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학창시절, 미술교생으로 오신 여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내준 첫 과제였다. 난 하얀 도화지에 큼직한 바위를 그려 넣고 그 위에 외롭게 자라는 노송 한 그루를 심어서 제출했다. 딴엔 아주 멋들어진 작품이라 여겼지만, 당시 좋은 점수를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때 급우들은 주로 소나무 은행나무 참나무 같은 수종을 소재로 삼았는데, 그중 소나무가 제일 많았던 기억이 있다.
▲ 해질 무렵 왕피천 하류에서 은어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왕피천은 오래 전부터 손꼽히는 은어낚시 명소로 알려져 왔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 사람의 절반 가까운 숫자가 소나무를 좋아한다고 한다. 민속학자들은 한국 사람은 소나무 아래서 태어나 소나무와 살다가 소나무 아래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우리 문화를 ‘소나무 문화’라 단정하기도 한다.
울진(蔚珍)은 ‘소나무 왕국’이다. 해안가든 강가든 산속이든 어디든지 소나무가 울창하다. 한반도에 터 잡은 고을 중에 소나무 없는 곳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울진의 소나무는 여느 고을의 소나무와는 격이 다르다. 굽어 자라지 않고 하늘을 향해 쭉쭉 시원스레 뻗는다. 한 마디로 기골이 장대하다. 낙동정맥 기슭의 깊디깊은 산골인 소광리는 ‘소나무 중의 소나무’가 자라는 곳이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원형으로서 가장 혈통이 좋다는 금강송(金剛松)이다.
▲ 그윽한 솔향과 솔바람 소리 들리는 소광리 금강송 숲은 오염된 영혼을 맑게 순화시켜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파란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솟아오른 금강송이 보고파 찾아가는 울진. 몇 년 전 개통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영주로 나와 봉화에서 낙동정맥의 답운치를 넘어도 좋을 것을 굳이 영동~동해 고속도로를 이용해 삼척을 지난 건 그 코스로만 접근해야만 했던 예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울진 최북단의 고포 마을은 1968년 11월 울진·삼척 지역으로 침투했던 무장공비들이 상륙 포인트로 삼았을 정도로 호젓한 곳이지만, 오래 전부터 돌미역 생산지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미역이 잔뜩 널려 있어야할 아담한 해안이 텅 비어있다. 바다가 보이는 평상에 한가하게 앉아 드나드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던 마을 노인이 나그네에게 귀띔한다.
“고포 돌미역은 옛날에 임금께 진상했기 때문에 하시라도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4월20일부터 5월 말일까지 하면 끝나뿐다.”
▲ 1.파돗소리 들으며 조약돌 줍는 고포 마을 소녀. 조약돌을 민물에 며칠 담가두면 때깔이 아주 고와진다고 일러주었다. 2.조선시대 진상품으로 유명한 돌미역을 생산하는 고포 마을은 작은 개울로 강원도와 경북으로 나뉜다. 길 왼쪽이 ‘강원 고포’, 오른쪽이 ‘경북 고포’다.
기온에 따라 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해도 고포 주민들은 미역의 질이 제일 좋은 봄 한 철만 채취한다. 6월 이후엔 바다에 미역이 아무리 많아도 절대 채취를 하지 않는다. 미역도 산에서 나는 나물과 똑 같아 너무 억세면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익 때문에 질이 좋지 않은 미역을 생산하면 소비자가 어찌 고포미역을 믿고 구입하겠느냐는 게 노인의 설명이다. 또 바닷속 미역은 전복의 먹잇감이 되기 때문에 일거양득이라고.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일이 다반사인 게 요즘 인심인데, 울진의 초입에서 이런 지혜를 만난 건 기쁨이다.
노인의 말대로 울진의 고포미역은 부산의 기장미역과 함께 조선시대에 왕실에 진상했던 명품이다. 노인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왕자가 태어나면 고포미역을, 공주가 태어나면 기장미역을 썼다”며 고포미역 자랑에 여념이 없다. 이런 명성 때문에 다른 지역의 미역을 고포미역이라 속이고 파는 경우도 있지만, 고포 어촌계 직인이 찍힌 걸 사면 속지 않고 적어도 이 고포마을에선 진품만 구입할 수 있다. 고포 주민들의 1인당 평균 소득은 1천만 원선. 돌미역 채취로 얻는 연소득은 6백만 원, 전복 등을 채취해서 4백만 원쯤 벌어들인다.
또 고포 마을은 한 마을 2도(道)의 독특한 마을이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작은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강원도와 경상북도로 나뉜다. 총 36세대가 살고 있는데, 우연히도 경북이 18가구, 강원도가 18가구다. 북쪽은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2리 땅이요, 남쪽은 경북 울진군 북면 나곡6리 땅이다. 그래서 북쪽에 주차되어 있는 승용차의 번호판은 강원이고 남쪽은 경북 번호판을 달고 있다. 전화 지역번호도 033과 054로 나뉜다. 주민들은 ‘강원 고포’, ‘경북 고포’라 나눠 부른다.
▲ 산태극수태극을 이루며 굽이 돌아가는 불영계곡은 오래 전부터 울진의 명소로 이름 날렸다.
일제 때 행정구역을 나누면서 담당자가 실수한 탓이지만, 고포 마을 주민들은 내남 가르지 않고 화목하게 지낸다. 항구도 같이 쓰고, 노인정과 어민복지회관도 사이좋게 이용한다. 그래도 당장 불편한 건 ‘강원 고포’ 사람들. ‘경북 고포’ 주민들이 울진 읍내에서 일 보고 오는 데 반나절이면 되지만, ‘강원 고포’ 사람들이 삼척 시내를 다녀오는 데는 곱절의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강원 고포’를 경북에 포함 시켜주길 희망했고, 이는 거의 성사 단계까지 갔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바다는 강원에 속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포기했다고 한다. ‘문전옥답’은 주지 않고 달랑 집주소만 바꾸면 당장 생계를 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포 마을을 벗어나면 7번 국도는 울진원자력발전소로 이어진다. 부구천을 건널 무렵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도로변엔 ‘죽음의 핵 폐기장 결사반대’ ‘핵 폐기장은 청와대에’ 등 울진에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어지럽게 걸려있다. 현재 나라 밖에선 북한의 핵 때문에 각국 정상 간에 의견조율이 한창이고, 안에선 핵 폐기장 후보지 선정 문제로 시끄러운데, 울진은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었다. 지난 3월 울진(근남면 산포리)이 경북 영덕(남정면 우곡리), 전남 영광(홍농읍 성산리), 전북 고창(해리면 광승리)과 함께 핵 폐기장 후보지로 선정되면서 주민들의 감정은 실망을 넘어서 분노로 이어진 것이다.
▲ 1.우리나라 명승 제6호인 불영계곡은 물줄기를 따라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2.비구니 절집답게 단정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불영사. 3.불영사 본전인 대웅보전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물로 외관이 매우 짜임새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4.대웅보전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는 채색이 유려하고 묘사가 정밀하여 영산회상도가 갖춰야할 품격이 돋보인다. 5.덕구계곡의 용소폭포. 덕구온천 원탕이 솟는 덕구계곡은 계곡미도 아주 뛰어나다.
울진과 원자력, 즉 핵과의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3월 건설을 시작해 1988년 완공된 원전 1호기를 시작으로 1989년 2호기, 1998년 3호기, 1999년 4호기가 차례로 가동에 들어갔다. 또 5호기와 6호기가 각각 2004년과 2005년에 완공될 예정이고, 앞으로 원전 7·8·9·10호기도 이곳에 건설할 계획이다. 울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원자력단지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주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발전소 건설 때문만은 아니었다.
“핵 폐기장이 문제지요. 울진에 원전 10호기까지 세우고 핵 폐기장까지 지으면 우리 보고 고향을 떠나란 말인가요?”
