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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따라잡기
강은령
“야, 같이 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겨우 따라잡을 만하면 녀석은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곤 했다. 저건 내가 알던 달팽이가 아니다. 사뿐사뿐 가볍게 달려가는 뒷모습이 마치 날랜 다람쥐 같다.
내 이마에는 어느새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줄넘기라도 열심히 해 두는 건데. 학원 가방을 든 내 오른팔이 축 늘어졌다. 이미 수업은 시작되었을 터였다. 처음으로 학원을 빼먹었다. 녀석은 도대체 어디까지 날 데려가려는 것일까? 마음이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저만치 앞서 달리던 달팽이가 문득 뒤돌아서서 손을 흔들었다. 발그스레한 얼굴에 환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녀석은 아까부터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말을 연발하며 이십 분이 넘도록 날 끌고 다녔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녀석을 따라나선 걸 후회하며 난 또 무거운 다리를 반사적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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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진저리를 치며 곧장 주방으로 달려갔다. 고기며 생선, 야채 같은 생식품들의 신선도 때문에 마트는 늘 실내 온도를 낮게 유지해야 한다. 엄마는 그 냉장고 속 같은 공간에서 일할 때보다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설 때 몸이 더 떨린다고 했다. 잔뜩 얼어 있던 몸이 겨우 정상 기능을 회복하느라고 그런다나.
엄마는 잠시 앉을 틈도 없이 후다닥 간식을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의 메뉴는 떡볶이였다.
“형진아, 빨리 와. 어서 먹고 학원 가야지.”
엄마가 서두르는 바람에나도 마음이 급해졌다. 포크로 떡볶이를 두세 개씩 한꺼번에 찍어 허겁지겁 입안에 밀어 넣었다. 엄마가 우유를 한 잔 따라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시간 단축을 위해 원 샷. 그랬더니 숨이 막힐 정도로 재채기가 연거푸 쏟아져 나왔다.
“자, 이제 어서 양치하고 학원 가. 빨리빨리.”
눈물까지 찔끔거리는 내 등 뒤에 대고 엄마가 성급하게 외쳤다. 엄마는 늘 ‘빨리빨리’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엄마는 빈 접시와 컵을 들고 또 주방으로 달려갔다. 이제부터 내 저녁밥을 지어 놓고 갈비 식당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를 돕는 길은 제시간에 늦지 않게 학원으로 사라져 주는 것뿐이다. 화장실로 달려가 대충 양치질을 하고 난 뒤 학원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왔다.
달팽이를 만난 건 놀이터 입구였다. 녀석은 철쭉나무 울타리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내가 몇 번이나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무 잎사귀에서 보물이라도 찾는지 꼼짝 않고 앉아서 뚫어질 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야, 달팽이!”
가방으로 등짝을 후려쳤다. 그때서야 화들짝 놀라며 엉덩이를 엉거주춤 일으킨다. 매사에 반응이 아주 느린 녀석이다.
“달팽이 맞아.”
픽 웃음이 나왔다. 제 별명이 달팽이인 줄은 아나 보다. 근데 뭘 그리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거지?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진짜 달팽이잖아?”
녀석이 오히려 어리둥절해 했다.
“달팽이 처음 봐?”
“응. 책에서는 많이 봤지만 살아 있는 달팽이는 처음이야.”
“숲 속에 가면 아주 많은데.”
“어디?”
“저기, 아파트 뒷산.”
그래서 녀석을 따라오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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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넓은 공터를 지나고 야트막한 언덕을 하나 넘자 갑자기 딴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우선 짙은 초록색 숲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시야가 탁 트인 게 좋았다. 굵고 커다란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우뚝 서 있는 사이로 키 작은 나무들과 수많은 종류의 풀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자라나고 있었다. 공기도 사뭇 달랐다. 나무들 사이로 넘나드는 상쾌한 바람이 실어다 주는 진한 솔향기가 콧속으로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아래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개울도 있어.”
녀석이 이끄는 대로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헤치고 오솔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잔풀만 빼곡하게 늘어선 사이로 듬성듬성 바위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학교 복도 넓이 만 한 개울이 나타났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았다. 조금 큰 바위는 굽이쳐 돌아가고 작은 돌들은 여유롭게 뛰어넘으면서, 개울물은 끊임없이 아래쪽으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 물은 졸졸졸 노래하며 흐른다더니 그게 아니었다. 돌들을 주의하라고 돌돌 외치며 기운차게 제 갈 길을 헤쳐 나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달팽이가 바지를 걷어 올리더니 조심조심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따. 나도 덩달아 첨벙첨벙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쉿!”
