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55
7월18일[연중 제1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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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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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b9774Gzm7s (이정훈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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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사랑하는 아들아, 울지마라. 그간 얼마나 힘들었느냐?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고쳐주겠다!>
우리 인간을 향한 불같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 그리고 그분의 외아들이자 분신이신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메시지는 백 퍼센트 일치합니다.
때로 세파에 지쳐 휘청휘청 걸어가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부드럽고 감미로우며, 따뜻하고 자상한지 모릅니다.
2천년 전으로 돌아가, 나병 환자나 중풍 병자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너무나 은혜롭고 감동적이어서 목까지 다 메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울지마라. 그간 얼마나 힘 들었느냐?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고쳐주겠다. 내가 다시 보게 해주겠다. 내가 깨끗하게 해주겠다. 일어나라. 내 딸아!”
그런가 하면 그 말씀이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울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강도가 센지 천둥 벼락이나 철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사항 한 가지, 그런 폐부를 찌르거나 뼈 때리는 강한 말씀 역시 그 배경에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들이 갈 길을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고 엉뚱한 길, 그릇된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간다면, 그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알아서 하겠지 하며 방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허허! 말세로다’하고 웃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빨리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라고 간곡히 호소할 것입니다. 때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물로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래도 모르는체한다면, 벼락같이 화를 내며 강력한 경고의 말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옛날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에게 던진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 21-22)
오늘도 우리를 향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뿐인 주님께서는 그 옛날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 사람에게 던진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건네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말씀은 많은 경우 우리와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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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결국 다 떠나가고 사라집니다. 오직 한 분 영원불멸의 하느님, 그분만이 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식별력과 함께 정확히 이해해야 할 구절입니다.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단이나 사이비 교주들이 악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몇몇 이단에 빠진 자녀를 구해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는 부모님들을 참으로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들딸들은 사이비 교주에게 얼마나 세뇌되었는지,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로 보지 않습니다. 가족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5-36)라는 말씀은 절대로 아들이 아버지와 불목하고, 딸이 어머니와 소식을 끊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등을 돌리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 모든 대상이나 가치 그 위에 하느님을 두라는 강조 말씀입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위치가 급격히 추락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걱정됩니다. 세상 만물의 창조주께서 우리를 당신 모상대로 만드셔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조차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과분하게도 그분을 통해 우리를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매일 아침 눈만 뜨면 백번 천번이고 감사드리며, 세상 모든 것 위에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흠숭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분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그분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배은망덕이며, 얼마나 하느님께서 슬퍼하실 일이겠습니까?
오늘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그토록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큰 가치를 부여하는 재물이나 부동산, 은행 잔고! 영원할 것 같지요? 어쩔 수 없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들은 어느새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꼭 붙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가 사랑했던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저만해도 그토록 든든한 보루였던 부모님, 형님, 존경했던 스승님, 은사님, 절친들, 정말이지 영원할 것 같았는데, 언제나 제 곁에서 든든히 저를 지켜줄 것 같았는데, 하나 둘씩 결국 다들 먼저 떠나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결국 다 떠나가고 사라집니다. 사랑도 지나가고, 청춘도 지나갑니다. 젊음도 사라지고, 생명도 저물어갑니다. 결국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영원불멸의 하느님, 그분만이 남습니다.
이토록 고마우신 하느님에게 가장 큰 사랑과 존경, 흠숭과 찬미를 드리라는 교훈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의 요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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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v8hJSLcU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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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받을 사람을 알아보는 가장 완전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일으키신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 고을을 심판하십니다. 유황불에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보다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이 더 악하다고 하십니다. 소돔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판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어째서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복음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당신을 증언하였지만, 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라는 노랫말처럼 요한의 증언에 무감각하였습니다.
요한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니 마귀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은 먹고 마시니 먹보요 술꾼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한이 바로 당신의 길을 닦으라고 오기로 된 예언자 엘리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심판의 말씀을 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결국 구원은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명확히 그 귀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받으면 귀가 생겨서 구원받은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 귀를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지 않으셨다는 예정설을 주장합니다. 다 틀린 말입니다.
