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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묵상글 (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 묵직한 묵상거리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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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묵직한 묵상거리들
어제 사람들에게 파멸의 시간이 와도 두려워하거나 속거나 따라가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제자들에게 박해받게 되면 오히려 증거의 기회로 삼으라고 하시고
그 과정에서 인내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속거나 따라가지 않는 정도만 되도 되지만
제자들은 그것으론 부족하고 주님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묵상할 것을 갖습니다.
첫째는 기회와 관련한 묵상거리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기회를 잡지 못하고 놓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기회를 잡더라도 고작 승진이나 출세의 기회나 잡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신자이며 제자인 우리는 다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기회가 아니라 당연히 영적인 기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주님을 증거 하는 기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기회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기회란 주님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로 묶으면 우리가 증거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고,
그래서 그들에겐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도 관념도 없고,
그래서 이 세상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 삶을 삽니다.
그러니 기회를 잡더라도 세속적인 기회만 잡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강한 갈망이 없으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어도 된다는 얘기가 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박해와 손해라는 기회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기회비용이라는 두 번째 묵상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기회비용이란 애초에 경제적인 용어로서
시간, 돈, 능력 등 주어진 자원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인간은 다양한 기회를 모두 선택할 수 없고 그래서
어떤 기회의 선택은 곧 나머지 기회들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그대로 적용하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나 하느님 나라와 같은 영적으로 큰 가치를 선택게 되면
이 세상의 가치를 포기하고 박해와 손해를 감수하는 기회비용을 치러야겠지요.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박해를
감수하는 기회비용뿐 아니라 박해를 감당하는 기회비용도 치러야 하는데
감당하는 기회비용을 다른 말로 하면 인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박해를 감수하는 것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감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수한 것을 감당해야 하기에
다시 말해서 감수한 다음엔 그것을 인내해야 하기에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라는
중요한 말씀을 오늘 마지막으로 하시는데 이것이
우리가 건너뛰지 말아야 할 세 번째 묵상거리입니다.
사실 박해가 아니더라도 약함과 병고를 인내해야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게 됨을 나이 먹고 늙어갈수록 무겁게 묵상하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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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담화, 곧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켜줍니다.
먼저, 박해와 박해 가운데에 있게 될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그러나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루카 21,12-15)
박해가 오히려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깨우치십니다. 곧 박해를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눌변인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탈출 4,11-12.15-16). 그러니 박해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신앙이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기의 순간은 가장 좋은 기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8)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실 것이니,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움 받거나 배척받게 되면 힘들어 합니다. 고난과 시련, 어려움이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힘든 것은 피하고, 편하고 좋고 즐거운 것, 듣기 좋은 말에 더 맞들이고 쉽게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곧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19)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성 베네딕도 역시, ‘인내’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수도규칙 머리말 50)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다.”(필립 3,10;로마 8,17).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루카 21,17)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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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사람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진면목을 알게 됩니다. 그때야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도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직자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21,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 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말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믿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12).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6,1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 실천해야 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6).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어려울 때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저런 소리와 압력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길 기도합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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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추워지면서 온풍기를 틀었습니다. 작동이 잘 되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잘 안되었습니다. 신문사의 운영이나, 사람과의 만남에는 울렁증이 없는데 기계에는 울렁증이 있습니다. 잘 모르면 배우면 되는데, 잘 모르니 관심도 없는 편입니다. 밀림은 비가 자주오니 더욱 밀림이 되고, 사막은 비가 오지 않으니 더욱 사막이 되는 것처럼 ‘디지털’ 시대에 더욱 문맹이 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래도 은행 업무, 온라인 쇼핑 업무는 디지털로 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젊은 신부님들은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 된 것 같아서 부럽습니다. 온라인으로 기차표를 예약하고,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새로운 세상으로 쉽게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곧 추운 겨울이 오기에 큰 맘 먹고 온풍기 앞으로 갔습니다. 빨간 불이 깜빡이는데 들여다보니 필터라고 표시된 곳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세탁물 건조기도 필터를 깨끗이 하라는 말을 들었기에 온풍기 옆과 뒤를 보니 손으로 뺄 수 있는 필터가 있었습니다. 꺼내니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한 번도 청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깨끗이 청소해서 다시 제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온풍기는 잘 돌아갔습니다. 안 해서 그렇지 저도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세례를 받아 깨끗해진 우리의 마음에도 영적인 먼지가 쌓이기 마련입니다. 