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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단종 유적지 탐방
일시:2017년 11월 1일 수요일
장소:강원도 영월 관풍헌, 장릉(단종 묘소)
* 영월 기차역
오늘 우리 부부는 영월 탐방을 하기로 했다. 원주에서 태백 탐방 때처럼 10시 18분 기차를 타고 11시 47분에 영월역에 하차하였다. 영월역은 기와지붕 역사로 전국의 역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역이라고 소개한다. 역 앞에는 김삿갓 동상이 세워져 있다. 곁에 정자 쉼터도 있다. 역앞 광장에는 포토존도 있다. 정말 세심한 배려까지 아주 잘 꾸며놓은 아름다운 역이다.
* 영월 동강대교
영월역에서 먼저 가는 곳은 관풍헌이다. 단종이 승하했다는 유적지다. 영월역에서 시가지로 가는 동강대교를 건너 간다. 동강에는 영월대교 등 여러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 입구에 시공과 건설에 대한 안대표석이 있다. 2009년에 개통된 다리다, 곁에는 정자가 있다. 조금 아래에 영월대교도 보인다. 동강의 다리를 보고, 더하여 걸어 간다는 것이 참으로 큰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흐뭇하고 뜻깊은 여정이다.
* 영월 단종유적지 관풍헌
영월 동강대교를 건너 영월초등학교를 지나 관풍헌에 도착했다. 도로변에 있어서 찾기 쉬웠다. 관풍헌은 조선 초기 1392년(태조 1)에 건립된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지방 수령들이 사용하던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이다. 영월읍 중앙로에서 동강1교 방향으로 약 700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외적인 역사 외에 더 중요한 것은 단종이 어린 나이에 이곳에서 승하하였다는 아픔이 숨어있다는 사실이다. 세조 2년(1456) 6월 28일,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홍수 때문에 이곳으로 옮겨와 머물던 중에 단종복위 운동을 구실로 세조의 명이 내려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과 공생 화득의 교살에 의해 1457년 10월 24일 17세의 나이로 사사된 곳이다. 기막힌 역사의 마디를 맴돌며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단종의 피서린 족적을 눈앞에서 본다는 것이 시리고 서늘한 눈과 가슴이다. 관풍헌이 있는 객사의 정문을 백운루(강원도지에는 관풍루라고 표기)라 하였다. 정사와 정사 좌우의 익사 1동씩으로 모두 3동의 건물이 있다. 옛지도를 외벽에 부착해 놓았는데 그 당시에는 꽤 큰 규모의 관풍헌으로 보인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이 유배되었던 청령포에 홍수가 나자 단종의 거처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단종은 관풍헌에 머물며 동헌의 동쪽에 있는 자규루에 올라 자규사(子規詞)와 자규시(子規時)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자규루는 일명 매죽루梅笑樓)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이 곳은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담한 관아 건물이 단종의 슬픈 역사를 전해준다. 사람은 가고 없는데 은행나무는 잘 자라서 고운 빛으로 물들어 있다.
* 영월 단종유적지 관풍헌 은행나무 단풍비경
관풍헌 정원 한 구석에 아름드리 큰 은행나무가 세 그루 있다. 곁에는 자규루 정자도 있다. 은행나무 노란 단풍잎이 바닥에 깔려 매우 아름답다. 나는 은행잎을 날리며 단종애사를 날려보내듯 훌훌 흩뿌려 날렸다. 그리고 내 고향 보령 은행나무 단지마을로 조성된 고향집 향수에 젖었다. 나의 집은 아버지가 내가 어릴적 심은 은행나무들이 집 주위에 많다. 지금은 아주 큰 덩치로 자라서 이곳 관풍헌 은행나무와 비슷하다. 은행나무 노란 단풍을 비경이라 하면 단종에게는 호사스런 누가 될까싶어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타고난 목숨을 다 하지 못한 단종의 마지막 숨결이 고인 정원에서 평화로운 세상에 사는 오늘의 현실마저 호사스러워 참으로 돌리기 어려운 걸음이었다.
