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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고래등대
01.인천 팔미도 등대
우리나라 첫번째 현대식 등대이며,
6.25 전쟁에 사용됐던 등대로서,
근래에 가장 아름답게 단장한 등대입니다.
2003년을 끝으로
등대의 불은 밝히지 않으며
한국 등대 문화유산 1호입니다.
02. 포항 영일만 호미곶 등대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지어진 등대입니다.
26m의 등대탑은 벽돌로만 쌓아 올렸고,
내부는 6층으로
조선왕실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호미곶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해맞이 축제가 열리는 곳입니다.
이곳은 호미곶 등대박물관으로 유명하고
바다의 손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가마솥 등
볼거리가 많습니다.
03. 울산 간절곶 등대
울산 대송리 간절곶에
1920년 세워졌고,
해맞이로 유명한 곳이며,
세계서 가장 큰 우체통이 있고,
등대홍보관이 있습니다.
04. 울산 방어진의 울기등대
러, 일 전쟁때
일본이 1905년 목조로 건립하고,
1906년 다시 건립하였습니다.
뒤에 보이는 것은
1987년 12월에
24m 높이로 새로 건립한 것이며,
처음 것은 등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주변에는 솔밭 등 경치가 좋고,
등대 바로 앞바다에
유명한 대왕암
(문무대왕 왕비의 무덤)이
있습니다.
05. 목포 구등대
1908년 무인등대로 건축되었다가
1964년 유인 등대가 되었습니다.
부근에는 목포 8경이 있습니다.
목포8경이란?
①유달기암
(유달산의 병풍 같은 기암)
②용두귀암
(석양무렵 돛단배가
고하도 용머리를 돌아오는 풍경)
③아산춘우
(아산에 내리는 봄비)
④입암반조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갓바위의 반조)
⑤삼학풍림
(삼학도의 단풍숲)
⑥금강추월
(금강 하늘에 걸린 가을달.
금강은 영산강의 옛이름)
⑦고하설송
(고하도 성마루의 노송에 덮인 눈)
⑧달사만종
(유달산 달성사의 저녁 종소리)
06. 부산 가덕도 등대
1909년 12월 건립되었으며, 특징은 부속건물이 일본 및 서양건축 양식으로서 주요 건축자재는 붉은 벽돌 및 목재(미송)를 사용
하여 건립했으며 출입구에는 일본 황실의 ㅅ아징인 오얏꽃 모양의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2001년 복원하여 보존되고 2002년 새로운 등탑이 불을 비추고 있습니다.
07. 여수 돌산등대
08. 목포 비금도 화원등대
09. 제주지방해양수산청 산지항로표지관리소 등대
1916년 10월 건립하였으며 현재의 것은 1999년 12월 새로 건설하였습니다.
40만 촉광에 42km 멀리서도 불빛이 보입니다.
10. 거문도 수월산 등대
11. 소매물도 등대섬 등대
사진작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섬답게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섬입니다.
벼랑위에 등대를 얹고서 망망대해를 기암절경으로 대하고 있는 섬 전체의 모습이 한편의 그림같습니다.
소매물도의 등대를 보려면 고갯마루 분교터를 지나 산 뒤편으로 넘어가야합니다.
등대섬 등대는 1917년부터 무인등대로 불을 밝혔고 1940년부터 등대지기들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등대섬은 경사가 급한 초지로 2000평이 넘으며 주변의 기암괴석돠 어우러져 영화와 광고촬영의 단골무대입니다.
새하얀 등대와 갈색 초지, 푸른 바다, 검은 기암이 어우러진 풍광들이 이채롭습니다.
등대섬 선착장에서 정상의 등대까지는 기분좋은 산책길이 계속됩니다.
봄부터 야생화가 군락을 이루어 여름에는 주황색 나리, 샛노란 우너추리꽃, 보랏빛 맥문동꽃이 넘쳐납니다.
특히 가을에는 구절초 무리가 볼거리입니다.
하얀 등대와 계절마다 다른 야생화들, 소매물도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들입니다.
12. 평택 행담도 화합의 등대
평택시와 당진군 지역간의 화합과 번영을 기하고 입, 출항 선박에게 머리숙여 인사하는 모습의 형상으로 만든 등대입니다.
13. 선유도 인어 등대
선유도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기우너하는 모습을 조형화한 등대입니다.
14. 통영 거북선 등대
경남 통영시 한산면 대고포항 해상에 위치하며 임진왜한 때 군수용 소금을 구워서 공급하던 염전이 있던 대고포 해상 암초에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기리고자 거북선 형상을 담아 설치한 등대입니다.
