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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이라는 한자는 한국인에게 ‘韓’자, 일본인에게 ‘和’자가 갖는 상징성만큼 베트남인에게 베트남의 전통과 역사를 상징하는 글자이다. 현재 베트남은 한자를 거의 쓰지 않지만, 응우옌 왕조가 공식적으로 멸망하는 적어도 20C 중반 무렵까지 그들은 한자 문명권 국가였다. 우리가 잘 아는 베트남에 대한 것들도 대부분 한자어들이다. 베트남[越南, 비엣 남], 하노이[河內], 사이공[柴棍] 등 지명이나 나라 이름은 물론이고 베트남 인들의 이름도 사실 따지고 보면 한자 이름을 베트남식 한자독법으로 읽은 것에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예로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수상인 호치민[胡志明]의 이름 역시 한자 이름이다. 한자뿐만 아니라 베트남인들은 쯔놈이라는 고유의 문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쯔놈은 한때 매우 활발하게 사용돼 쯔놈으로 많은 문학 작품들이 창작되기도 했다. ㅡ 쯔놈이 한국의 향찰, 이두와 달리 훨씬 광범위하게 많은 사람에게 쓰였던 것은 베트남어가 중국말처럼 단음절 단어가 많은 특성이 있기에 가능했다. ㅡ 한자와 쯔놈 문자를 사용하던 베트남인들은 프랑스 통치 기간을 거치면서 프랑스 선교사가 만든 베트남어 알파벳 표기법 ‘꾸옥 응우[國語]’로 자신의 표기법을 바꾸었고 이후 한자 교육도 이루어 지지 않아 대부분 베트남 사람들은 한자를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른다. 물론 식자층들의 경우 한자와 쯔놈을 여전히 공부한다. 한자를 쓰지 않으면서 '越'이라는 한자로 베트남을 표기하는 베트남 사람은 거의 없지만 여전히 ‘越’이라는 명칭은 베트남말 ‘비엣’, 또는 줄임말로 ‘비’라는 말로 쓰이고 비엣과 비의 V자는 베트남을 상징하는 글자로도 쓰인다.
‘越’이라는 이름이 처음 쓰인 곳은 현재 중국 대륙의 남부 지역이다. 월나라는 ‘구천과 부차 이야기’, ‘와신상담’로도 잘 알려진 춘추전국 시대의 나라이다. 월나라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중국 저장성 샤오싱시로 행정 구역상 상하이와도 매우 가까운 지역이다. 샤오싱시는 중국 근대 문학의 큰 별인 루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대 총리였던 저우언라이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곳은 본래 월주(越州)라고 불렸던 곳이다. 월나라는 베트남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중국 대륙 깊숙한 곳에 있다. 월나라 사람들의 풍습은 양자강 이북 지역 정통 중국 한족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장자>>에는 송나라(송나라는 상나라의 후예를 자처했기에 문화적 자부심이 굉장했다)의 상인이 월나라에 갔다가 월나라 사람들이 머리를 짧게 하고 문신을 하고 있다고 말한 부분이 나온다. (宋人資章甫而適諸越. 越人斷髮文身, 無所用之.) 이 구절에서 그 송나라 상인은 월나라의 풍습을 굉장히 이상하고 괴이하게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비단 그 송나라 상인뿐 아니라 양자강 이북 지역의 정통 한족들이 월나라의 풍습을 보는 시각이었을 것이다.