군청 한쪽의 농성 천막을 지키고 있던 주민이 언성을 높인다. 정부는 이미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선 울진엔 핵 폐기장을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여러 차례 했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보지에 꼭 끼워 넣는다는 것이다. 원전 10호기까지 세울 정도로 양보했으면 됐지 해도 너무 한다는 입장이다.
울진 주민들은 맨 처음 원전이 들어설 때만 해도 큰 공장 하나가 들어서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말한다. 물론 부가적으로 따라붙었던 재정지원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가 발생했다.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원전 중단 사태는 해파리·새우·멸치떼 등이 취수구로 몰려들어 냉각수 유입이 어려워지자 발생하는 사소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울진 군민들은 그 때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러다 지난해 11월엔 3호기 냉각수 내 방사선 오염으로 국내 최초로 ‘백색 비상’이 발령되기도 했다. 백색 비상은 원자력발전소에서 이상 사태가 발생해 작업자 등이 원전 안에서 0.1~0.5mSv(밀리시버트)의 방사선 피폭을 받을 것이 예상됐을 때 발령하는 비상등급. 다행히 피폭된 작업자는 없었지만, 울진 군민들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이런 상황인데 핵 폐기장까지 짓는다면….”
▲ 1.소광리 금강송 군락지 입구의 500년 묵은 금강송. 소광리 터줏대감이다. 2.울진이 핵 폐기장 후보지가 된 것을 반대하는 농성장. 울진엔 이미 여러 기의 원전이 있음에도 정부가 약속을 어기고 다시 핵 폐기장 후보지로 선정하자 군민들 전체가 반발하고 있다. 3.울진의 대표적 명소 중 하나인 성류굴. 12개의 크고 작은 광장과 5개의 연못으로 형성되어 있다. 4.원남면 해안도로의 촛대바위. 망양정에서 덕신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경치가 아주 뛰어나다.
발아래 펼쳐지는 불영계곡의 비경을 바라보며 소광리 금강송로 향하는 길 내내, 농성장을 지키던 주민의 마지막 말이 귓전을 계속 맴돌았다. 가슴이 답답해질수록 곧고 푸르른 금강송이 더욱 보고파졌다.
낙동정맥 삿갓재(1,119m) 기슭의 소광리 금강송 숲으로 가는 길은 가슴 벅찬 행복의 길이다. 굽이도는 임도를 따르며 맑은 대광천 물길을 몇 번을 건넜던가 까마득하다. 화전민들이 관솔불을 켜고 긴 밤을 맞아야 했던 두메산골로 한없이 들어가서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에 다달았을 땐 해는 이미 낙동정맥 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해질 무렵이나 이른 새벽에 솔숲 길을 걸어본 사람은 느낄 것이다. 앞만 보고 달음박질하느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삭막해진 영혼을 순화시켜주는 푸르스름한 빛과 붉은 살결, 그리고 온몸에 감겨드는 솔향과 솔바람…. 고결한 신부님의 뛰어난 설교도, 도통한 선승의 게송(偈頌)도 이보다 마음에 와 닿지 않을 것이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엔 언제 나타났는지 살진 반달이 500년 묵은 금강송 솔가지에 기대어 있다. 소나무 뿌리처럼 땅바닥에 드러누워 팔베개를 하고 소나무와 반달의 속삭임을 엿듣는다.
소나무는 궁궐이나 가옥을 짓거나 당시 중요한 수송수단이던 배를 만드는 재료였다. 조선시대엔 질 좋은 소나무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송목금벌(松木禁伐)정책을 시행했다. 지금 곳곳에 남아있는 황장금표(黃腸禁標)가 그 증거인데, 옛 문헌을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황장봉산은 강원·경상·전라도의 32읍 41군데에 이른다. 그중 이곳 소광리의 금강송은 여러 황장봉산들의 소나무 가운데서도 최고의 품질인 진골(眞骨). 경복궁의 새 건물들도 이곳에서 나는 금강송으로 지었다.
소광리 금강송은 우선 키가 크고 곧으며, 위와 아래의 폭도 거의 일정하다. 또 껍질이 얇으면서도 나이테의 간격이 좁고 비교적 일정해서 비뚤어짐도 거의 없고, 몸통 속이 황금색을 띠고 있어서 매우 고급스럽다. 평균 수명도 다른 소나무에 비해 10년 정도가 길어 평균 70년 이상이다. 이런 금강송 한 그루에선 웬만한 집 한 채는 거뜬히 지을 정도의 목재가 나온다 하니 ‘토종의 힘’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반도 최고의 금강송 숲에서 솔향과 솔바람을 자장가 삼아 잠들고 싶지만, 근처는 워낙 오지라 잠자리가 마땅치 않다. 보호구역이라 함부로 천막을 칠 수도 없는 일이다. 숲에서 들려오는 노루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깜깜해진 소광리숲을 벗어나 국도 건너의 통고산(1,066.5m) 심미골로 들어간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휴양림 안에 자리한 머슴공방을 찾아간다. 울진엔 나무 공예를 하는 공방이 서너 곳 있는데, 통고산에 자리한 머슴공방은 금강송과 가장 가까이 접한 공방이다. 주인장 박재근씨의 작업실엔 여느 공방보다 짙은 솔향이 가득하다. 바로 금강송에서 나오는 솔향이다. 전시실엔 금강송으로 다듬은 술잔 등의 목제품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박씨는 그러나 금강송은 보호목으로 지정된 까닭에 구하기가 매우 어렵단다. 보통 두 단계를 거쳐야 손에 쥘 수 있는데, 그것도 몇 조각에 불과하다. 평생 금강송과 살아온 박씨는 금강송 ‘신도’였다. 소광리에서 자란다고 모두 금강송이 아니라는 그이에게 나그네는 외관상 금강송을 구별할 수 있는 비법을 물었다.
“껍질은 얇고 거북등처럼 갈라져있으며, 색깔은 나무 아래쪽을 제외하곤 대부분 옅은 적색을 띠고, 솔잎이 연황색을 띱니다. 또 나무 아랫부분에 잔가지가 없이 곧게 뻗어있으면 진짜 금강송입니다.”
몇 번을 들었는데도, 눈썰미 부족한 나그네는 진골(眞骨)의 금강송과 성골(聖骨)쯤 될 울진 소나무의 미세한 차이를 아직도 잘 모른다. 하지만 올곧게 자라는 토종 소나무숲 속을 거닐며 누린 행복감에 소광리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 1.바다에서 수확한 멍게를 손질하는 덕신리 어민들. 2.후포면 거일리 해안에 세워진 울진대게 상징물. 거일리는 옛부터 대게가 많이 잡힌 곳이다. 3.꿩대신 닭? 비싼 대게 대신 싼 홍게를 사서 삶아먹는 관광객.
인근에 자리한 불영사 또한 나그네의 마음을 행복의 연장선에 머물게 해주는 절집이다. 비구니 절집답게 정갈한 분위기가 감도는 불영사는 국도변에 주차하고 10분쯤 걸어야 한다. 절만 급하게 보고 서둘러 떠나게 만들지 않고 걸어가면서 잠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절집이다.
우람한 소나무와 굴참나무 어우러진 들머리 숲길은 어느 계절에 지나도 좋다. 버찌가 까맣게 익어 가는 초여름 길을 따르면 불영사의 수문장 역할을 했던 굴참나무가 반긴다. 의상이 심었다고 전하는 이 굴참나무는 20여 년 전 1,300여년이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지나는 이들이 그 밑둥에 하나둘 쌓은 돌들이 어느새 언덕을 이뤘으니 죽어서도 본디 임무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불영사는 한 떨기 연꽃이다. 천축산(653m)에서 흘러내린 암봉들이 꽃잎이라면 불영사 자리는 화심(花心)인 셈이다. 불영사 경내에 들어서면 수선화 곱게 핀 연못이 눈길을 끈다. 창건 당시 부처 모양의 바위그림자가 비쳤다는 연못이다. 현재 불영사엔 대웅보전 응진전 극락전 관음전 명부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연못을 둘레로 앉아있다.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건물들이고, 그 이전 건물로는 응진전(應眞殿·보물 제730호)이 유일하다. 연못을 시계 방향으로 돌면 응진전을 먼저 볼 수 있다.
