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새마을 운동은 한국의 독특한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며, 이의 실천을 통해 국가발전을 꾀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1970년 4월 22일 당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 는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운동을 제창하였는데, 같은 해 5월 6일 구체적인 추진방안이 마련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71년부터 전국적 범위로 확대된 이 운동은 생활태도 혁신과 환경개선 및 소득증대를 통한 낙후된 농촌의 근대화를 취지로 하여 정부주도로 이루어졌다.
농어촌 경정비사업을 첫 단계로 한 농어촌의 새마을운동은 지붕개량·주택개량·농로개설·마을도로확충·하천정비·전기화사업 등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면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의 동(洞)·이(里) 에 시멘트를 무상지급함으로써 각 마을의 환경개선사업을 추진하도록 하여, 볏짚지붕의 슬레이트 대체, 담장보수, 마을 진입로 정비 등이 효과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72년부터 주민지도자를 발굴, 훈련시킴으로써 낙후된 주민의 정신을 계도시켜 나갔고, 농어가의 소득증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도시 도시새마을운동은 10대 구심사업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법질서의 준수, 건전소비풍토 조성, 도시녹화, 뒷골목과 가로 정비,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 생활오물분리수거, 시장새마을운동 전개, 도시환경개선, 낙후지역개발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도시새마을운동 추진은 지역·부녀·공장·학교새마을운동 등으로 조직화되면서 점차 정부 주도를 탈피하였으며, 80년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설립과 함께 민간주도로 전환되었다.
발전단계 1971∼73년까지는 <기반조성단계>로 자율실천의 기반구축과 새마을정신의 점화·확산이 주된 과제였다. 그리고 74∼76년까지는 <자조발전단계>로 경제난국 극복에 중점을 두었으며, 전국민 참여의 저변확대에 따라 도시와 농촌간 소득격차 해소, 새마을사업의 소득증대의 연계추진 등이 마련되었고, 도시새마을운동이 전개되었다. 또 77∼80년까지는 <자립완성단계>로 국력신장의 기층 확대, 농어촌 복지기반사업 확대 등을 추진하였다. 제 5 공화국이 들어선 81년 이후 <민주복지완성단계>를 표방하며 민간주도화하였으나, 여러 가지 맹점을 노출시키면서 운동 자체도 상당히 위축되었다.
투자규모 1971∼84년까지 새마을운동에 투입된 물량은 총 7조 2000억 원으로 연평균 5177억 원이었으며, 총액의 57%가 정부투자, 11%가 주민부담, 나머지 32%는 민간단체의 회사로 이루어졌다. 또 용도별 투자내역을 보면, 생산기반 22.2%, 소득증대 42.8%, 복지환경 27.5%, 정신계발 2.8%, 도시 및 공장새마을운동 4.7% 등으로 나타났다.
성과 새마을운동의 성과로는 앞서 언급했던 점 외에도 수리시설확충·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소득증대사업으로서는 영농의 과학화, 농가부업의 육성, 농산물가격보장, 새마을공장·새마을금고 육성, 농수산물 유통구조개선, 생산품 품질개선과 생산성 향상, 근로자 후생복지제도 및 시설확충 등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통체계하의 농촌을 단기간 내에 현대적인 것으로 변환하도록 충격을 가했다는 점이 특기할 성과라 할 것이다.
문제점 새마을운동의 가시적 성과는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였으나, 78년을 전후하여 정부의 경제정책이 바뀌자 농축산물 가격하락, 돼지파동, 쌀수매가 동결 등이 겹쳤고, 내무부가 새마을사업의 중점을 농촌주택개량에 둠으로써 농가마다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어 탈농·이농이 속출하였다. 여기에 제 5 공화국이 들어서자 이 운동을 이용한 온갖 부정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새마을운동은 침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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