예정설은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거부하는 생각이고 구원받음을 한순간으로 결정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이나 광야에서 훈련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일단은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속, 육신, 마귀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로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사는 삶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나를 죽이는 삶을 세상은 원하지 않습니다. 나를 살리는 삶이 행복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들을 귀를 잃습니다. 듣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심판이 결정됩니다. 자기를 긍정하는 이들은 들을 귀를 잃습니다.
‘스카페이스’(1983)는 1980년대 코카인 붐이 일던 시기에 마이애미의 마약 거래에서 권력을 잡은 쿠바 이민자 토니 몬타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바닥에서 시작하여 최고의 자리까이 오릅니다. 돈과 여자와 힘을 얻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갖은 악행을 저지릅니다. 물론 마지막은 그것을 지키지 못해 가족까지 피해를 입히며 망하고 죽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가 그의 돈을 집어 던지며 정신 차리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에서 어머니가 말을 할 때 한 성녀의 액자가 그 위에 달려있습니다. 이는 가톨릭 신자로서 아무리 삼구를 이기라는 말씀을 해도 세속, 육신, 마귀가 행복이라고 믿는 이는 말씀을 들을 귀를 잃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토니 몬타나의 끊임없는 부와 권력, 쾌락 추구는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의 경고와 간청을 무시하고 그의 파멸과 주변 사람들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누구든 자신이 이미 결정한 행복의 관점에서 이득이 된다고 믿는 것만 듣습니다. 그래서 세속과 육신과 마귀가 행복이 아닌 고통의 원인이라 청빈과 정결과 기도만이 참 행복의 길이라고 믿게 된 이들만이 들을 귀가 생깁니다. 그래서 그들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차인표 신애라 부부는 개신교 신자들이지만 매우 겸손합니다. 집에는 꼭 필요한 것들만 있습니다. 냉장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우 검소합니다. 그리고 차인표 씨 삼 형제는 아버지의 회사 경영권을 포기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주식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이 번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많이 돕습니다. 이들은 누가 봐도 삼구에서 돌아선 이들입니다. 이것으로 멸망할 자와 아닌 자를 구별하면 오류가 없습니다.
소돔이 멸망할 때 소돔 땅에 있는 사람들은 천사의 말을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이었고 롯과 같은 사람들은 천사의 말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차인표, 신애라 부부와 같은 이들이 그렇습니다. 세상과 구분됩니다.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는 광야에는 나왔지만,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직 돈과 성과 힘이 행복이라 믿는 세례자들입니다. 이들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받을 사람을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것입니다. 사순을 사느냐, 안 사느냐? 사순은 기도, 자선, 단식으로 삼구와 멈추지 않는 싸움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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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0-24: 회개하라
오늘 복음에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았지만 믿음도 회개도 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애태우는 슬픔이 서린 탄식의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지방은 띠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많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거절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주님을 배척하게 된다면, 우리도 유다인들과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이렇게 참으로 중요하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23절). 예수님의 자비와 기적과 행적으로 하늘까지 들어 올려지는 특혜를 받았건만, 그들은 믿지 않았기에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회개했더라면 이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 나아가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일어났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들의 사악함을 드러낸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24절). 이 고을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언어장애인들이 목소리를 찾아 주님을 찬양하고 눈먼 이들이 보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걸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났지만, 그처럼 놀라운 기적들로도 믿음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티로와 시돈에서도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발견된다.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주님께서 몸소 그곳에 가셨는데도 그분을 믿지 않았지만, 티로와 시돈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믿었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 예수께서 소돔에 대해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소돔에 빗대 이 고을들의 죄를 강하게 따져 묻기 위해서이다. 이 고을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시어 오래 머무신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회개로 부르시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러기에 올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지 못하면, 주님께서는 이 고을들에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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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 중에 미술관을 가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습니다. 성지순례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성지순례 중에는 피렌체에서 미술관 방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미술관 방문에서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수태고지’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림을 해설하는 분은 수태고지의 그림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성모님의 오른팔이 왼팔에 비해서 더 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모님의 무릎이 유난히 두껍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모님이 읽는 성경의 탁자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미술을 전공하는 분들이 오랜 시간 연구를 했지만 그 이유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 문제를 풀었는데 그것은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성모님의 수태고지 그림을 정면에서 보면 이해할 수가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수태고지 그림을 옆에서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의 오른팔도 왼팔과 균형이 맞았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의 무릎이 균형이 맞았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이 읽는 성경의 탁자가 성모님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철저히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은 제대의 높은 곳에 있었기에 옆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을 때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근대과학 혁명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바로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신앙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의 삶은 관점이 달랐습니다. 