연못 서쪽에 자리한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벽체가 발그레한 팥죽색이라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조선 중기에 세워진 이 건물은 본래 영산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빛과 바람이 통하도록 양쪽 칸에다 설치한 살창, 맞배지붕의 건물이면서도 측면에도 박공(합각머리나 맞배지붕의 양쪽 끝머리에 ∧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판이나 벽)과 공포(처마 끝의 하중을 떠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맞춰서 댄 나무쪽)를 댄 점도 특이하다고 평가한다.
안쪽의 대웅보전 주변엔 여러 전각들이 처마를 맞대고 옹기종기 앉아있다. 본전인 대웅보전(보물 제1201호)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겹처마팔작지붕 건물. 짜임새 있는 외관에 각 부재의 조각솜씨가 뛰어나다는 평가다. 내부의 단청과 탱화는 18세기 영남지역 특유의 양식과 색상을 잘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와 불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보물 제1272호)는 채색이 유려하고 묘사가 정밀하여 영산회상도가 갖춰야할 품격이 더욱 돋보인다. 게다가 이 탱화는 그림 아랫부분의 연화질(緣化秩)에 제작연대, 제작자, 제작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어 제작시기와 배경을 확실히 알 수 있어 18세기 초 조선 불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눈길을 끄는 건 대웅보전 기단 아래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는 한 쌍의 돌거북이다. 불영사터에 가득한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동해 용왕의 화신인 거북을 모셔둔 것이라고 한다. 등짐이 버거워 안쓰럽지만 어쩌랴. 그 덕분인지 임진왜란 이후 큰 불이 없었음을….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돌거북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준다.
이제 길은 다시 불영계곡을 따라 울진 읍내로 이어진다. 불영계곡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오래 전에 울진 출신의 지인과 불영계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자연을 바라보는 취향이 비슷했던 우리는 서로 맞장구를 치며 불영계곡 예찬을 늘어놓았다. 북녘의 금강산에 있는 상팔담에 뒤지지 않는다는 둥, 산양도 다니기 어려울 정도의 가파른 암벽에 꼿꼿이 뿌리박고 서있는 소나무 군락이 경이롭다는 둥 우리는 비교적 박자가 잘 맞았다. 소광리 금강송 얘기도 그 때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대화 말미에 정색을 하더니 “도로를 누가 낸 건 줄 아냐”고 물었다. “……” 질문의 뜻을 몰랐으므로 필자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불영계곡에 길을 넓게 뚫고 포장하는 일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에 가로막혀 동서 교류가 원활치 않았던 오지에 사는 울진 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다. 허나 이곳은 워낙 험한 계곡길이라 당시 기술과 장비로는 결코 수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1982년 8월16일, 드디어 불영계곡 확포장공사를 위해 첫 삽을 뜨게 된다. 1982년은 울진 사람들을 오늘도 긴장하게 만든 원전 건설이 시작된 바로 그 해다.
그런데, 불영계곡 확포장공사 임무엔 민간 건설업체가 아니라 1117 야전공병단 군인들이 투입됐다. 그만큼 난공사였기 때문이리라. 이들은 전쟁 중에 작전을 수행한다는 각오로 작업에 들어갔고, 결국 2년여만인 1984년 10월30일 총 54.4km 구간의 도로가 뚫렸다. 당연히 희생이 따랐으니, 당시 꽃다운 나이의 군인 9명과 민간인 운전기사 1명을 포함 모두 10명이 사망했다.
빛내 마을 근처에 서있는 도로준공기념탑 조형물의 인물들이 굴착기를 들고 철모 쓴 군인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후 나그네는 이 불영계곡을 지날 땐 불영정이나 선유정 등 왠지 멋대가리 없어 보이는 콘크리트 정자에 오르는 일은 빼먹어도 공병단 군인들이 씩씩한 표정으로 불영계곡을 바라보는 동상이 서있는 기념탑에 잠시 들렀다 간다.
이제 발길을 덕구온천으로 돌린다. 덕구온천은 울진에 왔다면 꼭 한 번은 들러야할 곳이 아닐까 한다. 물론 온천욕 때문이 아니다. 온천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덕구온천이 나그네의 발길을 잡아끄는 건 노천탕에 대한 정감 때문이다. 현대식 건물 안에 조명으로 화려하게 꾸민 ‘가짜’ 노천탕이 아닌, 대자연 속의 노천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1984년 여름에 홍수로 유실되는 바람에 지금은 비록 이용할 순 없지만, 덕구계곡 원탕에서 노천탕의 낭만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바위를 쪼아 만든 노천탕 욕조에서 눈 덮인 겨울날 천연 온탕과 냉탕을 즐겼을 예전 정취를 생각하면 대대로 이를 경험했을 주민들이 부럽다.
▲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왕피천. 지형적인 탓으로 물줄기 주변엔 원시의 자연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원탕이 자리한 덕구계곡은 자체의 풍치만으로도 충분히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맑은 계류가 쏟아지는 용소폭포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마당소엔 용이 된 이무기 전설이 전하고, 하얀 초롱꽃, 보랏빛 꿀풀 같은 야생화가 가득 피어있는 오솔길은 협곡임에도 어린이도 혼자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다. 솟구치는 온천수에서 목욕을 할 순 없어도 발 정도는 담글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 정도면 덕구(德邱)라는 이름에 걸맞는 덕(德)을 지닌 계곡이 아닌가.
덕구온천 원탕을 다녀와 장양수 급제패지(국보 제181호)가 보관되어 있는 월계서원과 논에 객토작업을 하다 발견된 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를 살핀 뒤 망양정에 도착했을 땐 바다 위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는 한밤중이었다.
옛부터 망양정은 우리나라 최고의 팔경이라는 관동팔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혔다. 일찍이 관동팔경의 그림을 두루 살펴본 조선 숙종이 그중 망양정이 제일 낫다고 하여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글씨를 써보내 걸도록 했고, 송강 정철도 우리말의 묘미를 한껏 살린 가사 ‘관동별곡’의 마무리를 이곳서 장식했으며, 진경산수의 선구자인 겸재 정선도 정자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남겼던 절경으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손때가 묻은 곳이다.
그러나, 불영계곡과 왕피천이 합류해 동해로 들어가는 하구 근처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지금의 망양정은 옛 시인묵객들이 감탄으로 다녀갔던 그곳이 아니다. 지금의 자리는 ‘너른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는 망양정(望洋亭)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빼곡한 소나무에 가로막혀 바다 전망이 좋지 않다. 수면에서 직접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 광경을 보는 것도 어렵다. 잔뜩 기대를 하고 망양정을 찾은 관광객들도 아쉬운 표정을 숨기진 못한다. 새벽 운동을 나왔던 마을 노인들이 “올해에 이 앞의 소나무를 베어낼 예정”이라고 일러주지만, 그렇다 해도 옛 시인들이 누렸던 망양정의 정취를 이곳서 되새긴다는 건 왠지 성이 차지 않는다.
기록을 살펴보면 망양정은 원래 이보다 남쪽인 기성면 망양동에 있었다. 특별한 이정표 하나 없어 물어물어 찾아간 망양정 옛터. 아래서 올려다보니 동해에서 흔한 바닷가 언덕이고, 현재의 망양정 자리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20m쯤 되는 언덕의 망양정 옛터에 올라서는 순간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파노라마를 한눈에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바다가 거기에 있었다. 비록 정자는 사라지고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듯한 늙은 소나무 서너 그루만이 그 터를 지키고 있었으나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깨닫는다.
