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카페 프로필 이미지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거대한기지개
    2. ywkim-3
    3. 근구수
    4. 닉엄슴
    5. 림림
    1. 무무동산
    2. 예맥연구소
    3. 별둘
    4. 그사세
    5. 춘수
 
 
카페 게시글
동아시아 역사 토론장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조선 중국이 실패한 이유는
선구자 추천 0 조회 1,181 11.06.23 09:00 댓글 40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11.06.23 10:53

    첫댓글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근대 이전의 중국과 조선은 완비된 중앙집권체제였습니다. 전국의 토지는 국가(왕)의 소유였고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했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북한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체제였다고 봅니다. 그런 체제하에서는 경제성장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의 막부(군사정권)체제는 여러 면에서 평가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그 체제는 이미 자본주의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에도시대의 쇼군 중 쌀 쇼군이 있는데 그는 쌀 생산이 너무 많아 쌀 값이 폭락하여 쌀로 봉급을 받는 무사들이 가난해지기 때문에 쌀값 폭락을 막느라고 골머리를 썩혔습니다. 이 문제에서도 그들은 자본주의적 정책을 씁니다.

  • 11.06.24 08:40

    에도시대에 일본에는 출판사가 난립하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서 생활하는 문학자도 나옵니다. 중국, 조선.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통해 자본이 축적됩니다. 조선에서 배운 자기기술을 활용하여 만든 그들의 자기는 유럽시장을 석권합니다. 조선은 기껏해야 중국. 일본과의 사절교환을 통한 공적 무역이 전부였습니다. 자본을 축적한 일본의 자본가들은 상품의 주문생산 등을 하게 되고 이것이 가내수공업, 공장제수공업으로 발전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체제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양식 초등학교를 세웠지만 그것은 이미 있던 '데라코야'라는 대중교육기관을 전환한 것뿐입니다.

  • 11.06.23 11:50

    데라코야의 교육과정은 한국 서당의 교육과정보다 더 실용적이었습니다. 서당에서는 주로 유학 입문서를 배웠지만, 데라코야에서는 생활에서 쓸 수 있는 3R's(읽기, 쓰기, 셈하기), 지리, 인명 등을 배웠습니다. 데라코야의 보급 덕에 일본은 1870년대 즈음 세계 최고의 문해율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일본이 근대화를 하기 위해 필요한 근대 시민을 길러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 11.06.23 11:37

    막부는 지방분권체제였습니다. 중앙에 쇼군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인민을 다스린 것은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었습니다. 쇼군도 다이묘 중의 하나입니다. 에도시대에는 300여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일본의 모든 관직은 세습제였습니다. 다이묘도 세습했습니다. 조선의 관리는 중앙정부의 파견관이기 때문에 임기 중 최대한 착취를 하고 떠납니다. 일본의 다이묘는 상황이 다릅니다. 내 나라 내 인민이기 때문에 그들이 부유해지기를 바라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폅니다. 또 그들은 이웃지방과 항상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부국강병책을 채용합니다. 낙오되면 이웃에게 먹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경쟁체제에 있었다고 봅니다.

  • 11.06.23 11:41

    중앙집권체제와 지방분권체제의 차이가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 정도를 결정했다는 견해도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이에 기반하여 독점과 경쟁의 차이를 중시하여 집권적이었던 중국에 비해 분권적이었던 - 여러 나라가 경쟁하였던 - 유럽 쪽이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이유를 대는 견해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 하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경우,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국왕과 파리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전통이 강한 나라이고 독일은 19세기에야 통일을 겨우 이룰 정도로 지방분권적 전통이 강한 나라입니다. 그 성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집니다. 그럼 위 논리에 따를 경우 독일이 프랑스보다 먼저 경제성장이

  • 11.06.23 11:41

    나 근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했을까요? 실제 결과는 그 반대였습니다.

  • 11.06.23 21:32

    일리 있는 지적이십니다. 중앙집권적 국민국가 체제가 확고해지는 19~20세기야말로 근대화가 극대화된 시대였으니까요(지금도 더욱 가파르게 가속화되고 있고..). 근대화 문제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선과 중국이 자신들의 체제가 선진적이라 믿고 변화를 거부했다는 선구자님의 지적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 11.06.23 11:56

    일본인들의 단결도 중요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후 세이난 전쟁 같이 일부 다툼도 있었습니다만, 만약 사카모토 료마 같은 인물이 없어서 사쓰마와 조슈번이 막부 타도를 위해 단결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결코 근대화에 성공할 수 없었을 겁니다.

