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를 물에 담근 호랑이
나는 땅끝을 떠나 두륜산 대흥사로 향했다. 茶聖인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그리고 추사에 앞서 명성을 떨쳤던 원교 이광사의 현판을 보기 위해서다. 또한 동갑내기인 초의와 추사가 함께 스승으로 모신 다산 정약용, 이들 세 사람 우정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있을까해서였다. 해남 두륜산은 높이 613미터에 불과하지만 우람한 산세가 어느 고산준령 못지 않다. 날씨 맑은 날은 정상에서 한라산이 지척에 보인다는데 나는 올라가지는 못했다. 최근 정상 부근까지 케이블카가 개통되어 누구나 쉽게 오를 수있는데 환경주의자들의 아쉬워하는 소리도 높다. 나는 절 입구 등산로를 따라 대흥사로 올라갔다. 일주문 못미쳐 백년 된 우리나라 최초 여관이라는 유선여관 앞을 지나려니 파전 부치는 냄새가 나를 유혹한다. 지나칠 수없어 동동주 한병애 해물파전 한 접시로 늦은 점심을 때우면서 '酒님 사랑'을 실천했다.
얼큰해진 얼굴로 일주문과 반야문을 지나 해탈문에 들어서니 다른 절과 달리 무서운 사천왕상이 없다. 어찌된 일인가 지나는 스님께 물어보니 대흥사는 풍수지리상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서쪽은 화산 선은산, 동쪽의 장흥 천관산 남쪽에 송지 달마산이 감싸고 있어 사천왕이 지킬 팔요가 없다고 한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대흥사가 그만큼 명당이라는 말로 이해했다. 또한 스님은 절을 둘러싼 두륜산 세 봉오리가 마치 부처님이 두손을 가슴에 얹고 누워있는 비로자나 와불상이라고 설명하는데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불심이 없어 그렇커니 생각했다. 내 관심사는 조선 양대 명필인 추사와 원교의 현판을 보는 것이라 대웅전부터 찾았다. '大雄寶殿'이라고 쓴 원교의 글이 들어온다. 바로 옆 백설당에는 추사의 '无量壽閣' 현판이 걸려있다. 나는 두 분 글이 지척에 함께하는 것이 보기 좋았다. 원교는 추사보다 82년 전 태어나 그가 출생하기도 전에 죽은 대선배이다. 추사 이전 최고 명필이며 양명학 대가이자 사상가로서 절대 무시당할 사람이 아니다. 원교는 당시 당파싸움에 밀린 소론으로 나주 벽보사건에 연루 완도군 신지도에서 귀양살다 73세에 사망했다. 지금 남도의 여러 절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는 까닭이다.
원교가 죽은지 9년 후 태어난 추사도 1840년 제주 귀양길에 친구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그가 주지로 있는 대흥사를 찾았다. 추사는 비록 귀양길이지만 병조참판과 대사성을 역임한 조선 최고 명필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는 대웅전 현판을 보자 "조선의 글을 망친 촌스런 원교의 글을 걸다니 될 말인가. 내가 써줄테니 당장 바꿔달게"하고 다그쳤다. 추사의 성화에 초의가 현판을 바꾸어 달았다. 그런데 9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다시 들린 추사는 초의에게 "내가 잘못 생각했었네 원교의 현판을 다시 달게"라고 했다. 귀양살이 9년 만에 일어난 추사의 놀라운 변화다. 그동안 추사는 제주에서 자신의 추사체 뿐아니라 자신과의 다름도 인정하는 인격까지 완성한 것이다. 위리안치의 혹독한 귀양생활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추사와 원교의 서체는 전혀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그저 다를 뿐이지 한쪽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도 한국사회는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한 것같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이해하기보다 일단 적대시한다. 한국사회 이념 갈등도 그래서 더욱깊어지는 것같다. 어쨋든 대흥사는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와 원교 두 사람 글을 함께 갖게 되었다. 당시 초의선사는 추사와 함께 다산의 제자이다. 다산이 24년 연상으로 아버지뻘이다. 그러나 셋은 스승과 제자로서 그리고 외로운 귀양지에서 연령을 초월한 길벗이자 말동무였다. 