▲ 1.월송정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월송정 주변의 솔밭. 2.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절경에 감탄했던 옛 망양정터. 현재의 망양정 자리보다 전망이 훨씬 좋다. 3.소광리 계곡 깊은 곳에 자리한 달우 자수정광업소. 여름이 되면 이곳에서 자수정줍기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벌어지는 자수정축제가 열린다. 4.영롱하게 빛나는 자수정. 5.망양정 앞바다에서 맞이한 일출. 6.1988년 논에서 객토 작업을 하던 중에 주민이 발견한 봉평신라비. 신라가 울진 지역으로 진출할 무렵 주민들이 항쟁하자 진압하고 세운 비석이다. 7.강자락에 가꿔놓은 밭에서 마늘을 수확하는 왕피천 주민들.
망양정 옛터에서 내려오니, 일부러 나그네를 기다린 기색이 역력한 망양동 할머니와 아낙들이 담 그늘에 앉아 있다가 신바람 난 얼굴로 정자에 얽힌 유래를 들려준다. 주민들에 의하면 현재는 7번 국도가 망양정 옛터 언덕 아래로 바싹 붙어서 뚫려 있지만, 옛길은 정자가 있던 언덕으로 해서 평해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전엔 파도가 언덕 아랫도리를 적셔서 정자가 있던 언덕에서 낚시도 했다고 한다. 겸재 정선이 1738년에 그린 ‘망양정도’의 분위기와 거의 흡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좋은 터에서 왜 옮겼을까? 군지 등의 기록엔 ‘쇠락해서’라지만 유서 깊은 터를 어디 손바닥 뒤집듯 쉽게 옮길 수 있을까. 더군다나 임금이 현판과 어제시를 내렸고,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역사의 현장인데-.
이런저런 기록을 정리해보면 당시 평해 관내에만 두 개의 관동팔경 정자(월송정과 망양정)이 있었는데, 망양정이 낡아 중건할 필요가 있자 “정자를 새로 지을 바엔 울진현에 세우자”는 의견이 우세했기 때문인 듯하다. 또 망양동 주민들에게서 들은 바로는 예전엔 망양정이 경치가 좋긴 해도 유독 뱀이 많아 정자에 뱀들이 심심찮게 출몰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옮기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뱀이 나오지 않는다”며 말끝을 흐리는 주민의 표정에서 아쉬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원래의 망양정터를 들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해볼 것이다. ‘언제쯤 망양정이 원래 자리로 돌아와 관동 제1루의 옛 절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옛 망양정터를 벗어나 월송정 솔밭에서 한참을 노닐다가 후포항 등대서 동해를 굽어본 뒤 한 마리 은어가 되어 왕피천(王避川) 물줄기를 찾아간다. 전하는 이야기엔 옛날 고려시대 마지막 왕인 공민왕이 피신한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또 신라가 망할 때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하자 마의태자와 모후 송씨가 이곳에 있다가 태자는 금강산으로 가고, 모후는 이곳서 생을 마쳤다고도 한다. 어떤 이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동해쪽에 자리잡았던 나라의 왕이 세력 싸움에 밀려서 숨어든 곳이라 말한다. 이런 전설의 공통점은 왕피천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야만 했던 왕국의 폐주(廢主)가 숨어들 정도로 깊고 깊은 산골이라는 것이다.
궁궁을을 흘러가는 왕피천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들은 모두 전설처럼 깊고 험한 오지다. 박달재 넘어 산굽이를 수백 번 돌아가야만 하는 왕피리도 도저히 사람 살 것 같지 않게만 느껴지는 두메산골이다. 들어와 화전 일구던 사연 묻지 않아도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어쩌면 왕족의 후손이요, 호위병들의 후예인지도 모른다. 여름 한철 찾아와 온갖 쓰레기 버리고 가는 외지인들은 끈질기게 찾아온 추적병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 왕피천 구고동 오지마을. 아침 햇살을 받은 누런 보리밭은 한 폭의 풍경화다.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해 오지마을 왕피리를 지난 왕피천 물길은 다시 무인지경의 산골을 굽이돌며 구산리 구고동 마을을 적신 다음 불영천과 매화천을 받아들여 덩치를 한껏 키운 뒤 동해로 흘러든다. 그 길이가 68.5km에 이르는 왕피천은 인적이 적은 오지였던 덕에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봄에는 황어, 여름엔 은어와 참게, 가을에는 연어가 찾아드는 생명의 강이다. 그 맑은 물에서 천연기념물인 수달이 헤엄치는 광경을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금강송 자라는 바위벼랑을 뛰어다니는 산양도 자주 목격되고, 얼마 전엔 ‘숲속의 은자’로 불리는 하늘다람쥐도 카메라에 포착됐다. 이외에 까치살모사 조롱이 고란초 노랑무늬붓꽃 같은 야생보호종이 곳곳에 서식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곳에 댐을 짓겠다, 온천을 짓겠다 난리다. 사업을 강행하려는 사람들은 환경영양평가를 했다고 언성을 높이지만,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하루만 왕피천에 머물러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이 땅에 왕피천 같은 곳이 남아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지난 4월 왕피천에선 모처럼 희망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왕피천 유역을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할 예정이란 내용이었다. 바람대로 왕피천 유역이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되면 2001년에 이곳을 속사댐 후보지로 지정한 건설교통부의 계획은 자동으로 백지화된다 하니 왕피천 동식물들이 모처럼 두 발 뻗고 잠들 수 있는 소식이다. 왕피천 물가에 등을 기대고 희망의 편지를 다시 꺼내 읽는 밤. 별들 깨어난 까만 밤하늘엔 북두칠성 기울어 가고, 소쩍새 소리는 강변 벼랑에 부딪혀 메아리로 울린다. 화전민 후예들이 가꾼 보리밭엔 하얀 달빛이 내려앉고 있는데, 옷깃엔 어느새 이슬에 촉촉하다. 내일은 저 왕피천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워 보리라. 이 강의 건강한 생명력 같은 은어의 반짝이는 비늘을 한 번 보리라. 물소리 요란하던 그 날 밤, 바다에서 올라온 은어떼가 금강송 굽어보는 왕피천 맑은 시냇물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울진, 어떤 곳인가
경상북도 동북쪽 끝에 자리한 울진군(蔚珍郡)은 북으론 강원도 삼척시, 서쪽으론 봉화·영양군, 남쪽으론 영덕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군 대부분의 구역은 낙동정맥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군의 서쪽은 대체로 낙동정맥 줄기에 속하며, 응봉산(999m)·삿갓재(1,119m)·진조산(908m)·통고산(1,067m)·백암산(1,004m) 등 1,000m 내외의 높은 산들이 많다. 반면 접하는 동쪽은 200m 전후의 구릉지대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바다에 이른다.
울진을 적시고 흐르는 하천은 대부분 낙동정맥에서 발원해 동해로 흘러드는데, 규모가 작은 편이다. 강의 상류는 심하게 감입곡류하면서 협곡을 이루고, 중하류 지역은 좁은 곡저평야를 형성해 농경지와 취락 등을 형성한다. 울진의 하천을 북에서부터 살펴보면, 응봉산에서 발원한 부구천과 남대천, 삿갓재에서 발원한 불영천,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한 왕피천, 금장산(848m)에서 발원한 매화천, 백암산에서 발원한 평해남대천 등이 있다. 이중 울진의 양대 하천이라고 할 수 있는 불영천과 왕피천은 원남면 노음리에서 합류해 4km쯤 흐른 뒤 동해로 빠져나간다.
기후는 남부 동해안형으로 연평균기온 12.8℃, 1월 평균기온 -0.1℃, 8월 평균기온 25.5℃로 내륙지방보다 겨울이 따뜻하다. 이는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북서계절풍을 막아 주고, 동해난류가 높새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연강수량은 974.9mm로 적은 편이나 겨울철에는 북동기류형 기압배치로 인해 강설량이 약간 많다.
