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인간의 못된 습성은 공이로 찧어도 고쳐지지 않고,
그것을 보는 저 자신도 도토리 키재기 하는 자인지라 그저 한숨만 나옵니다.
이 부정성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덮어 정결케 하옵소서.
에베소서 묵상을 시작합니다.
말씀의 은혜로 저의 영을 회복될 줄 믿고 나아갑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 주해)
1~2절 :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을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임을 밝힌다.
바울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다. 오히려 예수를 이단의 괴수로 보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 일을 열심히 한 사람이다. 그가 부름을 받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를 뜻한다.
바울은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이라고 따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았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1절, 새번역)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주시는 분의 일방적인 긍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은혜의 결과가 평강이다. 그러므로 평강은 ‘안락한 삶’이 아니라, 어떠한 환난과 핍박이 온다고 할지라도 평강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3~14절 : 바울의 터져 나오는 찬양의 내용이 단숨에 이어진다.
3~6절---인간이 기대하는 땅의 복이 아니라 신령한 복을 말씀한다.
그 복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것으로서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영적 복이다.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하늘에 속한 복에는 관심도 없이 거저 썩어지고 더럽혀지고 멸망할 땅의 것들만 복이라고 여기고 달려온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의 언약 때문에 이미 죽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이다. 그들로 땅에서 분리하시고 결국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만들어내시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땅의 것을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 마음을 두는 자가 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7~10절---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속량 곧 죄 사함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 영광스러운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평생을 통하여 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의 피로 인하여 구속을 받은 이 죄사함의 은혜가 살아가면서 겪는 그렇게 사소한 일들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직 은혜를 받지 못하였든지, 아니면 은혜를 받았지만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에 빠져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셔야 한다.
그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부어주시지 않으면 그 뜻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그 비밀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는 것이다. 이 통일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다시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경륜으로 이루어진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을 따라 이 역사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의 목적에 맞게 이루어 가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 바로 모든 때가 찬 하나님의 경륜인 것이다.
11~14절---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이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된다.
11~12절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새번역)
13~14절은 이방인의 구원을 말한다. 여기서 ‘너희’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새번역)
‘성령의 인치심’(13절)의 증거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에 확정이 되면서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하나님을 우리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증거, 성령으로 인치심의 증거인 것이다.
(나의 묵상)
바울 사도의 터져 나오는 찬송을 따라 나의 찬송도 함께 터져 나온다.
물론 그의 믿음의 분량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나의 수준이니 그 찬송의 크기와 깊이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보잘것없는 찬송을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음에 감사가 넘친다.
나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주어진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3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7절)
모든 것이 예수님 안이다. 그리스도 안이 아닌 것이 없다.
이 모든 것에 아멘이 되고 또 감사를 드리게 된 이유는 이것들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임을 알았기 때문이요, 또한 그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알기 전, 생명의 삶을 살기 전에는, 정말 땅의 복만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인생이었다. 교회를 다니기 전이나 교회를 다닌 후나 내 인생의 목표는 똑같았다. 무슨 엄청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직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목표였다.
그러다가 교회를 다니게 되니 그동안 막연하게 소원했던 대상에 예수님 이름을 붙이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구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더 신이 난 것이다.
그렇게 30년이 넘도록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을 하던 나를 주님께서 때가 되어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생명의 삶을 살게 하셔서 하늘의 속한 신령한 복을 알고 누리게 하신 것이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성경적 언어와 풍성한 내용으로, 그리고 엄청난 분량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예수님을 알게 된 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영생이라고 하셨으니(요17:3), 영생을 알고 누리는 것이 하늘의 신령한 복을 알고 누리는 것이다.
이것을 알았으니 세상의 복, 땅의 복을 구할 것이 없겠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생명의 나라가 아닌가?
이것을 궁구하고, 이 진리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그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하늘의 신령한 복을 구하면서도 은근슬쩍 땅의 기름진 복을 구하는 숟가락을 기도의 상에 얹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내 마음이었다. 언제였던가....남편이 하도 하늘의 신령한 복만을 구하는 기도를 하길래, ‘땅의 기름진 복도 좀 구하지....’ 하며 웃었던 기억도 있다.)
어제 청년부 설교를 하였다.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이 시간을 위해 나는 따로 설교 준비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님과 교제한 내용 중에서 청년들에게 선포하라고 주신 말씀이 있기를 내내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준비라면 준비다.
내가 전할 내용은 무궁무진하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매일 내게 주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말하고 또 말해도 끝이 없기 때문이다.
어제는 잠언 8장의 선재하신 그리스도, 창조자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지혜의 말씀을 전하였다.
나는 청년들이 어떤 설교를 기다리는지 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고민과 괴로움을 위로해주고, 비전을 가지고 다시 한번 일어서 보자는 식의 말씀을 기다리는 영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설교 중에 ‘예수님과 십자가가 없는 설교는 똥이다’라고까지 말하였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모든 그럴 듯한 위로도 인간의 말일 뿐이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젊은이의 꿈과 비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문득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떤 목사님이 주일 강단에 오르기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선포하니 그 말씀이 너무지겨워 듣다 듣다 한 사람이 일어나 강단을 향해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다음 주, 혼이 났을 목사를 생각하며 ‘이제는 그 따위 설교는 그만하겠지’ 하고 갔더니 목사님이 그 강단에 방탄막을 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했다는 이야기이다.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 심정이 꼭 그와 같기 때문이다.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그 세계, 인간을 향한 창세전 하나님의 뜻(영생), 그것을 위해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심, 아들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과 나타나심, 주님께 연합된 성도들,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해 성령을 보내심,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주님.....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은 자가 된 나도 바울 사도와 같이 이 모든 은혜의 말씀에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창세전에 저를 택하여 주시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주님의 십자가로 그 일을 이루어내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저로 이 은혜를 알게 하시니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은 자가 되어 최상의 노래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묵상하기 전 어지럽던 마음들이 다 사소한 것들이 되어 사라집니다.
오직 터져 나오는 찬송을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저는 성령님 아니시면
또다시 더러운 것과 악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오니
불쌍히 여기시어 항상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