  • 11.06.23 12:21

    메이지유신 직전 일본에는 2, 3만개의 데라코야가 있어 실용적인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일본사회가 그런 교육을 받은 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즉 상공업이 발달하여 그런 사람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세기 포루트갈과 네덜란드는 인도와의 무역에서 큰 돈을 법니다. 이윽고 그들은 중국에까지 진출합니다. 폭풍을 만난 그들의 배 한척이 우연히 남규슈에 표착하였는데 거기에 조총을 갖고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지방의 다이묘는 그 조총을 몇 억원이라는 거금으로 매입합니다. 강제 탈취가 아닙니다. 그 후 수년만에 일본은 조총을 양산하게 됩니다. 당시 그들의 금속공업기술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 11.06.23 22:45

    놀랍군요. 2,3만개라, 거의 준-초등국민교육 시스템이 돌아간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옛날 약소국이던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했던 이유를 한 역사학자가 '프로이센의 승리는 프로이센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결정되었다'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참고로 프로이센은 개신교의 영향으로 일찍이 국가에서 초등의무교육을 시행하였습니다. 혹시 말씀하신 데라코야와 관련된 내용의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데라코야와 관련된 책을 읽으신 거면 책을 말씀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 11.06.23 22:54

    에도 시대 말기의 정치가, 학자 사쿠마 쇼잔은 어렸을 시절부터 수학에 관심이 많았고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귀거래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데라코야에서 수학을 배웠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수학에 능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온 서양의 학문을 잘 흡수하고 기술 개발 역시 잘 할 수 있었습니다. 1850년대에 이미 그는 대포 개량, 지진예측기 제작에 성공했고, 종두법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에는 개항 이전부터 서양 학문을 흡수할 준비가 조선이나 중국보다는 더 잘 돼있었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데라코야의 힘이 컸겠고요.

  • 11.06.24 07:37

    포루트갈과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이 매우 매력적인 시장임을 알고 피나는 경쟁을 벌입니다. 결국 네덜란드가 승리하여 대일본무역을 독점하게 됩니다만 그들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조선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조선에 가 봐야 아무 것도 매입할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도시대 초기에 일본에는 무명이 없었습니다. 대 조선무역을 독점한 대마도주 宗氏는 무명을 수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대마도인들을 먹여 살립니다. 일본은 의류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무명의 수요는 많았다고 합니다. 월남, 필리핀 등 동남아에는 에도시대 초기에 형성된 일본인 마을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해외무역이 왕성했음을 말해줍니다.

  • 11.06.24 11:39

    베트남 '호이안'에 옛 일본인 거주지가 있습니다. 5년 전에 직접 방문했었는데 비행기로도 5시간 넘게 와야하는 베트남 중부 지역에 이미 17C부터 무역 기지를 만들어놓고 일본과 베트남을 왕래하면서 무역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더군요. 기록상 최초로 베트남을 방문한 조선 사람은 조완벽인데, 그는 왜란 때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가 가고시마에서 베트남과 무역을 하는 무역상에게 끌려 얼떨결에 베트남에 가게됐습니다. 베트남에 대해 잘 알지못했던 당시 조선과 달리 일본 사람들은 베트남과도 아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미 17C 무렵부터 국제 교역 측면에서 조선보다 한참 앞서 있었습니다. 나가사키에서 포르

  • 11.06.23 23:08

    투갈, 네덜란드와 무역하면서 난학을 발전시켜 일본은 서양 학문의 흡수 역시 조선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이런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조선과 일본의 지식인층이 갖고 있던 철학 사상의 차이가 큰 원인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조선은 리와 기 중 리를 중시하는 '리 중심'(퇴계의 사상)의 철학 사조가 강한 나라였습니다. 물론 율곡처럼 '기'를 중시하는 학파도 있었지만 당시 조선 지식인의 다수는 명분과 실리, 높은 도덕성, 고귀한 정신을 중시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성리학을 성스러운 학문聖學이라고까지 칭해 다른 사조에 대해서는 경시하는 시각도 존재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나카에 도주를 시작으로 성리학보다는 양지, 양