울진은 고대에는 파조로 불리다가, 삼한 때 변한에 속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고우이군(古于伊郡), 신라 우진(于珍)에 속했고, 통일신라시대에 울진군이라는 지명이 처음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울진군에 속한 평해를 평해군으로 분리 승격시켰다. 조선시대에는 현으로 되었다가 갑오개혁 때 다시 군이 됐다. 1896년 강원도 울진군이 됐고, 1914년 평해군이 울진군에 통합됐다. 1963년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편입됐다. 1979년 울진면이, 1980년 평해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됐다. 2003년 현재의 행정구역은 울진·평해읍과 북·서·근남·원남·기성·온정·죽변·후포면의 2읍 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3년 5월 현재 인구는 인구 62,250명.
산업은 농업·수산업·임업이 주산업이며, 경지면적은 총 82.73㎢(논 45.13㎢, 밭 37.6㎢)로 전체 면적의 8.4%를 차지한다. 대부분 산지인 탓에 경북에서 면적 당 농경지 면적이 가장 좁은 군에 속한다. 후포·죽변항 등의 항구에서는 청어·정어리 등이 성시를 이루었으나, 현재는 꽁치가 가장 많이 잡히며, 오징어, 미역과 같은 수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옛날 조선시대 왕실에도 진상했다는 고포미역과 울진대게가 유명하다. 임야는 주로 서부 산지에 많아 849.86㎢에 달하며, 비교적 임야가 넓다. 산지에선 약초·버섯 등이 생산된다. 특히 송이버섯은 전국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맛과 향이 뛰어나 인기 있다. 울진이라는 지명은 신라 김유신 장군이 이곳의 울창한 산림과 진귀한 해산물에 반해 지은 이름이라 한다.
다른 지방과 연결되는 울진의 주요 도로는 모두 3개. 동쪽은 7번 국도가 해안선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지고, 불영천을 따라 난 36번 국도와 백암온천을 지나는 88번 국가지원지방도가 낙동정맥을 넘어 동서를 연결해준다. 도로는 ‘ㅕ’자 형세를 이룬다.
소광리 금강송
강릉·삼척·울진을 잇는 산간지역에 많이 자라는 금강송 가운데 소광리 금강송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소광리 금강송은 낙동정맥 삿갓재와 백병산 기슭의 1,800ha에 이르는 넓은 산지에 빼곡하게 자라고 있다. 평균 수령은 약 80년. 이 가운데 10여 그루는 500년이 넘었다. 조선 숙종 6년에 이 소나무숲을 황장봉산이라 정하고 보호했는데, 이곳이 여느 지역에 비해 잘 보존된 까닭은 워낙 접근이 까다로운 오지였기 때문이다. 금강송은 명칭도 다양하다. 껍질이 유별나게 붉어 적송(赤松)이요, 속이 누렇게 황금빛을 띤다 하여 조선시대엔 황장목(黃腸木)이라 했다. 춘양목(春陽木)은 1950~70년 사이, 봉화군 춘양역에서 온 소나무라 해서 수도권 상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최근엔 금강송(金剛松)이라 불린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에 황장봉계표석(도문화재자료 제300호)도 만날 수 있다. 표석은 오른쪽에 5행 19자, 왼쪽에 1행 4자를 새겼는데, 이를 풀어보면 ‘황장목의 봉계지역은 생달현(生達峴)·안일왕산(安一王山)·대리(大理)·당성(當城)의 네 지역이며, 관리책임자는 명길(命吉)이다’는 내용이다. 황장금표(黃腸禁標)는 원주시 구룡사 입구, 인제군 한계리, 영월군 황장골 등에서도 발견됐으나, 이곳 황장봉계표석은 이들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것이다.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는 36번 국도가 지나는 광천교 앞 입구서부터 총 13.3km 떨어져 있다. 광천교에서 917번 지방도(비포장)를 따라 4.6km 들어가면 자수정광업소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2.2km 들어가면 황장봉계표석이 나오고, 다시 6.5km 더 들어가면 차단기가 내려진 금강송 전시막 앞이다. 차단기 바로 앞에 500년생 금강송이 우뚝 서있고, 임도를 따라 10분쯤 걸어 오르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놀라간 금강송을 볼 수 있다.
국도변의 광천교에서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로 들어서다가 갈림길에서 헷갈릴 때는 주 계곡인 대광천 물줄기만 따르면 된다. 계곡에는 민가가 많지 않다. 소광천상회(054-783-9291), 창수상회(782-9939) 등 가겟집에서는 민박도 친다. 차단기 부근의 빗네동물농장(054-782-1164)은 백숙 요리를 한다. 울진 국유림 관리사무소 전화 054-783-1009
울진 원자력전시관
부구천 하류에 자리잡은 울진 원자력전시관은 울진을 찾았다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전기에너지실, 원자력 발전의 필요성, 국내 및 세계 원자력 발전소 현황, 원자력발전소 절개 모형,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 축소한 원자로 모형,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 코너 등이 차례로 나타난다.
전기 상식, 전기 역사, 발전 원리, 원자력에 대한 상식 등을 소재로 한 컴퓨터 퀴즈 코너도 있다. 20여 분짜리 원자력 홍보영화도 상영한다. 관람시간 09:00~05:30 관람료·주차료 무료. 전화 054-785-2192
울진 달우 자수정광업소
금강송이 자라고 있는 소광리에 자리하고 있는 달우 자수정광업소는 세계 최고 품질로 인정받고 있는 한국산 자수정을 생산·보급하는 곳이다. 주요 생산 광물은 자수정 외에도 각섬옥·자황토·맥반석 등 총 15종이다. 광산 규모는 1,160만 평. 특히 매년 여름 깔끔하게 단장된 광산 시설물을 배경으로 개최하고 있는 ‘자수정 줍기 광산축제’는 특별한 이벤트로 여름에 이곳을 찾은 도시민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 기간에는 자수정 채굴 현장도 견학할 수 있다.
자수정 전시장에서는 자수정으로 빚은 목걸이, 반지, 팔찌 등의 보석을 전시·판매한다. 건강팩·건강밴드·발목밴드 등 자수정을 재료로 한 건강보석상품도 갖춰져 있다. 또 전시장 한쪽의 샘에선 자수정 육각수를 맛볼 수 있다. 이외에도 동행한 어린이들을 위한 소규모 농장과 농기구 전시장 등의 볼거리가 있다. 전화 054-782-4588 홈페이지 http://darlwoo.com
통고산 자연휴양림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기암괴석과 맑은 계류가 잘 어우러진 불영계곡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최고의 계곡으로 손꼽혀온 명승지다. 통고산 자연휴양림은 경관 좋은 불영계곡의 지류인 심미골에 위치한다. 이 휴양림은 소광리와 가까운 덕에 숲의 질도 뛰어나고, 계곡의 경관도 아름답다. 휴양림 시설은 해발 500m쯤의 깊은 산중에 있어 한여름에도 기온이 낮은 편이라 한결 시원하다. 또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은 각 산막들은 보기에도 시원하고, 산막 문 앞에 차를 댈 수 있어 편리하다. 역시 맑은 계류가에 자리잡은 야영장도 여름 무더위를 식히기에 더없이 적당하다.
국도 바로 옆에서 휴양림이 시작해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것도 장점이다. 지난 해 수해를 입어 현재 복구공사가 한창이지만, 산막을 이용하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다. 관리사무소측은 6월 말까지는 대부분의 공사를 완료할 계획이란다. 휴양림 내의 머슴공방(054-783-9956)은 금강송으로 다듬은 공예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입장료 1,000원, 텐트장 2,000원, 야영데크 4,000원. 숲속의 집은 4평 이하 30,000원, 5~8평 40,000원, 9~14평 50,000원. 통고산자연휴양림 전화 054-782-9007
불영계곡
금강산 상팔담에 견줄 만한 불영계곡은 장장 15km에 이르는 길고도 장엄한 계곡이다. 기암괴석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는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며 바위 벼랑에 금강송이 뿌리 박고 서있는 자태는 계곡의 운치를 더해 줘 계곡은 열두 폭 동양화가 된다. 이런 특출한 풍광 덕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6호로 지정됐다.