첫 번째는 ‘안식일’에 대한 관점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두 번째는 ‘자리’에 대한 관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높은 자리는 성공과 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 중에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늘 ‘낮은 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나신 것도 낮은 자리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너희가 잔치에 초대받거든 낮은 자리에 앉도록 하여라. 세 번째는 ‘재물’에 대한 관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많이 모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자비, 나눔, 겸손, 희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이 ‘관점’을 바꾸는 출발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루가복음 15장에서 ‘회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온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점은 생각으로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관점이 바뀌면 행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이 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납니다. 알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 병아리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있었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절망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고, 장애물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갖는 것도 우리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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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특권의식을 버려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0-24)
이 말씀은,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고 있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교만한 위선자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세 고을들만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기적’은 하느님의 은총, 사랑, 자비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당신이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많은 은총을 내려 주셨고, 많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만심에 빠져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쪽으로만 갔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5,17)입니다.
‘회개’는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입니다. 죄를 뉘우치는 것, 잘못된 생각과 생활을 고쳐서 바로잡는 것, 하느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메시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모두 ‘회개’에 포함되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7-9)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은, “회개한다고 말만 하지 말고 ‘온 삶으로’ 회개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라는 말은, “회개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또는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 있다는 것은, 길에 굴러다니는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 21장에 있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보면, 유대인들에게 직접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 말씀은 예언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쓸데없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회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경고를 무시했고, 결국 ‘선택된 민족’이라는 지위를 잃었습니다. (그 지위는 그리스도교로 넘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티로, 시돈, 소돔’은 하느님을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또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 고을들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만일에 그들이 하느님을 알았더라면, 또 나의 복음을 들었더라면, 너희보다는 잘했을 것이다.”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을 칭찬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루카복음 12장에,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똑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람에 대한 처벌과 하느님을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 대한 처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렇다면 하느님을 모르고 살다가 가벼운 처벌을 받는 것이 낫겠다.”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은총’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죄를 지을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믿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이 받게 될 ‘구원의 은총’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또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큰 은총’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로마 11,21)라고 경고합니다. 신앙생활에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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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고을은 코라진과 벳사이다입니다.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 악행에 대한 참회와 회개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행위입니다. 이스라엘 북쪽 해안에 자리한 티로와 시돈은 교역으로 큰 경제 발전을 이룬 이방인들의 도시입니다. 성경에서 티로와 시돈은 자주 나오는데, 하느님을 거부한 이방인의 세상을 대표합니다(이사 23장 참조). 회개하지 않는 고을은 이제 이방인의 도시와 비교됩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보다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비판입니다.
