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니언, 옛 일본군 비행장은 잡초로 뒤덮였지만 일본의 침략 야욕은 아직도 살아 있는 듯
일제 1930년대부터 군사기지화
방공호엔 화생방 방어시설까지
곳곳에 폐기된 군사시설물들
‘전쟁 참화 잊지 말라’ 교훈 줘
기사사진과 설명
일본군이 비행작전 지휘부로 사용한
제1항공함대사령부 건물 전경. 주위에 통신소, 방공호, 연료창고 등 부속 시설이 산재해
있다. |
한반도로부터 약 3000㎞ 떨어진 티니언. 태평양전쟁 당시 수많은 한국인이 징용자나
위안부로 끌려와 억울한 죽임을 당한 비극의 섬이기도 하다.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지 오늘날에도 스쿠버다이버들이 해안 주변에 잠수하면 침몰한
함정이나 추락한 비행기 잔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태평양 끝자락 티니언과 일본의 전쟁준비
앙상한 골조만 남은 일본군 제1항공함대사령부! 2층으로 된 건물 입구에는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한글·영어·일어로 표기돼 있다. 1930년대 시작된 일본의 전쟁준비는 집요하고도 치밀했다. 이미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사이판·티니언을
포함한 곳곳에 많은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이 작은 섬에도 4곳의 비행장을 만들었고 주변에 통신소·방공호시설을 완비했다. 견고한 원통형 방공호에
들어가니 화생방 방어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구 일본군 비행장은 잡초에 덮여 있었지만, 세계를 제패하고자 하는 일본의 야욕은 아직도 살아 있는
듯했다.
섬 곳곳에 전쟁잔해
일본군 비행기지를 돌아보고 안내인 A씨와 주변
지역을 살펴보다 ‘일본군 연료보급소’라는 작은 팻말을 발견했다.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니 대형 벙커가 나타났다. 벙커 안에는 녹슨 드럼통들이
뒹굴고 있었고 천장 일부는 시멘트가 떨어져 그물 같은 철근이 보였다.
자동차로 비행장을 벗어나니 여행객 출입통제를 위한 철망에
해골이 그려진 살벌한 불발탄 경고문까지 붙어 있다. 주변 바닷가에는 차량 크랭크축 등 전쟁잔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또한, 산호세 마을
입구에 전시된 전투기 프로펠러와 엔진, 대포 포신은 후세에 두고두고 전쟁의 참화를 잊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것 같았다.
기사사진과 설명
산호세 마을 입구에 전시돼 있는
태평양전쟁 당시 추락한 전투기 잔해. |
미 해군 공병대 활약과 미국의 전시 생산능력
1944년 8월 1일, 미군은 악귀처럼
저항하는 일본군을 격멸하고 티니언을 완전히 점령한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328명의 전사자와 1600여 명의 부상자가 있었지만, 일본군은
8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Sea Bee(바다벌)’라는 별칭을 가진 미 해군 공병대! 티니언을 점령하자마자 그들은 일본군
패잔병을 소탕해 가며 순식간에 대형 활주로 2곳을 건설했다. 미국은 전쟁 중 건설 부문 노동자 26만 명을 뽑아 해군 공병부대를 창설했다. 당시
미 해군장관 포레스털은 “공병대원들은 산양처럼 냄새 나고 개처럼 생활하고 말처럼 일했다. 그러나 누구도 열악한 전장 여건에 불평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태평양전쟁을 등에 짊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찬양했다.
또한 미군은 주변 해안을 파내 대형 수송선 8척을
한꺼번에 수리할 수 있는 도크까지 만들었다. 이로써 해상전투 후 손상을 입은 군함들이 하와이까지 가지 않고 가까운 티니언에서 수리를 할 수
있었다. 특히 미국은 전쟁 기간 선박건조과정을 표준화해 1만 톤급 수송함을 1주일에 1척씩 완성했다. 일본은 이런 미국의 전시 생산능력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기사사진과 설명
해안 일부 지역에 설치된 철조망과
불발탄 위험 경고 표지판. |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힌 한민족의 서러움
70여 년 전 이 조그마한 섬에서 미국과 일본은
사생결단의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전쟁과 아무 관계도 없었던 한민족은 세계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히기만 했다. 수많은 선조가 티니언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오직 추모비 1개만이 비극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을 뿐….
태평양전쟁 희생자유가족회장 양순임(76) 씨는 오랫동안
강제징용자와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왔다. “1940년대 시아버지 형제와 친척 동생 10명이 한꺼번에 징용 영장을 받았다. 그들은 몰래 간장을 몇
사발씩 들이켜 일부는 결핵 환자로 판정받아 강제징집을 피했다. 그러나 맏형이었던 시아버지와 몇 명의 형제는 남양군도로 끌려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위패를 망향의 동산에 모시고 있다”라고 했다. 아마 이들도 티니언에서 일본인의 가혹한 노동과
학대로 목숨을 잃었을지 모른다.
수난 현장서 피어오른 한국인의 우수성
티니언의 대형 카지노에 근무하는 안내인 A씨는 틈틈이 여행객들을 안내하고 있다. 전쟁유적지에서 한국인 희생자
이야기를 하며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A씨는 “100여 년 전 강대국에 의해 우리 민족은 어쩔 수 없이 전 세계로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수난을 밑거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곳 티니언 교민들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인의 우수성,
근면성, 창의력을 다른 민족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다”라고 했다. 사진=필자 제공
<신종태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