녀석이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쳇!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녀석을 뒤쫓아 다녔다. 녀석이 제법 큰 돌멩이 하나를 들어 올리자 돌 틈에 숨어 이던 가재 몇 마리가 뿔뿔뿔 기어 나오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달팽이가 그중 두 마리를 붙들었고 나도 간신히 한 마리를 잡았다. 돌처럼 작고 단단한 가재였다.
“너 이거 먹을 거야?”
녀석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천만에, 이렇게 작고깜찍한 가재를 어떻게 먹는담? 누굴 야만인으로 아나?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그만 놔줘. 너무 오래 잡고 있으면 죽어 버리거든.”
우리는 동시에 가재를 물속에 놓아주었다. 가재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쳐서는 다시 돌 틈으로 숨어들었다. 잡았다가 놓아주고 다시 붙들었다가 놓아주려니까 마치 가재들이랑 숨바꼭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숨바꼭질은 없을 것이다.
얼마를 그렇게 놀았을까? 마침내 우리는 지쳐서 개울가에 있는 넓적한 바위 위에 네 활개를 펴고 드러누웠다. 파란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은 하늘에는 양털 같은 흰 구름 몇 덩이가 둥실둥실 떠가고 있었다. 저렇게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또 얼마 만인가. 이곳에서는 시간이 아주 느릿느릿 흘러가는 것 같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느긋해졌다.
옆을 돌아보니 달팽이도 나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만 놀아서 그런지 녀석은 좀처럼 서두르는 일도 없고, 어지간해서는 화도 내지 않았다.
아빠도 이런 생활이 그리워서 떠난 것일까? 시를 쓴다는 아빠는 도시의 번잡하고 바쁜 일상을 못 견뎌 했다. 시골에 있는 친구의 농원으로 간다던 아빠는 벌써 몇 달째 소식이 없었다.
개울 아래쪽에 있는 소나무 숲 사이로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까만색 바지에 상아색 재킷을 입고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은 분명 엄마였다. 반장 아줌마가, 갈비 식당에는 손님들이 저녁에 몰리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만 아르바이트해 줄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엄마는 그 말을 전해 듣자마자 대뜸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마트에 일 다니잖우.”
반장 아줌마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유, 그 돈 가지고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요. 아이 학원비도 대야 하고.”
엄마는 사정하다시피 해서 그 일자리를 얻어 냈다. 오후 네 시면 마트 일이 끝나니까 적어도 다섯 시까지는 식당으로 갈 수 있다는 게 엄마의 계산이었다.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쯤 가야 하기 때문에 식당에 다섯 시까지 도축하려면 적어도 네 시 사십 분쯤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엄마는 그 사이의 얼마 안 되는 시간을, 내 간식을 마련하고 저녁밥을 짓는 데 몽땅 썼다. 그러다 보니 잠시 앉을 틈도 없이 늘 종종거리며 뛰어다녀야만 하는 것이다.
‘가엾은 엄마’
연방 시계를 들여다보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려가는 엄마가 오늘따라 더 애처로워 보였다. 달팽이도 버스 정류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 같다.
“우리 엄마야.”
나직한 목소리로 달팽이에게 일러 주었다.
“정말?”
녀석은 벌떡 일어나더니 자세를 고쳐 쪼그리고 앉아서 턱을 괴었다. 아까 달팽이를 관찰하던 바로 그 자세였다. 저렇게 집중할 줄 아는 녀석이 어쩌다 도움반까지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새 학년이 된 지 이 중릴쯤 지났을 때였다.
“이승우!”
선생님께서 부르셨다. 아직 누가 누군지 제대로 파악이 안 되던 때여서 아이들은 그저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작고 바싹 마른 애였다.
“승우는 이제부터 국어와 수학 사긴에는 도움반에 가서 공부할 거예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선생님이 데려다 줄게. 자, 필기도구만 챙겨서 이리 나와.”
그 아이는 말없이 선생님을 따라갔다.
“재 바보 아니야?”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누군가 불쑥 말했다.
“유식한 말로는 학습 부진아라고 하지.”
회장인 준모가 아는 체를 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아이들이 와글와글 떠들어 댔다. 승우를 데려다 주고 오신 선생님이 교탁을 탁탁 쳐서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승우는 공부를 못해서 도움반에 간 게 아니에요. 다만 여러분과 달리 공부하는 속도가 조금 느릴 뿐이에요. 그렇다고 승우를 놀리거나 하면 안 돼요.”