한두 달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먼지가 쌓이면 우리 마음의 필터도 문제가 생기고 하느님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먼지가 쌓이기에 우리는 양심이 무디어지고, 열정이 식어갈까요? 첫째는 교만이라는 먼지입니다. 이것은 한번 우리 마음에 쌓이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작정하고 떼어내야만 합니다. 우리의 원죄도 ‘교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와 교만한 바리사이의 헌금을 나무라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와 겸손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둘째는 근심이라는 먼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풍랑에 마음이 흔들리던 제자들에게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 곁에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물위를 걷다가 두려움 때문에 빠져들던 베드로의 손을 잡아 주시면서도 ‘왜 두려워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근심이라는 먼지가 쌓이면 우리는 아름다운 가을의 단풍도 보지 못합니다. 하늘을 나는 멋진 새의 모습도 보지 못합니다. 내 앞에서 손을 내미는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에 쌓인 죄의 먼지들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양심성찰을 하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필터를 청소한 온풍기가 따뜻하고 깨끗한 바람을 내 보내듯이, 깨끗해진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과 소통하고, 열정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문학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조직과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악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나약하고, 작은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니, 강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돋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 분들을 만나면서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자녀문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부의 불화로 힘들고 어렵게 지내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문제들로 가슴아파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묵시문학은 이야기 합니다. ‘이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가리라.’ 결국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밝은 빛을 보리라고 말을 합니다. “인내로서 생명을 얻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생각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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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희에게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또한 미움을 받을지라도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약속의 내용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조건입니다. 그 조건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박해를 받을 때….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거나 시련을 겪게 됐을 때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총을 얻을 것입니다. 언제나 이 은총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채우려 하다가 겪는 시련이라면 혹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달려가다 만나는 박해와 고통이라면…. 그 안에서 우리는 오늘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과 은총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일 때 주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약속의 은총으로 다가가는 마지막 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는 모두는 주님의 은총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세상의 비난에 인내해야 하고 악의 유혹에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내는 생명이라는 선물이 되어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비보호
운전하다 보면 만나는
비보호
상황을 살펴서 자유롭게 하라는
비보호
자유라는 이름 안에 책임이라는 뜻을 간직한
비보호
하늘은 오늘도 자유를 선물합니다.
마지막 날 하늘은
우리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라는 비보호 아래
책임이라는 소명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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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마태오 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광야에 왜 가셨을까요? 마귀가 유혹해서 가신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의지로 가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당신 의지로 가셨을 것 같지만, 마태오 복음 4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 의지를 세워 광야에 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가신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시도록 내어 맡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서 이루시도록 자신을 이렇게 내어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찾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찾아 나선다면 하느님 자리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유혹을 받는 광야에 간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쁜 것이 되는 것은 유혹에 빠졌을 때이고, 유혹을 이겨냈을 때는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유혹의 순간이 올 때, 왜 이런 유혹을 주시냐고 울부짖어야 할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할 때였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이 이 세상 안에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은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이루시도록 모두 내어 맡기실 때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박해와 고문,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왜 그런 힘든 시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에게 유혹의 공간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듯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곧 우리의 구원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을 얻는 삶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가져올 수 있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겨내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루카 21,19 참조).
오늘의 명언: 사람들은 가치보다 가격에 더 주목한다. 하지만 가격은 당신이 지불하는 것이고, 가치는 당신이 얻는 것이다(워런 버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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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All time is in God’s hand”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
어제 읽은 영어 글귀가 내내 생각납니다. 이런 하느님 믿음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연중 마지막 주간은 해마다 갖는 요셉 수도원 연피정 기간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집중하고 쉴 수 있어 좋습니다. 피정강의로 수고중인 강사 신부님과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강의하시노라 수고 많습니다!”
“수사님들 다 아시는 내용인데요.”
힘없이 말하는 강사 신부님께 즉시 드린 답입니다.
“늘 들어도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순간 환해지는 느낌의 신부님 얼굴이었습니다. “늘 들어도 새롭다”, 정말 잘 대답한 것 같으니 그대로 성령님 덕분입니다. 깨어 있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나날이 있을 뿐입니다. 똑같은 날은 하나도 없고 늘 새롭고 거룩한, 날로 깊어지는 반복이 날이 있을 뿐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의 진리가 계시되는 꽃자리입니다. 어제 요한 카시아누스의 담화집을 읽는중 마음에 와닿은 대목입니다.