그 중에서도 진잠교서부터 불영사 입구까지 8km 구간이 절경으로 꼽힌다. 의상대, 창옥벽, 조계등, 부처바위, 중바위, 거북돌, 소라산 등 온갖 전설이 얽혀 있는 절경지가 많다. 전망 좋은 곳에는 선유정과 불영정 같은 2층 팔각정을 세워놓아 계곡 풍광을 굽어볼 수 있다. 계곡 주변에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불영사, 소광리의 금강송, 민물고기 전시관 등 볼거리가 많아 이 나라 으뜸 드라이브 코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불영계곡 매표소 부근과 상류의 삼근리에 민박집이 있다.
불영사 불영계곡 구절양장 도로를 달려 고개 중간쯤 이르면 왼쪽으로 불영사 일주문이 보인다. 불영사는 651년(신라 진덕여왕 5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고찰이다. 창건 당시 연못에 부처 모양의 바위그림자가 비쳤다 해서 불영사(佛影寺)라 불렸다.
1397년(태조 6년)에 화재로 타버린 것을 소운(小雲)이 중건했는데, 그 후 다시 소실되어 1500년(연산군 6년) 양성법사(養性法師)가 중건했고,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모두 소실됐으나 응진전(應眞殿)만은 피해를 면했다. 그 후 1609년(광해군 1년) 진성법사(眞性法師)가 재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응진전(보물 제730호), 대웅보전(보물 제1201호) 등의 법당은 비구니절집답게 단아함이 넘치고, 영산회상도(보물 제1272호)가 절집의 격을 한층 높여준다. 불영사 입구 주차장 주변에 식당과 기념품 매점이 있다. 민박도 가능하다.
민물고기 전시관
불영계곡과 왕피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경상북도 민물고기연구센터 건물 1층에 마련해놓은 민물고기 전시관의 규모는 100평. 이곳에는 연어의 생활사와 회유도를 비롯해 우리 토종 민물고기 중 사라져 가는 어종과 주요 어종 위주로 50여 종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 각종 민물고기의 사진자료, 그리고 액침표본으로 보관되어 있는 여러 대형 민물고기와 알 등 민물고기 표본 2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수족관에 전시되어 있는 살아있는 민물고기는 총 50종. 그 중에는 쉬리·꺽지·퉁가리·동자개·참종개·각시붕어·동사리 등 국내에서만 서식하는 한국 특산종 물고기 7종이 포함되어 있다. 수조 아래의 버튼을 누르면 물고기의 명칭·학명·서식처·식성·분포지역 등 물고기에 대한 설명이 화면에 나타난다.
야외 수조에선 어류의 사육과정, 월동, 부화과정 등을 관찰할 수 있고, 큰 콘크리트 수조 안의 물고기에게 직접 먹이를 던져줄 수도 있다. 가을에는 연어잡이 등 현장체험도 할 수 있어 반응이 꽤 좋다. 입장료·주차료 무료. 전화 054-783-9413
덕구온천
낙동정맥 응봉산(999m)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덕구온천은 국내 유일의 자연용출 온천으로 유명하다. 온천수는 41.8℃의 약알카리성으로, 신경통·피부염 등에 좋고, 특히 등산·잠수 등 운동 후 근육 피로를 푸는 데 특효가 있다고 해서 국내 프로야구나 프로축구 선수들이 이곳을 찾아와 휴식을 겸한 온천욕을 즐긴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말 궁수와 창수로 유명한 전씨라는 사냥꾼이 사냥 도중에 상처 입은 멧돼지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목격하고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주민들이 계곡의 바위를 쪼아 물이 고이게 만들고 돌을 쌓아 온천탕으로 이용했다. 특히 겨울에 덕구계곡에 쌓인 눈을 바라보며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는 정취가 있어 각광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1984년 여름 홍수로 유실됐다. 그 후 온천수 주위는 협곡이라 시설물 설치 등 개발이 어렵다고 판단해 4km의 송수관을 덕구온천장까지 연결 43℃의 온천수를 공급하고 있다.
온천지구 공용 주차장 안쪽에 자리한 산길식당(054-782-4648) 앞이 덕구계곡 들머리. 입구에서 원탕까지는 4km로 걷는 시간만 왕복 2시간쯤 걸린다. 용소폭포·선녀탕 등 맑은 계류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덕구계곡의 아름다움을 덤으로 감상할 수 있다. 덕구온천관광호텔(054-782-0677), 벽산덕구온천콘도(054-783-0811)는 온천장과 숙박시설을 갖춘 곳이다. 부근에 덕구민속촌식당(054-783-4846), 양평해장국(054-783-6989), 옹심이칼국수(054-783-5820), 토담집(054-782-0169) 등의 식당과 여관이 몇 군데 있다.
구수곡 자연휴양림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의 경계에 솟은 응봉산(999m) 동남쪽으로 흐르는 구수곡은 원시의 미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계곡이다. 자연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오염원이 전혀 없어 계곡물은 그냥 떠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또 구수곡을 품고 있는 응봉산 산자락에는 50~200년생 금강송과 소사나무 군락지가 있고, 천연기념물인 산양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구수곡(九水谷)은 ‘아홉 물줄기가 각각 아홉 가지 경치를 보인다’고 해서 불리는 이름인데, 10km에 달하는 계곡에는 웅녀폭포, 용소폭포, 팥바위폭포 등 10여 개의 크고 작은 폭포와 검소 등 18개 소가 절경을 이룬다.
2000년 개장한 구수곡 자연휴양림에는 숲속의 집·야영장·등산로·산책로· 삼림욕장·물놀이장·체력단련시설 등을 갖추었으며, 한국 자생화 50여 종을 키우는 야생화 관찰원과 숲속수련장 등의 교육시설이 있다. 시설사용료는 주차장(소형) 3,000원. 일반 텐트장은 2,000원, 야영데크 4,000원. 통나무집은 7평형(2동) 40,000원, 10평형(2동) 50,000원, 14평형 1동 60,000원. 전화 054-783-2241
연호정
울진읍 연지리에 자리한 연호정(蓮湖亭)은 울진 군민들이 휴식처로 애용하는 공간이다. 특히 연꽃이 활짝 피어나는 8월이 되면 군민들은 물론이고 멀리 외지에서도 연꽃을 구경하기 위해 연호정을 찾는다. 무더운 여름날 솔숲에 둘러싸인 정자에 앉아 있으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주 시원하게 느껴진다. 연못을 감상하기 좋은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지면에서 약 30cm 띄워 누마루를 깔고 주위에 난간을 돌렸다. 연못의 둘레는 2km, 수심은 2m. 연못 속에는 잉어·붕어·뱀장어 등이 서식하고 있다.
장양수 급제패지
울진읍 고성리 월계서원 경내 국보각에 소장되어 있는 장양수 급제패지(張良守 及第牌旨·국보 제181호)는 1205년(고려 희종 원년)에 진사시 병과에 급제한 장양수에게 내린 패지로써 현존하는 우리나라 행전문서 중 가장 오래 됐다. 내용은 장양수가 병과에 급제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시험관 5명(왕규·임유·최충헌·기홍수·최선)의 관직과 성이 당시 주류를 이루던 소동파 서체로 기록된 과거시험 합격증서(88cm×44cm)다.
장양수는 고려 정종 때 삭방도 안렴사를 지낸 울진장씨의 시조 장말익의 8세손으로 추밀원부사, 전리판서, 상호군위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나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월계서원은 장말익과 장양수를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가을에 사림이 제향하고 있다.
