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54
7월17일[연중 제1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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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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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sfS7JaEywE (최해용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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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다 떠나가고 사라집니다. 오직 한 분 영원불멸의 하느님, 그분만이 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식별력과 함께 정확히 이해해야 할 구절입니다.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단이나 사이비 교주들이 악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몇몇 이단에 빠진 자녀를 구해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는 부모님들을 참으로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들딸들은 사이비 교주에게 얼마나 세뇌되었는지,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로 보지 않습니다. 가족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5-36)라는 말씀은 절대로 아들이 아버지와 불목하고, 딸이 어머니와 소식을 끊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등을 돌리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 모든 대상이나 가치 그 위에 하느님을 두라는 강조 말씀입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위치가 급격히 추락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걱정됩니다. 세상 만물의 창조주께서 우리를 당신 모상대로 만드셔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조차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과분하게도 그분을 통해 우리를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매일 아침 눈만 뜨면 백번 천번이고 감사드리며, 세상 모든 것 위에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흠숭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분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그분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배은망덕이며, 얼마나 하느님께서 슬퍼하실 일이겠습니까?
오늘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그토록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큰 가치를 부여하는 재물이나 부동산, 은행 잔고! 영원할 것 같지요? 어쩔 수 없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들은 어느새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꼭 붙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가 사랑했던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저만해도 그토록 든든한 보루였던 부모님, 형님, 존경했던 스승님, 은사님, 절친들, 정말이지 영원할 것 같았는데, 언제나 제 곁에서 든든히 저를 지켜줄 것 같았는데, 하나 둘씩 결국 다들 먼저 떠나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결국 다 떠나가고 사라집니다. 사랑도 지나가고, 청춘도 지나갑니다. 젊음도 사라지고, 생명도 저물어갑니다. 결국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영원불멸의 하느님, 그분만이 남습니다.
이토록 고마우신 하느님에게 가장 큰 사랑과 존경, 흠숭과 찬미를 드리라는 교훈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의 요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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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2hUZADAjb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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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양 떼가 되느니 외로운 늑대가 되련다>
강형욱 훈련사는 TV와 유튜브 방송을 하며 개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반려견을 키우는 이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냥 행복할까요? 요즘 그의 모습은 조금은 슬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는 훈련이 안된 강아지들을 좋은 반려견이 될 수 있도록 훈련하고 많은 조언을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견주들에게 화를 낼 때도 있고 호통을 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반려견을 떠나보낸 가족들에게는 위로도 해 줍니다.
한 번은 성탄절 선물로 반려견을 잃은 가족들에게 그 반려견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어 선물로 위로를 해 주는 방송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의 사연을 들으며 자신이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도 얼마 전 반려견이 하늘의 별이 되었는데, 자신은 정작 삶에 치여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도 위로받고 싶었나 봐요….”
‘고독한 훈련사’에서 훈련사 24년 차에 찾아온 슬럼프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뭐라고 잘 키우고 있다 못 키우고 있다를 말할 수 있나…. 모르겠어요. 그냥. 아직도 개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배우고 싶고 세상의 모든 개를 만나고 싶어요. 나도 좀 위로를 받아보고 싶어요. 잘하고 있다고.”
최고가 되면 다 좋을까요? 이렇게 외롭고 고독합니다.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의 위로가 있어야 하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계속 사람들에게 칼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혹은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최고에 있는 사람이 결국 주게 되는 것이 이러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안식이 없습니다. 다 안식을 요구하는 사람들만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도 이 세상에 칼을 주어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맞추기 위해,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목표를 낮추겠습니까?
최고가 세상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의 생태 교란종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잘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교란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박해받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모든 이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무리에 속하는 것보다 옳은 방향으로 고독하게 나아가는 편이 낫습니다.
