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과 선화공주
황원갑<역사소설가>
백제 제30대 임금 무왕의 성명은 부여장(夫餘璋)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마를 캐어 팔아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맛둥이 - 서동(薯童)이라고 불렀다. 두 모자는 사비성 남쪽, 금마저의 마룡지란 연못 가에서 살았다. 왕손인 서동이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신분을 감추고 가난하게 살게 된 까닭은 피비린내 진동하는 왕위쟁탈전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서동을 데리고 가까스로 대궐을 탈출하여 금마저로 달아났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물으면 ‘서동은 마룡지 연못의 용의 아들’이라고 둘러댔던 것이다.
서동은 준수하게 생긴 데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매우 영리했다. 철이 든 뒤 어머니의 이야기로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된 서동은 꾸준히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宣化公主)가 그지없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꼭 한 번 만나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궁리를 거듭하던 그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뒤 어머니와 작별하고 국경을 넘어 신라로 건너갔다. 서라벌로 들어간 서동은 매일같이 대궐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먼발치에서 선화공주의 아리따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매, 기막히게 이쁜 것! 넌 이자 내 것이여!”
한눈에 반한 서동은 그날부터 이 거리 저 거리로 돌아다니며 바랑에 가득 담아서 가지고 간 마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친해지자 이런 노래를 가르쳐주고 부르게 했다. 아이들이 동네방네 다니며 그 노래를 신나게 불러대자 노래는 이내 서라벌에 널리 퍼졌다.
-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려두고
맛둥서방님을
밤에 몰래 품으러 가네.
(善化公主主隱 /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之 / 夜矣卯乙抱遺去如) -
이 노래가 바로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는 향가 ‘서동요’로서 국문학사에 빛나는 걸작이며 귀중한 사료이다. ‘서동요’는 당대 서라벌 최고의 인기 유행가였다. ‘서동요’에는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창검과 화살이 난무하고 피가 피를 부르던 삼국 혈전의 난세에 풍류 한마당으로 아름답게 피어난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드라마틱한 연애사가 담겨 있다. 그렇게 해서 서라벌에서 ‘서동요’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마침내 임금이 있는 대궐 안에까지 들어갔다. 근신들로부터 그런 보고를 받은 진평왕은 노발대발했고, 부녀간에는 이런 대화가 오고갔을지도 모른다.
“선화야, 이쁜 공주 선화야, 니는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는 걸 봤노? 이기 도대체 우찌 된 소문이고?
“하이고 아부지예! 지가 우찌 알겠십니꺼? 모립니더! 몰라예! 내사 억울해서 몬 살겠십니더!”
진평왕은 우선 그 서동인지 맛둥인지 하는 자부터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노래는 계속해서 퍼져나가는데 서동은 어디에 숨었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신하들을 시켜 비밀리에 조사해보라 시켰더니 ‘그 서동의 정체가 어쩌면 백제 왕실의 유혈정변 때 행방불명된 위덕왕의 서손, 아좌태자(阿佐太子)의 아들인지도 모르겠다’는 특급정보도 올라왔다. 이 일을 장차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꼬, 하고 진평왕이 골치를 앓고 있는데, 중신들이 왕실을 욕되게 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면 이 추문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강력히 주청했다. 진평왕이 할 수 없이 공주를 귀양 보냈는데, 떠날 때에 왕후 마야부인(摩耶夫人)이 황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죄 없는 공주가 억울하게 귀양을 가는데 어디선가 기다렸다는 듯이 서동이 나타나서 자신이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으나 훤칠하게 잘 생긴데다가 말솜씨까지 빼어난 그를 믿고 첫눈에 반했다. 그렇게 동행이 되어 가는 도중 두 청춘남녀는 눈이 맞고 마음이 맞아 마침내 한 몸이 되었다. 오늘날과는 달리 삼국시대의 남녀관계는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선화공주는 그제야 자신의 신세를 망친 그 ‘서동요’가 결국은 사랑의 기쁨을 가져온 파랑새 같은 노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함께 첫날밤을 보낸 서동은 비로소 자신이 궁중정변에서 쫓겨난 백제의 왕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백제로 가서 살자고 했다. 공주는 두 말 없이 동의했다. 선화공주가 그렇게 서동을 따라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앞으로 살아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고 물었다.
“이것이 뭣이란가요?”
공주가 대답했다.