15. 속초등대
1957년 점등하였고, ㅅ고초시 영랑동에 위치하여 '영금정 속초등대전망대'라고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속초등대는 다른 등대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점을 갖고 있는데, 바로 '항로표지의산교육장'이란 것입니다.
속초등대전망대에서는 각종 항로표지의 종류를 볼 수 있는데, 속초항 방파제부터 시작해서 등부표, 조도무인등대, 속초항
등표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유인등대 한 곳에서 다양한 무인표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번국에서 이곳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항로
표지에 대해 모르는 일반인이나 관리원들의 산교육장으로 이용되어집니다.
16. 부산 오륙도 등대
부산항의 상징으로서 1937년 일제 강점기에 건립된 시설이 너무 낡아 1997년 일반 시민들의 현상공모 작품을 선정 1998년에
건립한 등대로 암반의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태풍과 해일에도 안전하도록 건립된 연면적 125평에 3층짜리 복합건물
(업무시설 및 숙박시설)이며, 옥상은 일반인의 전망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외부에 계단을 설치했습니다.
등대 시설 내부에는 서게의 등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이 있습니다.
17. 여수 하멜기념 등대
18. 포항 낙서 등대
등대 탑하부에 낙서판을 설치하여 무분별한 낙서로 인한 등대 훼손을 방지하였습니다.
19. 영던 창포말 등대
이곳의 특산물인 대게를 형상화하여 개축한 등대입니다.
20. 송이버섯 등대
강원도 양양군 물치항 방파제에 이 지방 특산물인 송이버섯 모양을 형상화한 등대입니다.
21. 대변 월드컵 등대
22. 대변 로봇 태권V 등대
23. 부산 차전놀이 등대
세계로 역동하는 부산 신항의 힘찬 모습을 뱃머리와 파도 그리고 전통 차전놀이와 승천하는 해룡의 모습으로 설치할 등대
24. 통영 미륵도 연필 등대
높이가 최대 22m에 이르며 등대 고유기능 뿐 아니라 통영문학을 기념하는 등대로서 12개의 외측기둥과 6개의 내측기둥이
제각각 수직으로 높이 솟은 혁신적 디자인으로 되어 있어 눈길을 끕니다.
모양이 마치 깍아 놓은 연필을 닮앗다 해서 일면 '연필등대'로 불립니다.
설계의 컨셉은 "중력을 극복하며 하늘을 향해 도약하는 힘찬 기상과 통영의 문학적 업적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런 에너지가
모여 밝은 불빛을 뿜어냄으로써 후세에게 밝은 길을 비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25. 부산 태종대 등대
日本語 殘滓說
1. 개요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일본어 잔재가 아직도
한국어 안에 남아있다는 주장.
2. 설명
사실 서로 다른 두 문화가 접촉할 때
국력, 문화적 영향력 같은
힘의 차이가 있으면
언어도 영향을 받아
의도치 않게 종속되거나
사멸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한 언어가
다른 언어와 상호작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본래 있던 단어나 표현을
외국어가 대체한다고 해도
관점에 따라서는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한국과 일본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로
얽힌 복잡한 근현대사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광복 이후 한국에서는
일본 잔재의 청산 문제가
계속 제기되어 왔고,
그 연장으로 한국어 속에 남은
일본어 잔재도 청산해야 한다는
시각이 꾸준히 존재했다.
영문학자 이재호 교수는,
한국 광복 이후
미군정이 들어오자
필요에 의해 영한사전을
편찬하던 중
시간과 돈이 모자라
당시 일본이 가지고 있던
영일사전을
그대로 가져온 탓에
일제식 언어문화도 남아서
이런 현상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온게
1946년 류형기 목사의
신생영한사전
(新生英韓辭典)이었고,
현대 사전들도
이를 충실히 본받아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고 있다.
영문학자가
영어사전 보다가
빡쳐서 쓴 버그리포트
영한사전 비판에
자세한 내용이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함.
공영방송을 비롯한
주요 언론 매체에서는
일본어 잔재 청산 논리가
상당부분 통용되며,
국립국어원이나
학계의 다수견해로 채택된
사례도 있으니
몇몇 사례는 참고하는 것이 좋다.
다만 시중 고시
또는 공무원 수험서는
일본어 잔재인지 아닌지
분명하지도 않은 사항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고
진리처럼 싣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특히 깨알같은 재정국어
여기에는
인터넷 맞춤법 검사기도
한 몫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별다른 근거도 없이
"일본어 잔재다!"라고
주장하는 사례가 매우 많고,
대중들 역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문제삼으면
매국노 내지는 친일파라고
여긴다.