구천이 사망한 후, 월나라는 급격히 쇠퇴하여 기원전 306년 멸망하였다. 이후 월나라의 잔존 유민들은 중국 남부 지역 전역으로 뿔뿔히 흩어지게 됐는데 일부는 현재 광동어[粤語, 월어]를 쓰는 광동성, 광서성 지역과, 민어[푸젠성과 타이완의 토착 방언 閩語]를 사용하는 푸젠성과 타이완 일대 오늘날의 한족이 되었고, 다른 한 부류는 그보다 더 이남 지역인 베트남의 북부 홍강 지역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베트남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이런 모든 월나라의 부류를 통틀어 ‘백월’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베트남과 남부 광동어, 민어를 쓰는 중국인들의 다수가 백월족의 후예일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에도 광동어와 민어를 쓰는 한족들은 황하 일대에서 기원한 중국 정통 한족들과는 좀 다른 독특한 일종의 혈연적 문화적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가령 작년 2010년에 중국 정부가 홍콩과 광동성의 방송에서 광동어가 아닌 표준어인 보통화를 공식어로 사용하라고 했을 때 많은 홍콩과 광동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서서 광동어 탄압 중지를 외치며 중국 정부에 거세게 항의했다. 물론 광동인 스스로 중국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월나라 계통의 언어와 문화를 계승한 약 1억명 정도의 광동성, 광서성의 한족들은 분명 보통화를 사용하는 한족들과는 다르다. 정말로 같은 백월족의 후손이어서인지, 광동어는 베트남어와도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다. 베트남어는 단음절이 한 단어인 경우가 많은 언어로, 한자 하나에 하나의 음가를 대응시켜 뚝뚝 끊어지게 발음하는 광동어와 상당히 닮아있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어가 6성의 성조인 것처럼 광동어 역시 9개의 상당히 많은 수의 성조를 갖고 있다. 물론 문법이라든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두 언어는 다르지만, 적어도 듣기에 광동어는 보통어[북경어]보다 분명 베트남어와 말의 억양이나 느낌이 더 비슷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베트남어가 월어[越語]이듯 광동어도 월어[粤語]라고 불린다.
백월족의 정통을 가장 많이 계승한 나라는 아마 베트남일 것이다. 그들의 나라 이름 자체가 베트남[越南]인 것만 봐도 그렇다. 베트남이 공식적으로는 그들과 월나라와의 관련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연원을 따져본다면 하노이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저장성 지역에서 흥기했던 월나라 역사와 베트남은 분명히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마치 한국인들이 지금은 중국 영토인 만주 지역의 홍산 문화 등에 대해 한국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월나라 멸망 후에도 ‘越’이라는 이름은 나라의 이름으로 계속 사용됐는데 우월, 양월, 간월, 민월, 남월, 산월, 구월 등이 그 예이다. 대부분은 중국사의 부분으로 취급되지만 그 중 유독 남월(베트남말: 남 비엣, 중국말: 난 위에)은 중국의 남방공정 때 베트남과 중국이 서로 자국의 역사로 주장하여 한참 논쟁이 있었던 나라라고 한다.ㅡ난 베트남과 중국 사이 어떤 논쟁들이 자세히 오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ㅡ 둘의 논쟁의 중점은, 베트남은 남월이 백월족이 세운 베트남의 고대 국가이며 베트남인이 중국 광동, 광서 지역까지 통치한 역사였다고 말하는 반면, 중국은 남월이 중국변방소수민족의 국가이며, 남월의 지배층은 본래 중국 혈통이었으므로 남월은 중국사이고, 베트남 북부 지역도 중국 국가인 남월의 통치하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중국이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논리와 비슷한 논리로 남월을 중국사라고 주장한 것이다. 남월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기 때문에 한국 백과사전에서는 중국사의 일부로 다루기도 하고 베트남사의 일부로 다루기도 한다.
남월의 수도는 번우로서, 오늘날 베트남이 아닌 중국 경내의 광동성 광저우시이다. 광저우시가 현재 큰 도시인 것도 결국 남월의 수도였던 것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광저우시에는 남월왕박물관, 월수공원 등 남월과 관련된 유적이 다수 남아있다. 남월의 건국자 조타[趙佗, 베트남말:찌에우 다>이하 ‘찌에우 다’로 표기]는 본래 허베이성 출신의 중국인이었다. 마치 위만조선의 건국자 위만이 중국 연나라 사람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찌에우 다는 진나라에서 현재 양광 지역과 베트남 북부 지역에 파견돼온 관리였지만 진시황 사후, 중앙으로부터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독립을 선언하고 남월국을 세웠다. 남월국의 건국은 통일 왕조였던 진나라가 멸망하면서 항우와 유방이 서로 패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던 시기였기에 가능하였다.