백종원 씨가 나폴리에서 음식 장사를 하는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줄을 많이 섰는데 다 감당할 수 없을 때 생각해 낸 것이 ‘도시락’이었습니다. 굳이 그런 것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스태프들이 10유로에 먹는 도시락이 너무 허접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태리는 식사를 매우 오래하기 때문에 도시락으로 빨리 먹고 끝내는 것은 생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시락을 팔아도 그 상태가 매우 열악합니다.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는 비주얼이 좋은 도시락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폴리의 10유로 도시락을 전멸을 내고 가는 거야. 내 특기거덩, 시장 교란시키는 거.” 백종원 씨는 요식업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어떤 틈으로 들어가면 성공할 수 있는지가 보입니다. 그것이 보이면 그 시장은 교란 상황이 일어납니다. 최고는 어쨌거나 세상을 교란합니다. 그러면 그 세상에서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제거 대상이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도 이와 같습니다. 돈과 맛있는 것, 명예욕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 누가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더라도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백종원 씨는 예산 국밥 거리에 분열이 일어나서 결국엔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또 골목상권에 독점이 심하다고 국회에 불려 가서 “의원님, 너무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 때문에 포기해야 할까요? 절대 그래 보이지 않습니다.
약한 양 떼에 속하느니 고독한 늑대가 되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차갑게 있느니 불을 지르는 사람이 되고 비겁한 평화 속에 머무느니 칼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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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 중에 베네치아에 가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성 마르코 성당으로 가던 중에 스마트 폰의 화면이 멈추었습니다. 예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참 난감했습니다. 액정을 고치는데 1달 정도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스마트 폰을 빌려야 했습니다. 사진도 찍고, 문자도 확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마음에는 거센 풍랑이 불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도 해야 하는데 마음은 온통 스마트 폰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비우고 뉴욕에 가서 고치기로 했더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주위에 있는 분들이 사진도 찍어주었고, 미사도 잘 봉헌했습니다. 음악을 연주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니 한국음악을 신청하면 연주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신청했습니다. 감미로운 한국 노래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니 이번에는 ‘도라지와 아리랑’을 연주해 주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베니스의 성 마르코 성당 광장에서 한국의 음악을 들었고,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풍랑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희들 곁에 있지 않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근심을 털어버리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스마트 폰을 충전기에 연결하니 전원이 들어오면서 화면이 켜졌습니다. 스마트 폰은 액정이 고장 난 것이 아니고 전원이 방전 된 것이었습니다. 화면이 켜지면서 제 마음도 평온해 졌습니다.
예전에 이순신 장군의 ‘명량’을 보았습니다. 주인공 최민식의 연기와 실감나는 해상 전투 장면도 기억에 남지만 제 마음을 움직인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힘을 가졌지만 일본군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고, 겨우 풀려났지만 배는 고작 12척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에게는 ‘두려움’이 팽배했습니다. 일본에서 300척이 넘는 배가 다시 왔고, 이번에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부하들이 머물던 집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다.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말을 들은 부하들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영화 말미에 아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움은 상대방에게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만 있다면 우리는 능히 이길 수 있다.” 명량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화약을 가득 실은 배에 남편이 있었고, 그 배는 이순신 장군이 있는 대장선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육지에 있던 아내는 그 배를 향해 포탄을 쏘라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비록 남편은 죽을지라도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지에 있는 백성들은 모두 옷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고, 남편은 화약을 실은 배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을 억압하고, 남자아이들을 강물에 던져서 죽게 하였습니다. 파라오가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된 원인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나와 상대방을 갈라놓고, 불신의 벽을 쌓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기준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족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의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부귀함도, 건강도, 생명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강을 건너 영원한 삶에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넘어서면 마음에 위로가 오고, 그것이 지속됩니다. 반면에 두려움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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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34-11,1: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를 많이 짓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러운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끌어내기 위해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에서 갈등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러운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말씀을 통하여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0-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같은 상을 받는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 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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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영적 동반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4-39)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예수님은 세상에 ‘참 평화’를(구원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과 싸움이 생기고 박해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분열과 갈등의 책임은 예수님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칼’은 분열, 갈등, 전쟁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나는 평화를(구원을) 주려고 왔는데, 사람들은 칼을(멸망을) 선택한다.”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2) 말씀의 표현에 초점을 맞춰서, “나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거짓 평화와는 다른 ‘참 평화’이다.