사안이 복잡한 만큼
모두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
이 문제는 단순하게 접근하기에는
좀 복잡한 양상을 띈다.
이런 저런 문제가 뒤섞여 있어서
파고들수록
새로운 사안이 많고
언어적 접근과 함께
역사적 접근이
상당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처럼
일본 제국주의 정신을 담고 있어서
반드시 청산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어에서 온 말이 아니어도
오해받는 경우 또한 상당히 많다.
순 우리말 토시처럼
일본어로 오해받는
한국어인 경우도 있고,
일본제 한자어라고 생각했던 단어가
고려, 조선 시대의 사료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경성(京城)과 부락(部落).
이렇다 보니
심지어 전문가들도
실수로 잘못 판단하는 일이
종종 빚어진다.
'해외'(海外)가
한 때 국립국어원의
순화 대상이었던 것도
그런 사례인데,
당시에는 '섬 나라인
일본을 기준으로 한
표현이다.‘
라며
'국외'(國外)로 순화하라고 했으나,
역사학자들의 지적을 받아
2012년에는
순화 대상에서 빠졌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식 한자어 문서에서
추천 도서로 언급된
사쿠라 훈민정음 같은 경우도
고대 중국에서부터 쓰였던
'산보'(散步)를
일본식 한자어로
지목하는 등
은근히 오류가 있다.
무엇이 진짜 일본어 잔재인지
판단하는 것은
결코 혼자만의 독단적인 사고로는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는
복잡한 사안인 것이다.
왜 복잡한가 하면
역사적으로
한국어와 일본어가
오랫동안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왔고,
계통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 '섬'과
일본어 시마(島) 같은 단어의
상관관계를 논하는 경우가 있다.
일본은 고대 문화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백제와 가야를 중심으로 한
삼국시대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처럼 국립국어원에서
고유어을 살펴보다 보면
소리와 뜻이 일본어와
유사한 것들이 많다.
반면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식 표현이 들어와 당시 조선어, 한국어에 영향을 끼쳤다. 가령 '-하고 있었다' 같은 과거 진행형 표현은 이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원래는 유럽어식 표현이었던 것이 번역 문체가 되어 일본을 거쳐 유입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경제'라는 economy의 한자번역이 있다. 중국인들은 처음에 이 단어를 《사기》에서 유래한 理財(이재)라고 번역하고 일본인들은 《대학》의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표현에서 차용한 経済(경제)라고 번역했다. 이재가 이코노미의 원의미와 실제적 의미 모두를 살린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돈벌이라는 표현보다 진중한 가치를 내재하는 경제가 압도적으로 통용되면서 이재는 치부(致富)의 표현이 되고 경제가 economy를 뜻하게 되었다.[3] 과거 일본식 한자어가 유입되던 현상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국가들이 비슷하게 겪었던 현상이다.
여담으로 일본어 잔재는 타이완에서도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아저씨를 가리키는 歐吉桑(어우지쌍, 오지상), 아줌마를 歐巴桑(어우바쌍, 오바상)이 있으며[4] 최고를 一級棒(이지빵, 이찌방)이라 한다. 이외에도 운전기사를 가리키는 運將(윈장, 운짱) 등 한국어, 중국어보다도 훨씬 다수가 섞여있는데 이쪽은 언어순화 운동을 안 하므로 미디어 매체에서 그대로 나오기도 한다. 타이완은 한국과 다르게 일본 식민지배 역사에 대한 감정이 좋아서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 실제로 일본어 잔재인 것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한국어의 외래어/일본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일본식 한자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위 내용들은 일본어 잔재'설'과는 하등 상관없는, 명백히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들이다.
4. 실제로는 일본어 잔재가 아닌 것
몇몇 일본어의 잔재가 아닌 말들이 일본어의 잔재로 오해받는 이유는 네티즌들이 자주 이용하는 맞춤법 검사기가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적한 사례들의 대부분은 맞춤법 검사기를 통해서 퍼진 잘못된 정보들이다. 정작 일본에서는 쓰이지 않는 한자어도 맞춤법 검사기에서는 일본식 한자어라고 잘못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지자체의 병크도 이를 부추긴다. 2015년 4월 서울시에서 발표한 행정 순화 용어 목록에는 식비(食費)를 일본식 한자어로 분류했지만, '식비'는 조선왕조실록에 이미 등장했던 단어다.