찌에우 다는 비록 한족 출신이었지만 양광과 베트남 북부 지역에 살던 백월족의 문화와 풍습을 존중하였고, 그 자신도 백월족의 문화, 풍습을 받아들여 아예 백월족이 되려고 하였다. 찌에우 다 이후의 찌에우[趙, 조)]씨 왕들도 ‘화집백월(和輯百越)’ 정책을 추진하여 기존 토착 백월인들과 이주해온 한족들의 융합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남월국에는 기존 토착 세력의 백월족 문화와 중국의 한자 문명의 문화가 뒤섞여 당시 중국의 한족 왕조와는 다른 매우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는 오늘날의 베트남 전통 문화 역시 베트남의 토속 문화와 중국의 한자 문화가 뒤섞여 형성돼온 것과 같다. 남월은 중국에서 한나라가 건국된 이후,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는 등 한나라에 대해 조공 관계를 맺었지만, 이것은 남월이 통일 중국과 구분된 독립 왕조라는 사실을 인정받았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남월국의 남쪽 베트남 북부 지역 일대에는 남월국과 같은 백월족이 세웠던 툭판 왕조가 있었는데, 남월국은 적극적인 정복 사업으로 툭판 왕조를 정복하고 영역을 남쪽으로 더 확장시켰다. 툭판 왕조는 베트남의 최초의 왕조인 홍방 왕조를 멸하고 들어선 왕조로 사실상 남월은 툭판 왕조를 정복함으로써 동손 문화[베트남 홍강 일대의 청동기 문화]를 이은 백월족까지 도 다 통합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남월은 한나라에 조공 관계를 맺었지만, 사실은 찌에우 다 시대부터 남월은 한나라와 잦은 전투를 벌였고 찌에우 다는 스스로를 황제(한나라 황제의 신하가 아니라 한나라 황제와 대등하다고 칭한 셈이다)라고 칭했다. 남월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못했는데 6대 조건덕 황제 시기, 고조선 침공 3년 전인 기원전 111년 한나라 무제는 남월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그 무렵 남월은 백월족 토착 세력과 이주한 중국 한족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있었고, 국력 역시 한나라에 비하면 약하였기에 결국 남월은 멸망하고 말았다. 고조선이 멸망한 지역에 한사군을 세운 것처럼 무제는 피정복민 통치를 위하여 멸망한 남월국 지역에 일곱 개의 한나라 군(郡)을 세웠다. 이 중 4개 군은 오늘날의 광서성, 광동성에 설치됐고 교지[쟈오 찌] 3개 군은 현재 베트남 북부 지역에 설치됐다. 중국인들은 옛 남월 지역에 중국 문화를 이식하려고 애썼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석광과 임연이었다. 그들은 군혼(무리지어 결혼하는 것)과 같은 풍습을 중국식 부계 제도로 고치려고 했고, 수렵을 주업으로 삼던 주민들에게 우경법을 소개하였다. 남월의 유민들은 이런 새로운 행정 조직이나 이질적인 문화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이런 남월에 설치된 한나라의 군은 한나라 내에서도 오지였기 때문에 주로 파견된 관리들이 매우 천박했고 착취를 일삼았다. 때문에 한나라에 대한 남월의 유민들(베트남인)의 투쟁은 줄기차게 이어지게 됐다. ㅡ 그 내용은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남월국은 스스로 한나라의 중국 통일 문명권 밖의 독립된 국가였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비록 남월의 수도가 현재 중국의 광동성 지역에 있었지만 베트남은 남월 멸망 후, 남월에 대한 계승 의식을 계속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쩐 왕조(陳朝)의 학자 레 반 흐우(여문휴, 黎文休)가 1272년(한국이 삼별초 대몽 항쟁을 할 무렵) 쓴 <<대월사기>>에서 진정한 베트남의 역사의 시조 국가로 남월을 서술할 만큼 남월 멸망 1300년이 지난 때에도, 베트남은 비록 남월의 영토는 다 갖고 있지 못했지만 남월에 대한 분명한 계승 의식을 갖고 있었다. 