오늘 복음은 ‘기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기적이라는 말은 ‘힘’이나 ‘능력’을 뜻합니다. 일상에서는 쉽게 만나지 못하는 현상이자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의 힘이 세상의 순리를 넘어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기적은 그 사람의 능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기적의 다른 면을 소개합니다. 복음서에서 기적은 회개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분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면서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뛰어난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기적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기적 자체에만 관심을 둔다면 복음이 말하는 기적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합니다. 기적이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기적의 참뜻을 깨닫고 자신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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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어둠 속에 오래 있다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차츰 보이게 됩니다. 그 어둠이 지속되다 보면, 생활하는 데 그리 불편함이 없습니다. 이때 갑자기 밝은 빛이 들이닥치면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눈을 찌푸리고 빛을 가리며 어둠을 찾아 스스로 눈을 감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고을,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아마도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잘못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고자 하느님께 청하였을 때 (창세기 18장 16절-33절 참조), 열 명이라도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자비로우신 하느님처럼, 예수님께서도 아무리 타락한 도시라 하더라도 전체가 아닌 개인의 회개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개인의 잘못된 행동과 의도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마을 전체를 꾸짖으시는 것일까요? 그 도시들은 대체 어떤 도시였을까요?
이 세 도시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큰 규모의 도시들이었습니다. 동북으로 연결된 큰 도로가 지나가던 도시였기에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였고, 호수와 맞닿아 있어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도시들의 문제처럼 빈부의 차가 극심하였고 사회적 부조리도 만연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보다 물질을 더 믿었고, 탐욕과 방탕의 삶이 사랑과 배려를 집어삼켰을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양식에 그들은 차츰 적응하고 타협하며 그것이 자신의 목표인 양 살아갔을 것입니다. 어둠과 악에 적응하고, 물질과 방탕의 우상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 가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무서운 것은 악에 대한 ‘적응’과 ‘순응’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나 혼자만 그리 살지 않으면 바보가 되고 뒤처지니까, 적당히 타협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어느새 그런 태도가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이제는 오히려 어둠을 사랑하고 빛을 멀리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둠에 얼마나 적응하셨나요? 물질의 어둠, 탐욕의 어둠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빛으로 나아가십시오. 처음에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견뎌 내면 그 빛 안에서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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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장동현 미카엘 신부님]
성경에 나오는 고장 가운데 순례객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교통이 불편해서, 또는 주요 성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온통 폐허뿐이기에, 볼 것도 없고 느낄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코라진이라는 곳입니다. 이곳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풀고 설교하실 당시에 번창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대에 귀를 닫고 회개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지금은 인적이 끊기고 쓰레기가 뒹구는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폐허를 보면 예수님의 음성이 귓전을 때릴 것입니다. ‘너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음성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값진 물건으로 치장하고 화려한 것으로 두른 이 몸, 이 인생의 끝은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먼지를 털어내면 어렵긴 하지만 간단한 질문만 남는다고 합니다. 착하게 살았느냐? 악했느냐? 그리고 잘살았느냐? 못살았느냐?
그래서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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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11장 20절)
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일을 보고도 자신들이 지은 잘못에 대해 뉘우치지를 못했을까? 그분께서 보이신 행동들이 의미하는 것을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예수님께서도 단단히 화가 나셨나 보다. 멸망한 소돔 땅 사람들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라 표현하신다. 마치 저주라도 하시는 듯 그 말씀이 격하시다.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 민족에게 보여주신 행동과 들려주신 말씀은 과히 누구나 놀라게 한 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분을 십자가의 길로 몰아세웠다. 왜 그랬을까? 크게 세 가지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하나는, 성숙하지 못한 인간은 자신의 숨기고 싶은 잘못이나 죄를 건드렸을 때, 일차적인 반응으로 화를 낸다. 자신의 모든 허상과 죄가 타인에 의해 드러났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눈앞의 것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그러한 면이 없는지 뒤돌아보아야 한다.
또 하나는, 바로 편견이다. 우리의 상스러운 표현 중에 하나가 “제까짓 게 뭔데?”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상대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의 모든 것을 무시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더욱이 옳은 소리를 했을 때, 더욱 무시하고 싶은 반작용의 심리다. 그만큼 인간은 모자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목수의 아들 주제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기득권에 대한 방어본능이다. 예수님께서 부딪치셔야 했던 벽들은 높고 튼튼했다. 소위 전문가라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성을 부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문가들은 보통 자신의 전문분야를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건드리려 할 때, 본능적으로 방어기제를 작동 한다. 그리고 눈이 멀고 만다. 옳고 그름을 식별하려는 작업보다는 공격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가장 비겁한 방법으로써 자신이 구축한 힘을 빌려 자신을 건드리려는 힘을 없애고자 집중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같은 입장에 처해진 힘들을 규합하여 양아치 짓을 서슴지 않고 한다.