  • 11.06.23 23:15

    능의 실천, 실용성, 사회 개혁(정신 역시 물질 역시 부정하지는 않는)을 강조하는 일본 양명학 사조가 성행했습니다. 여기에 조선 성리학의 영향으로 생긴 후지와라 세이카의 일본 성리학파도 있었지만 일본에는 이런 리, 기의 사조가 조선보다는 훨씬 열린 상태로 공존했고 여기에 서양, 동남아 등 외부 세력과의 교력이 많았기에 기 중심의 실용적 사고가 강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것이 일본의 기 우위의 사상적 풍토가 사상 조선의 리 중심 사상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인의 다소 무모하기까지 한 '정신력이 강하면 된다,' '긍정적 사고는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사고, 정신 '리' 우위의 사고가 폐허가 됐

  • 11.06.24 11:39

    던 한국을 크게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했다고 생각됩니다.(사족으로 북한에서 내건 구호들의 내용 역시 굉장히 정신력을 강조하는 게 많은데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 '가는 길 힘들어도 웃으면서 가자'....이런 것도 굳이 연관짓자면 한국의 전통적인 '리 중심 사고'와 관련지을 수 있지 않을런지...) 일본은 지나치게 실용성, 절대 도덕성보다는 상대성을 -이런 사고는 분명 기 위주의 것이고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보다 강한 것 같습니다 -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회 도덕의 붕괴, 메뉴얼 사회, 개인주의 풍조, 지나친 성적 문란 문제를 야기하는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가 생각이 듭니다. 물론 분명한 근거가 없는 개인적 짐작

  • 11.06.23 23:28

    입니다;;

  • 11.06.23 20:23

    예전에 도올선생께서 tv강의에서 말씀하셨던 '문화적 차이'가 아닐지요. 일본 문화에서 특징적인 우월한 존재에 대한 인정과 더불어 경세치용, 이용후생적인 사회풍토가 더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로 사츠에이 전쟁이후 양이가 수그러들고 개화로 급변된 점처럼 역사상 처음 겪은 절대적 우월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쉽게 동화된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고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모습도 비슷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봉건적 사회구조도 한 몫했다고 봅니다. 양무운동도 결국 이홍장이나 서태후같은 막강한 중앙권력 앞에 부분적인 근대화(특히 북양군 같은 군사조직이라던지 군수산업에)만을 이룬 것에 반해(중체서용)

  • 11.06.23 20:24

    탈아입구처럼 극단적인 개혁을 감내할 수 있는 일본의 문화적 성향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조선 역시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여지고, 오히려 중국보다 더한 악조건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 11.06.24 07:04

    寺子屋에 관하여 아마도 중앙공론사에서 나온 <일본의 역사>(총 15권)에서 읽은 것 같습니다. 각 시대별 전문학자가 집필한 책입니다. 그런데 무케길잔님의 질문을 받고 구글저팬을 검색해보니 거기에는 데라코야의 수가 15600개라고 나와있네요. 이 숫자가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에도시대 무사계급의 자제를 위한 학교인 藩校는 관립이었지만 서민의 자제 교육을 위한 데라코야는 사립이었습니다. 봄에는 소풍을 가고 칠월칠석에는 학부형의 참관하에 습자대회를 열었다는군요. 농촌의 데라코야는 농한기인 늦가을에 열려 쑥의 싹이 돋아나는 초봄에 학기가 끝나므로 선생을 '쑥떡훈장'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 11.06.24 15:16

    17C 무렵 절[寺]에서 사무라이와 측근의 자녀들을 가르쳤는데, 이런 아이를 데라코[寺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에 절이 아닌 정식 학교를 지어 교육을 시작했는데 이름은 그대로 남아 데라코를 가르치는 학교라는 뜻에서 데라코야[寺子屋]가 됐다고 합니다. 놀라운 건 한국 서당에서 남자 아이만 거의 수학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데라코야에는 여자 아이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에도 시대 때도 여성의 문해율이 전체 일본 여성의 20%나 됐다고 하는군요. 일본이 근대화하는 데는 데라코야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일본 여성들의 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양성 평등 교육이 필요한 근거도 될 수도 있겠습니다.

