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한 것.
송담 큰스님
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한 것.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 깊은 산중이건 시장바닥이건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을 두고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미 업의 종자를 보리심으로 승화를 시켰기 때문에 업의 종자는 '소멸이 되었다'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소멸이라기보다는 '승화를 시켰다'고 표현한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알기 쉽게 '소멸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여기에 빈 자루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무엇을 많이 줏어 담아 가지고 왔으면 그 자루 속에 담아진 것을 꺼내서 보여줄 것이 있겠지만, 우리의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업의 자루 속에 담아져 있는, 무량겁을 통해서 그 쌓아 담은 업의 종자를 참선을 함으로써 그것을 녹여 없앴습니다.
그러니 내보일 것은 확 뒤집어 보여 봤자 빈 자루입니다. 빈 자루를 내보였으니 거기엔 아무것도 내보일 것이 없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사천 묘법문이, 다 그것을 한데 모아서 녹여 가지고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골수 법문을 추출을 해 낸다면, 그것이 바로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을 한다’ 이겁니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참선 공부입니다. 참선은 ‘이 무엇고?’ 내가 나를 찾는 공부여.
근데 이 참선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무엇을 구하느냐? 내가 나를 찾는 공부여.
‘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 정말 그것은 여러분들이 납득할 만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밖에도 있지 아니하고, 안에도 있지 아니하고, 그 중간에도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다’고 말하는 그 말에도 어폐 면치 못합니다마는 부득이해서 그러한 말을 빌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나, ‘나’라고 하는 것, 중생들은 ‘나’라고 하면 이 이목구비와 사지가 있는 이 육체를 가지고 '내 몸이다, 나다' 이리 생각합니다마는,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모여가지고 그래 가지고 이 육체를 구성을 하고있습니다.
이것은 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져서 없어지고 맙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 때리면 아픈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이놈이 바로 이 ‘나’입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몸을 받아난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사실 이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받아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겨난 역사가 없이 존재해 있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기 때문에 멸하는 때도 없습니다. 그러한 ‘한 물건’이 이 몸뚱이를 주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아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육체의 관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심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은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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