(요한 14,27) 내가 주는 ‘참 평화’를 얻으려면, 세상의 거짓 평화를 단호하게 끊어버려야 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칼’은 거짓 평화를 잘라내고 끊어버리는 단호함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식구들이)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라는 말씀은, 종교와 신앙 때문에 식구들이 분열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그런 일이 항상 생긴다는 뜻도 아니고, “식구들과 갈라서라.”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라는 말씀은, “식구들을 원수로 삼아라.”라는 뜻이 절대로 아니고, “신앙을 위해서라면 식구들을 버려라.”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종교박해가 가정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종교와 신앙 문제로 식구들이 분열되고, 식구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상황이 되면,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앞의 16절에 있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가정 안에서 생기는 박해에도 적용되는 지침입니다.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인생의 영적 동반자입니다. <우리는 가족이 ‘인생의 동반자’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가족을 버리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1베드 3,1-2)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슬기롭고 순박하게’ 가정의 ‘참 평화’를 지키는 일입니다. 즉 식구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 말씀은 식구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37절의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뜻도 아니고,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방해하는 ‘현세적이고 육적인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족’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심과 집착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식구들과 함께’ 구원받아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사랑 실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웃 사랑 실천의 첫 번째 대상은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섰을 때, 가정을 떠났을 뿐이고, 가족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코린토 1서를 보면,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결혼해서 아내가 있는 사도들은 선교활동을 할 때 아내와 함께 다녔다는 말이 나옵니다.(1코린 9,5)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온갖 어려움들을 기꺼이 감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혼자 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십자가라도, 가족이 함께 진다면 가벼워질 것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의 궁극 목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족 없이 혼자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 나라에서 무슨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가족 없이 혼자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이 ‘참 평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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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의 업적으로 표현된(이사 9,5-7 참조) 평화는 단순히 다툼이나 싸움이 없는 상태로 여겨지기보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평화는 죄를 넘어서고,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하거나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되찾은 상태를 말합니다. 칼은 글자 그대로 군사적인 의미에서 싸우는 도구가 아니라 칼이 주는 표상과 함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리나 분열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화가 아닌 칼’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됩니다.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가족 관계입니다. 그 시대의 사회상을 생각하면 가족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유대를 맺고 있었습니다. “칼을 주러 왔다.”라는 것은 비교를 위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자들은 가족에서 분리되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사회의 유대가 아닌 예수님과 이루는 관계가 먼저입니다. 제자가 되는 길에는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께 합당한 제자가 되는 길은 기존의 관계와 자신을 위한 길을 벗어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철저하게 스승을 따르는 자세입니다. 넓은 의미로 제자인 신앙인들도 비슷합니다. 그 길에는 다른 것에 앞서 말씀을 따르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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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아침에 눈을 뜨며 ‘5분만 더 잘까?’ 하는 고민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고 강론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쓸까 고민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토론하고 고민합니다. 온종일 우리는 고민과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고민은 대개 나 자신이 좀 더 편하려는, 더 쉽게 살아가려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싸움이며, 곧 유혹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은 것을 내놓기 위한, 남들보다 더 힘들어지는 고민과 갈등은 대부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이기적인 고민을 먼저 하다 보면 예수님의 가치와 시선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고민 없이,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깁니다. 나아가 그러한 고민이 없는 삶을 평화라 여기며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평화는 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짓밟고 힘으로 누르는 평화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거대한 힘 앞에서 두렵고 무서워 타협이라는 명목으로 도망치고 비굴해지는 평화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고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고민은 우리에게 ‘칼’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찌르며 고통을 줍니다. 때로는 그 고민의 칼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하고, 의견이 달라 대립하며 갈라서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칼 때문에 우리를 원망하며 우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무겁고 감당하기 힘들지만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그 끝에 더 큰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때로 그 십자가의 무게가 고민의 칼로 다가올 때는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 길의 끝이 죽음이 아닌 부활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오늘도 묵묵히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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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관계성을 하느님 중심으로 개편하라고 촉구>하십니다.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오 복음 10장 34절-35절) 예수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만 들으면 마치 그분이 이 세상에 불화를 조장하고 가족 관계를 파괴하러 오신 것 같습니다.
