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술 고개 넘어 백리 길을 걷다(홍천 두촌면에서 남면까지 41km)
4월 24일, 아침에 일어나 가람밸리리조트 일원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휴양림이 있는 지역이라 공기가 맑고 상쾌한 기운이 감돈다. 여성회원들은 쾌적하고 안온한 분위기가 좋다며 하루 쯤 쉬었다 가면 좋겠다고 말한다. 허기범 상무를 비롯한 직원들이 친절하고 식당의 음식도 깔끔하다.
오전 8시, 목적지까지 43km로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하니 모두들 마음이 바쁘다. 서둘러 몸을 풀고 곧바로 행진에 나섰다. 5년 전에 서울에서 도쿄까지 완주한 80세의 임창선 씨가 이틀 일정으로 합류하였다. 연세에 비하여 겸손하고 순박한 언행이 돋보이는 분이다,
숙소에서 큰 길로 나가 곧바로 강변 소로로 접어들었다. 꽤 길게 이어지는 천변을 지나 언덕길에 오르니 주음치(酒飮峙)라는 색다른 마을이 나타난다. 술과 음식의 고개라는 뜻인데 주막보다 차원이 높은 표현이 마음에 든다. 그 마을 경로당 앞에 앉아 모찌와 두유를 들며 잠시 쉬다가 4차선 도로 쪽으로 나가니 주음치리라고 쓴 버스 정류장이 나오고 오르막길로 연결된다.
주음치 경로당 앞에서 모치와 두유를 들고 있는 한동기 선생과 아내
고개 넘어 화촌면, 면소재지의 농협에서 2차 휴식을 가진 후 한 시간쯤 걸으니 점심장소다. 걸어온 거리는 15km쯤, 오후에 갈 길이 많이 남아 일찍 점심을 드는 것이 반갑지 않다. 날씨가 더운 편이라 오후 걷기가 더 힘든 터라서. 점심메뉴는 순두부백반, 맵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하여서인지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다.
12시 반에 오후 걷기에 나섰다. 인제에 이어 홍천에도 군부대가 많은 편, 어느 부대 앞을 지나니 '강한 군대, 따뜻한 육군'아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군은 나라의 간성, 표어처럼 강력하고 따뜻한 국군이 되어라.
한 시간 넘게 걸어 홍천읍내에 들어서니 경찰서를 지나 군청에 이르기까지 꽤 긴 도심이 이어진다. 홍천은 강원도에서 인구가 많고 규모가 큰 군, 아파트도 많이 들어서고 관광호텔도 보인다. 홍천군의 명품은 찰옥수수 외에 쌀, 잣, 인삼, 한우 등이고 무궁화 중심도시라고 곳곳에 포스터가 붙어 있다. 무궁화는 제 철이 아니라서 볼 수 없지만 철쭉꽃이 활짝 핀 천변길이 아름답다.
보무도 당당하게 홍천강변을 걷는 일행
걷는 길목에 깨끗하게 지어진 읍사무소가 쉬어가기 좋은 장소, 2시에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마침 읍사무소 가까운 곳에 조카(사촌여동생의 딸)가 운영하는 제과점 파리 바케트가 있다. 지나는 길에 빵을 주기로 미리 연락한 터, 단팥빵과 카스테라 한 상자를 보내주어 모두들 맛있게 든다. 공지사항 등의 통역으로 수고하는 재일동포 이혜미자 씨가 전화를 걸어 감사의 뜻을 표한다.
오후 2시 15분, 읍사무소를 출발하여 읍내를 가로지르는 홍천강변의 우레탄 길을 지나 양평으로 가는 국도에 들어섰다. 한 시간 쯤 걸어 산림조합 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일본인들이 산 아이스크림으로 흐르는 땀을 식힌다.
3시 반에 이곳을 출발하여 소로로 이어지는 조용한 길과 국도를 번갈아 걸어가니 4시 40분경 아스라이 보이던 고개아래에 이른다. 이름은 며느리고개, 날씨가 덥고 오르막길이어서 물이 많이 먹힌다. 오렌지를 곁들여 시원한 물을 마시며 며느리 고개를 넘으니 오늘의 목적지인 홍천군 남면의 양덕원이 가깝다.
남면소재지인 양덕원은 군부대의 배후도시인 듯, 화랑이란 군인아파트가 들어서고 모텔도 여러 개 눈에 띤다. 숙소인 테마모텔에 도착하니 오후 6시, 주행거리는 41km로 예상보다 약간 빠르게 도착하였다. 내륙의 가장 긴 코스를 무사히 완주한 것을 축하하며 만세를 부른다.
저녁식사는 생선구이 전문집, 예약된 시간에 식당에 도착하니 두 대의 관광버스를 타고 온 외국인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와 사진촬영에 바쁘다. 말레이시아에서 6일간 예정으로 방한한 이들은 밝은 얼굴로 같이 사진 찍자며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 와 포즈를 취한다.
선상규 회장이 일행들에게 말한다. 어제 저녁에는 술이 없어 미안했는데 술고개 넘어 백리 길 넘게 걸었으니 마음 놓고 마시라고. 술 고개 넘고 며느리 고개 넘어 한양길이 가깝구나. 서울 도착을 앞두고 주최측에서는 27일, 일본측에서는 28일에 만찬을 갖는다고 초대장을 돌린다. 미시령도 넘고 백리 길도 걸어 축제의 날이 가까우니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걷자.