…濫徵綿布、銅器於匠人, 爲酒食費, 其判事任孝明…
…함부로 면포(綿布)와 동기(銅器)를 장인(匠人)들에게서 징수하여 주식비(酒食費)로 삼았으며, 그 판사(判事) 임효명(任孝明)은…
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 10월 29일 丁未, 2번째기사
이로써 식비는 '주식비'에서 주만 빠졌을 뿐 짜임새가 같은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식비'의 사례처럼 조선왕조실록에 이미 오래전부터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한자어로 오해받는 단어들이 상당수 있다. 링크 참조
이하 예시는 잘못 알려진 주장-일본어의 잔재가 아닌 이유 순이다.
4.1. 언어학 요소]
•말 끝에 붙는 "~요"는 일본어의 잔재다.
일본어 종조사 よ 또는 조동사 よう와 국어의 보조사 요는 3개 다 기능이 서로 다르다. 예를 들면, '가요'라는 말에서 보조사 '요'는 '가'라는 반말을 존댓말로 바꿔주는 기능을 하지만 '行こうよ'에서 'よ'는 '行こう'의 권유의 의미를 강조할 뿐, 존대의 의미는 없다.
•효과를 /효꽈/로 읽는 등, 된소리가 늘어난 건 된소리가 많은 일본어의 탓이다.[5]
이미 조선시대부터 활발히 사용되던 "사이시옷" 현상이 확산된 결과다. 오히려 20세기 초반의 대세는 일본어의 무성파열음을 평음으로 적는 것이었다.(예를 들자면 山本(야마모토) - 야마모도) 다만 임진왜란 이후 두음의 된소리화가 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일본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하지 못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건 세상살이가 험란해질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한국전쟁 당시 북한과 소련(러시아어)[6]의 영향이라는 논리를 펴도 들어맞을 수 있다.
•조사 의는 일본어에서 온 것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
보통 조사 의를 남용하여 문장을 읽기 곤란할 때는 의를 지우지만, 조사 의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이를 확대해석하여 조사 의를 아예 쓰지 말라는 과격한 주장을 펴기도 한다. 주로 글 잘 쓰는 요령을 알려 준다는 블로그 포스팅에서 볼 수 있는 주장인데, 애초에 출처도 없거니와, 논술 전문가나 국어 학자, 현직 국어 교사의 주장도 아니니 의심해 볼 여지가 많다. 의가 일본식으로 쓰인 경우는 주로 ~에의, ~로의처럼 다른 조사와 결합하여 쓰이는 경우인데, 조사 하나만 써도 뜻이 통하는 경우에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순화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극단적으로 조사 의를 배격한다면, 오히려 말을 잘못 해석하게 된다. 실제로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가 나왔을 때 이를 언니의 별명이 신데렐라인 줄 알았다는 시청자가 있었다(언니 = 신데렐라). 하지만, 드라마의 내용은 주인공인 언니를 동화 신데렐라에 등장하는 의붓언니에 비유한 것이었다(언니 = 의붓언니).
또한, 형태만 달랐을 뿐 조선시대에도 조사 의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조사가 이미 존재했다. 결코 별도의 조사 없이 단어만 늘어놓고 문장을 썼던 것이 아니다. 15세기 국어에 쓰였던 사잇소리가 그러한 예이다. 링크 이것이 나중에 조사 의로 대체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우리말의 조사 의에 대해서만 따로 분석한 책도 있으니 참고해 보자. 링크
4.2. 예시
예시는 가나다 순으로 정렬하도록 한다.
4.2.1.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단어
일제강점기 때 옮겨온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 문서를 참고하자.
•가족(家族)을 식구로 써라.
가족과 식구는 뜻 자체가 다른 단어다. 일단 가족은 족보를 따지는 차원에서 쓰는 경향이 있고, 식구는 핏줄과는 관계 없이 한 집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을 묶어 부르는 말에 가깝다. 즉, '강아지도 우리 가족'보다는 '강아지도 우리 식구' 쪽이 자연스럽다. 과거 일본의 한국인 모 교수가 주장했던 이야기로, 역시 검증되지 않는 글이며, 마치 일부에게 정설처럼 퍼진 말이다. 집 가(家)자를 쓰는 가족과, 먹을 식(食)을 쓰는 식구는 뜻 자체가 다른 단어, 실제로 식구보다 가족이 많이 문헌에 등장한다. 중국의 여러 문헌에도 등장하며 현재도 쓰인다. 단 일부 지방에서는 고대어로 본다고. 예:) 한국고전 - 死徙相望 家族分離
•감사(感謝)는 일본사람들이 사용한 어휘다.