그 소리는 차라리 하지 않은 것만 못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유독 굼든 승우를 달팽이라고 불렀다. 눈치가 없는 건지 지나치게 넉살이 좋은 건지, 녀석은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을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다. 국어와 수학 시간이 되면 제가 알아서 도움반으로 향하며 선생님께 꼬박꼬박 인사까지 챙기는 것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녀석을 반에서 제일 착한 아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아이들은 선생님만 자리에 없으면 녀석을 따돌렸다 꼭 불러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이름 대신 별명을 부르고, 부르기도 귀찮으면 등짝을 후려치기가 예사였다.
여자애들은 녀석과 짝이 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모든 일에 한 박자가 느린 녀석은 일일이 챙겨 주지 않으면 도무지 수업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녀석과 짝이 된다는 것은 녀석의 도우미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녀석 때문에 수업이 지연되면 짝은 친구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과제물이나 학습지를 바꿔 채점할 때면 녀석의 짝은 일인이역을 해야 하니까 그야말로 손바닥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같은 모둠이 되는 것도 싫어했다. 특히 모둠의 점수가 수행 평가에 많이 반영되는 과학 시간이면 녀석과 한 모둠이 된 아이들의 신경은 곤두섰다. 그렇다고 녀석이 멍하니 보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수업을 열심히 듣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에 속했지만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녀석이 속한 모둠에서는 늘 크고 작은 소동이 일어나고, 뭔가가 깨지거나 엎질러서 아이들의 원성을 듣는 일이 빈번했다.
지금 달팽이의 모습은 그때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할 때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새로운 과제를 받을 대마다 보이던 난감한 표정도 아니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동자가 반짝반짝 광채마저 띠고 있었다. 그 사이에 엄마는 막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릴 때까지 넋 놓고 바라보던 달팽이가 불쑥 말했다.
“좋겠다. 나도 저런 엄마가 있었으면.”
“넌 엄마 없어?”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난 엄마 얼굴도 몰라.”
“그럼 아빠하고만 살아?”
“응.”
“너희 아빠는 뭐 하시는데?”
궁금증이 생겨서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자꾸 물어보게 된다.
“대학교 선생님이야.”
“야아, 그럼 교수님이야?”
이건 좀 의외다. 달팽이 같은 아이에게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빠가 있다니.
“교수는 아니고. 뭐라더라? 아, 시간 강사라고 하는 것 같던데.”
“시간 강사?”
“나도 잘 몰라. 이 학교 저 학교 옮겨 다니면서 한두 시간씩 대학생들을 가르치나 봐. 지방으로 갈 때도 많아. 우리 아빠는 늘 한밤중에 들어와서 아침 일찍 나가셔. 일요일은 그동안 밀린 잠을 자느라고 온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고, 내가 아빠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일요일 저녁때뿐이야.”
그래서 그랬나? 달팽이가 유독 느린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아기부터 말 상대도 없이 방치되어 왔다면 나라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녀석이 저렇게 작고 마른 이유도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런 것만 같았다.
“그럼, 밥은 누가 해 줘?”
“내가.”
녀석이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탁탁 쳤다.
“뭐, 어떻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녀석이 갑자기 대단해 보였다. 난 여태 밥 같은 건 할 엄두도 내보지 않았다. 밥은커녕 간식조차 내 손으로 챙겨 먹은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거 별로 어렵지 않은데. 쌀 씻어서 밥솥에 넣고 물만 부어 주면 전기밥솥이 알아서 다 해 주는걸.”
녀석이 하도 심드렁하게 대꾸해서 내가 꼭 바보 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쉬운 밥도 못하는 바보. 난 왜 내 손으로 밥해 먹을 생각을 못했을까? 그랬더라면 엄마가 저리 바쁘게 뛰어다니지 않아도 될 텐데. 아빠와 내가 지나치게 의지하고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엄마가 혼자서 그 모든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엄마는 결혼 전에 전문 산악인이었다고 했다. 특히 암벽 등반을 좋아해서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랴야 산맥 위에 우뚝 서 보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마트 안도 춥다면서 어떻게 그 추운 곳에 가?”
놀리듯이 말하면 엄마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 빙벽과 마주 서 있을 대는 추운 줄도 몰랐는데 말이야. 나도 내가 이렇게 추위 타는 사람인 줄 몰랐어.”