개인 생각으로 남월은 중국이 아닌 베트남의 역사에 넣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중국이 남방공정으로 남월을 베트남사에서 제외해 버리고 베트남의 양광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애초에 없애버리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 이해는 일면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학문적으로는 용인되기 어려운 일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이 남월을 자국사로 만드려는 것은 역사에 대한 순수한 연구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분히 국가적 차원에서 계산된 정치적 의도를 갖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월은 한국의 위만조선과 멸망한 시기, 그리고 건국된 주체가 중국인이었다는 점, 한나라에 대해 독립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점 등 공통점이 많아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북공정에 대한 더 치밀한 대비 전략을 세우려면 남방공정(베트남), 서북공정(몽골) 등 중국이 벌이고 역사 왜곡에 대해 베트남과 몽골은 어떤 논리와 연구를 펼치고 있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트남 무제 정복 이후 구 남월국의 지역은 한나라의 일부로서 ‘교주(交州)’라는 지명으로 널리 불려졌다. 마치 평양(왕검성) 지역이 낙랑이라고 불렸던 것과 비슷하다. 越, 다시 말해 비엣이라는 명칭이 지도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백월족 유민들의 한나라에 대한 저항은 줄기차게 이어졌다. 쯩 자매는 한나라에 대항하여 베트남 사상 최초의 대규모 저항운동을 일으켰고, 수 백년 후에는 남월국 왕족 성인 찌에우 성을 가진 찌에우 티 찐이 중국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베트남인들은 약 60년의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前 리 왕조'를 세웠으며 왕은 ‘찌에우 대왕’을 칭했다. ㅡ 이것 역시 베트남인들이 찌에우 씨인 남월에 대해 계승 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 사실로 볼 수 있다. ㅡ 그로부터 400년이 더 흘러 베트남은 독립국가인 응오 왕조를 세웠고, 이후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독립 국가는 딘, 리, 쩐, 호, 레, 응우옌으로 1000년 넘게 이어졌다. 왕조의 이름은 왕의 성을 딴 것일 뿐, 베트남의 공식적인 국호는 항상 '大越[대월, 다이 비엣]', '越南[비엣 남, 다시 말해 베트남]' 등 越자가 포함된 이름이었다. 베트남은 이후로도 중국의 침략에 대하여 거의 처절하다고 할 만큼 베트남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인의 '越'이라는 이름에 대한 애착은 그만큼 더 깊어졌을 것이고 현재 '비엣'이라는 말이 베트남을 상징하는 말이 되게 했을 것이다. 오늘날 '베트남[越南]'이라는 나라 이름은 청나라에게 사용을 허용받은 이름이다. 응우옌 왕조 창건 후 베트남 위정자들은 남월이라는 명칭을 국호로 윤허해 줄 것을 청나라에 요청했지만 남월이 과거 중국(한나라)에게 대항하였던 역사를 이유로 들어 청은 남월이 아니라 월남이라는 국호를 사용할 것을 허용했다. 어쩌면 베트남은 청에게 공식적으로 베트남이 남월의 계승국인 것을 인정받고 싶어했던 것 같다. 꼭 조선 개국 시기 국호를 조선으로 할지 화령으로 할지 명나라에게 사신을 보냈던 우리 역사가 떠오른다.
이름이야 어찌됐건 베트남은 역사 자체가 중국에 대한 저항의 역사였다 할 정도로 중국과 많은 전쟁을 치룬 나라였다. 때문에 베트남에는 한국처럼 중국에 대항하여 대승을 거둔 영웅 장수들이 많다. 중국 송나라가 베트남 남부 지역의 힌두교 왕조 참파와 같이 리 왕조를 쳐 양분하기로 모의하자 리 왕조의 리 트엉 끼엣[이상걸, 李常傑] 장군과 애국심에 가득 찬 베트남 군대는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먼저 공격하여 참파의 왕 루드라바르만 3세를 생포했고, 이어 송나라의 남부 통치 거점이던 광동성 지역을 공격하여 송나라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쳐들어온 송군 역시 리 트엉 끼엣이 이끄는 베트남군에게 큰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몽골의 대병력이 베트남에 쳐들왔을 때는 쩐 왕조의 쩐 흥 다오[진흥도, 陳興道] 장군이 하노이를 가로지르는 홍강[당시 백강이라 불렸다] 일대에서 절대적인 열세 전력으로 완벽한 게릴라 전술을 펼쳐 몽골의 침략군을 완전 패퇴시켰다. 이후 일시적으로 중국 명나라의 지배하에 있기도 했지만 다시 독립하여 독립국가의 역사를 계속 이어갔다. 베트남의 독립 왕조들은 쯔놈이라는 민족 문자를 만들어 고유의 쯔놈 문학을 꽃피우게 했으며, 중국의 유교, 한자 문명을 적극 수용하여 통치의 수단으로 적절히 활용하였다. 이후 무능했던 응우옌 왕조 시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치욕을 겪었지만 줄기찬 독립 운동의 결과 결국 다시 독립했고, 이후 미국과도 근성 있게 전쟁을 펼쳐 결국 오늘날의 베트남에 이르게 됐다.