26. 강원도 지나 경기도에 들어서다(홍천 남면에서 양평읍까지 35km)
4월 25일 아침 7시, 전날 저녁식사를 한 밥도둑 생선구이 식당에서 누릉지에 고기국을 곁들여 조반을 들고 8시에 숙소를 나섰다. 오늘의 행선지는 경기도 양평읍이다. 5일간 함께 걸은 오까야스 사다코 씨와 전날 백리길을 걸은 원로 임창선 씨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남면 소재지를 벗어나 4차선 국도로 들어서니 언덕길이 한참 이어지고 고개마루에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표시하는 입간판이 크게 세워졌다. 한쪽은 '하늘이 내린 살아 숨쉬는 땅, 강원도', 다른 쪽은 '세계 속의 경기도'라고 쓴 표기가 대조적이다. 들어선 곳은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한 시간 쯤 걸으니 경치 좋은 길목에 양평군이 지정한 모범화장실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서 쉬는 동안 오이 한 조각 씩 입에 물고 더러는 아픈 다리를 주므르기도. 체육지도자이기도 한 노자와 가즈하루 씨는 발바닥이 갈라져 여러 날 고생하였는데 허벅지도 아파서 힘이 드는 모습이다. 아내가 손가락을 만지며 지압으로 자극을 주니 고통을 참느라 얼굴을 찌뿌리고 눈물을 쏟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한 두 군데 불편함을 참고 견딘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일본에서 손꼽히는 걷기 배테랑인 사또 에이코 씨도 남은 날을 꼽으며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는 한동기 선생의 귀띰이다. 그래도 표정들이 밝고 발걸음은 힘차다. 기수로 시종 흔들림 없이 걷는 오시카와 코조 씨는 기수 노릇 잘 하려고 평소 새벽 4시에 일어나 천 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맹훈련을 하였다고 안정일 씨가 말해준다. 그의 구두는 매일 아침 정성으로 닦아 번쩍번쩍한다. 그런 프로 정신을 본받아야.
손가락 지압에 고통스런 표정인 노자와 가즈하루 씨
10시 쯤 청운면소재지를 지난다. 한참 더 걸어가 현대 오일 주유소에서 두 번째 휴식이다. 간식은 카스테라에 두유. 15분 쉬고 단월면 지나 한 시간 넘게 걸으니 점심장소인 머무름 막국수 집에 11시 50분에 도착한다. 이정표에 500m라 적힌 지점에서 10여분 걸어도 음식점이 나타나지 않아 모두들 지친 표정, 100m라 쓴 지점에서 300m는 족히 가야 음식점에 이른다. 500m라 쓴 곳에서 너무 멀다고 모두들 한 마디, 식당 주인 왈 '간판쟁이가 그렇게 해 놓아야 차 타고 가는 사람들이 지나치지 않고 찾아온다고 말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란다. 막국수 맛도 됀찮거니와 넓은 부지에 여러 개의 정자를 운치 있게 세워 놓아 밥 먹고 30분 넘게 '바람도 쉬어가는 머무름' 이란 쓴 정자에서 놀다 출발하였다.
바람도 쉬어가는 머무름 정자에서
식당에서 바로 이웃하여 용문면에 이른다. 남한강 줄기인가, 운치 있게 나무로 깐 강변길을 따라 걸으니 용문산관광지로 유명한 용문면소재지로 이어진다. 마침 장날이라 오후인데도 사람들로 붐비고 전철이 연결되어서인지 시골인데도 활력이 넘친다. 걸어가는 길목에 라일락 향기 풍기고 은헹니무에 물이 올랐다. 레일바이크 타는 젊은 남녀들이 손짓하며 파이팅을 연호하기도.
용문면의 한적한 강변길을 따라 한동안 걸어가니 언덕길이 나오고 그 길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양평읍의 경계에 이른다. 고개 위에서 땀을 식히며 포도 쥬스 한 잔 마시고 잠시 쉬다가 다시 걸으니 오후 4시가 가깝다. 고개 아래에서 4차선 국도를 만나 우회하니 다시 작은 고개, 그 언덕 넘으니 양평 읍내가 시야에 들어온다. 내리막 길을 열심히 걸어 시가지를 관통하니 강폭이 넓은 남한강변에 이르고 양평경찰서 옆에 오늘의 숙소(VIP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도착시간은 오후 5시 10분, 35km를 걸었다.
한강변의 숙소에서 낙조를 보기는 처음, 우선 경관이 마음에 들고 강바람이 시원하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6시부터 앤도 야스오 일본대표의 생일축하를 겸한 만찬이 펼쳐졌다. 촛불 켠 케이크를 자르며 감회에 젖은 앤도 대표는 '70(오늘로 72세)이 넘으면 생일맞이가 좋은 일인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며 건배를 제의한다. 조용히' Happy Birthday to You'를 합창한 후 준 생일 선물은 다 닳은 구두를 대신하라며 워킹화 한 켤레. 쌈밥에 막걸리 한 잔 곁들이고 글 쓰기 위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내 발에 물집이 생기고 오혜란 씨는 발목이 시큰하다며 홍순언 이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마지막까지 잘 걸어 유종의 미를 거두자.
조촐하게 벌인 앤도의 생일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