“이기 바로 황금이 아니고 뭡니꺼? 이 금덩이만 가고 있으면 우리가 앞으로 백 년을 살아도 편히 살 수 있다 아인교?”
“에헤이,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이 황금이란 걸 흙덩이처럼 쌓아 두지 않았겠소? 으흐흐흐.”
공주는 서동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 황금이 바로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 금을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교?”
“좋소이다. 그렇게 하지요!”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했다.
“에헴, 내가 신통력으로 보내줄 터이니 그 금덩이들을 이리로 가져 오시오.”
그리하여 서동과 공주가 서라벌에 보내는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 앞에 갖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냈다. 금과 편지를 받은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 것이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그렇게 해서 선화공주와 서동왕자는 요즘 식으로 말해 영․호남 화합의 선구적인 국제결혼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사실은 당시 백제와 신라 양국은 혈전이 그치지 않던 앙숙 관계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 역시 즉위 초부터 재위 42년간 쉴 새 없이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벌인 것으로 나온다.
시집인 백제와 친정인 신라의 전쟁 중 백제의 왕후가 된 선화공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당연히 사랑하는 남편의 편을 들었을 법하지만, 남편이 아버지(진평왕)와 언니(선덕여왕)가 차례로 임금 노릇을 하는 신라와 싸우는 동안 그녀의 마음이 결코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양국의 죄 없는 젊은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죽어갔는가. 선화공주와 무왕이 당대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한 것이 둘 다 독실한 불교신자, 특히 내세불인 미륵신앙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미륵사 창건 설화는 이렇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 선화공주와 더불어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선화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이소. 그것이 신첩의 큰 소원입니더."
무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또다시 신비스러운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상을 만들고 잔각과 탑과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그 역사(役事)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이 분을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현재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는 오금산성이 있고, 그 산성 아래에 마룡지라는 연못이 있으며, 그 근처 숲속에는 서동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는 전설이 서린 집터가 있다.
사적 제150호로 지정된 금마면 기양리의 미륵사는 오랜 세월의 흐름과 그 사이의 숱한 전화에 따라 이제는 폐허로 변해 석탑 하나와 당간지주 한 쌍만이 남아 있다. 석탑은 국보 제11호, 당간지주는 보물 제236호.
미륵사 터 남쪽 왕뫼마을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묘라고 전해오는 대왕뫼와 소왕뫼, 합해서 쌍릉이라고 불리는 고분도 있다. 사적 제87호. 쌍릉 중 규모가 작은 것이 선화공주의 능, 규모가 더 크며 ‘동국여지승람’에 ‘말통대왕릉’으로 기록된 것이 무왕의 능이라고 한다. 말통대왕은 맛동 - 서동왕자, 곧 무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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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를 세운 주인공이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달리 선화공주(善化公主)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료가 나왔다. 2009년 1월 19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익산 미륵사지 현장에서 공개한 미륵사석탑 금제사리장엄구 봉안기에는 무왕 40년(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이 무왕의 왕후는 맞는데, 그녀는 선화부인이 아니라 좌평인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라고 나온다. 사택은 백제 8대 성씨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 김씨의 자리에 사택씨가 대신 들어앉게 된 셈이다.
이렇게 되면 <삼국유사>가 전해주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틱한 사연은 지금까지 누려오던 역사적 위치를 크게 위협받게 된다. 사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혈전이 그치지 않던 앙숙 관계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서기 600년에 즉위하여 641년까지 재위 42년간 쉴 새 없이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또 선화공주란 이름은 <삼국유사>에만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최근 햇빛을 본 <화랑세기> 발췌본에도 보이지 않는다.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국제결혼이 사실이라면 백제 관련 기사가 많은 <일본서기>에도 나올법한데 단 한마디도 없다.
양국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싸우는 판에, 산 같은 황금을 보내고, 장인(匠人)을 보내 미륵사 건축을 도와주었다는 기록도 믿기 힘들기는 하다. 미륵사는 무왕과 그의 왕후 사택부인이 창건한 백제왕실의 원찰(願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 봉안기 공개로 또 다른 사실도 밝혀졌다. 백제 사람들이 자신의 임금을 황제와 동격인'대왕폐하'라고 불렀고, 그의 부인은 왕비가 아니라 '왕후'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연선사는 이 설화를 어떻게 취재했으며, 또한 '서동요'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졸지에 역사의 미아가 되어버린 선화공주는 어디로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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