베트남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은 문화권도 심지어 인종도 굉장히 다르다. 어쩌면 베트남의 문화는 아직도 남부 참파 왕국과 북부 전통 베트남 왕조로 분열돼 있는 것 같다. 오히려 베트남 북부의 문화는 베트남 남부보다 현재 중국의 남부 양광 지역의 문화와 더 비슷할 것이다. 한국이 만주에 대한 강한 향수를 가졌듯 잘은 모르나, 베트남인들도 종종 과거 越[비엣]의 조상들이 광활한 중국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때를 떠올릴 것 같다. 한국만큼이나 유교 질서를 국가적 차원에서 강하게 추구했고, 공자를 제사지내는 문묘를 하노이 한가운데 아주 크게 건설했던 베트남인들은 분명 중국 문화의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꼭 한국처럼 매우 독특하고 자신만의 문화를 이룩해왔다. 어쩌면 한국의 전통 문화는 거리로는 대마도까지 49.5km 남짓밖에 떨어져있는 일본의 문화보다도 수천 킬로 떨어진 베트남과 더 비슷할지도 모른다.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를 비추어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다. 그만큼 역사가 비슷하고 앞으로도 중국 대륙의 동쪽과 남쪽에 국경을 접하는 나라로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비슷한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 걸어 나갈 수밖에 없는 두 나라이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결코 중국에 일방적으로 억눌린 작은 나라로만 지냈던 나라는 아니었다. 현재 중국에 접경한 비슷한 크기의 나라(베트남과 남북한의 인구는 거의 같고, 면적 역시 베트남이 한반도보다 1.5배 정도밖에 크지 않다.)로서 이러한 공통적인 역사와 문화를 한국과 베트남이 서로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근 한국에 시집오는 베트남 처녀들, 일하러 오는 노동자들이 많다. 그들이 한국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인들 역시 베트남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 봐도 좋을 것 같다. 작년 2010년은 베트남이 하노이를 수도로 정한지 1000년이 된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하노이에서는 정말로 성대한 기념 행사와 축제가 열렸다. 왜 베트남인들이 그만큼 하노이의 1000년 정도(定都)를 축하하는지 베트남의 1000년 이상 이어져온 외세에 대한 투쟁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비슷한 역사를 겪어온 우리는 그 까닭을 아마 다른 민족보다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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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베트남과 광동,광서성이 밀접한 관계가 있군요^^ 베트남인에게는 광동,광서성이 정말 한국사람들의 만주같은 향수를 불러 일으킬수 있다는 생각드는군요.
베트남이 한자문화권이었고 우리와 같이 남북분단국이었다는 것, 고대에 양자강 주변에서 부차와 구천이 명 대결을 펼쳤다는 것, 또 베트남의 자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등은 중국역사서를 통하여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구체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오월의 싸움을 그들은 자신의 일로 생각하겠군요. 또 월남이란 이름보다 남월에 훨씬 애착을 갖고 있겠군요. 베트남과 한국이 그렇게 많은 역사적 유사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양국 국민이 상대방의 역사를 알게 되면 서로 상대방을 훨씬 친근하게 느끼게 되겠는데요?
'오월의 싸움을 그들은 자신의 일로 생각하겠군요'>이렇게까지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월나라와 관계는 인식하고 있겠습니다만,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옛날 몽골에서 왔다는 얘기를 듣고 몽골에 대해 갖는 그 정도 감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양자강 하류(오늘날의 상해시와 소주, 항주 등)~북베트남 지역에 이르기까지 분포했던 백월족은 여러 지파가 있는데, 물론 그들 간에 동질의식이 전혀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베트남이 역사적으로 자국사의 영역으로 보아왔던 범위는 광동, 광서성의 남월과 낙월, 구월 정도입니다. 뭐 기준만 달리 잡는다면 백월 전체를 자국사로서 다룰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중국과 부딪힐 건수가 그만큼 많아지겠지요. 현재 남월만 하더라도 중국과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어서...