사회의 기본이 되는 가정 공동체의 구성원인 아버지와 아들이, 딸과 어머니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맞서고 원수가 되어 갈라서면 세상은 함께 흔들리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오 복음 10장 37절) 이어지는 말씀이 앞의 알쏭달쏭한 말씀을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즉 관계의 우선이 혈연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족을 우선하고 챙기게 마련이지요. 태초에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맺어주실 때부터 서로 끌리고 보완하는 사랑을 매개로 가족이 형성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남녀의 사랑이나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보다 우선하는 진정한 사랑이 있으니, 바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대신 돌아가시면서 사랑하십니다. 신앙인이라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가 우선이지요. 하느님과의 사랑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려면 자기와 가족의 안위만 추구하는 육적인 애착에서 한걸음 나와야 합니다.
시야를 확장한다고 해서 가정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공고히 성숙한 사랑으로 결속될 수 있지요.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0장 41절)
육적인 사랑이 성장하고 승화해 하느님과의 사랑 관계로 들어가게 되면 그와 동시에 하느님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람들, 즉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믿음이 끌리는 일에 투신하는 이들,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여기에 이르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 예언자나 의인이 아니어도 예언자와 의인이 받을 상을 받게 됩니다. 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을, 그리고 종래에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와 의인이 받을 상이란, 성삼위 하느님의 거처가 되어 사랑의 존재로 변모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에 몸붙여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탈출기 1장 10절)
요셉의 치적을 모르는 새 임금이 등극하면서 이스라엘은 경계와 압박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사백삼십 년 전, 일흔 명으로 이집트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이 이제는 이집트인들을 넘어설 만큼 더 많고 강인하게 번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나갔다."(탈출기 1장 12절)
이집트인들에게 강제 노역으로 시달리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번성합니다. 이는 그들의 생명이 육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기인하기 때문이지요. 일찌기 하느님은 이집트로 떠나는 야곱에게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창세기 46장 3절)고 약속하셨으니 지금의 번성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강제 노역과 사내아기를 죽이라는 말살 정책이 구체화되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잘 정착하고 번성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의 백성에게 결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오랜 기간 이방 민족 안에서 누렸던 안락한 평화을 박차고 떠나야 하는 때가 무르익은 것이지요. 바야흐로 "칼"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이 갈라섬, 떠남은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으로 우뚝 서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단계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칼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인간적으로 익숙한 혈연, 지연, 학연은 물론 서로 영광과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 안에 파묻혀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고, 그 안에서 '우리만' 안락하고 평온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면 평화라고 여기며 안주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좋은 게 좋은' 그런 관계가 하느님과의 사랑을 가리우고, 하느님의 사람들을 경시하고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촉구하십니다.
육적인 차원을 넘어서 영과 육의 통합을 이루어 가라고 부르심 받은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모든 관계성은 하느님 중심의 관계성으로 재편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화답송) 이 노래가 우리 관계성의 기준이고 평화의 바탕입니다. 내 근친, 지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형제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평화가 옵니다. 평화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존재하고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강물처럼 온 세상을 감싸며 아우르고 퍼져나가는 하느님의 충만함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랑의 질서를 새로이 수립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이 첫째이시고, 모든 것은 그 관계에서 파생됨을 깨닫는 지혜와, 이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용기와 결단을 주시길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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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령의 칼>
칼은 좋은 것입니까? 해로운 것입니까? 칼은 꼭 필요한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내면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 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같지 않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지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간, 부부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해 거짓 평화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세상에 대한 온갖 집착과 산란한 마음을 단호하게 잘라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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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도둑놈은 도둑놈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운동선수도 상대방을 보고서 운동선수인지 아닌지 쉽게 알아봅니다.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같은 계통에 살고 있으면 상대방을 알아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을 누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을 쉽게 판단합니다. 특히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 내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 모습이 바르다고 단정을 짓기 전에 자신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지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지도 않으면서 하는 판단은 절대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둑놈이 도둑놈을, 운동선수가 운동선수를,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처럼, 상대에 대해 알아차림은 그 모습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누군가의 틀린 점을 발견했다면 내 안에 그 틀린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와 겸손이 늘 필요합니다.
