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일단 잠시 한 때나마 부끄러운 새색시 입가에 머무는, 웃으면 큰일 나는 이등병의 양 볼에 비치는 미약한 미소 배시시 지을 수 있는 시간 주기 위해 쓴, 더운 여름 육수 닦기 위해 쓰고 버리려다 자기 인생의 존재 의미 회상하며 짓는 한숨에 날아가는 한 장 기름종이처럼 왠만해선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글임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격렬한 설사 후에 오는 쌉싸름한 아픔 같은, 잠재의식 속에 고이 접어놓았다가 예기치 못하게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 끊어지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조합이 부조화스러운 음식의, 항상 맴도는 은은한 잔향 같은, 아주 옛날 기억의 편린들이 왠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에서 혼란하게 섞여 마구 솟구쳐 올라 그냥, 함부로, 막 엮어본 뻘글임을 밝히고 들어갑니다.
이런 일들에 공감하는 우리 나이 또래가 몇이나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초등학교 저학년 때, 대도시 대전에는 OB BEARS가 홈으로 야구장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주로 이어폰 꽂고 들었던 라디오를 통해서 야구를 접했던 것 같습니다. 딱 봐도 머리 숯이 희박한, 그 당시의 중년 아저씨 홈런왕 김우열(사실 중년은 아니었을 겁니다. 홈런왕이 아니었을지도), 너클볼이라는 주장이 우세했던 진짜 이상한 공을 던지던 젊고 잘생긴 박철순(24승, 22연승 이런 건 사실 잘 몰랐습니다.), 과도하게 자주 다리를 스트레칭하며 공을 잡은 모습이 뇌리에 박힐 정도의 키다리 아저씨 1루수 신경식, 왠지 진짜 곰의 이미지가 특히 강했던 윤동균 등등 그해 우승하고 어린 마음에 감동해서 울면서 며칠을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으며 그 순간만 무한정으로다가 곱씹었던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어슴프리하게 나는 것도 같습니다. 그 다음해, 다 아실 겁니다. 베어스는 우리를 떠났고 박철순은 허리를 다쳤으며, 우리의 영웅들은 어린 영혼들에게 전부다 배신자로...
그러고는 애욕과 배신의 쓰라림으로(물론 곁눈질은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몇 년이 지날 때까지 저도 아예?? 야구를 떠났드랬죠. 관심이 아예(?) 없었습니다. 물론 1986년도에 빙그레이글스가 신생하여 배성서감독이 오셨고 한밭종합운동장에서 오렌지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한희민, 이상군, 한용덕, 유승안, 강정길, 이광길, 황대연, 지화동, 이강돈, 고원부, 이중화, 황병일, 김우열(잠깐) 뭐 이런 선수들이 뛰었고 그해 7위했다는 정도는 곁눈질로 대충 압니다. ㅋㅋ
그 다음해 6등, 그 다음해에는 2등 이런 식으로 계속 더 잘하게 되었다는 정도..
사실 그때는 이미 야구가 어린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시기가 헷갈리기는 하지만 미들급 백인철이 충무체육관에서 하던 권투시합을 직관했고 시기가 더 지나서는 강만수, 강두태, 경기대 삼손 이상열의 배구에 심취했었고, 더 지나서는 탱크 맥도웰의 현대 다이넷을 응원하기도 했었죠. 삼촌이 노가다 뛰고 돈 벌면 꼭 사주겠다는 약속만 하고 실제 사주지는 않았던 나이키와 정품 나이스(NICE R), 월드컵과 프로월드컵, 스펙스와 프로스펙스가 공존하고, 타이거라는 중저가 운동화가 가난한 우리들의 로망까지는 아니었지만 최동원이 애용하고 광고에도 나오던, 꽤나 잘 팔리던 그 시절, 좀 산다는 집의 친구들은 쫀득 쫀득 쫀쫀한 줄줄이 비엔나 반찬을 싸와서 어린 마음에 너무 먹고 싶어서 하나만 달라고 했다가 ‘너 다 쳐먹어라’ 여린 마음, 여자애들 앞에서 굴욕 당했던 그 시절(가난이 웬수지), MBC청룡의 하늘색(지금 생각해보면) 바람막이 같은 걸 입었으며, 오비베어스 어린이 회원들은 빨간색/흰색이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그 시절, 백인천의 홈런치고 먼 산 바라보던 포즈로 날리던 ‘게브랄티’ 멘트를 무한 따라하다가 망측하다고 어른들에게 맞기도 했던, 브라보콘도 물론 비싸고 무지 맛있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던 야구선수 사인 들어간 사진 모으던 것이 주목적이었던, 인베이더, 갤럭시, 스크램블 같은 오락에 미쳐서 엄마 지갑을 털고 혹시나 동전 떨어져 있을지 모른다며 바닥만 바라보고 걷다가 부딪히고 깨지던 그 시절을 거치고 중학교 때 주변의 강력하고도 화려한, 다양한 유혹에 못내 이기지 못하는 척하며 대전 시내 거의 모든 로라장을 섭렵하며 들개처럼 떠돌던 그 시절이 다 지날 때까지 야구는 인생에서 곁가지, 아주 작은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대학교를 갔는데 그해 코리안 시리즈에서 또 그 지긋지긋한, 그놈의 해태를 만나서 그 잘 던지던 송진우가 퍼펙트가 깨지더니, 노히트 노런이 깨지고, 승리도 날아갔던 그날, 우리 고등학교이며 동시에 대학 동문들 이기도한 대전 사람들끼리 모여서 깡통에서 TV로 야구를 응원하고 있었는데 경기도 지고 기분도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로 들었던 그 한마디 ‘멍청도’. 우리는 분연히 일어섰고 타관에서 가뜩이나 서럽고 야구도 진 분노가 폭발하여 해태 팬들과 주먹다짐 했던 기억도 납니다.
어른들의 삶이야 예나 지금이나 무겁고 버겁지만 이미 그때의 어른들 보다 더 어른이 된 이 시점에 밑도 끝도 없이 그 때 그 시절이 갑자기 회상 되는, 이제 야구가 인생의 곁가지가 아닌 거의 중심이 되다시피한 지금, 제 인생에서 야구의 무게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고 진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한화 파이팅(옛날 구호죠!) 올해 꼭 가을야구, 포스트시즌 거쳐서 꼭 우승하길!! Again 1999!!
첫댓글 저랑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생각으로 사신거 같네요~ ㅎㅎ
더욱더 많이 반갑습니다 보물섬님. 그러고보니 보물섬의 실버가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