* 영월 단종유적지 관풍헌 자규루
자규루는 관풍헌 정원에 있는 정자다. 바깥 도로에서도 보인다. 단종에 이곳 정자에서 자규라는 시를 지어 자규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규루는 단종(재위 1452∼1455)이 세조(재위 1455∼1468)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을 때 잠시 지내던 곳이다. 단종은 이 누각에 자주 올라가 자규시를 지었다고 한다. 자규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르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지은 것이다. 자규루는 관풍헌과 더불어 옛 객사 근처의 건물로, 관풍헌에서 동쪽으로 약 7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누각은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1단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를 사용한 중층문루인데 좌측 첫째 칸에 나무계단을 설치하여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영월군수 신숙근이 세종 10년(1428)에 창건하여 매죽루라고 칭하였으나, 후에 단종이 이곳 객사에 거처하면서 누각에 올라 자신의 고뇌를「자규사」 및「자규시」로 읊은 것이 계기가 되어 누각의 이름이 자규루로 바뀌었다고 한다. 원래는 세종 10년(1428) 군수 신권근에 의해 지어져 ‘매죽루’라 불리웠으나 단종의 자규시가 너무 슬퍼 누각이름을 매죽루에서 자규루로 바꿨다고 한다. 그 후 많이 퇴락해 민가가 들어섰는데, 정조 15년(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이곳을 돌아다니다 그 터를 찾아 복원하였다. 그 후 이 누각은 선조 38년(1605)의 대홍수로 인하여 민가가 들어설 정도로 폐허가 되었는데, 강원도관찰사 윤사국(1728-1809)이 정조 15년(1791)에 영월을 순찰할 때 옛 터를 찾아 중건하고 단종의 시를 봉안하였다. 웅장한 풍채로 그날을 재현하고 있다.
* 영월 단종유적지 장릉 입구
관풍헌을 나와서 중식을 하고 단종유적지인 장릉으로 갔다. 장릉은 단종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관풍헌 근처에서 가는 버스도 있는데 택시로 갔다. 요금이 3100원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입구에 들어서니 조선의 왕릉 42기 중 2기는 북한에 있고, 40기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안내문구가 있다. 그로 인하여 이곳 단종묘인 장릉도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관리요원이 관람순서와 묘소 올라가는 산길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어서 고마웠다. 장릉의 내경이 단풍과 옛 고풍스런 건물들로 매우 아름다운데 그에 서린 역사는 매우 슬프다. 장릉은 조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이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이곳 산속에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 묘소와 단종에 대한 역사가 서린 유적지다. 그날을 모른다고 고개를 내젓는듯 화사하게 가을빛을 내뿜는 비경이 서늘하지만 단종을 추모하는 걸음, 걸음들로 장릉 경내는 훈훈하다. 우리 부부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장릉에 들어섰다.
* 영월 단종유적지 장릉 단종역사박물관
장릉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간 곳은 단종역사박물관이다. 단종의 출생에서부터 단종에 관한 역사를 전시하였다. 그 당시의 인물들도 자료를 전시하여 이해를 돕는다. 지상 1층과 지하 건물로 나뉘어져 있다. 1층을 모두 관람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태실에 관한 자료도 있고 단종을 마지막 모시고 가던 신하 2명과 단종의 모형이 세워져 있다. 단종을 생각하며 지은 왕방연의 시조도 있다. 단종이 경복궁에서 쫓겨나 이곳 영월로 유배를 당하던 그날의 길목을 넓은 판에 그려 놓았다. 또한 장례식을 재현한 사진도 있다. 단종의 부인은 82세까지 살았다 하니, 같은 여자로서 안타까웠다. 모두 피눈물 서린 슬픈 전시물들이다. 모두 관람하고 나와 장릉 단종 묘소로 향했다.
