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8~29일 이틀 동안 경남 하동에서 국제슬로시티 글로벌포럼이 열렸다. 이탈리아·영국·미국·노르웨이·캐나다 등 15 개국에서 온 슬로시티 대표와 관련학계 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국제행사였다. 포럼은 국제슬로시티 과학위원회 발족을 기념해 마련됐고, 하동은 그 모태 도시가 됐다.
포럼 참가자들은 '자연·전통과 함께하는 느린 삶'을 추구하자는 슬로시티이념(Cittaslow)을 재확인했다. 쌍계사에서 산사길 느리게 걷기와 경내 투어, 하동 녹차 체험 등 행사도 가졌다. 국제슬로시티 사무총장인 올리베티씨는 하동은 정말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며, 슬로시티 정신을 그대로 지켜나가고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도시라고 칭찬했다.
슬로시티 국제연맹은 1999년 이탈리아에서 발족했고, 현재 20개 나라 132개 도시가 가입해 있다. 하동군은 작년 2월 군 내 악양면이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이를 계기로 악양면에 모두 6개 코스 총 45km의 슬로길이 생겨났다. 맑고 깨끗한 섬진강과 지리산의 빼어난 자연경관, 녹차와 대봉감, 매실 등 토속적인 슬로푸드, 여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하동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그 길에 녹아 있다.
하동군 이종현 공보계장은 하동은 '느림의 3박자'를 갖춘 곳이라고 했다. 자연·사람·문화를 말한다. 자연은 지리산과 섬진강이다. 그곳은 여유로운 마음과 느긋한 걸음으로 볼 때 그 참맛을 느낄 수 있고, 그 품에 안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하동은 태고적부터 느림의 근원을 안고 있는 도시다. 최근엔 귀농예술인을 중심으로 '지리산학교'라는 느림을 실천하는 자연주의 운동도 확산되고 있다.
하동은 사람도 느긋하고 여유롭다. 그래서 소통의 도시요, 화합과 통합의 고장이다. 경상도에 속해 있지만 몇 걸음 옆이 전라도다. 학교도 시장도 강 건너 하동으로 다니는 전라도 사람들이 많다. 마찬가지로 강 건너 전남 광양시 다압면 무동산에 아침·저녁으로 등산 다니는 하동사람들도 부지기수다.
그 일대 찻집 주인들도 대부분 하동 사람이다. 경상·전라도 구분 없이 강 건너 시집·장가가는 처녀·총각도 많다. 화개장터도 그렇다. 경상도 하동, 전라도 구례 사람들이 어우러져 장을 이룬다. 그래서 굳이 도(道)를 가를 것 없이 '경전도(慶全道)'라고 해야 맞을 법하다.
여기에 더해 하동엔 느림의 역사와 문화가 배어있다. 지리산 청학동은 곧 느림을 상징하는 단어다. 그곳에선 아직도 옛 선비 문화가 주인이다. 문명의 변화에 개의치 않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화개장터 주막도 느림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섬진강과 지리산이 어우러진 이곳에서 영·호남 사람이 만나 세상사는 얘기며, 나랏일 걱정이며, 가정사 푸념까지 한 번 주막에 앉으면 시간을 잊고 일어서질 않는다.
하동군은 작년부터 하동 사람들의 자부심인 문학자산을 느림의 문화와 접목시키고 있다. 박경리, 이병주와 같은 문학의 거목을 만날 수 있는 곳이 하동이다. 하동군은 작년 10월 '문학수도 하동'을 선포하고 슬로시티와 결합한 도시마케팅에 나섰다.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악양면 최참판댁 입구를 포함하는 '토지길 걷기' 프로그램을 만든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다. 하동문인협회 최영욱 회장은 토지길 걷기 안내 자원봉사를 맡는 바람에 하루도 쉴 틈이 없다고 자랑 섞어 푸념했다. 김남조 시인은 하동을 이 땅에 마지막 남은 보석 같은 땅이라고 했다. 토지의 문학 향기가 어우러져 유장하게 흐르는 섬진강과 넉넉하고 조용하게 펼쳐진 평사리 들판을 걷다보면 도시에서 찌든 삶의 찌꺼기가 어느새 씻겨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