  • 11.06.24 07:44

    조선은 특히 인조반정 이후 성리학의 절대화가 이루어지고 성리학이 지배계층의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됨으로써 죽어버립니다. 성리학은 과거시험과목이 되어 암기위주가 되고 정형화되고 지배계층에서 생각하고 있는 성리학 외에는 전부 이단으로 취급했으므로 발전의 여지가 없었다고 봅니다. 때문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극히 좁은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들은 늘 일본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고 통신사 파견의 목적 중 하나가 일본의 실정을 파악하는 것이었지만 통신사는 돌아와서 그들이 번영하는 것은 서민착취의 결과라고 보고합니다. 성리학의 잣대로밖에 상대방을 평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리학 우위를 자랑합니다.

  • 11.06.24 07:38

    무케길잔님과 애도영원님은 정신적, 문화적 차이를 지적하셨습니다만, 저는 경제적, 물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古代 말기부터 사유재산을 인정하였으며 그 결과 대지주들이 탄생했습니다. 무사의 전신은 지주입니다. 大名은 대지주라는 뜻입니다. 일본의 역사에는 유난히 소송사건이 많은데 대부분 토지소유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원인도 히데요시가 大名들에게 나누어 줄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그들은 大名이 지배하는 수백의 소국으로 나뉘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렸습니다. 발전이 늦으면 먹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사회였습니다. 자본주의사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 11.06.24 08:55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경쟁이 시장경쟁력을 높여 경제를 성장시킨다(나아가 근대화를 촉진한다)는 주장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과연 어땠을까요?
    근대 초기에 유럽 각 국의 경제발전이 국내에 수백, 수천개의 조그만 기업들이 약육강식의 극단적 생존경쟁을 하면서 아옹다옹하는 와중(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쟁시장)에 이루어졌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사실상의 독과점(독과점시장)을 전제로 발전했다고 보십니까?
    후발 개도국이라는 독일과 일본의 19세기 비약적 발전이 기업간 치열한 경쟁에 의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정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큼직큼직한 기업들이 덜 경쟁하면서 나타났을까요?
    심지어 후후발 개도국이라는

  • 11.06.24 08:58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시대의 비약적 경제성장이 설마하니 각 기업들이 약육강식의 무차별적 경쟁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진 않으시겠지요?
    경제학계 내부에서조차 작은 단위들의 무수한 경쟁이 성장을 촉발시킨다는 주장과 큰 단위간의 덜한 경쟁이 성장을 촉발시킨다는 주장 간에 완전한 합의가 없는 상황입니다. 한 예로 '창조적 파괴' 등을 주장한 슘페터 같은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너무 작은 단위들간의 극단적 경쟁상황(완전경쟁시장)에서는 기업들이 하루하루 생존에 급급할 뿐 R&D 에 투자할 여력이 적어 성장이 크게 나타나기 어렵고, 오히려 독과점시장에서 큰 이윤을 남겨 먹는 기업이 있어야 그들이 새로운 투자를 할 여력이 많아

  • 11.06.24 09:01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도체 사업 같은 경우에 삼성전자 급 정도 되어야 팍팍 투자를 해서 자신의 경쟁력을 유지하지 하이닉스 정도만 되어도 그만한 투자여력이 없고, 그보다 더 작은 기업들은 투자할 여력은 고사하고 생존 자체를 걱정하는 상황이 슘페터의 지적과 대략 부합할 겁니다.)
    이런 문제의식이 장하준 교수가 <사다리 걷어차기> 등에서 비판했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대략 부합하는 면이 있을 겁니다.

  • 11.06.24 09:40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에서 대다수가 몰락하고 소수만이 살아남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이지유신은 미쓰이 등 소수의 대자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에도시대의 다이묘들은 만성 재정적자에 허덕였습니다. 그들은 가을 추수를 담보로 대자본가로부터 거금을 빌렸습니다. 관리들의 봉급을 지불해야 하니까요. 대자본가도 설마 번이 망하지는 않겠지 하고 거금을 빌려주었습니다. 막부말기에는 대부분의 번들이 이런 상황에 처했습니다. 조슈번, 사쯔마번이 메이지유신을 주도합니다만 이들은 개혁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막부말기에 일본의 번들은 자동적으로 멸망하게 되어있었습니다.

