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히브 11,32-40; 마르 5,1-20 / 연중 제4주간 월요일; 2025.2.3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아주 상반된 상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독서에서는 저자가 이스라엘의 영웅이나 위인으로 추앙받았던 인물들이 자신들의 신앙과 신념을 위하여 박해를 감수하면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녀야 했던”(히브 11,38) 사연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만나신 사람이 마귀에 들려서,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고 했던”(마르 5,5) 사연이 나왔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속은 딴판입니다. 겉으로 비슷해 보여도 속은 딴판인 것도 현 시기 우리 사회의 정국과 똑빼닮았습니다. 보수 반동으로 극우적 성향을 띤 무리들이 반민족적으로 친일 동향을 보이더니 급기야 계엄 내란 정국을 일으키고 이를 극구 옹호하는 형국이 군대 마귀를 닮았고, 이를 예의 주시하던 시민들이 계엄 당시부터 온 몸으로 막아서더니 탄핵과 파면까지 이끌어 내고자 연일 거리를 메우고 평화 시위를 하는 형국이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초기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역이 되었던 구약의 영웅들은 큰 고난을 견디어냈습니다. 조롱과 채찍질은 물론 결박당하고 투옥되었으며,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했는가 하면,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받으며, 짐승 가죽만 두른 채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녀야 했습니다(히브 11,36-38). 거룩한 영의 이끄심을 받았기에 가능한 삶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초기 영웅들과는 딴판으로 지배자들이 우상을 숭배하며 백성을 억누르던 시기에,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려던 상황을 전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득실거리고 있는 적진으로 뛰어 드신 셈이었습니다. 실제로도, 마귀는 믿음이 없이 허약한 이들에게 들어가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무덤가에서 살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귀에 들린 부마자(付魔者)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으로 예수님을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지내야 했는데, 이는 아마도 마귀의 힘을 알지 못하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행한 조치였겠지만 마귀의 힘은 쇠사슬도 끊어버리고 족쇄도 부수어 버릴 만큼 강했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발광을 하게 하며 자해행위를 시키는 짓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지옥과 같은 고난 속에서 살다가 드디어 자신을 찾아와 주신 메시아를 만났던 것입니다. 그가 멀리서부터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서 그 앞에 엎드려 절한 행동 자체가 그 부마자의 간절한 심정을 대변합니다(마르 5,6).
하지만 그 부마자는 입이 있어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마귀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 정체를 알아보았고 쫓겨날까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항의조로 애원을 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르 5,7).
하느님의 적인 마귀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드님께 말을 하고 있는 이 기막힌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말씀으로 그 마귀를 쫓아내버리셨습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 그 마귀는 꼼짝없이 2천 마리나 되는 많은 수의 돼지 떼 속으로 쫓겨 들어가는 운명을 맞이했고 놀란 돼지 떼와 함께 호수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마귀로부터 해방되어 제 정신으로 돌아온 그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 하고 청했습니다만, 그분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가 수행할 수 있는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러합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구마 기적을 두고 당신이 하신 일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성령께서 해 주신 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일이 성자와 성령의 합동작전임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기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행사하면, 우리도 마귀의 모든 유혹과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책임 있게 각자의 자유를 행사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책임 회피일 뿐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책임있게 행사할. 줄 아는 때부터 사람은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부활의 가치를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대중의 유행사조에 내어맡기는 순간부터 사람은 누가 매어놓은 줄로 모르는 족쇄와 쇠사슬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체성과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혼에 하느님의 영을 받아서 온전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사도 바오로가 치명한 후에 로마제국 영토 안에서 여러 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살던 히브리인 신자들에게 이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리하여 그리스도 신앙으로 로마제국을 복음화시키고자 했으면서도, 자신의 협조자로는 유다인 동족 중에서 고르고자 했고, 그리하여 이방인들과 함께 유다인들도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되기를 간절히 염원했었던 그 속내를 알고 있던 그의 제자들이 바오로의 지향과 사상과 신앙을 담아서 이 히브리서를 써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과 목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는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더러운 영에 휘둘리지 말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된 삶으로 살아가는 일은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신앙 과제입니다. 더욱이 무속과 검찰의 연합 정권으로 나라의 공동선을 짓밟다가 급기야 계엄과 내란 정국을 저질러 탄핵을 당한 내란 수괴의 파면을 앞둔 이 상황에서, 이를 옹호하고 있는 정당과 언론을 내모는 일은 구마 행동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말합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