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치열했던 전투와 전우들의 장렬한 죽음을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엄숙하게 추모하며 기리고 있었습니다.
만나본 참전 용사들은 물론 그 가족들도 그들의 남편과 아버지가
한 국전쟁 참전 용사였다는 것을
최고의 영광인양 자랑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참전 부대와 참전 용사들이 살고 있는 지방으로
취재차 이동할 때마다 그 지역의 신문과 방송이 우리를 역으로
취재해갔습니다. 그날 밤 방송 뉴스와 이튿날 신문에서
우리는 취재 당한 우리 취재팀 모습을 봤습니다.
'30년 만에 한국이 우리를 찾아왔다!' 라는
커다란 제목이 붙은 지역 톱 뉴스를…
그 때 저는 느꼈습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를 때까지 한국은 이 나라들로부터
원조만 받고 거래만 해왔지단 한 번도 이들 참전국들에게
우리를 구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정식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으며 취재하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6.25 60년이 되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건의 드립니다.
이번 6. 25 60주년을 맞이하여 참전16개국
(지원국까지 합하면 22개국?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의 대사관,
영사관이 주축이 되어 전체 한국의 기업들과 상사의 주재원, 교민과
유학생, 관광객들까지 한데 모아 몇몇 생존해 있는 참전 용사와
그 가족들, 그리고 당시의 참전 부대장들을 초빙하여
함께 그 나라의 국군 묘지나 한국 참전 기념비를 참배하며,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며 싸워 준 그 은혜에 엄숙히 감사를
표하고 밤에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 참전 용사들과 그 가족들에게
즐겁게 감사를 표시하면서,
당신들 덕분에 한국이 이렇게 발전했다는 것을 소개하고,
푸짐한 선물을 안겨드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이 행사를 올해를 기점으로 매년 계속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제 생각에는 불쑥 서울에 한 번 초대하여 환영식을 갖고 마는 것보다
한국에 대한 감동이 훨씬 더 잔잔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널리 퍼져나가
전 세계에서 한국을 편들고 응원하는 한국 팬들과
한국 문화와 한국 상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60년 전의 은혜를 잊지 않고
매년 성대한 의식과 잔치를 22개국에서 베푸는 것 자체가
감동이고 이 감동들이 쌓여서 신뢰를 이룩하게 된다는 것은
개인이나 기업과 국가나 다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참전 용사의 장례식에 한국 외교관이 조문하고
그 집의 애경사에 참여한다면 어떨까요?
각 나라의 외교관들이
자기 나라를 선전할 이벤트 꺼리가 없어서 혈안인데
우리는 6. 25의 혈맹이라는 너무나 좋은 소재를 가지고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만 허송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2002 월드컵 때 관중석 머리 위로 파도처럼 춤추며 올라가던
대형 터키 국기를 본 터키 국민들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감동,
UAE 원전 수주 때 대통령이 실권자 부친의 추도식에까지 동행하여
이끌어 낸 감동을 생각해 보면
그 효과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국내 행사에 관해서 제안합니다.
수많은 6. 25 기념물들이 전국 각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부산의 UN군 묘지로부터 각종 승전비, 전적 비. 순국 전몰 비.
참전 기념비 등등... 이 기념비들의 용도는 무엇일까요?
잊지 말자고 세워 놓고, 우리는 깡그리 다 잊고 말았습니다.
이 기념물들은 본래의 건립 목적에 맞게 효과적으로 기념되어야 합니다.
이번 6. 25부터 그리고 매년 부산의 UN군 묘지에서
참전 16(또는 22) 개국의 대사와 그 가족들,
UN 멤버들, 초청된 각국의 군인 대표들,주한 미군 관계자들,
해외 참전 용사들, 우리 군 원로들과 현역 장성들,
각 나라의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들, 외국 관광객들을 모시고
부산시, 아니 대한민국이 떠들썩하고 전 세계가 놀랄 정도로
성대하고 엄숙한 감사의 추모식을 거행하고
밤에는 부산영화제 못지 않는 성대한 조명, 불꽃 위령제와
감사의 파티. 거창한 규모의 공연을 하여 한국인들이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만큼 발전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입니다.
