼한다는 내용이 이 작품에 담겨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현실을 웃음과 해학을 통해 풍자하는 것이다.
현실의 결핍과 부족을 웃음을 통해 풍자하는 것이 웃음의 본질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선동자들 때문에 평화가 깨지고 전쟁이 지속된다고 보고, 선동자들을 비웃기위해 희극을 썼으며 또 작품에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선동자들이 젊은이들의 교육을 망치고 아테네의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비난하고 있다.
3. 작품 <구름>
기원전 423년에 초연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으로 기원전 423년에 디오니소스 축제 때 희극 경연대회에서 3등상을 수상을 수상했고, 이후 작가는 애통해 하며 이작품을 기원전 421년과 417년에 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의 배경으로는 새로운 교육방식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판이 자리 잡고 있다. 시대적 배경은 기원전 5세기로, 이 시기에 고대 그리스는 신화 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시대였고,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이끈 철학이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과 소크라데스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적 성격의 철학자들에게서 나왔다. 세계를 더이상 신화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대로 변화해가는 시대에 이 작품이 등장한 것이다. 구시대의 인물인 스트레시아데스는 천둥과 번개를 제우스가 만들어낸것으로 생각하지만, 신시대를 대표하는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자연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이미 이 시대가 역사시대,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며,스트렙시아데스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이 너 자신을 알라는 계몽적 철학 행위와 그를 중심으로 아테네에서 행해지는 새로운 교육방식을 궤변으로 파악하고, 이를 비판할 목적으로 이 희극을 썼다.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로서, 제우스가 신이 아니라 자연현상(구름)이 신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교육을 젊은이들에게 주입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런한 교육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한다(작품에는 웃음을 야기하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예를들면, 학생들이 교실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머리로는 땅 속을 관찰하면서 엉덩이로는 하늘을 관찰하는 모습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너 자신을 알라 라는 구호를 통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교육방식은 당시 소피스트 철학과 더불어 아테네의 젊은이들 사이에 폭넓은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아리스토파네스를 비롯한 아테네의 상류층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젊은이들의 교육을 망치는 행위로 생각하고,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비웃음의 표적으로 삼아서 이 작품을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