* 영월 단종유적지 단종묘소 장릉 가는 산길
단종 묘소 장릉은 산 위에 있어서 산길로 접어 들었다. 계단을 따라 오르니 산길을 잘 포장하여 놓았다. 나무들이 가을빛을 머금고 외인을 맞이 한다. 단종은 제5대 문종의 아들이다. 아버지인 문종이 1452년 재위 2년 4개월 만에 세상을 뜨자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 출산 후 산후 후유증으로 하루만에 승하하였다.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으로 권력을 잡자 1455년 세조에게 왕위를 내어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이 시도한 단종복위 운동이 실패하여 1457년 세조 3년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다. 결국에는 경복궁에서 쫓겨나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물에 잠기자 영월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해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관풍헌에서 승하하였다. 1516년 중종 11년에 장릉은 비로소 왕릉의 모습을 갖추었고, 1698년 숙종 24년에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슬픔어린 길을 한숨 섞어 올라가니 단종과 그의 부인 정순왕후의 영혼이라도 함께하자는 뜻으로 옮겨 심은 정령송이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묘소가 보인다. 묘소에 다다르기 전 장릉 안내문에 단종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밀장했다는 엄흥도의 인간적인 행적도 기록되어 있다. 그것만 보고, 그 내용만 품어가고 싶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업고 몰래 이 산길을 오를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저 산정에 단종을 비밀리에 묻고 갈 때 얼마나 서러웠을까. 한때는 임금의 권좌에 앉았던 분을 세력 다툼에 밀려 목숨까지 앗아간 세월이 얼마나 한탄스러웠을까. 이런 사실이 알려자면 자신의 목숨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어찌 그 무서운 현실을 감당하고 이런 일을 했을까. 단종 묘소에 오르는 산길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정으로운 삶의 한 단면을 본다.
* 영월 단종유적지 단종묘소 장릉
산길을 따라 10여분 걸어오른 야트막한 산능선에서 장릉을 만났다. 아담함 묘소로 단종의 슬픈 역사를 머금고 있다. 장릉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면 영흥4리에 있는 조선 제6대왕 단종의 능이다. 사적 제196호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명릉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양식이 가장 간단한 왕릉으로 1698년 종묘에 부묘하고 왕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1458년(세조 3) 성삼문 등이 도모한 상왕복위 계획이 탄로되어 영월에서 사사되자, 영월호장 엄흥도가 관을 갖추어 장사지낸 뒤 숨겨져왔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조심스럽게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묘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더니 선조 때에 이르러 김성일, 정철 등의 장계로 영역을 수축하고 돌을 세워 표를 하였다. 1681년(숙종 7)에 이르러 대군으로 추봉하였고, 1698년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왕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상설은 추봉된 정릉[貞陵 : 태조의 계비 神德王后康氏의 능] 등의 예에 따라 난간과 무석(武石)을 설하지 않았고, 양식은 왕명으로 가장 간단하며 작은 후릉[厚陵 : 정종의 능]의 양식을 따랐다. 따라서, 장릉의 석물(石物)은 숙종과 정조 연간에 만들어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능석물의 선구를 이루며, 명릉[明陵 : 숙종의 능] 이래 만들어진 사각옥형의 장명등은 장릉에서 그 첫선을 보이게 되었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호젓한 산중 묘소에 우리 뒤로도 간간이 사람들이 찾아온다. 주변은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이 17세 단종의 마지막 나이를 붉게 물들이듯 화사하다. 두 아들을 둔 우리 부부는 남다른 감회로 가슴이 먹먹하여서 숲속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가지고 온 간식도 먹으며 단종의 묘소와 한 동안 마주하다가 하산하였다.