실은 전 세계에 알리는 것보다 우리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 최고속으로 이룩했다는 조그만 경제 발전에 취하여
적인지 아군인지도 구별 못하고,
우리가 받은 것이 은혜인지 침략인지도 구별 못할 정도로
우리 국민들의 정신과 도덕적 판단력 역시
세계 최고속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으니까요
6, 25 때 5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낸 미국에게
'효순이', '미순이'라는 두 소녀의 훈련 중 사망 사고 때문에
몇 달간의 반미 촛불 데모를 벌였을 때 얼마나 억울했으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한국에 대해서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으면
4성 장군인 당시의 주한 미군 사령관이
한국의 반미 촛불 데모에 대한 본국 의회 청문회 직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그 때 저는 KBS에 그 인터뷰를 구해서
우리 국민에게 방송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묵살 당했습니다.)
그 후 정권이 바뀌고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또다시 국가가 위태로울 정도로 흥분해서 반미 촛불 시위를
몇 개월 동안 벌리는 한국을 보면서
미국 사람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정말 애국심 없어지더군요.
저렇게 은혜를 모르고, 신의를 헌 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과
한 동포이고 한 국민이기가 싫어지기까지 하더군요.
그 때 이민가려고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국내용 행사를 건의합니다.
전국 각지의 6. 25 관련 기념비와 전적비에는
기념해야 할 날짜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날을 기념하지 않는 거지요.
이 기념일의 기념 행사는
그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지역의 지방 자치 단체와
그 지역의 각 사회 단체, 기업, 학교, 주민들이 주최하게 해야 합니다.
참전국의 기념비일 경우,
앞의 두 제언에서처럼 해당국 주한 외교관들과
해당 참전부대장과 의장대, 생존 참전 용사와 그 가족들,
한국에 거주하는 그 나라 사람들을 초대하여 전몰자를 추도하며
그 나라와 그 부대, 그 용사들, 그리고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엄숙한 추도식과
감동적인 뒤풀이 행사와 공연, 파티와 선물이 이어져야 하겠지요
아마 국내에서 벌리는 외교 이벤트가 될 것이며,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살면서 일부 못된 한국인들에게서 당한
절치 부심의 원한을 조금쯤 녹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흔해 빠진 자매 결연도 그 때 한다면 양쪽을 위해
더욱 더 좋을 것 같고요. 우리 국군 전승 기념일과 전적지 행사도
성대하게 할 수 있고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날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의 부대장 이하 고급 장교들,
의장대와 군악대를 초청하여 옛날의 전승 기념지에서
생존해 있는 역전의 용사들과 그 지역에 사는 그 부대 출신 예비역들,
그리고 그 지역 주민들이 어울리는
한바탕 기념 행사와 지역 잔치를 베푼다면, 군 부대는 군 부대대로
자기 부대에 대한 긍지와 사기가 높아질 것이며,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자기 지역에 대한 애향심과
선열,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질 것입니다.
전국에서 이런 행사가 매년, 꾸준히, 성대하게 베풀어진다면
6. 25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젊은이들과
학생들에게 살아 있는 우리나라 현대사 현장 학습도 시킬 수도 있겠고,
자기 나라 군대를 '군바리' 라고 부르는 못된 풍조도
조금씩 고쳐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잘 하면 그 지방의 관광 상품으로 만들 수도 있겠습니다.
세계 각 나라의 정부와 외교관들이 제 나라를 선전할
명분 있는 이벤트 꺼리를 못 찾아 애태우는 것처럼
지금 각 지방자치단체와 지역들도 자기 지역을 선전할
이벤트 꺼리를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즘 흔히들 브랜드를 띄우려면 스토리를 만들라고 이야기하죠.
국가와 민족이 겪은 참담하기 짝이 없는 비극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6. 25의 보은 기념 이벤트는
세계적으로도 지방적으로도
우리 한국을 세계와 결속시키고 국민을 단합시킬 히스토리이고,
너무도 훌륭한 스토리 깜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가장 지방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도 있었지요.
그리고 60주년이 되는 금년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정부가 아마 이 모든 것들을 이미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혼자 행복해 하겠습니다.
은퇴한 늙은 PD의 조그만 애국 충정으로 아시고
참고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통령님의 건투와 건승을 기원합니다.
아~ 어찌 잊으랴?
