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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읽자 원문보기 글쓴이: 새암
그리운 이리중학교(안도현)
교문 앞 문방구에 1학년들 아침 새떼로 왁자그르르 내려앉는 소리 뛰어가다가 인사하고 다시 내달리는 발자국소리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 바퀴살이 바람을 감는 소리 복도에서 뒤엉키는 소리 찬란한 난장판 만드는 소리 교장 선생님 지시사항 줄줄이 지시하는 소리 접혀진 출석부같이 돌아서서 선생님들 불평하는 소리 숙직실 앞 산당화 화들짝 꽃잎 여는 소리 서무실 아가씨 타자치는 소리 동전 거슬러주는 소리 수업시간을 절반으로 뚝 자르며 달리는 기차 소리 호통치는 소리 훌쩍이는 소리 책 읽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찰흙처럼 말랑한 종아리에 차륵차륵 매 맞는 소리 아이들 쑥쑥 키가 크는 소리 체육 선생님 목에 달린 호루라기 소리 담배 피우다 교무실에 잡혀와 귀싸대기 맞는 소리 몰래 담 넘어가다 붙들려와 손바닥 싹싹 비는 소리 좁은 직원변소에 쭈그려 앉아 힘쓰는 소리 한참 있다가 선생 똥 떨어지는 소리 흐린 날 분필 뚝뚝 부러지는 소리 하늘 속으로 축구공 차올리는 소리 운동부 학생들 칠면조같이 악쓰는 소리 유리창에 매달린 붉은 저녁놀이 보채는 소리 심야 자율학습 감독 선생님 짜장면 후룩후룩 먹는 소리 형광등에 모기며 나방들이 날아와 붙는 소리 퇴근하고 전교조 사무실로 향하는 선생님들 발소리 적막 속으로 먼동 트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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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87년 6월 26일)
이리중학교
안도현
어느 때묻지 않은 손이 닦아놓았나
유리창을 열면
군산선 화물열차가
바다에서 돌아오는 곳
운동장 앞으로는 목포 여수 서울로
호남선과 전라선이 달리는 곳
짓궂은 아이들이 그래서 기차길 옆 오막살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리중학교, 꼭두새벽 도시락 싸서
나는 낡은 외투를 입고 출근하고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데리고 등교한다
우리나라 모든 학교가 그러하듯이
월요일 아침이면 애국조회가 열리고
펄럭이는 태극기 아래
아무것도 모르는 가슴에 손을 대는
일제 치하 어린 학동 교장선생님이 그러하였듯이
분단 나라 젊은 국군 담임선생님이 그러하였듯이
측백나무처럼 오와 열을 맞추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코끝이 맵고 발이 시린 겨울
이리중학교에서
누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나
일주일에 스물네 시간 국정 국어교과서를 가르치는
한 달에 스무 시간 보충수업을 하는
조회 종례 때마다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수업료 보훈성금 방위성금 불우이웃돕기성금
극기훈련비 수학여행비 졸업앨범비
날이면 날마다 독촉을 하는
명찰 배지 실내화 두발검사를 하는
성적이 떨어지면 매를 들고 때리는
나를 아이들은 선생님, 하고 부른다
나는 분필밥 겨우 2년 먹었는데
나는 봉급날을 기다리는 가난한 월급쟁이인데
나는 넥타이도 제대로 맬 줄 모르는데
나는 배고픈 아이 라면 한번 못 사주었는데
이 유리창을 닦으며
모르는 사이에 하늘을 닦던 아이들 중에
먼 바다에 배 타고 고기 잡으러 간 아이는,
소작 얻은 황토밭에서 배추 뽑고 있는 아이는,
이리역 화약폭발 사고 때 하늘로 떠난 아이는,
그때 살아남아 교문 앞을 손수레 끌고 바삐 지나는 아이는,
대학생이 되었다가 감옥에 간 아이는,
귀금속공장에서 하얗게 밤새는 재작년의 아이는,
추억의 동창회가 열려도 돌아올 줄 모르고
그 옛날 총각선생님 머리 위에는
눈이 내렸다
그 옛날에 졸업한 아이가 출세하는 동안
해진 출석부 끼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버드나무들이 톡톡 손가락 꺾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러면 봄은 또 멀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그날 평교사를 위한 시를 쓰고 싶었다
겉보리라 불리던 김경회 수학선생님이
책상 속을 정리하고
40여년 교직생활을 그 서랍을 닫고
홀로 뒷모습을 보여주며 떠나시던 날
나는 숙직실 수돗가에서 얼굴을 씻고
까닭 없이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이리중학교야
나도 저 무명의 찬란한 길을 가리라
점심시간이면 김치 냄새가 우리를 적시는 교실에서,