‘내 안에 그 모습이 있구나. 그래서 이렇게 판단하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담고 있어야 할까요? 사랑을, 평화를, 친절을, 기쁨을….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가진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뜻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을 통해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하신 첫마디가 ‘평화’일 정도로 평화를 강조하신 분이신데,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예수님께서 가져오실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악에 순응해서 얻어지는 거짓 평화가 아닌, 참된 평화를 가져오시기 위해 칼을 들어 거짓 평화를 잘라 버리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칼이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서 세상의 모든 악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편하고 쉬운 것,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있는 것만을 따르는 것이 아닌,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보이는 자기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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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하다>
마태오 10,34-11,1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버림과 따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벗하다>
믿음은 믿음과 벗하고
믿음과 벗하니 믿음이라네
희망은 희망과 벗하고
희망과 벗하니 희망이라네
사랑은 사랑과 벗하고
사랑과 벗하니 사랑이라네
참됨은 참됨과 벗하고
참됨과 벗하니 참됨이라네
의로움은 의로움과 벗하고
의로움과 벗하니 의로움이라네
부드러움은 부드러움과 벗하고
부드러움과 벗하니 부드러움이라네
기쁨은 기쁨과 벗하고
기쁨과 벗하니 기쁨이라네
맑음은 맑음과 벗하고
맑음과 벗하니 맑음이라네
밝음은 밝음과 벗하고
밝음과 벗하니 밝음이라네
착함은 착함과 벗하고
착함과 벗하니 착함이라네
깨끗함은 깨끗함과 벗하고
깨끗함과 벗하니 깨끗함이라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과 벗하고
아름다움과 벗하니 아름다움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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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칼을 주신다면>
오늘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범상치 않습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주님은 일치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주님도 일치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 주님의 본 모습입니까? 주님께서는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시고, 갈라서게 하시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잘못된 인연은 끊고,
잘못된 관계는 갈라서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관계와 하느님께 같이 가려 하지 않는 사랑은 아무리 서로 사랑하여도 잘못된 인연과 관계이기에 칼같이 끊고 갈라서라는 뜻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프란치스코가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려고 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자기 집 재산을 거덜낼 거라고 생각하였기에 프란치스코를 고소하고 상속권을 뺏으려고 했지요.
이때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자기가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자기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자유롭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고, 오늘 주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아들이나 딸이 주님과 일치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더 문제입니다.
부부의 인연은 잘도 끊고 부모와는 갈라서도 자식과의 관계는 못 끊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제가 짓궂은 질문을 엄마들에게 던진 적이 있습니다. 죽어 부활한 뒤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과 지금 내 자식의 엄마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지금 자기 자식의 엄마가 다시 되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자식을 수도원에 봉헌하라고 주님께서 하신다면, 그보다 더 아예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끊으라고 하신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그 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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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우리는 칼을 잘 써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고 싸움을 붙이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물론 주님께서 주시는 칼이 나쁜 칼이 아니고, 붙이시는 싸움이 나쁜 싸움이 아니라고 알고 또 믿습니다. 그렇기에 또 아무튼, 주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시니 우리는 칼을 잘 써야 하고, 싸움도 잘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주님이 주시는 칼은 찌르라는 칼이 아니라 자르라는 칼입니다. 사람을 찌르라는 칼이 아니라 잘라내야 할 것을 자르라는 칼입니다. 우리는 같은 칼이라도 어떤 사람의 손에 들려있고 어떻게 쓰이느냐?, 그에 따라 칼이 사랑의 도구일 수도 범행의 도구일 수 있음을 알지요.
의사의 손에 있는 칼은 종기를 짤라내고 치유하는 사랑의 칼이고 강도의 손에 있는 칼은 사람을 찌르고 돈을 빼앗는 범행의 칼이지요. 주님께서 주시는 칼도 주시는 뜻대로 쓰면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칼인데, 앞서 얘기했듯이 찌르는 것이 아니라 끊고 자르라는 것이 주님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자르면 되겠습니까?
첫째 불의의 고리는 끊어야겠습니다.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그런 접근은 초장에 끊습니다. 서로 좋은 게 좋지 않냐는 말은 서로에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관계의 악화와 단절을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 나에게 잘해준 사람과 좋았던 관계를 끊은 것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과 관계를 잃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인데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과 그런 관계는 결코 좋은 사람도 관계도 아닙니다.
다음으로 집착과 애착의 관계를 끊어야겠습니다. 집착과 애착은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눈을 멀게 하고 사랑이 눈을 멀게 한다고 하잖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도 하시고 당신을 위해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도 버려야 한다고 하시지요.