아버지는 그 날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우리 미 24사단을 독려하고 후퇴 작전 중에
큰 전과를 올린 우리 사단에 대한 부대 표창과
미국 정부가 저에게 수여한 은성무공훈장을
제 가슴에 직접 달아주시려고 짚 차로 달려오시다가
의정부와 문산 간의 어느 도로에서 후퇴중인
한국군 트럭에 부딪쳐 현장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계속되는 추위와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전 전선이 계속 패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모처럼 아군이 큰 승리를 했고
그 승리의 주인공이 아들이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951년 12월 23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며칠 전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 정부에 아버님의 대장 진급을 상신해 놓았더군요.
이렇게 해서 우리 부자간의 한국에서의 첫 만남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아버지 월튼 H 워커 대장
(중장으로 전사, 사후 대장으로 추서)의
우락부락한 모습과는 달리 멋진 미 육군 정장에
네 개의 별이 반짝이는 바나나 모자를 쓴 훤칠하고
잘 생긴 아들 워커 미 육군 예비역 대장은
알링턴 미 국립묘지의 아버지 무덤에 한참이나 거수경례를 한 뒤
눈물을 글썽이며, 30년 전, TBC-TV 6.25 3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팀과의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틀 뒤 나는 도쿄의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불려갔습니다.
사령관이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워커 대위! 아버님의 전사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월튼 워커 대장은 정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미군은 물론 미국의 커다란 손실이다.
귀관에게 고 월튼 워커 대장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긴다."
저는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그것은 안 됩니다. 저는 일선의 보병 중대장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 부대는 후퇴중입니다.
후퇴 작전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을 각하는 잘 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부하들은 목숨을 건 위험에 노출되어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대장이 바뀌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중대에 제가 없으면 안 됩니다.
고 월튼 워커 대장의 유해는 의전 부대에 맡기십시오.
각하의 휘하에는 반드시 의전 부대가 있습니다.
저는 전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 때 이미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맥아더 사령관이
뒤돌아서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명령이야" 그리고는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군인이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님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이곳 알링턴까지 와서 바로 이 자리에 안장했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저는 이미 워싱턴의 육군 본부로 발령이 나 있었습니다.
이기기가 싫었겠죠. 그러나 결코 그 결정에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군인이 부하를 위험한 전장에 남겨 놓고,
치열하게 전쟁 중인 한국을 떠나왔다는 생각이
지금도 가슴을 무겁게 합니다.
그러나 그가 결코 한국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다.
초대 주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고 월튼 워커 대장과 함께
최초의 미군 父子 大將(4 star)이며,
미 육군 최연소 대장 진급자였던 전도 유망한 워커가
젊은 나이에 예편된 것은 바로 한국 때문이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박 정희 대통령의 불화로
카터가 주한 미군을 철군하려고 했을 때
한국에서는 주한 미군 참모장인 싱그러브 소장이 반대했다가
예편되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미 육군의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이며
차기 참모총장이나 NATO군 사령관으로 유력하던 워커 대장이
카터에게 반대를 했고, 결국 예편될 수밖에 없었다.
월튼 워커 대장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또 있다.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교통 사고로 사망한
의정부 문산 간의 도로가 바로 얼마 전,
미군이 탱크 훈련 중 미선과 효순이라는 두 소녀를 치어 죽게 한
바로 그 도로이며 사고 지점도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워커 미 8군 사령관의 짚차를 운전한
한국인 운전병과 짚차와 부딪힌 한국군 트럭 운전병을
이승만 대통령이 사형시키려 하자,
미군 참모들이 적극 만류하여 사형을 면하게 해 주고,
대신 가벼운 징역형으로 감형케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의정부와 문산 간의 같은 길에서 난 같은 교통 사고를 두고,
1951년 미 8군 사령관을 죽게 한 한국 병사를
미군과 미국은 용서해 주었는데
2002년 훈련 중에 두 소녀를 과실로 죽게 한 미군 탱크병을,
아니 미군과 미국 전체를 싸잡아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증오하고 저주하며
촛불을 켜들고 한국을 떠나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나라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보다 앞서 1950년 8월,
대전을 사수하라는 워커 8군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탱크를 앞세워 밀려오는 적을 보병만으로 막아야 했던
불리한 전황 속에서 어떻게든지 대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소 3.5인치 로켓포를 발사하여 적의 T-34 탱크 한 대를 직접 폭파시키면서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리던 미 24사단 사단장 '윌리암 딘' 소장이
부대와 떨어져 홀로 36알 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한국인 농부의 밀고로
북한군에게 잡혀 3년 동안의 포로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자 그의 조국 미국은
사단장이 직접 적 탱크와 맞닥트려 싸울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3년 동안의 포로 생활 중 보여 준
미군 장성으로서의 군인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미국이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을 수여했지만
"내가 한국에서 사단장으로서 한 행위는 나무 훈장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적 탱크를 격파한 것도 어느 하사관도 할 수 있는 일 이었다."고
부끄러워하며 은둔했던 그가 단돈 5 달라에 자기를 밀고해서
미군 장성으로서의 인생을 포로라는 치욕으로 마치게 한
그 농부가 5년형을 받아 복역 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분연히 일어나 무지한 농민이 살기 위해서 한 행동이니
감형해줄 것을 한국 정부에 간청하여
기어코 출옥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딘 장군의 포로 생활은 북괴군이 그를 심문할 때 통역을 했던
민간인(이규현)이 탈출 귀순하여 진술함으로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규현씨는 후에 중앙일보 사장과 문공부장관을 역임했다)
만약 외국에 파견한 한국군 사단장이
그 나라 민간인의 밀고로 전투 중에 포로가 되고
군사령관이 전사하는 경우를 당했다면 우리 국민과 나라는 어떻게 했을까?