봉평신라비
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는 1988년 논에서 객토 작업을 하던 중에 발견됐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비석의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글자 판독이 용이해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비석은 자연돌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비문은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데, 글자수는 400자 정도.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
신라가 울진을 포함한 동북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석으로, 524년(법흥왕 11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신라 사회 전반에 걸치는 여러 면들을 새롭게 검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다.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체를 사용해 파악이 어렵지만, 기본 줄거리는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감에 따라 주민들이 항쟁을 일으키자, 신라에서는 육부(六部) 회의를 열고 대인(大人)을 보내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이는 법흥왕 때의 율령반포와 육부제의 실시, 왕권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당시 이미 6부가 성립됐음을 확인해 주는 ‘신라육부(新羅六部)’라는 글귀 등 기존의 사료에 나타나 있지 않은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죽변항
울진 북쪽의 죽변항은 동해의 풍부한 수산자원을 배경으로 오래 전에 기본시설이 완비된 동해안의 주요어항 중 하나로 높이가 15.6m인 울진등대가 서있다. 천연기념물 제158호로 지정된 죽변항의 향나무가 이곳의 운치를 더해주어 있다.
죽변항과 인접해서 북쪽은 후정 해수욕장, 남쪽은 봉평 해수욕장이다. 특히 봉평 해수욕장 앞마을에는 국보 제242호인 봉평신라비가 있다. 연근해 채낚기 어업의 오징어가 주산물이며, 이외에 고등어, 꽁치 등도 많이 잡히는데, 특히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이른 아침 어판장에 나가면 울진대게를 구입할 수 있다. 매월 3, 8일에 장이 선다.
망양정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의 망양정(望洋亭)은 왕피천과 불영천이 만나 동해로 빠져드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일찍이 관동팔경의 그림을 본 조선 숙종이 그중 망양정이 가장 낫다고 하여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글씨를 써보내 정자에 걸도록 했다. 또 정조가 친히 지은 어제시와 정추(鄭樞)의 망양정시,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초, 채수(蔡壽])의 망양정기 등 관련된 글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망양정은 처음 세워진 고려 시대에는 현 위치에서 남쪽으로 10여km 떨어진 기성면 망양동 해안에 있었다. 그러다 조선 세종 때 채신보가 망양정이 오래되고 낡았다 하여 망양동 언덕으로 옮겼고, 1517년 폭풍우로 넘어진 것을 1518년에 중수했다. 이후 다시 쇠락하자 1858년에 근남면 산포리의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망양정에 대한 시인묵객들의 예찬은 대부분 기성면에 있었던 구 망양정의 절경을 읊은 것이다.
성류굴
왕피천 하류 성류산(선유산 199m) 기슭에 있는 석회암동굴. 약 2억5천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이 동굴의 총길이는 472m, 높이는 40m로 12개의 크고 작은 광장과 5개의 연못으로 형성되어 있다. 연못 중에는 수심이 30m에 달하는 것도 있다.
동굴은 직선형을 이루고 있으며, 연무동석실· 은하천·오작교·용신지(池)·선녀교 등으로 이어지는 광장은 저마다 독특한 경관을 자랑한다. 50만 개의 종유석·석순·석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명 지하금강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일찍이 개방됐던 탓에 안타깝게도 종유석·석순 등이 많이 훼손된 편이다. 연못은 굴 바깥의 왕피천과 통하고 있어 물고기를 비롯해 박쥐, 곤충류 등 31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굴 내부의 온도는 항상 15℃를 유지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원래 이름은 신선이 노닐 만큼 주변경관이 아름답다고 해서 선유굴이라 불렀는데, 임진왜란 때 인근 사찰에서 불상을 피난시켰다 해서 ‘성류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인근 주민들이 왜군을 피해 숨어들자 이를 알아챈 왜병들이 동굴 입구를 막아 모두 굶어 죽었다는 슬픈 사연도 전한다. 굴 바깥의 암벽에 살고 있는 측백나무는 수령이 천 년으로 동굴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됐다.
매표소 부근에 은어튀김 등을 하는 식당이 많다. 관람시간은 08:00~18:00(동절기 17:00), 관람료는 대인 2,200원, 소인 1,100원. 주차료 승용차 소형 1,000~2,000원. 성류굴 관리사무소 전화 054-782-4006
왕피천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해 서면과 근남면을 굽이 돌아 동해로 흘러드는 왕피천(王避川)은 지형적인 탓으로 원시의 자연이 그대로 남아있는 물줄기다. 이 일대에는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인 금강소나무가 군락으로 자라고 있고, 다양한 야생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생태계의 보고로도 꼽힌다.
상류의 장수포천을 포함한 왕피천의 전구간은 68.5km. 왕피천의 백미는 오무 마을~한천 구간(6km), 왕피리 속사 마을~용소 구간(4km), 그리고 구고동~탑동~청암정 구간(2km)이다. 하지만 지난해 수해를 입어 공사중인 구간이 많다. 아름다운 풍광을 제대로 즐길 수 없어 조금 아쉽다.
울진에서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두 군데. 왕피천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서면 왕피리는 36번 국도가 지나는 불영계곡의 삼근리에서 험한 산길을 따라 20~30분쯤 달려야 한다. 왕피리에 민박집이 여럿 있다. 왕피천 중하류쯤에 속하는 근남면 구산리 구고동은, 울진 수산교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2.5km 달리다 만나는 오른쪽 농로를 따라 들어간다. 특별한 표지판은 없고, 단지 길가에 서있는 ‘왕피천관광농원’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중간중간 만나는 마을길에서 헷갈릴 때도 마찬가지.
구산리 왕피천휴양농원(054-783-0625)은 콘도형 방갈로 8동 갖추고 있다. 바로 근처 민가 옆으로 가면 보물 제498호인 구산리 삼층석탑을 볼 수 있다. 구고동은 왕피천휴양농원 앞에서 왕피천을 건너 1km쯤 더 가면 된다. 구고동은 50여 호가 있는 제법 큰 마을로 여름에는 대부분 민박을 친다.
백암온천
평해에서 88번 국지도를 타고 서쪽으로 10km쯤 달리면 백암온천이 나온다. 신라 때 창에 맞아 쫓기던 사슴이 치료한 곳이라는 전설을 내려온다. 그 당시 인근 백암사의 스님이 환자를 목욕시키고 질병을 치유했다고 전한다. 또 고려 때는 현령이 지방민을 사역하여 큰 화강암으로 석함을 만든 후 다시 집을 지어 욕탕을 공개했다고 한다. 온천수는 48℃에 이르는 유황천으로, 신경통·만성관절염·동맥경화증 등에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암온천지구 내에 백암온천호텔(054-787-3044), 백암관광호텔(054-787-3500), 백암한화콘도(054-787-7001) 등에서 온천욕을 할 수 있다. 목욕료 5,000원. 이외에 수십 개의 음식점과 숙박·위락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월송정
신라 때 화랑들(영·술·남석·안상)이 울창한 솔밭에서 달을 즐기며 노닐던 정자. 관동8경(월송정 대신 강원 통천군의 시중대를 꼽기도 한다)의 하나로 월국(越國)에서 가져온 소나무 묘목을 심었다하여 월송정(越松亭)이라고 하는데, ‘月松亭’이라고도 쓴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정자를 몇 번씩 복원하는 바람에 옛 정취를 느끼기는 쉽지 않지만, 울창한 솔밭은 참 좋다. 1989년에 산책로 1,200m를 조성해 놓았다.
정자는 고려시대에 이미 월송사(月松寺) 부근에 세워졌던 것을 연산군 때의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중건했다고 하며, 세월이 흐르면서 퇴락하자 1933년 향인(鄕人)들이 다시 중건했으나 일제 말기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 우려가 있다 하여 철거해 버렸다. 이후 1969년에 재일교포들이 콘크리트로 신축했으나 옛 모습과 같지 않아서 해체하고 1980년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26평으로 정자치고는 큰 편이다. 편액은 최규하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후포항
울진의 남단에 위치한 항구. 이른 아침에 가면 고깃배에서 각종 어패류가 부려지는 어시장 풍경을 구경하면서 싱싱한 횟감이나 어패류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후포항에는 울진대게·도루묵·가자미·고등어 등이 많이 나온다.