  • 11.06.24 10:05

    번(지방의 소국)이 재정적자로 허덕이니까 백성들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번으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인심은 흉흉해집니다. 다이묘들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천황파(사쯔마. 조슈번)에게 백기를 듭니다. 막부는 스스로 멸망했습니다.
    하여튼 일본은 사유재산인정, 무한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원리를 일찍부터 도입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반면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사회로, 지금의 북한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정체된 사회였다고 봅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배경에는 그들의 산업발전과 자본축적이 있었다고 봅니다

  • 11.06.24 11:17

    분열로 인한 무한경쟁상태가 반드시 성장과 번영을 가져온다면, 분열 사례가 잦았던 중국의 경우 분열시기에 통일시기보다 항상 더 번영했다는 결론이 나와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러했을까요? <삼국지연의> 의 배경이 된 후한 말기의 분열 및 극단적 경쟁시대에 중국이 더 번영했을까요? 아니면 대제국 한, 당, 송(남송 포함), 원, 청 등의 시기에 더 번영했을까요? (오늘날 중국에서는 종종 중국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시기로 '당' 을 꼽습니다. 성당(盛唐) 이 북경 올림픽 구호에 등장할 정도입니다.)
    통일국가가 형성되어 지방세력간의 무한경쟁이 사라지는 상황이 번영에 절대 불리한 게 아닙니다.

  • 11.06.24 11:15

    기본적으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시장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데에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합니다. 독일 경제학자 리스트가 독일의 번영을 위해 분열된 독일 소국들의 경쟁을 주장한 게 아니라 독일 소국들을 묶어 경제적으로 시장통합을 하여 국가간 경쟁이 억제되는 것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제국들이 왜 EU 라는 통합을 하고, 유럽 소국들이 왜 EU 에 가입하지 못해 안달할까요? 더 큰 통합체에 가입함으로써 국가간 경쟁이 억제되는 것이 번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 11.06.24 11:22

    통일국가냐, 분열이냐/ 중앙집권이냐, 지방분권이냐는 경제적 번영과 산업발전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가 아닙니다. 양쪽 어떤 상황에서도 번영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통일국가 독일도 번영하지만, 통일되지 못하고 분열된 베네룩스 3국이나 스칸디나비아 3국 역시 번영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문화' 라고 봅니다. 상공업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다면 그 사회는 번영할 수 있고 상공업을 경시하는 문화가 있다면 그 사회는 경제적으로 번영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이 문화는 정부의 정책기조에 의해서도 장기적으로 변화할 수 있겠지요.

  • 작성자 11.06.24 11:24

    그러나 유념하실 사항은 에도시대의 경우 후반기에 경제적으로 침체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도시대중에서도 전반기가 경제적으로 번성기라고 볼수있죠. 그러니 에도시대 경제적 분위기를 일본 근대화성공과 연결짓는다라는 것 자체가 명백한 오류입니다.

  • 11.06.24 14:53

    에도말기에 자본가들은 공장제수공업에 자본을 투하하며 이 공장은 농촌지역에까지 확대됩니다. 시모노세키의 해전에서 서양연합함대에 참패를 당한 조슈번은 서양무기의 위력을 실감하고 영국과 화해하고 그들의 신식무기를 구매하여 무장합니다. 사쯔마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이지유신 때 그들은 고액의 연봉을 주고 서양의 지식인을 교사로, 고문으로 초빙합니다. 또 유신으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과거 지배계급 무사들에게도 연봉을 지급하여 그들의 불만을 달랩니다. 난학을 통하여 그들은 이미 서양학문이나 의학 등에도 기초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울러져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 작성자 11.06.25 10:27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일본전체가 아닌 일부 부류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명치유신으로의 정치개혁에 실패했다면 에도말기의 자본주의활성화를 부각시킬수 있었슬까요?