늘 우리는 순수한 마음을 청해야 한다. 회개라는 것은 순수한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감동이든 슬픔이든 간에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에게 가능하다. 아무리 우리에게 자신을 뒤돌아볼 기회가 주어진다 한들, 이미 굳어진 마음이라면 뉘우침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하여,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어린이와 같이 되라 하셨는지도 모른다.
오늘 예수님께서 보이신 격한 반응은 저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안타까움이었다. 우리가 그분의 이러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다시 희망이 허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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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한 날>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는 날은 긴장된 날입니다. 그렇지만 동안의 수고와 땀의 결과를 대면하는 날이기에 기대되고 기쁨이 충만한 날입니다. 자신의 현주소를 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간직한 날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심판 날이 다가온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에게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구원의 날이요,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감사하는 날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판의 날이 두렵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이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요, 부족함이 드러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주시고 자비와 용서로 함께해 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에 보면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에제 18,3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아왔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인생이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과거는 올가미가 아니라 새 삶의 디딤돌이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여기서 새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과거를 들추어내며 무어라 하든지 내가 주님 앞에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받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코라진, 벳싸이다, 가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열심히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총을 거부하였고 결단의 시간을 낭비하였습니다. 은총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간수 하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반면에 티로와 시돈, 소돔은 이방인 도시로써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이 된 곳으로 퇴폐와 음란, 악의 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더 큰 구원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허물과 연약함에 대한 인정과 새 삶에 대한 희망이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기적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들은 분명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은총이 아무리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언제나 깨어 준비하는 삶이 요구됩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교만의 죄입니다.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죄는 하느님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코헬 12,14)고 하셨으니 마음을 다잡아 오늘을 충실히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불 속에 던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니만큼 알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먼저 자신을 잘 살핀다면 심판은 기쁨이요, 곧 하늘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갖고 심판을 맞이하십시오. 허물과 죄, 부족함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나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기를 다짐하며 이날을 봉헌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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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마귀는 사람의 약한 부분을 공격해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이용해서, “지금은 쉴 때야. 이렇게 피곤한데 어떻게 기도해? 내일부터 열심히 기도하면 되지.”라는 식으로 유혹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음식이나 술로 혹은 성적인 유혹으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저는 술에 대한 유혹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술을 원래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맥주 한 캔도 혼자서는 마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부분에서는 마귀의 유혹이 없습니다.
마귀는 그 사람의 약한 부분만을 이용해서 유혹합니다. 이 약한 부분의 타격은 대단하지요. 삶 전체를 흔들 수 있는 큰 충격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운동선수가 매일 훈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합을 대비해서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평소에 열심히 훈련하는 이유 역시 적의 침략의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귀의 유혹도 언제 어디서 올지 모릅니다. 기습 공격일 수도 있고 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공격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악을 경계하는 것과 동시에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악을 잘 경계하고 있습니까? 죄로 쉽게 넘어갈 수 있게 아무런 경계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또 기도는 어떠합니까? 이 중요한 것을 ‘다음에’라는 말로 계속 미루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 카파르나움아,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이중에서 카파르나움은 육로와 수로의 교차점을 이루고 상업이 번창하던 상업 도시였고,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카파르나움의 위성도시쯤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왕래가 많던 곳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도시들은 율법교사들의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종교도시가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넘치던 곳, 또 많은 율법교사가 있어서 종교적으로도 하느님께 가깝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기적이라는 표징을 그렇게 많이 보여줬으나 계속된 의심과 세속적인 판단으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즉, 그들은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있는 풍요로운 곳에 마귀의 유혹이 없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곳 역시 마귀의 유혹은 있었습니다. 이 유혹은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계속됩니다. 따라서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마음에 담고, 주님과의 대화라는 기도를 통해 철저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마귀의 공격을 거뜬하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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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 기적과 회개>
마태오 11,20-24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삶, 기적과 회개>
삶이란
기적이요
회개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있게 하시니
기적이요
내가 당신 뜻대로
바로 있으니
회개입니다
삶이란
기적이요
회개입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스미어 오시니
기적이요
내가 당신을
정성스레 품으니
회개입니다
삶이란
기적이요
회개입니다
당신께서 나와
늘 함께하시니
기적이요
내가 당신과
오롯이 함께하니
회개입니다
삶이란
기적이요
회개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살게 하시니
기적이요
내가 당신을 닮아
올곧게 사니
회개입니다
삶이란
기적이요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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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매일 Smile합시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오늘은 너무 늦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강론을 올리지 말까 생각하다가 오래전에 인터넷에서 본 재미있고 의미 있는 말이 생각나 그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대신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See
Miracle
In
Life
Every day.