프란치스코가 법정에 갈 정도로 아버지와 관계가 나빠지고 마침내 아버지와의 연을 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지 않아서입니까?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하느님 아버지를 따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아버지와 관계를 끊은 다음 "이제부터 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스럽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외치고 선언한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자기를 끊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역시 찌르면 안 되고 끊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자기에서 하느님을 거부하는 나를 끊어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신 다음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내가 죽어야 하느님과 일치하는 내가 산다는 뜻이지요. 이는 마치 그래야지 내가 살기에 종기를 내게서 도려내거나 썩어가는 내 발을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나의 한 부분이기에 잘라내는 것은 너무도 아픈 것이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듯이 내가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나를 버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칼잽이이고, 칼을 들어야 하며, 칼을 잘 써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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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 인내와 겸손이 답이다 -
“항상 그 자리에 계셔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부님의 지혜가 담긴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새벽에 일어나 읽어보는 지난 밤에 받은 카톡 메시지입니다. 90년대 초 30대 초반의 나이였던 자매인데 30년이 지난 지금은 60대 초반에 접어든, 수도원과 오랫동안 계속 관계를 맺어온 분입니다.
하루가 끝나갈 무렵 힘차게 온힘을 다해 불렀던 잠자리에 들기 전 끝기도 ‘찬미가 둘째 연’과 ‘시메온의 노래 후렴’ 그리고 ‘본 기도’ ‘강복’ 내용이 새삼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 영광을
새는 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이래서 하루중 가장 기다려지는 행복한 시간은 온전히 주님과 함께 하는 잠들기 전과 잠깬후의 시간입니다. 이어지는 시메온의 노래 후렴과 강복, 본기도도 좋습니다.
“낮 동안 우리를 활기 있게 하신 주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니, 자는 동안도 자켜 주시어 편히 쉬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주여, 오늘 우리가 주님의 부활 신비를 경축하였사오니, 겸손되이 비는 우리 목소리를 들으시어, 거칠 것 없는 당신의 평화 속에 쉬게 하시고, 내일도 당신께 찬미 드릴 수 있도록 기쁜 마음으로 잠 깨게 하소서.”
알렐루야 찬미로 시작하여 아멘 감사로 끝나는 하루입니다. 문득 생각나는 23년전 5월 요셉상 배경의 흐드러지게 폈던 연산홍꽃 장면을 보며 써놨던 시가 생각납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요셉상 옆
붉게 타오르는
연산홍!-2000.5.10.
주님을 닮아 경거망동, 부화뇌동,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주의 내적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인내와 겸손이 답이다-”로 정했습니다. 어제 새벽 산책중 무수히 피어나는 무궁화꽃에 감동하여 저절로 흘러나온 제 고백 같은 시입니다.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이라 했지만 실은 제 소망이 담긴 고백입니다.
-일년 내내 아니 평생을
날마다 위로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며
사랑을 배웠습니다.
날마다 아래로 땅 어머니를 바라보며
흙의 겸손을 배웠습니다.
“사랑합니다!”
때 되어 하늘 사랑 고백하며 환하게
송이송이
무수히 환대의 사랑으로 피어나는
무궁화꽃들
깊고 깊은 하늘 사랑 찬미의 고백은 끝이없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을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삶입니다. 이런 마음을 바탕으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니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제1독서의 변화가 가벼운 충격입니다. 창세기의 별같이 찬란히 빛나던 성조들의 이야기는 요셉으로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출애굽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의 시련과 고난을 보여줍니다.