중국의 전근대 문헌에도 보이는 표현이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등장한다. 애초에 지금 중국어에서도 실생활에서 쓰이는 말로, 단어 그대로 고마움을 느낀다는 말이다. 빈도의 증가는 일어의 영향일 수 있지만 원래 국어에 있던 표현이다. 2009년도에 독서신문 편집자가 쓴글인데, 검증없이 일부에게 퍼졌다. 심지어 SBS '파워 FM'에서 짬 시간에 내보내는 <SBS 생활 정보>도 이런 잘못된 정보를 내보냈다. 2월 21일 오후 3시 30분께에 내보낸 해당 방송에서는 고맙습니다는 신을 의미하는 고대 순우리말 '고마'가 어원으로 신처럼 소중히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반면, '감사합니다'는 일제 강점기에 쓰인 한자어라고 주장했다.
해당 방송에서 설명한 고맙다의 어원은 국립국어원의 공식적인 견해와는 다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또한 이 주장은 일본 혐한 극우들이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었다'며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개소리로 이용하기도 한다.
•구라 해당 문서 참조.
•구두라는 말도 일본어에서 유래한 단어다.
일본어로 신발을 뜻하는 쿠츠(くつ, 靴)와 발음이 비슷해서 나온 주장이지만 정확한 어원이 불분명하다. 일단 공식적으로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일본어 くつ(靴)를 어원으로 보고 있고, 그 이후에 출간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다음에서 제공)에서는 어원이 분명치 않으나 くつ(靴)가 어원이 아닐까 추측한다고 되어 있다. 이전 서술에서는 백제 시대부터 쓰던 말이라고 되어 있었다. 몽골어에서 번역된 말이라는 주장도 있으니 참고. #1#2
이 글에 따르면 일본의 어원 검색 사이트에서 くつ(靴)의 어원이 한국어 구두에서 온 말 뭐지? 순환논증? 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 오히려 한국어에서 일본어로 넘어간 말일 가능성도 있다.
•근성(根性)은 일본 곤조에서 유래한 단어다.
1492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시문집을 편찬한 동문선에 '근성이 작아…'란 대목이 있다. 그리고 조선 정조 때 간행된 홍재전서의 무인기문에는 '그의 충의의 근성은 평소에 온축된 것', 화평귀주 치제문에 '효우근성(효성과 우애가 타고난 천성)'이란 기록이 있다. 옛날에도 타고난 성질이나 천성 또는 뚝심, 배포, 끈기와 비슷한 뜻으로서 현재 사용되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농악(農樂)은 일제가 조선 음악을 천대해서 만든 말이다.
한동안 학계에서도 농악이란 낱말이 1936년 일본인 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부락제'에서 처음 나왔다고 알려져 있었다. 또는 일본 전통 탈극인 노가쿠(能樂)를 연원으로 한 일본식 음악조어로 만들어졌단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아래의 예문처럼 농악은 조선시대부터 이미 보편화된 단어였다. 지역에 따라 풍물(風物), 풍장, 매구, 굿, 두레, 걸궁, 걸립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지만 당시 사대부들의 문헌에는 농악이 주로 많이 쓰인 편.
농악은 편안하다. 또한 모두의 음악이 각기 절주가 있고, 조리가 있다. 난잡한 듯하여도 난잡하지 않다. 나는 곧 농악과 군악을 심히 즐겨한다.
18세기 문인 옥소 권집의 문집
대개 시골에서는 여름철에 농민들이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논을 맸다. 이것을 농악이라고 한다.
1890년 황현의 매천야록
야삼경에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크게 울리며 말하기를 모두 한 무리를 유지해 가락암으로 가서 화적을 물리치자고 했다.
1894년 충남 서천의 유생 최덕기가 쓴 일기
•대하(大蝦)는 일본어 '오오에비'(おおえび)의 일본식 한자 표기이므로 '왕새우'로 순화해야 한다.
거짓이다. 대하라는 단어 역시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당대 기록에 숱하게 나온다. 특산품으로 대하를 바쳤다는 공문서에 大蝦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서 각 지역의 특산품이 대하라고 소개하는 기록에서도 제대로 大蝦라고 표기하고 있다. 우선 일본어에서 'オオエビ'는 '쿠루마에비'(クルマエビ, 車海老)와 같은 말로 이는 '보리새우'에 해당하는 말이고, 새우를 가리킬 때도 '蝦' 대신 '海老'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대하(Fenneropenaeus chinensis )는 한국 서해, 중국 보하이(渤海), 동중국해 연안을 주요 서식지로 하는 새우로, 역설적이게도 일본어 정식 명칭도 コウライエビ(高麗海老), 즉 한국새우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도 한때 잡았으나 지금은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수입업체 이름에서 비롯된 '타이쇼에비'(大正海老)라는 말이 흔히 쓰인다.