* 영월 단종유적지 장릉묘소 아래 유적들
단종묘소에서 하산할 때 올라갔던 길이 아닌 우측길로 내려왔다. 입구의 안내원이 가르쳐준 길이다. 계단을 내려오니 조금 전 다녀온 단종묘소도 산정에 보이고 그 아래에는 여러가지 단종에 대한 역사유적 건물들이 있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 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배식단사는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98인, 환자군노 28인, 여인위 6인등 모두 264인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장릉 홍살문 밖 동쪽 약 1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 15년(1791) 2월 정조의 특별교지에 의하여 당시 영월부사 박기정이 창건하였다. 매년 한식때 제향을 올리는데, 배식단사에 봉안한 위패를 배식단에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 정려비, 기적비, 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단종을 도와준 수백 명의 위패를 모신 사당도 보았고, 제사 지내는 제단도 보았고, 단종비각도 보았다. 숙종 24년(1698) 노산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고, 이듬해 능을 수축하였다. 영조 9년(1733)에 단종대왕신도비를 세우고 이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비각을 건립하였으며. 이때 수복실과 정자각도 같이 세웠다. 정조 15년(1791)에 영월 부사 박기정이 장릉과 청포 등을 대대적으로 개수할 때 이 비각도 수보했다.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도 있고, 우물도 있고, 부엌도 있다. 금방이라도 단종이 살아서 저 산을 타고 내려올 듯한 느낌이 드는 정겨운 뜨락이며, 정겨운 건물들이다. 초등학생들, 노인회, 개인 등 많은 걸음들이 와서 단종을 추모한다. 슬픈 역사가 다시는 없기를 기원하며, 화사한 시대에 감사하며 떠나왔다.
* 영월 단종유적지 장릉 단풍비경
장릉 입구로 다시 돌아나오는 길에 단풍 비경을 만났다. 묘소에서 내려온 산길을 비롯한 좌우 양편에 붉은 빛, 노란 빛 단풍잎들이 단종의 혼블을 밝혀든 듯 화사하다. 슬픔도 때로는 타오르는 불꽃으로 승화한다고 외치는 것일까. 창사초롱 등불도 그날을 재현히고 있다.
*영월 단종유적지 장릉 엄흥도정여각
장릉 경내 중앙 쯤에서 아담한 누각이 발길을 잡는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모신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누각 정여각이다. 엄흥도 정려각은 단종 시신을 암장한 영월 호장 엄흥도에게 1726년 영조 2년에 어명으로 정려하였다. 그리고 1792년 정조 16년에 비각을 세운 곳이다. 장릉 경내 재실 좌측 약 10m지점에 있다. 엄흥도는 단종이 승하한 후 군수에게 성장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여 성사치 못하고, 통곡하며 동강과 서강이 합류하는 금강에서 옥체를 건져내어 관곽과 의식을 준비하여 리민을 거느리고 영월 서북방 지역인 그의 선산 동지을산 자락에 밀장하였다. 이는 1742년 영조 18년에 공조참의에 가증되고, 1758년 영조 34년에 다시 공조참판로 가증되었다. 그 후 1788년 정조 12년에 장릉 동구에 있는 육신사가 퇴락하여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것을 도에서 수리하도록 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엄흥도의 집에도 치제케 하였다. 1791년 정조 15년에는 어명으로 엄흥도를 장릉 충신단에 올리고, 그 이듬해 정려비를 세워 제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1833년 순조 33년에 엄흥도는 공조판서에 추증되고1876년 고종 13년에 충의란 시호를 받았다. 참으로 가슴 훈훈한 인정과 단종에 대한 깊은 사랑이 담긴 유적이다. 엄흥도는 그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한 훌륭한 인물이다. 잠시 정여각을 둘러보며 단종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다시금 새겨보았다.
* 영월 단종유적지 장릉 재실건물
엄흥도 정여각에서 입구로 나오는데 커다란 기와지붕 건물이 두 채 있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그 옛날의 가옥을 재현해 놓았다. 이곳 재실은 단종의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 1인과 수호군 9인이 상주하였다. 현재 재실은 1699년 숙종 25년에 건립되었다. 1932년에 중건되었다.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재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기구들을 보관해오던 곳이다. 장릉 경내에서 아주 웅장하고 넓은 건물로 자리하여 고픙스런 옛 정취를 자아낸다.