손목과 발목이 굵어지는 운동장에서,
추운 아침에 서로 뿜어주는 입김 속에서,
모이면 횃불이 될 아이들의 수많은 눈빛 속에서,
이 뜨거운 조국의 한복판에서,
이리중학교에서
[세계의 문학]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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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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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놈
안도현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絶交다
쑥부쟁이 : 한꽃대에 여러송이달리며 꽃잎이 가늘고 긴쑥부쟁이
대부분 보라꽃 쑥부쟁이
구절초 : 한꽃대에 한송이씩핀 구절초 꽃잎이 뭉툭하며 하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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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격
- 안도현 -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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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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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奢侈)
고은
어린 시절, 고향 바닷가에서 자주 초록빛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빨랫줄은 너무 무거웠고 빨래가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오랜 병(病)은
착한 우단 저고리의 누님께 옮겨갔습니다.
아주 그 오동(梧桐)꽃의 폐장(肺臟)에 묻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누님은 이름 부를 남자가 없었고
오직 `하느님!' `하느님!'만을 불렀습니다.
저는 파리한 채, 누님의 혈맥(血脈)은 갈대밭의 애내로 울렸습니다.
이듬해 봄이 뒤뜰에서 살다 떠나면
어쩌다 늦게 피는 꽃에 봄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여름 한동안 저는 흙을 파먹고 울었습니다.
비가 몹시 내렸고 마을 뒤 넓은 간석농지(干潟農地)는 홍수에 잠겼습니다.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왔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찬 세면(洗面) 물에 제 푸른 이마 주름이 떠오르고
그 수량(水量)을 피해 가을에는 하늘이 서서 우는 듯했습니다.
멀리 기적(汽笛)소리는 확실하고 그 뒤에 가을은 깊었습니다.
모조리 벗은 나무에 몇 잎새만 붙어 있을 때,
누님은 그 잎새들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맑은 뜰 그 땅 밑에서 뿌리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더 푸르기 때문에 제 눈 빠는 버릇이 자고
그러나 어디선가 제 행선지(行先地)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누님께서 기침을 시작한 뒤 저는 급격하게 적막하였습니다.
차라리 제 턱을 치켜들어 보아도
다만 제 발등은 노쇠(老衰)로 복수(復讐)받았습니다.
마침내 제가 참을 수 없게 누님은 피를 쏟았습니다.
한 아름의 치마폭으로 고히는 그것을 껴안았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보았습니다, 누님의 깊은 부끄러움을.
그리고 그 동정(童貞) 안에 내숙(內宿)한 조석(潮汐)을.
그 뒤로 저의 잠은 누님의 잠이었습니다.
누님의 내실(內室)에는 어떤 고막(鼓膜)이 가득 찼고
저는 문 밖에서 순한 밤을 한 발자국씩 쓸었습니다.
누님께서 우단 저고리를 갈아입던 날,
저는 누님의 황홀한 시간을 더해서
겨울 바닷가를 헤매이다가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봄의 음력(陰曆), 안개 묻은 빨랫줄을 가리키며
누님의 흰 손은 떨어지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울지 않고 그의 흰 도자(陶磁) 베개 가까이 누워
얼마만큼 그의 혼을 따라가다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