•도합(都合)은 일본어 '쓰고우'(つごう)의 한자표기이므로 ‘합계’ 등으로 순화해야 한다.
도(都)가 ‘모두’이고 합(合)이 ‘합하다’이므로 ‘모두 합하여’라는 뜻의 지극히 정상적인 한자어다.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 일성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며 어떤 물품들의 총합을 표시할 때 사용했다. 그와는 별개로 일본어 '都合'에는 합친다는 뜻 외에도 형편, 융통하다 등의 뜻이 더 있으므로 주의하자. (언어간 동형이의 한자어 문서 참고.)
…貿銀之數四五百同, 都合二千六百餘同
…은을 무역할 대금 4, 5백 동 등 도합 2천 6백여 동에 달합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44권, 광해 10년 4월 12일 辛丑, 5번째기사
•명일(明日) 금일(今日) 작일(昨日) 익일(翌日)은 일본어 잔재다.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고려사절요, 그 외의 야사나 문집 등 고전문헌에서 용례를 풍부(...)하게 찾아 볼 수 있는 한문 유래 단어다. 원래 한중일 한자문화권에서 계속 써온 말이다. 그런데 최근 군대에서는 자기들이 일본 출신이 많으면서 일본에서 온 말이라며 없애라 하는 추세(...) 정확하게는 한문/문어투의 표현이며, 이런 단어들은 일본어 잔재여서라기보다는 같은 의미를 잘 전달하는 일상적인 단어(내일,오늘,어제,다음 날등)가 이미 있음에도 구태여 뉘앙스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입말과 괴리된 채 쓰여 의미전달에 오히려 지장[7]을 주기 때문에 쉽게 고쳐쓰자고 하는 게 맞다. 옛날에는 입말과 글말이 철저히 분리되어 글(한문)로 쓸 때는 今日이라고 쓰고 입으로는 오늘이라고 말했지만, 언문일치에 한글전용이 원칙인 현대 한국어에서는 오늘을 나타내는 단어로 그냥 오늘을 그대로 쓰면 되니까.
•민초(民草)는 백성을 뜻하는 일본식 한자어다.
조선시대 문집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 조선 초기의 학자인 권근이 개국공신 조준을 찬양한 시에 민초들이 단비를 바라듯 하였거니 천명이 돌아가는 것을 알았으므로 라는 표현이 나타나며[8], 성종 때의 학자인 이석형의 문집 '저헌문집'에도 民草已從風草偃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이 표현은 《논어》 〈안연편〉 19장에서 나온 군자(君子)[9]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小人)[10]의 덕은 풀과 같으니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쏠리게 마련이다.[11] 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이 구절은 '군자'의 통치를 받아 '교화되는 대상'으로써의 '민'을 속성을 규정지은 말로써, 여기의 '초'가 '민'과 묶여 '민초'라는 말로 파생된 것이다.[12]
•부락(部落)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단어다.
부락(部落)은 조선왕조실록에 422회 등장하는데, 거의가 ‘야인’, ‘평안도’, ‘왜인’ 등과 함께 등장한다. 즉 오랑캐(조선인 눈에)의 마을/촌락은 ‘부락’으로 지칭한다는 얘기. 중국 쪽에서도 비슷한데, 그네들 어휘 해석으로는 ‘원시사회에 혈연이 가까운 씨족 종족 등이 모여 형성된 집단’을 부락이라 칭한다. 결국 비슷한 의미이며 조선시대 사람들은 여진족이나 왜인들을 미개인(원시인)으로 간주했으므로 그네들 마을을 특히 ‘부락’으로 칭한 것이다. 일본은 특이하게 근대에 와서도 ‘부락’이라는 용어를 자국민 일부에게 사용했는데, 일본 국내에서 차별받는 천민들 마을을 특히 部落이라 불렀다. 이것이 역으로 한국으로 알려져, 부락이 일본어 잔재라고 말하는 선무당들이 생겼다. 다만, 만약에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조선인 마을만 특히 부락이라 불렀다면 그건 차별적 용어가 맞다. 허나, 部落이라는 어휘 자체는 한서(漢書)나 신당서(新唐書)에도 등장하는 만큼, 조선왕조실록 또한 물론이고, 굳이 일본어 잔재라는 평가는 무의미하다. 1920 ~ 1930년대에 조선의 문인들의 문예동인지(同人誌) 이름으로 부락이 들어간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요즘도 잘만 쓴다), 이들은 과연 조선식의 ‘오랑캐/미개인 모임’이라는 의미로 썼을까? 아니면 일본식의‘천민집단’이라는 의미로 썼을까? 이들은 소위 문인(文人)으로서, 글을 파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비하하는 그런 이름을? 답은 자명하다. 바로 ‘혈연이 가까운 씨족’을 상기하면,‘혈연에 비할 만큼 친밀한, 동인(同人)들의 모임’이라는 의미. 친밀감 일체감의 강조이다. 애초 일본에서도 부락이 차별 용어로 자리 잡게된 건 피차별부락민을 줄여서 부락민이라 부르면서 부터다. (아바타와 비슷한 경우.) 그 이전에는 한중일 다 집락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썼다.
