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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혹시라도 나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평소 사랑과 자비, 용서와 인내를 목청껏 외쳐왔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왠지 말씀에 날이 서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발언의 강도나 수위가 꽤 높습니다. 어떤 말씀은 너무나 섬뜩해서 듣기조차 거북스럽기까지 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연자매란 돌로 만든 방아입니다. 크고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는 것이지요.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습니다. 따라서 연자매 사이즈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즉시 사망이었습니다.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인 동시에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이 연자매 관련 경고 말씀입니다.
오늘 저는 죄와 관련해서 이런 걱정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혹시라도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미처 인지하지 못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악표양으로 인해, 우리를 보고 있는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를 죄짓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멀리 보지 않아도 그런 인물 중의 대표주자를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이 매일 여기 저기 수시로 등장하는데, 그분 얼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옵니다. 그분은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원흉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같은 사제 수도자들은 그럴 가능성이 참 많은 인생입니다. 많은 시선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호시탐탐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언행에 신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우들은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교우들이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마다 제일 먼저 우리 얼굴을 떠올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낸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대로 우리 얼굴만 봐도 갑자기 뒷골이 당기고 혈압이 급상승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펴보고 성찰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좋은 곳에 투자하십시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어느 날 왕이 한 사나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즉시 자기에게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나이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하고 다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두 번째 친구는 사랑하고는 있지만 첫 번째 친구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은 하지만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자 겁을 먹은 그는 소중히 여기는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 친구는 한 마디로 싫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궁궐 문까지는 함께 가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네.”
그는 별 수 없이 세 번째 친구에게 갔습니다.
“암, 함께 가주지, 자네는 아무것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네. 내가 함께 가서 임금님께 그렇게 말씀드려 주겠네.”
왜 세 명이 친구들은 각각 그렇게 말했을까요?
첫 번째 친구란 곧 재산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돈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지라도
죽을 때에는 고스란히 남겨두고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란 곧 친인척입니다.
무덤까지는 따라가 주지만 그를 거기에 남겨두고 돌아가 버립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착한 행실은 평소에는 별로 눈을 끌지 못하지만 죽은 뒤에는 영원히 그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늘나라에서도 그 선행에 따라 받는 상이 다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은 많은 상을 받고 적게 쌓은 사람은 적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도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성경 도처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가 되기로 한 것 중에서 하늘에 ‘투자’를 하자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투자는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투자를 하면 차후에 더 많은 이득이 옵니다.
더 많은 희생을 하면 하늘나라에서 더 큰 부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기술자로 전해집니다.
인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머물렀는데 그의 소문을 들은 왕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웅장한 왕궁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토마스는 흔쾌히 승낙하였고 그것에 필요한 돈을 받았습니다.
몇 달 시간이 지나고 왕은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나 알고 싶어서 다시 토마스를 불렀습니다.
토마스는 당당히 모든 돈을 가난한 이를 위해 나누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토마스를 가두고 내일 사형을 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왕은 꿈을 꾸었고 하늘나라에 올라가 몇 년 전에 죽은 자신의 동생을 만났습니다.
동생은 형을 반가워하면서 하늘나라에 새로 생긴 멋진 궁궐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저 궁궐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천사가 그러더라고.
저건 네 형을 위해 토마스 사도가 지어놓은 것이니 너는 저기에 들어갈 수 없다.”
왕은 꿈에서 깨어나 토마스를 풀어주고 잘못을 사과하여 많은 재물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제 건물 짓는 법을 아셨으니, 임금님께서 직접 지으셔도 되겠습니다.”
하며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금세 지나가지만 이 세상에서 물 한 잔 준 선행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례 주었던 한 할머니는 그저 제가 세례 주었다는 것만으로 해서 당신을 태어나게 해 주신 아버지로 여긴다고 하십니다.
그저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 때문에도 이 세상에서 이렇게 감사를 받는다면 하늘나라에서는 어떨지 기대가 됩니다.