후포항 야트막한 언덕에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후포 등대가 서있다. 이곳은 후포항과 동해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도 한다. 후포 등대는 후포항 부두 끝에서 해안길을 따라가다가 ‘포항지방해양수산청 후포항로표지관리소’ 이정표가 있는 왼쪽 콘크리트길로 들어서면 된다. 등대관리소 담벽을 돌아가면 후포항 일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후포여객선터미널(054-787-2811)에서는 카타마란호가 성수기(7~8월)·연휴·명절 등에 후포~울릉간을 하루에 1~2회 부정기적으로 운항하고 있다. 항구 해안을 따라 횟집이 즐비하다. 매월 3, 8일에 5일장이 선다.
울진 송이
경상북도 동북단에 위치한 울진군은 화강암과 고운 토질, 그리고 깨끗한 공기가 어우러져 더없이 향기로운 양질의 송이가 난다. 주민들은 다른 지방의 송이에 비해 표피가 두껍고 단단해 특유의 향이 진할 뿐만 아니라 신선도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맛이 변하지 않는 울진 송이가 송이 중의 으뜸이라 자랑한다.
울진군 송이 생산량은 2002년 전국의 11%, 경북의 13%를 차지했다. 지난해 평균 가격은 1kg에 99,638원. 최고 가격은 무려 651,900원을 호가했다. 송이철인 9~10월에 구입할 수 있다. 울진군 산림조합 전화 054-783-2340
울진 대게
대게에 관한 한 울진 주민들도 할 말이 많다. ‘울진 대게’보다는 ‘영덕 대게’라는 말이 세간에는 더 익숙하게 통하기 때문인데, 울진 주민들은 “사실 대게의 본고장은 울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원래 울진이 대게의 주산지인데, 인근에서 가장 큰 장이 서는 곳이 영덕이기 때문에 영덕 대게로 더 알려진 것이라 한다.
1930년대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던 시절, 서울·대구·포항·안동 등 대도시에 해산물을 공급하기 위한 인근의 수산물은 대부분 교통이 편리한 영덕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울진 사람들은 잡아올린 게를 몽땅 싣고 영덕으로 가서 팔았다. 결국 영덕은 대게의 집산지인 셈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영덕이 대게의 본고장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울진 금강송이 한때 집하지였던 춘양의 이름을 따서 ‘춘양목’으로 불리던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울진 주민들이 대게의 명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축제로도 나타나, 후포항 인근에서 매년 4월 대게축제를 연다. 이 때는 후포항과 죽변항의 공판장이나 횟집 등에서 싱싱한 대게를 직접 골라 쪄 먹을 수 있다. 대게의 어획시기는 주로 11월부터 이듬해 4월말 경까지. 문의 죽변수협 전화 054-783-8454, 후포 수협 전화 054-787-1331
고포미역
강원도 삼척시와 경계를 이루는 북면 나곡리 고포 마을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돌미역 생산지. 고포미역은 고려 때부터 왕실에 진상하던 미역으로 이름이 높았다. 수심이 얕은 고포 앞바다의 물은 매우 투명해 말간 봄햇살이 골고루 퍼질 수 있어 질 좋은 돌미역이 잘 자란다. 동해안에서 가장 빠르다는 물의 흐름도 고포 돌미역을 명품 반열에 올려놓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3월에서 5월 사이에 생산하며, 구입은 연중 가능하다. 가격은 1단(20올)에 100,000~130,000원선. 고포마을영농회 전화 054-782-0916, 죽변수협 전화 054-783-8454
왕피천 은어
봄부터 늦가을까지 은어가 서식하는 왕피천은 여름철의 은어 낚시로 이름이 높았다. 요즘 왕피천 하류에서는 은어낚시가 한창이다. 왕피천과 불영계곡이 만나는 수산교 상류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은어 포인트. 날이 점차 더워지면 은어는 상류로 올라간다. 성류굴 위쪽의 수곡초등학교 근처 상수곡 마을 앞의 잠수교 주위도 은어 포인트로 소문난 곳이다. 구산리의 두전동과 탑동 마을 부근의 은어는 씨알이 굵은 편이다.
은어로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은은한 수박향이 감도는 은어회를 비롯해 튀김·매운탕 등이다. 수산교 부근이나 성류굴 입구에 은어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이 많다.
일정별 길라잡이, 교통·숙박
일정별 길라잡이
경북 울진은 낙동정맥 동쪽에 자리한 고을이라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남북을 잇는 7번 국도와 동서를 연결하는 36번 국도, 88번 국지도가 있지만, 동서 도로는 산지를 지나기 때문에 매우 험한 편이다. 울진은 대체적으로 3개의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덕구온천·죽변항 등이 있는 북부권, 불영계곡·성류굴·망양정·왕피천 등을 아우르는 중부권, 월송정·백암온천의 남부권으로 나눌 수 있다. 7번 국도가 지나는 해안도로 주변의 명소 외에는 산간지역이기 때문에 접근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다.
●당일
울진은 수도권에서 접근하는 데만 5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에 당일로 스케줄을 잡는 건 무리가 있다. 그래도 당일로 드라이브만 즐길 요량이라면 동해고속도로 동해로 나와 7번 국도를 타고 삼척을 지난 다음, 죽변항~망양정~36번 국도~불영계곡~불영사를 거친 뒤 봉화~영주 거쳐 영주 나들목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귀가하면 된다.
●1박2일
수도권에서 첫날 일찍 출발한다고 해도 울진에 들어서면 점심때가 훌쩍 넘는다. 그리고 이튿날 점심 식사 후에는 길을 떠나야만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귀가할 수 있다. 각 권역 중 한 곳에서 숙박할 계획을 잡고, 다른 권역은 오가는 길에 잠깐씩 들러야 한다.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덕구온천이나 백암온천 중 한군데서 온천욕을 하면서 하룻밤 쉬고,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이다. 산속에 있는 덕구온천의 원탕을 다녀오고 싶다면 온천시설지구나 10분쯤 거리의 구수곡 자연휴양림 등에서 숙박하면 이튿날 편하다. 산을 좋아하면 통고산 자연휴양림 등을 이용할 수 있다.
●2박3일
울진의 명소는 대부분 둘러볼 수 있는 일정. 그러나 명소들이 대부분 깊은 산골에 위치한 탓에 모두 둘러본다고 욕심을 부리면 수박 겉핥기가 될 수 있다. 우선 덕구온천·백암온천·불영계곡·왕피천 등에서 잠을 잘 수 있다. 삼척서 접근했을 경우 고포 마을~원자력전시관~죽변항~덕구온천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 성류굴~망양정~해안도로~원망양정터~월송정을 본 후 되돌아가 불영사를 본 뒤 통고산 자연휴양림에서 묵는다. 그리고 마지막 날 아침에 소광리 금강송과 자수정광산을 둘러본 후 귀갓길에 오른다.
●3박4일
울진의 명소는 모두 둘러볼 수 있다. 특히 덕구온천 원탕, 소광리 금강송, 왕피천 등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다. 여름이라면 하루쯤은 바닷가에서 숙박하는 것도 괜찮다.
수도권에서 접근할 수 있는 코스는 두 군데. 우선 가장 일반적인 영동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를 이용해 동해 나들목~동해~삼척~울진이 있다. 요즘에는 몇 년 전에 개통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영주 나들목~36번 국도~영주~봉화~불영계곡~울진으로 들어오는 길도 많이 이용한다. 남부지방에서는 중앙고속도로나 7번 국도를 타고 접근하면 된다.
울진은 바닷가를 끼고 있어 해안에 숙박시설이 많다. 여름에는 해수욕장에 텐트를 칠 수 있다. 나곡·후정·봉평·양정·망양·기성망양·구산 해수욕장 등에서 민박할 수 있다. 또 덕구·백암온천 지구에 고급 숙박시설이 있고, 불영계곡에도 불영사 부근과 상류 등에 민박집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다. 왕피천의 왕피리와 구고동의 민가는 여름이면 대부분 민박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