이런 것을 한 번 생각이라고 해 본 사람들이 있기나 한가?
지극히 의심스럽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 비행 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아버님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이 편지는 워커 장군의 후임이었던 릿지웨이 장군이
맥아더 장군이 해임됨에 따라 UN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 뒤
그 후임으로 부임한 벤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가 이제 막 해외 근무를 마쳤음으로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여하면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리고 그 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1952년 4월 2일. 이 훌륭한 군인은
압록강 남쪽의 순천 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한 후
표적을 향해서 날아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다.
즉시 수색 작전이 시작된 것은 물론이다.
4월 4일 아침 10시 30분 8군 사령관 밴프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지미 밴프리트 2세 중위가 폭격 비행 중 실종되었고,
지금 수색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지미 벤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 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 작전은 너무 무모하다."
아버지가 아들 구출 작전을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것은 인접 한국군 부대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했던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증언이다.
며칠 뒤 부활절을 맞아
그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벗이 곧 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밴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한국을 벗이라고 생각했고,
그 벗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이런 강직하기 짝이 없는 군인 앞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놀라운 부탁을 하였다.
1952년 12월,
대통령 당선자인 노르만디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한국 전선을 살피기 위해 방한하여 8군 사령부를 찾은 것이었다.
8군과 한국군의 고위 장군들과 참모들이 모두 참석하고
전 세계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밴프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끝내자,
조용히 듣고 있던 차기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였다.
"장군,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안 있어 대통령에 취임할 당선자의 전투 사령관에 대한
첫 질문 치고는 너무나 대통령답지 않은 사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아들을 잃고도 꿈쩍하지 않은 밴프리트였기에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전방의 미 제3사단 정보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라고 밴프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하자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참석자 모두가 놀라 자빠질
사적인 부탁을 공공연히 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배치시켜 주시오."
참석자들이 모두 서로 두리번거리면서 웅성거리고
밴프리트 사령관도 언짢은 표정으로 아이젠하워를 응시하면서
의아해 하자 당선자가 조용히 말했다.
“내 아들이 전투 중에 전사한다면 슬프지만,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미국과 흥정을 하려 들 것입니다.
나는 결단코 그런 흥정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령관이 잘 알다시피
미국 국민은 대통령의 아들이 적군의 펴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고 외치며
나와 미국에게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령관이 즉시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
순식간에 두리번거리면서 의아해하던 분위기가 반전되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표정이 되고
곧이어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각하!" 라는
밴프리트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미 2사단 72탱크 대대의 대대장
T.R Fehrenbch 중령이 전역 후 쓴 'This kind of war(한국전쟁)'
이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페렌바하는 전역 후 유명한 역사 저술가와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마지막 UN군 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 클라크 대위도
금화 지구의 저격 능선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가
세 번에 걸친 부상으로 전역을 했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은 모두 142명,
그중 35명이 전사하였다. 한국전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모두 54,000여명, 부상자는 10만 명이 넘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여 사령관이 전사하고
사단장이 포로가 되며 자기 자식들마저 참전시켜
전사를 당하게 하는 장군들과,
남의 나라 전쟁에 54,0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도,
아직도 우리를 돕고 있는 미국을 두고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 옮긴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