-사도의 말씀에 따라 사람은 “영과 정신이 새로워져”(에페4,23) 날마다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필리3,13) 전진해야 한다. 그것을 소홀히 한다면 사람이 곧 뒷걸음치고 나빠지게 된다. 우리가 올라가지 못했던 날에는 우리가 뒤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을 얻지 못하면 무엇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덕행을 닦는 노력과 열성을 중단해서는 안되며 꾸준히 그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진전이 중단되면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적 삶의 지혜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주제는 “재난의 시작”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삶은 늘 재난의 시작처럼 생각됩니다. 물론 복음은 구체적 박해의 재난을 뜻하지만 우리의 작금의 사회현실을 봐도 삶은 언제나 늘 재난의 시작처럼 위기입니다. 그러나 궁극의 승리는 하느님께 있고 이런 하느님을 믿는 자들은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예수님 역시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이런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너희는 명심하여 미리부터 변론한 말을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겠다.”
추호도 박해나 재난의 상황에 당황하거나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언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니 온갖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주눅들지 말고 평온한 마음을 지니며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결정적 구원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주님 이름 때문에 비록 우리가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하느님의 보호하에 있기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에 믿음과 희망을 둘 때 항구한 인내요, 인내로서 생명을 얻는 구원의 삶,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 주님 말씀이 이런 우리를 격려합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묵시2,10)
죽을 때까지 인내하며 순교적 삶에 충실할 때 주님께 생명의 화관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 이전에 이미 제1독서의 주인공 다니엘을 통해 이런 순교적 삶의 모범을 봅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무장한 다니엘은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고 지혜롭게 왕궁 벽의 글자를 풀이해 줍니다. 벨사차르 임금의 온갖 선물과 상도 겸손히 사양하고 임금의 잘못된 처신을 충고합니다. 목숨을 건 용기요 이런 대담함은 그대로 하느님을 배경했기에 가능합니다. 참으로 멋지고 매력적인, 기품이 넘치는 욕심이 전무한 하느님의 사람, 다니엘입니다.
“임금님의 선물을 거두시고 임금님의 상도 다른 이에게나 내리십시오. 임금님께서는 주님을 거슬러 자신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는 신들을 찬양하셨습니다. 임금님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임금님의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찬송하지 않으셨습니다.”
벨사차르 임금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는 질책 말씀입니다. 모든 시간이, 우리의 목숨과 길 모두가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는 진리를 결코 잊어선 안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왕궁벽의 “므네 므네 트켈 파르신” 글자 풀이도 의미심장합니다.
-1.‘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을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2.‘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3.‘프레스(파르신의 단수)’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벨사차르 임금은 물론 모두가 하느님 손 안에 있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결코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을 떠난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고유한 사명을 지닌 섭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잊었던 벨사차르 임금이요 이 임금처럼 저울에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의 “트겔”에 해당되지는 않는지 우리 존재의 무게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지 않지만 곧 이어지는 말씀이 섬뜻한 느낌입니다.
“벨사차르는 분부를 내려,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고, 그가 나라에서 셋째가는 통치자가 된다고 선포하게 하였다. 바로 그날 밤에 칼데아 임금 벨사차르는 살해되었다.”(다니5,29-30)
곧장 이어진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입니다. 다니엘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벨사차르 임금의 비참한 최후입니다. 하느님이 내린 심판이라기 보다는, 하느님을 무시한, 망각한 삶이었기에 스스로 자초한 심판에 비참한 최후의 죽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시종여일 한결같이 충실한 자들은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의 보호하에 있기에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시간이, 모든 삶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으며 궁극의 승리 역시 하느님께 있습니다.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는 깨달음입니다. 궁극의 승리자는 인내하는 자요 그에게 선사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한결같이 충실한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루카21,18-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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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길을 거슬러>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
미움이 살길일 때에
사랑으로 죽는 겁니다
가짐이 살길일 때에
비움으로 죽는 겁니다
보임이 살길일 때에
감춤으로 죽는 겁니다
높임이 살길일 때에
낮춤으로 죽는 겁니다
거짓이 살길일 때에
참됨으로 죽는 겁니다
가름이 살길일 때에
이음으로 죽는 겁니다
내침이 살길일 때에
품음으로 죽는 겁니다
누름이 살길일 때에
섬김으로 죽는 겁니다
저주가 살길일 때에
축복으로 죽는 겁니다
죽임이 살길일 때에
살림으로 죽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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