요즘 돈만 있으면 여기저기서 투자하라고 난리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물 한 잔의 작은 돈도 영원한 수익이 창출될 하느님 나라에 투자하라고 권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지옥 이야기를 하시면서 소금불에 절여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소금은 이 세상에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을 사용할 줄 몰랐던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소금은 넣어야 짜지고 녹아야 간을 배게 하는 것처럼,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마치 달란트의 비유처럼, 이 세상에서 자신을 녹여서 세상을 유익하게 할 것을 지니고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고 가지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란 뜻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줄 것이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그 줄 수 있는 것이 소금입니다.
물론 녹아 사라지겠지만 그 희생의 상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고, 만약 그것을 사용하지 않아 맛을 잃으면 그것 때문에 혼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다 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올바른 곳에 투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다가 써 보지도 못한 채 낭패 보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9,41-50: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자선을 베푸는 데는 부유하고 풍족한 사람들뿐 아니라,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다 그 몫이 있다. 인간은 누구도 남과 나눌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다. 나누는 것이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애정은 같을 수 있지 않겠는가?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것 자체가 자선이라고 하셨다. 자선은 못 하면서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42절) 하신다. 이 말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버려지는 모습이다. 땅에는 그가 묻힐 곳이 없어서 돌을 달아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45절) 하셨다고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잘라내라고 하신 것은 지체가 아니라, 욕망이다.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우리 육의 욕망을 끊어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달려가는 방향을 멸망의 길에서 돌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47절) 눈은 우리 마음의 창과 같고 온갖 더러운 욕망은 갈라진 틈새와 같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을 핑핑 돌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우리 눈을 가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놓고 갈등하는 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지 않는 구더기나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지옥에 있는 구더기나 불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다. 구더기와 불은 고통을 의미하는데, 이 세상에서 겪는 어떠한 감각의 고통도 저승에서 죄인들이 받을 벌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꺼지는 불과 꺼지지 않는 불은 차이가 크다. 구더기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죽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제할 길 없는 탄식과 후회가 있는 그곳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으며, 죽고 싶어도 죽음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자유의지로써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 주님 안에 희망을 품고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50절) 소금은 말씀의 지혜를 뜻한다. 지혜롭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청중의 일치를 뒤흔들어 놓는 일이 없도록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잘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나 자신을 두려워하며 더욱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신약성경에서 죄를 뜻하는 희랍어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입니다. 하마르티아는 화살 쏘는 이가 과녁을 빗맞히듯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는 핵심에서 벗어난 인간의 존재 방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죄에 물들어 있으면 인간답지 못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고통을 겪고 고통을 또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녁은 당연히 주님입니다. 주님을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죄 중에 빠지게 되면서 힘든 삶의 연속이 됩니다. 사기를 쳐서 부자가 되면 행복할까요? 이런 사람들은 언제 잡힐지 불안해서 공돈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을 순간적인 만족을 주는 유흥에 낭비하며 쓰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도 모으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당연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뇌물을 줘서 높은 지위를 얻으면 어떨까요? 이 역시 자기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불안함의 연속이 됩니다.
세상의 풍요, 또 편하고 쉬운 것만을 쫓다 보면 주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어렸을 때, 복사도 서면서 열심히 성당에 다녔었다고 말씀하시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세상일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당을 멀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 순간 어렸을 때 성당 안에서 지냈던 행복한 기억들이 떠올려져서 다시 성당에 나오게 되었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나의 과녁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삶의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이전의 삶을 끊고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아주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거창한 일을 실천하는 데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됩니다. 이 아주 작은 일을 소홀히 하면 주님으로부터 벗어나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점을 분명히 하시지요.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작은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충격받을 만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래야 주님을 과녁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에게 커다란 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맛을 낼 수 없음도 이야기하십니다. 우리 존재는 이웃과 함께하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나는 그 어떤 것도 주님의 관심을 끌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주님의 관심 안에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바람직한 삶이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며, 목적이 아니라 방향이다(칼 로저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9,41)
우리를 죄짓게 하는
눈과 귀와 입을 갖고 있다면
아직
천국이 멀리 있기 때문이라네.
우리를 죄짓게 하는
손과 발을 갖고 있다면
아직
어둠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네.
우리의 몸이
불 소금에 절여지는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거든
우리를 죄짓게 하는
모든 것들을
싹둑 잘라버리고
불구의 몸으로라도
절뚝이며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네.
복음 말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41-5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4)·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6)·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