•산보(散步)는 일본식 한자어다.
한자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던 단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시에서 숱하게 발견되는 산보라는 단어들이 명확한 증거가 된다. 정작 일제강점기 때 산보보다 더 고급스럽게 인식된 단어는 조깅이나 하이킹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외국어를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마 구한말 외국어 시험 때문에 자살까지 했던 사례가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자
•십분(十分)은 '아주 충분히'를 의미하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단어이므로 '충분'으로 순화하자.
이는 위의 식비, 도합과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보이는 단어일 뿐만 아니라, 일본어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다른 근거도 있다. 바로 강조 표현에 관한 것인데, 일본어에서도 같은 의미로 十分(じゅうぶん)이라는 표현이 있으나 강조해서 말하고자 할 때는 十二分(じゅうにぶん)이라는 말을 쓴다. 반면 한국어에선 十分의 강조 표현으로 백분(百分)/만분(萬分)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예: 네 심정은 백분 이해한다.) 상식적으로 이 말이 일제강점기 때 건너왔다고 가정해도, 두 언어에서 강조 표현이 분리될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확한 어원을 짚자면 할푼리가 일본에서부터 도입되기 전엔 분리호(分厘毫)를 썼다. 즉 십분은 100%, 십이분은 120%, 백분 천분은 1,000%하고 10,000%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 단어에 대한 오해는 十分이라는 한자에서 '아주 충분히'라는 의미를 도출하기는 어렵다는 점, '충분'에 쓰이는 '充'자 역시 일어 음독으로 'じゅう'이라는 점 때문에, 充分과 十分이 일어에서만 같이 쓰이는 것으로 착각한 것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帝嘗求十分純潔光姸好細白紙于我…
일찍이 황제가 십분(十分) 순결(純潔)하고 광채가 좋으며 가는 백지[細白紙]를 우리에게 요구하였으므로…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11월 12일 丙辰, 1번째기사
•애매하다(曖昧-)는 일본식 한자어이니 '모호하다'(模糊-)라고 써야한다.
애매라는 단어가 일본어에서 왔다는 설이 있으며 근거로 발음의 유사성을 들고 있는데 애매하다는 말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모두 사용되며 같은 한자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음이 전부 비슷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한자어인 경우 일본어와 한국어의 발음이 유사한 경우는 엄청나게 많다. '애매(曖昧)'와 순우리말 '애매'가 있으며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한자어 '애매(曖昧)'는 희미하여 확실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순우리말 '애매'는 '애꿎다, 억울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애초에 '애매(曖昧)'와 '모호(模糊)'는 둘 다 원래 아주 작은 수를 가리키는 불교 용어다. 오히려 '애매'에 '모호'를 붙여서 쓴 '애매모호'가 일본식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흔치 않은 표현이다. 오히려 한국어로 작성한 문장에서 압도적으로 애매모호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 중 논란이 되는 것은 한자어 '애매(曖昧)'인데, 일본에서는 애매모호도 모호도 자주 쓰지 않으니, 자연히 애매(曖昧)라는 단어가 사용 빈도가 높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일본식 표현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졌을 법하지만, 이건 아래 예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록에서도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前日上言聽納之說, 獲蒙兪允。 雖臣等識淺才疎, 豈敢以曖昧之說, 仰干聰聽?