오늘 기사를 보니까 베트남이랑 중국이랑 난사군도, 시사군도 때문에 초긴장 관계이더군요. 난사군도, 시사군도는 중국이 왕조 시대부터 통치해온 고유의 영토도 아닌 것 같던데, 중국은 모든 난사 시사군도 섬이 중국의 것이고 지금 베트남령인 섬까지 내놓으라는 식인 것 같습니다. 전쟁은 결코 안 났으면 좋겠습니다만, 베트남인들 입장에서는 정말 화 날 것 같습니다. 본래 베트남령이었던 시사군도의 몇 개 섬은 베트남이 베트남 전쟁으로 경황 없을 때 중국이 침입해서 뺏은 것이라 하더군요. 지금 중국 지도부가 아직 강대국으로서 취해야할 현명한 자세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저렇게 해보아야 중국의 군사력은 과시하더라도
국제사회에서 존경하는 수준 높은 선진국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장담컨대 중국은 얼마 안있으면 내부분열로 붕괴 될겁니다. 빈부의 격차가 너무 차이나고, 민주주의 열망을 중국공산당이 강제로 막고 있지만 중국에 민주주의가 도래하는 순간 중국은 분열해서 송나라크기의 영토만 가질 것입니다.당연히 티벳, 신장위그르,내이멍구,만주등은 독립할거로 봅니다. 중국의 분열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토론해 보면 좋을 문제인 것 같군요. 제 개인적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중국은 생각보다 소수민족 정책을 영리하게? 잘 구사하고 있습니다. 중국 '한족漢族'이라는 말보다 '중화민족', '화족', '화인'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티벳, 위구르, 몽골, 조선족도 다 중화민족의 일부라는 인식을 깔고 있는 거지요. 이러한 동화 정책은 소수 민족의 반발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한편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조선족의 경우 대부분 그들 스스로 한국 민족(남북한)이 아닌 중화 민족의 일부로서의 조선족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티벳, 위구르의 경우 동화 정책에 반감이 강합니다만 일부 동조하는 사람도 있겠고, 동조자의 비율
도 중국의 통치 기간이 길어질수록 많아지겠죠. 중국은 독립을 방지하기 위해 이미 내몽골, 위구르, 티벳에 한족을 대거 이주시켜 내몽골의 경우 80% 넘는 인구가 한족이고, 위구르 티벳의 경우도 절반 이상(정확한 데이터는 모르겠습니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주는 독립할 가능성이 더욱 적습니다. 만주족들은 만주어를 전혀 못하고 한족들과 거의 같습니다. 또 만주족은 청나라 시기 5족 융합(한, 만, 몽, 위구르, 티벳)를 시행하여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스스로 한족 사회 내에 진입하여 한족과 같이 산지가 400년이 다 돼갑니다. 만주족들(제 친구 중 하나가 만주족이라 얘기해봤는데) 스스로도 자신은 완전한 '중국인'이며 청나라 역시
강성했던 중국의 왕조로서 자신은 만주족인 중국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하더군요. 푸이의 괴뢰 만주국이 망하고 현재 중국이 들어선 이후 만주족은 더욱 한족화됐으며 독립할 생각을 가진 만주족은 거의 0%에 가깝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ㅡ 한마디로 지금 만주족은 다른 소수 민족과들는 많이 다릅니다. ㅡ 티벳, 위구르 내몽골, 조선족은 자신의 문화와 민족 의식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국제 정세에 따라 중국에게서 이탈할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 현재로서 그 가능성은 낮아보입니다.
다만 커다란 변수가 중국의 민주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하신 빈부격차 문제도 하나의 변수가 될 거고요. 류샤오보를 비롯한 중국내, 대만, 홍콩 등지에 있는 민주화 세력들이 언제가는 민주화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경제가 좋아지고 시민 의식이 높아지면 민주화는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을 거고, 중국 역시 현재 공산당 독재 체제가 아니라 다수당 체제처럼 좀 더 민주화된 정치 체제로 바뀔 거라 예상할 수 있겠죠. 현재 중국 반공산당 세력의 경우 소수 민족 문제에 대해서 중국 공산당보다는 훨씬 덜 강경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소수 민족을 독립시키는데까지 동의할지는 매우 의문스럽습니다. 민주화가 돼도 자국 국민, 영토
가 독립되는 것을 결코 허용하고 싶지 않겠죠.
낙천무교님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 경우 만주는 누가 주체가 될까요? 만주족은 지금은 전부 중국인에 흡수되었다고 하던데... 韓族이 만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군요. 지금 만주에는 韓族 외의 이민족은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그건 그렇고 연해주는 역사상 한국과 중국의 영토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러시아가 나타나 그 땅을 삼켜버렸고 소련이 붕괴될 때도 그 땅은 아무 동요도 없었다는 것이 못내 아쉽네요.
베트남과 관련하여 베트남이나 우리나라가 중국에 먹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위치와 인구가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우쳐주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