아, 이게 인생입니다. 늘 순탄대로의 인생이 아니라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삶의 리듬처럼 반복되면서 전개되는 파란만장한 세상의 삶입니다. 다시 이런 시련과 고난이 시작되는데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아,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의 수난은 계속됩니다. 하느님만큼 걱정많고 고생많은 분도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했던 하느님께 위로와 힘이 됐던 분들이 바로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면 묵묵히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과 함께 끝까지 견녀내고 버텨낼 것입니다. 내적 평화와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미소를 머금고 말입니다. 고통과 시련중에도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를 잃지 않았던 믿음의 성인들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순교적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우는 평화, 사랑, 십자가, 환대입니다. 주님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말씀하십니다. 충격적 표현에 놀라지 마십시오.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성 베네딕도는 “거짓 평화를 주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리 앞에 드러나는 거짓이요, 빛 앞에 드러나는 어둠이요, 정의 앞에 드러나는 불의입니다. 주님은 참 평화를 주러 오셨지 결코 거짓 평화, 값싼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처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면 이처럼 칼로 나누듯 선명한 분리로 분열이요 불화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참평화의 과정일뿐입니다. 이런 창조적 정화과정후의 평화가 값비싼 진짜 참평화입니다. 바로 저희 수도자들의 오랜 정주생활후의 베네딕도의 평화가 이런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힘차게 고백합니다.
다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에도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워선 안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우리는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모두 사랑하되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항구한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앞서의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이래야 모두에 대한 집착없는 초연한 무사한 사랑, 자유롭게 하고 생명을 주는 사랑 깨끗한 사랑,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십자가입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결코 값싼 십자가가, 악세사리, 장식품 십자가가 아니라, 끝까지 죽기까지 온힘을 다해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할 내 십자가입니다. 구체적으로 아모르 파티 내 책임의 십자가, 내 운명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여 어깨에 메고 하루하루 날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래야 항구한 정주의 삶이요 존엄한 품위의 참삶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은 우리 모두 십자가를 질 힘을 주십니다.
다음은 환대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내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하나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들이요, 잠시 이 세상에 온 손님들이요 나그네 길손들이라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에 연민의 사랑이 넘칠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하나라도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궁극에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는 주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은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을 섬기듯 그런 환대의 사랑으로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우리의 궁극의 갈망이요 소망이 주님께 합당한 사람, 참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평화의 사람이, 주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그리고 모두를 주님처럼 맞이하는 환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靜水流深 정수유심),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深水無聲 심수무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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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역설의 신비!>
오늘 복음(마태10,34-11,1)은 '파견 설교의 끝부분'으로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과 '버림과 따름에 대한 말씀', 그리고 '파견된 이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 안에 머물러 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안에서만 바라보면'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평화와 하나됨의 역설(paradox)'입니다. 때문에 문자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되고, 그 너머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바라보아야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24,36; 요한20,19.21)
예수님께서는 분명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요한복음 17장 참조) 그런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일치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참 평화'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 거짓과 싸워 승리할 때 주어진다는 의미...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악과 싸워 승리할 때, 그리고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육의 열매들(갈라5,19-21 참조)을 예리한 영적인 칼로 단호하게 잘라낼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참되게 믿으면 평화가 함께하고, 하나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확인하시고자 가끔씩 고통도 주십니다. 이 고통 앞에서 나의 민낯이, 나의 믿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고통이 또한 칼의 의미이자, 분열의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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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0kf_Z_kP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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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평화는
하느님이라는
중심을 지킬 때
더욱 예리하게
빛나는
살아있는 칼과
같습니다.
중심을 먹고 사는
평화입니다.
칼과 평화는
그래서
함께 공존합니다.
무딘 평화가
아니라
칼날처럼
깨어있는
평화입니다.
깨어있는 칼은
이미 평화의
다른 이름입니다.
어디에서
우리는 평화를
찾고 있는 것입니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만나는 평화입니다.
자르지 않고서는
죽지 않고서는
결코 밥이
될 수 없는
평화입니다.
칼다운
칼이 되는
평화입니다.
주님의 칼이 되어
중심에서
결코 빗나가지
않습니다.
평화를 향하는
길이 하느님께
집중해야 하는
칼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칼이 지나간 길이
십자가의
평화입니다.
아직도
하느님께
집중하지 않는
우리들 삶입니다.
악습을 도려내는
칼은 평화를
지키는 평화의
이치입니다.
잘라내고
도려내고
끊어내는
자아의 죽음이
참된 평화임을
아시기에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복음의
칼을 주십니다.
깨어있는 평화는
시들지 않으며
잘 벼리어 진
칼처럼
하느님을 비춥니다.
분산이 아니라
집중의 칼입니다.
중심을 다시 잡는
오늘의 평화
주님의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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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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