매일의 삶에서 기적을 보라는 말인데, 각 단어의 앞 글자를 연결하면 ‘smile’이 되잖습니까?
그러니까 매일의 삶에서 기적을 보면 매일 ‘Smile’하게 된다는 말이 되고 매일 웃으면 매일 행복하게 된다는 말이 되겠지요.
진정 우리는 매일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해가 뜨는 것이 기적이 아닌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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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하느님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내 마음 당신을 그리나이다."(이사 26,9)
하느님께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지금(now)을, 새로움(new)을 뜻합니다. 지금의 하느님, 새로움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깨어 있는 영혼들은 늘 하느님의 지금을, 하느님의 새로움을 삽니다. 어제 다음 말마디를 게시판에 써불이고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잠자는 시간외에는 결코 눞지 않는다!"
"잠자는 시간, 묵상시간, 말씀을 경청하는 시간외에는 결코 눈을 감지 않는다!"
요즘 불길하고 우울한 뉴스가 가득합니다. 무엇보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입니다. 국내의 홍수 피해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천재에 인재까기 겹처 정말 회개하여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전 세계 덮친 폭염, 홍수”라는 1면 톱기가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지난 주말 한국에서 폭우로 40명이 희생된 가운데 미국 북동부 펜실베니아주 돌발 폭우로 5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시에 미국 남서부엔 폭염이 덮져 데그밸리의 기온이 50도를 넘어서며 종전 지구 최고 기온 기록 경신을 앞두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48도가 넘는 폭염이 예고되며 유럽 최고 기온도 곧 다시 쓰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웃 중국과 일본도 폭염과 홍수에 몸살을 앓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폭염 및 극단 기후의 배후로 지목되는 가운데 온실가스 최대 배출국인 미국과 중국이 기후 관련 논의에 나섰지만 실질적 합의가 도출될 것이라는 기대는 크지 않다.-
국내외가 총체적 난국입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가 인간의 무지와 탐욕으로 인해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자연재해 앞에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지요. 홍수 및 산사태로 인해 초토화되는 현실 앞에 망연자실한 사람들입니다. 피해는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에게 먼저 닥칩니다. 어떻게? 뾰족한 답이 없어 보입니다. 답은 단 하나, 회개뿐입니다. 말로만, 마음만으로의 회개가 아니라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생활방식의 변화입니다. 개인의 노력은 물론 정책이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참 격렬합니다. 오늘날 세상에 오셔도 주님의 반응은 똑같을 것입니다. 예나 이제나 참 벗어나기 힘든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돌아오는 철저한 회개만이 무지에 대한 답임을 오늘 복음이 가르쳐줍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다. …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대로 오늘의 하느님을 잊은 무지한 이들을 향한 불행 선언같습니다. “행복하여라” 많이도 반복됐던 행복선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불행선언입니다. 불행도, 행복도 선택입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요 지체 없는 회개의 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 활약하시며 세 고을에 많은 기적을 베푸셨는데 그 기적들이 궁극으로 목표했던 바는 무지한 사람들의 회개였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뿐입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없이는 온유와 겸손도 자비와 지혜도 없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아니곤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복음 선포와 더불어 늘 강조하신 것도 회개였습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게 회개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의 행복한 자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한 참자유요 참 행복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사는 이에겐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창세기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어제부터 시작된 제1독서 탈출기가 흥미진진 새롭기가 처음 읽는 듯합니다. 다시 시작하는 하느님의 결의가 우리에게는 용기와 힘이 됩니다. 좌절함이나 절망함이 없이 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하느님이야말로 우리 회개의 여정에 최고의 참 좋은 안내자가 됩니다.