  • 11.06.25 12:08

    선구자님의 지적대로 에도말기에 일본경제는 침체되어있었습니다. 그 결과 민중들은 생활이 어려워졌지만 역으로 대지주는 늘어나고 대자본가는 농촌지역까지 침투하여 공장을 짓습니다. 한편 대부분의 번들은 파산 일보직전으로 몰렸습니다. 민중들은 번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번주(다이묘)들은 더이상 버틸 힘이 없어 백기를 듭니다. 막부는 스스로 무너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지주나 대자본가는 모두 유신파를 지지했으며 필요한 자금지원을 합니다. 그 후 이들은 정부로부터 갖가지 보호와 특혜를 받으며 산업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합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몇년 후에는 세계 5대 강국으로 부상합니다.

  • 11.06.25 12:05

    저는 그들이 이미 막부말기에 산업화, 민중의 교육, 서양과학기술에 대한 이해, 자본축적, 기술축적 등 근대화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는 그들이 일찍부터 사유재산인정 및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적 체제 하에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 11.07.29 01:07

    이야기를 조금 달리해서 조선이 어떻게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3가지를 반드시 짚고 싶은데.
    우선
    1. 죽일 놈의 [사대주의]
    조선은 자신을 소중국이라 생각할 만큼 중국에 사대가 강한 나라였습니다. 또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란 의식이 있었고, 과거부터 너무도 폐쇄된 국가였기에 안목이 부족했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또한 100년에 걸쳐 근대화가 이루어진 서양에 비해, 고집만 부리다 현실을 깨달았고, 이후의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2. 명분론적 외교관
    실리를 추구하지 못하고, 유교를 덕목으로 삼은 탓인지 너무도 명분에만 집착하였습니다.
    예로 당시 조선의 입장에선 나름 최선의 길이기도 했던

  • 11.07.29 01:15

    중립외교노선을 두고 과거 5만 군사를 내주고, 임진년 전쟁에 나라를 구해진 은인을 저버린다하여 신하들이 폐위시켰죠. 명이 기우니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한다라는 나름대로의 대안을 모색할 수도 있었는데 당시 주요 세력이었던 서인들은 이를 두고 오랑캐와의 타협이라며 무력 반정을 일으켰죠. 이 사건을 보더라도 나라의 주요 세력의 안목과 사고의 유연성의 한계가 절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라 여겨집니다.
    3. 유교 국가의 한계
    유교는 기본적으로 왕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를 기본으로 하죠. 물질이 아닌 정신을 표방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래 아시아적 가치가 정신에 주를 두고 있긴 하지만요.
    사실 유교쪽이 너무도 결정적

  • 11.07.29 01:19

    인 것이 유교를 지나치게 숭상하다 보면 사고의 유연성을 잃기 쉽상입니다. 도리와 덕목에만 치중하여 실리를 추구하지 못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다소 이분법적 사고에 휘둘려지기 쉽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약간 옵션을 두어서
    사실상 아시아 제1의 국가로써, 오히려 비슷한 국토와 항상 서로 견제를 해오던 중세 유럽과 달리, 홀로 대륙의 1인자였으며, 국가의 콧대가 너무도 높았기에 그에 따라 사고의 유연성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은 아니더라도 동서남북이 전부 사실상 오랑캐였죠.
    이들 또한 유교에 찌든 사회였기에 개화의 필요성은 인정했을지 몰라도 사고가 유교에 붙잡혀 있었기에 이들의 개화는 반토막

  • 11.07.29 01:28

    개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를 두고 싶은게 당시의 한중일 3국의 형세를 두고 청의 리홍장, 조선의 흥선대원군,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비교하는데, 일찍이 유럽 유학을 통해 세계 정세를 빠르게 터득하고, 다소 잔인하기까지한 이토의 기질이 당대 가장 빛을 바랬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원군은 다들 아실 것이고, 리홍장 같은 경우는 하직 당시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난 낡은 것을 고칠 줄 아나, 새것을 창안해내기엔 부족한 사람이었다.."

    왜란 속에 이순신이란 불세출의 영웅이 나라를 구했듯 당시의 조선, 청에 난세의 영웅이 될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도 아쉽내요. 그 하나로 모든게 뒤바뀌진 못하겠지만...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