전일에 상언(上言)한 바, 간언(諫言)을 들어주어야 된다는 설(說)은 윤허(允許)를 얻었는데, 비록 신 등이 견식이 얕고 재주가 쓸모없지마는, 어찌 감히 애매(曖昧)한 말로써 우러러 임금에게 듣기를 요구하겠습니까?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14일 辛卯, 1번째기사
여담으로 한자어 '애매'와 '모호'는 뉘앙스가 약간 다르다. 애매는 '단어의 의미'가 불분명한 것을 의미하며[13], 모호는 '단어의 기준'이 불분명한 것을 의미한다.[14]
•야채(野菜)는 일본어에서 온 말이므로 '채소'(菜蔬)를 사용해야 한다.
근거없는 루머다. 해당 문서 참조.[15]
•에누리란 말도 일본이 만들었다.
옛날부터 잘만 쓰이던 순우리말이다. 사타구니, 소쿠리, 야코, 뺑소니, (후술할) 토시 등도 비슷한 경우인데, 받침 없는 음절이 여럿 나오다 보니 발음이 일본어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인지 괜한 의심을 사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에누리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널리 쓰이고 있는 할인(割引)이 순일본말에서 온 단어이다(割り引き:わりびき). 일본식 한자어 참조.
•오뎅은 '어묵'으로 순화해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얽혀 있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생선살을 으깨어 이것저것을 넣고 익혀서 응고시킨 음식’을 오뎅에서 어묵으로 순화하는 문제다. 이 경우에는 순화하는 것이 맞다. 왜냐면 일본어에서 ‘오뎅’은 요리 이름이지 요리 재료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어 ‘오뎅’은 어묵, 묵, 유부, 곤약 등을 끓는 장국에 넣어 익힌 요리 이름이고, 어묵은 일본어로 ‘스리미(すり身)’ 또는 가마보코(かまぼこ)이다. 한국어에서 오뎅은 의미가 변질되어 어묵을 가리키지 탕을 가리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음식점 메뉴의 안주 이름이 ‘오뎅탕’이며, “길거리 분식점에서 오뎅을 두 꼬치 먹었다.”라고 하는 등이다. 또, 부산오뎅은 부산에서 만드는 어묵이지, 부산식 탕요리 이름이 아니다. 이러한 오뎅은 어묵으로 순화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고, 순화함이 바람직하다.
두 번째로 일본의 탕요리인 ‘오뎅’을 어묵탕으로 순화하는 문제이다. 오뎅은 '어묵을 비롯해 여러가지 재료를 넣고 끓인 요리의 총칭'을 말하는 것으로서, 실제로 어묵이 들어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하므로 어묵탕과 1:1로 대응하기 어렵다. 또 일본 사람들이 먹는 일본의 요리 이름을 우리가 순화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오뎅’이라는 일본 고유요리 이름을 인정하면 되고, 아무 문제 없다. 같은 맥락에서 소설가 박계주가 이런식으로 일본 고유어를 한국어로 순화하는 운동을 비판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 고유요리 다쿠앙을 단무지로, 우동을 가락국수로 순화하는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서상 김치를 기무치로 발음만 바꿔도, 반발심리를 표출하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다. (물론 이건 김치가 외국에서 기무치로 통용되는 것에 대한 경각심에 의해 시작된 심리라 맥락이 다르긴 하다. 이 때문에 일본과 문화싸움을 하기도 하였고.) 이건 흡사 스팸을 부대찌개라 순화하는 격이다.
•오케바리는 일본어로 '결정'을 뜻하는 단어 '오키마리'(お決まり)에서 유래했다.
'오케바리'의 어원은 아직까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단지 '단어도 비슷하고 뜻도 비슷하니까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이다. 'OK. Buddy.'라는 영어 문장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참고
•왕녀(王女)는 일본에서 만든 정체불명의 한자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올 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 진수의 삼국지 등에도 많이 나오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왕녀나 공주란 한자어 대신 '히메(姬)'라는 고유어를 더 자주 쓴다. 원래 천황제이기 때문에 황녀라면 몰라도 왕(王)이 들어가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점호(點呼)는 일제 군사용어다.
일제시대 군사용어라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 허봉(허균의 형)의 문집 하곡집에서 이미 쓰였다. 그 밖에 일제 군사용어는 조선시대부터 있었다는 글
•정상(頂上)은 산꼭대기라는 의미의 일본식 한자어다.
고려 말엽부터 쓰인 한자어다. 다만 산꼭대기를 뜻하는 순우리말로 '고스락'이라는 말이 있긴 하다.
•토시는 일본식 표현으로 '덧소매'로 순화해야 한다.
완전히 잘못된 지식. 토시는 순우리말이다. 덧소매 형태의 의복을 가리키는 일본어 중에 토시라는 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