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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8. 묵상글 (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 종말이 와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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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8.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종말이 와도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파멸이 날이 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주님께서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속지 마라.
-따라가지 마라.
첫째로 전쟁이 나고 지진과 전염병과 기근이 생겨도
이 정도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답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말고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들 두려워하고 싶습니까?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 말씀이 공허한 말이 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말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사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긴말의 준말입니다.
제자들끼리 호수를 건너다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시며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이 풍랑 앞에 너희만 있고 이 고통 앞에 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고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이지요.
둘째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시는데
이 말은 속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왜 속는 사람이 많고,
누구에게 속고 무엇에 속는다는 말입니까?
속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속이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오늘 주님은 아무리 속이는 사람이 많아도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속을 때 보면 두려움과 욕심 때문에 속습니다.
우선 돈 욕심이 있는 사람에게 고수익을 약속하며 속이듯
속이는 사람이 인간의 욕심을 이용할 때 쉽게 속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속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편인 저는 웬만한 건강식품 선전에 관심이 없지만
여기저기 중병이 있는 사람은 아무렇게도 저보다 관심이 많고,
돌팔이들이 내가 치유자라거나 이 약이 좋다고 할 때 잘 속겠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도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일이 언제 일어나겠냐는 질문에
내가 그리스도라거나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자에게 속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는 종말과 관련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종말이건 세상의 종말이건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믿음 말입니다.
주님도 그날과 시간은 당신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리스도인 주님께서도 그때를 모르시고 때의 주인이신 하느님만 아신다고 했으니
자기가 그리스도이고 그래서 그때를 안다고 하면 그 자체로 사기꾼이 되는 겁니다.
셋째로 주님께서는 이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들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긴 해도 그렇다고
이들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대수는 아니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므로 우리에겐 한눈팔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면 된다는 확신이 필요하고
종말이 와도 두려워 않고 속지 않고 따라가지 않을 수 있는 확신이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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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8.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사실, 성전파괴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 예고된 바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루카 21,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치유해주고 행복하게 해주겠소.”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재물’이나 ‘능력’ 혹은 ‘세속정신’을 사이비 메시아로 따르고 섬기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곧잘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주장과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주님!
속이지도 속지도 말게 하소서.
재물에 속지 않고, 세속에 속지 않게 하소서
또한 나의 생각과 견해와 편견, 허영과 탐욕에 속지 말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내 자신과 내 자신의 뜻에 속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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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8.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깨어 준비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진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고,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 당하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 하였으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로마의 헤로데 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하였고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는데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외면하였으며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약속한 미래를 희망할 뿐입니다. 희망하는 만큼 지금에 충실합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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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8.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담아낸 ‘영상다큐’를 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1970년대와 80년대의 영상을 보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겨울이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길가에 수북이 쌓여있는 다 타버린 하얀색의 ‘연탄’이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종종 들려오는 뉴스 중에는 ‘연탄가스’가 있습니다. 저의 집에도 연탄가스가 있어서 자칫 큰일 날 뻔했습니다.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그는 ‘김장’이 있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이 함께 김장을 하였고, 맛있는 김치 속에 돼지고기를 삶아서 먹는 호사도 있었습니다. 동네 개울에서 타던 ‘썰매’가 있습니다. 손재주가 좋았던 큰 형은 멋진 썰매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호빵’도 있습니다. 달디단 ‘군고구마’도 있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 겨울은 그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던 달동네는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아파트’로 변했습니다. 겨울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연탄은 언제나 따뜻한 물이 나오게 해 주는 가스보일러에게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맞벌이 부부와 핵가족은 더 이상 김장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트에서 종갓집 김치를 간편하게 사서 먹습니다. 동네 개울에서 타던 썰매는 보이지 않고 많은 젊은이들은 스키와 스노보드를 타고 있습니다. 먹을거리도 많이 변했습니다. 피자, 햄버거를 먹습니다. 배달의 민족답게 원하는 것들은 배달시켜서 먹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온 시절은 아니지만 40년대와 50년대의 영상을 볼 때도 있습니다. 산업화 이전의 대한민국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대한민국은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 가난한 나라가 이념의 대립으로 둘로 나뉘었습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나라는 비극의 3년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전쟁의 결과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전쟁의 결과 많은 사람이 부상당하고 죽었습니다. 