특히 초의가 때마다 보내주는 차는 다산과 추사 두사람에게는 귀양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대흥사에는 재미있는 전설에 얽힌 벽화가 눈길을 끈다. 침계루 벽에 그려진 호랑이와 가재 벽화이다. 소나무에 네발이 묶여 대롱대롱 매달린 호랑이 표정이 재미있다. 잘못을 저질러 매달린 모습치고 장난기가 가득하다. 엄숙한 사찰 분위기와 딴판이다. 옛날 절을 지키는 호랑이가 있었다. 그런데 육식성 호랑이가 채식으로 버티려니 죽을 맛이다. 토끼, 너구리 같은 작은 짐승도 호랑이를 무서워하기는 커녕 약을 올린다. 참다못한 호랑이가 계율을 어기면 안되는 것을 알지만 한 번 뿐인데 어떠랴 싶어 작은 놈을 잡아 먹었다. 그런데 중이 고기맛을 알면 빈대가 사라진다는 말처럼 한 번 맛들이자 호랑이는 계속 사냥에 나섰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스님에게 호된 꾸중을 들은 호랑이는 사냥을 멈추었으나 육식을 향한 갈망을 참을 수없다. 하루는 호랑이가 계곡물에 몸을 담구는데 가재가 꼬리를 물고 딸려나온다. 짐승보다는 못해도 먹을만하다. 그때부터 호랑이는 바위 위에 수도하는 척 좌정하고 꼬리만 물에 담근 채 가제잡기에 나선다. 그런데 호랑이의 요상한 수행을 눈여겨 본 스님에게 들통이 난다. 화가 난 스님은 구제불능인 호랑이를 칡넝쿨로 묶어 소나무에 매단다. 그래도 호랑이는 스님을 속여 먹은 것이 고소해 실실 웃는 표정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를 포함한 요즘 세태를 깨우치는 것같았다.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겉으로는 거룩한체 하면서 뒤로는 사리사욕에 빠져 있는가. 천주교, 불교할 것없이 모든 종교가 물신주의에 빠진 것같아 서글프다. 예수를 팔아 재벌이 된 대형교회 목사들도 있다. 나부터도 얼마나 많은 세월 겉과 속이 다르게 살아왔는지 부끄럽다. 수도하는 자세로 앉아 꼬리를 물에 담구는 호랑이와 무엇이 다르랴. 이러다 들통나면 나도 호랑이처럼 실실 웃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밖에 산신각에도 도인과 함께 있는 호랑이 그림이 있다. 불교가 토속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사찰에 호랑이 그림이 등장하는데 침계루 호랑이 벽화는 매우 해학적이다.
천년 사찰 대흥사는 볼거리가 많다. 가로지르는 개천을 경계로 北院과 南院 두 구역으로 나누어진 경내에는 국보 308호 마애여래좌상을 비롯 동종과 3층 석탑 등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들이 있다. 하다못해 짐승조각 식수대도 애교있게 만들어져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 부도도 있고 그를 기리는 표충사는 사찰 내 유교식 사당으로 눈길을 끈다. 삼국시대를 거치며 폐허가 되다시피한 대흥사는 조선 중기부터 급격히 부흥하여 수많은 선승과 학승을 배출했다. 금강산의 서산대사는 대흥사가 만년을 보존할 장소라며 자신의 의발을 그곳에 보존하라고 유언했다. 대흥사가 번창한데는 그의 힘이 크다. 지금 대흥사는 조계종 교구 본사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절구경에 빠져 있다보니 사위가 어둑어둑하다. 아차, 오늘은 어디서 피곤한 몸을 눕힐꼬.
저녁 늦게 해남에 도착한 나는 숙소부터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다. 모텔은 여럿 있으나 갈만한 곳이 없다. 할 수없이 또 찜질방 신세를 졌는데 불쾌한 기억만 남는다. 그러나 내가 해남에서 먹은 저녁과 이튿날 아침식사는 환상적이었다. 음식이 정갈하고 맛 또한 깔끔해 남도음식의 정수를 보는 것같다. 60초반 주인 여자는 직접 산에 올라 산나물을 채취하고 음식에 쓰는 효소들을 자신이 만든다며 야채효소 만드는 방법을 일러준다. 오랫동안 병석에 있는 남편 대신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도 그녀는 신앙으로 매일 행복하다고 했다. 또한 그녀는 인간의 행, 불행이 모두 마음먹기 달린 것 아니냐고 한다. 옳커니 '一切唯心造'다.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다. 해남읍내는 별로 볼 것이 없다. 마침 5일장이라 가보았는데 규모도 작고 사람도 얼마 없다. 읍내는 다른 소도시처럼 많은 자동차들이 주차할 곳을 찾아 헤매고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는 등 시골 정취가 사라진지 오래다.
(2014.6.10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