꿈을 포기해 버려서 더 시리고 추운 걸까? 그 말을 할 때 엄마의 표정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지금 엄마한테 필요한 건 이런 여유와 휴식이다. 가끔씩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돌돌돌 흐르는 시냇물의 맑은 음향도 듣고 짙푸른 소나무의 상큼한 향기를 만긱해 보는 것은, 엄마의 고단한 삶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게 틀림없었다.
“어? 골무꽃이 피었네!”
달팽이가 숲 가장자리에 난 자잘한 보랓빛 꽃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꽃 이름이 골무꽃이야?”
“응, 꼭 털이 보송보송 난 심장 같지 않아?”
녀석은 신이 나서 숲 속을 뛰어다녔다. 나도 녀석을 따라 본격적으로 풀꽃 탐색에 나섰다.
“이건 애기똥풀, 이건 제비꽃, 갈퀴덩굴, 별꽃, 환삼덩굴.”
제멋대로 피어난 잡초 같은데 제각각 이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녀석은 그 이름들을 거의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도 녀석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숲 속을 제집 안방 돌아다니듯 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난 지난번 과학 시간을 떠올렸다.
과학 교과 담당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번씩 과학 퀴즈 대회를 열었다. 모둠별 대항으로 우승하는 모둠은 수행 평가에서 가산점을 받는 것은 물론 부상으로 컵라면까지 먹을 수 있었다. 오엑스(OX)로 대답하는 문제를 풀 때였다.
식물의 기공은 잎의 뒷면보다 앞면에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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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둠의 모둠장인 은지는 이 문제에서 망설이지도 않고 O를 선택했다.
“숨을 쉬기 편하려면 당연히 앞면에 잇어야지.”
나는 은지를 믿었다. 공부 잘하는 은지가 알아서 하겠지. 그런데 녀석이 은지가 들고 있던 카드를 자꾸 만지작거렸다.
“가만있지 못해?”
은지가 녀석의 손등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녀석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정답은 X였다. 식물의 기공은 앞면보다 뒷면에 더 많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녀석이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녀석을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이해력이 떨어지고 숫자 계산을 잘 못하니까 다른 것도 당연히 못하리라고 섣부른 판단을 했던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고, 자신감을 회복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녀석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지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리 와 봐. 여기 달팽이가 있어.”
녀석이 풀숲에서 넓적한 잎 하나를 들추며 소리쳤다. 정말 여기는 달팽이 천국이다. 연녹색 잎새 뒤나 축축한 땅을 덮은 가랑잎 밑, 이끼 낀 돌 틈바구니에 몸을 잔뜩 웅크린 달팽이들이 숨어 잇었다. 살그머니 긴 더듬이를 내밀어 기웃거리다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껍질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진심 어린 애정으로 불러내기 전에는 좀처럼 고개를 내밀 것 같지 않은 여리고 수줍은 달팽이들이었다.
월요일 1교시와 2교시에는 연이어서 과학 수업이 진행된다.
“즐거운 과학 퀴즈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나만의 식물도감 만들기’ 과정이 거의 마무리도어 가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이들이 와아 함성을 질렀다.
은지는 등을 꼿꼿하게 펴고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지난번 준모가 있는 3모둠에게 우승을 빼앗긴 게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꼭 우승을 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는 듯 선생님께서 나누어 주신 모둠 깃발에 벌써부터 손을 갖다 대고 있었다.
우리 5모둠은 은지와 정연이, 달팽이와 나, 이렇게 네 명이다. 그중에서 은지가 공부를 제일 잘한다. 물론 나도 수학이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과학은 사실 별로였다. 그래서 퀴즈 시간에는 우리 모둠을 대표해서 은지가 문제를 풀도록 내버려 둔다.
칠판에는 식물 이름을 써 놓은 카드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카드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빙빙돌 지경이었다. 우리나라에 사는 식물의 종류가 어저면 저렇게도 많은지.
“첫 번째 문제, 이건 좀 쉬운 문제입니다. 물속에 사는 식물을 골라 주세요.”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은지가 모둠 깃발을 들고 달려 나갔다. 정해진 시간은 1분이었다. 은지가 카드 네 장을 떼어 들고 들어왔다. ‘수련’,‘생이 가래’,‘붕어마름’,‘나사말’, 내가 봐도 제대로 고른 것 같다. 각각 넉 장씩 맞춘 우리 모둠과 2모둠과 3모둠이 재대결을 벌였다.
다음 무넺는 높은 산에 사는 식물을 고르는 문제였다. 이번에도 은지가 달려 나가 ‘솜다리’와 ‘두메양귀비’를 뽑아 들고 왔다. 준모도 두 개를 맞추어서 또다시 3모둠과 우승을 다루게 되었다. 칠판의 카드는 어느새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남아 있는 것들은 거의 들어 본 적 없는 낯선 이름들뿐이었다.