* 영월 단종유적지 장릉 박충원 낙촌비각
박충원 낙촌비각은 장릉 경내 단종의 묘소로 오르는 산길의 초입에 세워져 있다. 영월군수이던 낙천 박충원이 꿈속에서 노산군 단종의 무덤을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이다. 이 비각은 1974년 5월 5일 그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1973년 성균관장 창산 성낙서가 쓴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고 종친, 구신 등 삼족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당하시니 엄흥도는 충성으로써 단종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 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길이 없어 풍설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 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도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기를 7인에 이르렀다. 중종 36년에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한 즉 군리(郡吏)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명이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온 세사람에게 끌려가 본 즉 숲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 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 임금을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 번째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서 처형을 모면하였다. 깨어보니 꿈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 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 후부터는 군수가 부임초에 죽어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훈훈한 인정과 사랑과 충절이 담긴 비각이다. 박충원 낙촌비각 곁에는 배견정이 있다. 배견정은 장릉 능선의 남쪽에 자리하여 남하하던 거북이가 머리를 번쩍 들고 맑은 하늘을 바라 보는 것 같은 형상을 한 언덕 위에 네모진 아담한 정자가 있으니 배견정이라 한다. 배견정은 낙화암에서 순절한 시녀들의 넋이 단종묘소를 찾아와 죽어서 두견이 되었다는 단종대왕 영혼 앞에서 울며 절하던 곳이라 하여 배견정이라 이름 지은 것으로 이 정자는 1792년 사육신의 유일한 혈손인 박팽년의 현손 박기정 부사가 창건하였다. 여기서 단종을 두견새에 견주어 말한 것은 여기서 연유된다. 옛적 중국 촉나라의 망제가 그 신하인 요령에게 임금의 자리를 빼앗기고 궁궐을 쫓겨나서 서선에 숨어 살면서 복권되기를 기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객사하였다. 이에 촉나라에 돌아가지 못한 그 원귀가 새가 되어 '촉혼귀, "촉혼귀'하며 울었으므로 그 새를 두견새라 하였다고 한다. 이 새의 이름은 여러가지로 불리워지는데 두우, 두혼, 촉흔, 촉백, 자규 등이다. 왕위를 빼앗기고 객지에서 죽은 왕의 원혼을 비유하는말이다. 배견정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만 보았다. 아쉬운 걸음으로 저녁 무렵 장릉을 떠나왔다.
* 영월 동강 비경과 금강정
장릉 입구에 있는 정류장에서 오후 4시 25분 버스를 타고 영월역으로 왔다. 이곳에 올 때 오후 5시 54분 원주행 기차표를 사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조금 걸어서 동강변으로 갔다. 저녁 무렵의 동강은 비경이다. 맑은 물과 강변의 갈대들이 일몰에 젖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다. 오리들이 노닌다. 그리고 강변에 금강정 정자 한 채가 명화로 뜬다. 이 금강정은 현재 영월 KBS 방송국 동편 금강의 절벽 위에 있으며 이승만이 쓴 현판만이 남아 있을 뿐 기문판과 시판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이 건물은 30cm 높이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원주를 이용한 정면 4간, 측면 3간의 규모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정자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높이는 기단에서 42cm이고, 출입은 정면 우측에서 2번째 간을 이용하게 되었다. 난간은 출입부를 제외하고 모든 간사이에 높이 40cm로 머름 형식의 평난간을 돌렸고, 양식은 초익공식인데 양봉이 이와 비슷하게 초각되어 공포형식을 보이고 있다. 세종 10년(1428) 금부항이 창건하였고, 이자삼이 영월군수로 있을 때 금강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송시열의 「금강정기」에 의하면 이자삼이 부임하여 낡은 정자를 새로 지으려 하자 강원감사인 어익지가 도와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군수 이가 1684년에 중건하였고, 정조 16년(1792)에 군수 박기정이 중수하였으며, 군수 박서원이 1818년에 중수하였다. 동강 건너편의 금강정을 바라보는 것으로 오늘 의 여정을 마무리 지었다. 가운 단픙이 가득 채워진 우람한 산과 청청한 동강 강물과 소박한 영월 시가지가 외인과의 이별을 아름답게 고한다. 오늘 영월 탐방은 관풍헌과 장릉만 아주 자세히 들러본 뜻깊은 여정이다. 다음에는 영월 청령포와 김삿갓 마을 등을 자세히 둘러볼 것이다. 우리 부부는 원주행 기차에 몸을 싣고 돌아오며 내년 봄에는 아들네 가족과 함께 와서 더 알차고 보람된 여행을 하자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