전쟁의 결과 그나마 있었던 산업기반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 세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놀라운 경제성장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누나는 가발공장에서 일하였고, 버스 차장으로 일하였고, 좁고 어두운 방에서 미싱을 돌렸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형들은 인력거를 몰았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밤을 새우면 일하였습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돌렸습니다. 삼촌은 서독의 탄공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고모는 서독의 병원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아저씨들은 사막의 나라 중동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보아왔던 생생한 기억들입니다. 그리고 2023년 대한민국은 경제력으로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 ‘한류’를 보여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Made in Korea'는 부끄러운 제품이 아니라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는 자랑스러운 제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자원이 풍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정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죽었고, 제자들은 모두 무서워서 숨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도 새싹은 올라오듯이 죽음을 넘어, 시대를 넘어 부활의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교회는 갈릴래아라는 좁을 울타리를 넘어 세상 끝까지 세워졌습니다. 239년 전에 세워진 조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의 모진 광풍이 불었습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교하였습니다. 239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쳤던 곳은 ‘성지’가 되었습니다. 원조를 받던 교회는 이제 원조를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두웠던 시대에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매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어나는 놀라운 모습을 저는 직접 보았습니다. 신앙은 혼자 뛰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신앙은 함께 뛰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뒤에 오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열정과 헌신으로 복음을 살면 좋겠습니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꿈은 확실하고 그 뜻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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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8.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마음은 이미 고통과 번민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주님 자신에 관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가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하셨습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아버지,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씀하시며 기도하셨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이렇게 순명하셨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간적인 고뇌와 번민이 없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참 인간이시며 동시에 참 하느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번민의 순간은 다가옵니다. 우리 각자 신앙의 길 위에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고통의 순간은 다가옵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이미 보여 주신 순명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부활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고통과 고난이 우리 앞에 있더라도 주님처럼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면 무너졌던 성전은 다시 세워질 것이고, 죽었던 모든 곳에서는 새 생명에 숨 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눈을 두지 마십시오.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주님 가신 길에 내 눈을 두십시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고통과 고난이 우리 앞에 있더라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하느님 앞으로 걸어가십시오.
예루살렘
부귀와 영광이 아닌
겸손과 순명의 왕이 사셨던 곳
어둠이 아닌
빛의 나라로 이끄셨던 왕이 지나가신 곳
무엇보다 사랑이
무엇보다 가치 있음을 외치신 왕이 숨 쉬었던 곳
끝내 그 사랑을 포기 못 해
목숨 바쳐 사랑을 지켰던 왕이 서 있었던 곳
저는 지금, 이 순간
이곳
예루살렘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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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8.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교수이자 심리학자인 로버트 에먼스는 사람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10주 동안 매주 1번씩 기록을 하게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는 감사한 일들을, 두 번째 그룹에는 스트레스를 느끼게 했던 일들을, 세 번째 그룹에는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일들을 그저 객관적으로 적게 했습니다.
연구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감사할 일들을 적었던 첫 번째 그룹만 현실의 삶에 더 만족하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운동을 더 자주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건강이 증진되었다고 합니다.
이 연구 결과만을 보면 무조건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하기 어렵다고 느낄 때, 더욱 감사해야 할 때임을 깨닫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고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더 상황이 안 좋아집니다. 마찬가지로 감사할 일이 없다며 자기 스트레스만 바라보고 있으면 분명히 더 안 좋아지고 맙니다.
사실 우리 뇌는 가상의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상 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 안에서 VR 안경만 써도, 롤러코스터를 타야 경험할 수 있는 짜릿한 긴장감이나 공포를 거의 비슷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뇌는 실제 경험과 상상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본인의 생각하는대로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계속 가지면 실제로 감사하면서 얻는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스트레스만 계속 나열하게 되면 불만족 속에서 힘든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과 글,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아름다운 돌과 자연 예물로 꾸며졌다면서 성전 건물과 봉헌 예물을 보고 감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서지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실제로 성전은 기원후 70년경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은 성전의 파괴만을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슬퍼하고 절망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하늘의 무서운 징조가 일어난다고 해도 바로 끝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인이 말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최고의 복수는 상대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의 가치를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것이다(김홍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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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8.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파거불행(破車不行), 노인불수(老人不修)-
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라의 고승 원효는 발심수행장에서 이릅니다.