모세를 통해 다시 시작하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시며 우리의 평생 동반자가 되고 계십니다. 모세를 준비시키는 심모원려의 하느님의 지혜와 겸손, 끝없는 인내와 기다림이 놀랍습니다.
참으로 회개의 여정에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믿음임을 배웁니다. 야곱을 수련시키고, 이어 요셉을 치열히 수련시킨 하느님은 모세를 수련시킴으로 구원역사를 시작합니다. 모세의 탄생과정과 성장과정이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섬세한 개입을 통해 이뤄집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절망은 없음을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파라오의 딸, 공주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었을 때,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합니다. 새삼 세례성사로 물에서 건져 낸 우리 하나하나 역시 모세임을 깨닫습니다.
모세야말로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겪으며 혹독한 수련을 겪으셨던 예수님이요, 예수님에 앞서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하느님을 수련장으로 하여 기나긴 회개의 여정에, 수련에 돌입합니다. 여전히 인생 광야에서 회개의 여정 중 평생 수련자들인 우리입니다. 우리의 수련장 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선언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친히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오시는 주 예수님은 우리의 수련장이 되어 회개의 여정 중 늘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주십니다. 저절로 나오는 행복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 예수님을 수련장으로 모시고 평생 회개의 수련자로 사는, 회개의 여정중인 사람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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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11,22.24)
<회개의 기적!>
오늘 복음(마태11,20-24)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꾸짖음은 지금 여기에 있는 믿는 이들에게 하시는 꾸짖음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는 기적은 무엇일까?
저는 그 첫 번째 기적이 매일 제대 위에서 사제의 손을 통해 일어나는 '성체와 성혈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성변화되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적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크고 작은 은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기적을 보고도, 이 기적 체험들을 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꾸지람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매일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도 지금 여기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 날에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보다도 더 많은 매를 맞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 저 너머에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을 희망합니다. 그 목적이요 희망이 나에게서 이루어지려면 지금 여기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로 보다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날마다 아니 매순간 회개의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배둔에서도 새 성전 건축이라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이제 배둔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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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3xzX74_mz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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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마태 11, 20)
은총과 기도의
오늘이
밝았습니다.
믿음을
꾸짖는
믿음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기적은 반드시
회개로
시작됩니다.
회개가 믿음이고
회개가
가장 아름다운
우리의
기적입니다.
기적을
건져올리는
우리자신의
회개입니다.
인생을
죽이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교만이었습니다.
인생이 바로
우리의
기적이며
은총인 것은
하느님의
과분하신 사랑을
우리가 만나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사람을
만들고 회개가
참된 만남으로
우리를 예수님께
데려다 놓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회개가
가장 아름다운
기도이며
기적입니다.
회개가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기적을 사랑으로
바꾸어 봅니다.
사랑은
마침표가 없는
회개의
이야기입니다.
마침내
사랑받고 있음을
뜨겁게 깨닫습니다.
가장 좋은
기적이
한 단어에
다 모였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살아있을 가치와
사랑하는 행복이
회개로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기적의 아침입니다.
인생을 살리는
기적(奇蹟)! 그것은
우리자신의
회개입니다.
모든 회개는
하느님을
모든 사랑의
중심에 둡니다.
참된 사랑이
참된 회개이며
참된 기적임을
믿습니다.
회개로 다시
태어나는
은총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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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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