“자, 결승전이니까 이번에는 조금 어려운 문제를 내겠어요. 평소에 좀 더 우리 주변의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문제를 냅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지를 흘깃 쳐다보았다. 긴장이 되는지 표정이 꽤나 굳어져 있었다.
“이번에도 네가 할 거야?”
슬적 은지의 마음을 떠보았다.
“왜? 네가 나가려고?”
은지가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드디어 마지막 문제가 떨어졌다.
“지금은 봄이죠. 봄철에 하얀색 꽃을 피우는 풀꽃 이름을 찾아 주세요.”
선생님께서 칠판에 붙은 카드 중 다섯 장만이 정답이라고 덧붙이셨다. 그러자 은지가 슬그머니 깃발을 내려놓았다. 나는 얼른 깃발을 집어 달팽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너 미쳤어?”
은지가 눈을 부라렸다.
“나도 우리 모둠이 이기길 바라건든.”
은지와 내가 다투는 사이에 녀석은 어느새 특유의 느림보 걸음으로 칠판을 향해 슬금슬금 나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왈가닥 정연이가 가장 대범했다.
“애들아, 진정해라.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지기만 해 봐. 네가 다 책임져야 해.”
은지가 씩씩거리며 쏘아붙였다. 이 문제만은 준모도 자신이 없는지 칠판 위쪽에 있는 카드를 한 장씩 훑어보더니 고개만 갸웃거릴 뿐 선택을 망설이고 있었다.
“어, 이건 아닌데.”
녀석이 어떤 카드를 선택할까 쳐다보던 나는 그만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은지가 날카롭게 외쳤다. 달팽이는 비실비실 앞으로 나가더니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제일 아래쪽에 있는 카드 세 장을 뚝뚝 떼어 들고 들어왔다. 좀 제대로 읽어 보기나 할 일이지.
“3모둠, 선택한 카드를 들어 보세요.”
3모둠 아이들은 준무가 들고 온 카드를 한 장씩 나누어 들고 기대에 찬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세 자으이 카드 중 ‘별꽃’하나만이 정답이었다.
“다음, 5모둠!”
선생님과 아이들의 시선이 우리 모둠에게도 쏠렸다. 은ㅈ는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듯 책상 위에 놓은 카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와 정연이, 달팽이가 마지못해 카드를 한 장씩 들어 올렸다.
“산자고, 바위위, 은방울꽃.”
선생님께서 우리가 들고 있는 카드를 또박또박 읽으셨다. 우리는 없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 개 모두 정답! 와, 5모둠 정말 대단한데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우리는 어리둥절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만 껌벅이다가 아이들의 박수 소리와 함성이 울렸을 때에게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이고, 네가 정말 달팽이 맞냐?”
정연이가 녀석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할머니 같은 말투로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우승한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은지가 크게 선심을 썼다.
“하늘을 나는 슈퍼 달팽이지.”
연방 달팽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녀석은 배시시 웃기만 했다.
우리는 선생님이 베푸는 성찬을 기꺼이 받았다. 아이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맛있겠다. 한 입만 줘.”
우승 팀을 제외한 나머지 모둠에게는 초코파이가 하나씩 돌아갔지만, 아이들이 정말로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컵라면이었다.
“훠이, 세상에 제일 치사스런 게 남이 음식 먹는데 껄떡거리는 거야. 훠이 훠이.”
정연이가 참새 떼를 쫓듯 아이들을 쫓아 버렸다. 마침 출출했던 참이라 우리는 컵라면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국물 한 방울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먹고 나니까 뿌듯한 포만감이 밀려 마음까지 넉넉해지는 것 같았다.
달팽이는 아직도 면발을 한 가락씩 들어 올리며 느릿느릿 먹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고개를 숙일 때마다 앞으로 쏟아진다. 머리카락 쓸어 올리랴 젓가락질하랴 제 나름대로는 꽤나 부산했다.
“승우야!”
처음으로 달팽이의 이름을 불렀다. 승우가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표정이 꼭 해맑고 순진한 아기 같다. 나는 승우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러자 승우도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이런, 우리는 꽤나 잘 통하는 친구가 될 것만 같은걸. 나는 가슴을 활짝 펴고 승우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막 껍질 밖으로 얼굴을 내민 수줍은 나만의 달팽이를 향해.
(원고지 61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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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마워요!!!
따뜻한 댓글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