“파거불행破車不行), 부서진 수레는 갈 수 없듯이 망가지고 무너진 몸은 더 이상 쓸 수가 없고, 노인불수(老人不修), 늙은 사람은 닦을 수가 없습니다.”
좀더 젊고 건강하고 힘있을 때 힘껏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새삼 오늘 지금 여기 주님과 함께 살아 수행하는 제자리, 꽃자리가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 묵상중 두루 떠오른 내용들입니다. 우선 떠오른 시편 성구입니다.
1.“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시편90,10)
이어 중세기 스페인의 신비가이자 성녀인 아빌라의 대 데레사가 노래한, 후대인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으며 널리 불리는 기도문입니다. 시간되면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2.“아무것도 너를 어지럽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부족한 것이 아무도 없으니
오직 하느님만으로 넉넉하도다”
불교 스님의 다음 말씀도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3.“나이가 들게 되면 몸뚱이도 문제지만 마음이 더 문제입니다.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아상我相), 이런 게 가득 찹니다. 남의 말을 잘 안 듣게 되어있어요. 수행이라는 것이 아상을 녹이는 건데, 나이가 들수록 아상이 공고해지기 때문에 수행이 어려운 것입니다. 아상을 녹이는 수행이요,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을 비우는 수행입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법정이 소개하는 효봉스님 말년의 묘사입니다.
“스님의 성격은 천진한 어린애처럼 풀려 시봉들과 장난도 곧 잘 했다. 육신의 노쇠에는 어쩔 수 없는 것, 무상하다는 말은 육신의 노쇠를 두고 하는 말인가. 스님은 가끔 ‘파거불행(破車不行)이야.’라고 독백을 하였다.”
4.또 부처님께서는 “설사 백년을 산다 해도,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수행하지 않는 사람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말씀하시며, 자경문에는 “3일간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이고, 백년을 탐하여 모은 재산은 하루 아침에 먼지가 된다.” 이릅니다. 새삼 하루하루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생명과 빛의 진리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5.이사야서 다음 말씀도 우리 마음을 더욱 하느님 말씀에 귀기울이게 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40,6-8)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 예언서에서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를 깨우치는 현자 다니엘이 참 통쾌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꼭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예표처럼 생각되는 다니엘입니다.
기원전 6-2세기 중동 제국들의 흥망사를 보면서 역시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은 사라져간다는 진리를 확인합니다. 금을 상징하는 바빌론, 은으로 상징되는 아시리아, 청동으로 상징되는 페르시아, 그리고 그리스제국이 사라져갔습니다. 모든 제국이 사라진 뒤 영원한 나라가 예시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2000년 이상 계속되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예언처럼 들립니다. 그리스제국에 이어 로마제국도 사라졌고 그 후로도 얼마나 많은 제국들이 생겨났다 사라져갔는지요! 미제국도 언젠가는 사라져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을 모시고 있는 가톨릭 교회는 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원조인,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왕 역시 건재하며 당신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를 이끄십니다. 다음 복음에서 약속하신 그대로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다 사라져도 주님 교회 안에 정주하는 우리는 영원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성전 외관의 화려함에 놀라며 집착하는 이들에게 이 또한 사라질 것임을 예언하시며 보이는 것 넘어 당신 안에 굳건히 자리 잡을 것을 은연중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0년대 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 초토화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니 그동안 사라져간 위대하고 화려했던 건물의 성전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혼란스럽다 해도 끝은 아니니 정신 바짝 차리고 제자리, 꽃자리에서 깨어 제 역할에 충실할 것을 권하는 주님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를 따라가지 마라.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이 아니다.”
주님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 꽃자리에서 결코 부끄럽게 경거망동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고 깨어 당신과 함께 묵묵히, 충실히 살라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지극한 인내로 정주의 제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찬미와 감사중에 기쁘게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역시 나누고 싶은 제 좌우명 기도 마지막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께서 불러주신
정주의 이 꽃자리에서
자신을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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