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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학교 안양3기
 
 
 
카페 게시글
말씀으로 든든하게 스크랩 작은 생각의 힘
장덕수 추천 0 조회 40 09.07.29 08: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작은 생각의 힘

“5.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5-7).”


(들어가는 말) 작은 생각 하나의 힘


  브리스 코트니의 소설 [하나의 힘(The Power of one)] 주인공 ‘피케이’는 병든 어머니를 떠나 멀리 있는 학교로 보내집니다. ‘피케이’는 숙모의 보호를 받으며 시골에서 자라납니다. 숱한 불행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년 ‘피케이’는 고난을 이겨내고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어느 날 어머니를 만나러 가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던 중 ‘호피’라는 차장을 만나 ‘작은 생각 하나’가 우리의 행동과 삶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인공 ‘피케이’와 ‘호피’가 만난 시간은 겨우 24시간, 호피는 주인공 ‘피케이’에게 ‘하나의 생각, 하나의 의견, 하나의 용기, 하나의 마음, 하나의 계획, 하나의 결심’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은 ‘피케이’에게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작은 생각, 하나의 힘’은 그 어린 소년 ‘피케이’의 가슴에서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 되었습니다. 주인공 ‘피케이’는 ‘작은 생각이라는 하나의 불꽃’이 자신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한 결코 파멸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작은 생각의 힘이 이다지도 크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 복음송 -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아돌프 히틀러]는 지배자 민족을 창조하려는 아주 나쁜 작은 생각이 커져 한 문명을 파괴하다시피 했습니다. [짐 존스]라는 사람은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여 900명이 넘는 신도들을 파멸로 몰아넣었습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박사는 몇 가지 작은 생각을 잘 배합하여 원자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베토벤]은 몇 가지 음악적인 작은 생각으로 5번 교향곡을 만들어 냈습니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당시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국민의 사기를 높여서 나치의 지배로부터 영국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영국의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파리의 에펠 탑, 모나리자, 미국의 독립선언, 시스티나 성당,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 한국의 경제 발전은 모두 누군가의 마음에 떠오른 작은 생각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1.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이요, 품성이다.


  성경 잠언 23장 7절에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의 인격이요, 품성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갈 것이냐? 성경 빌립보서 2장에 가면 예수님의 생각을 가질 것을 권면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생각)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생각)이니(빌2:5)” 그러면 그리스도의 생각은 어떤 생각이란 말씀입니까? 첫째, 사랑하는 생각입니다(같은 사랑을 가지고; 2절). 둘째, 경건한 생각(하나님과 동등 됨을; 6절)입니다. 셋째, 종의 생각(종의 형체를; 7절)입니다. 넷째, 겸손한 생각(자기를 낮추시고; 8절)입니다. 다섯째, 순종하는 생각(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8절)입니다. 여섯째, 찬양하는 생각(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9절)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품으면 성공하는 삶, 위대한 삶을 살 수 있고 부부간에도 참된 행복, 참된 사랑을 나눌 줄 믿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릴 적부터 너무 부정적으로 성장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사건을 보면 부정적으로 응대합니다. 이것을 기독교 인지치료에서는 ‘자동적사고’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보니 차가 많이 막힐 때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유! 지긋지긋해! 여기는 항상 이렇게 차가 막힌다니까.” 거기다가 앞에 있는 자동차에 여성 운전자라도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이런 말이 또 나옵니다. “아니, 여자가 뭣 땜시 차는 끌고 나와서 복잡하게 만들어? 밥이나 했나? 빨래는 했나? 저런 여자가 살림살이는 제대로 하겠어? 운전은 또 얼마나 못할까? 어이! 참! 우리나라 교통체증은 다 여자 운전자들 때문이라니까!”라고 하며 연신 욕까지 해댑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이런 소리 한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이런 말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지긋지긋해!, 항상, 여자가, 다 여자 운전자들 때문이라니까!”라는 말은 모두 부정적인 생각, 자동적 사고에서 나오는 말들입니다. 벌써 지긋지긋하다는 말부터 문제가 있고요, ‘항상’이란 말은 실상 맞지 않는 말입니다. 인간사에서는 ‘항상’이란 말은 언제나 소망적인 단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아시지요? 인간의 삶은 항상 똑같지 않습니다. 다릅니다. 이런 말을 가리켜 상담학적 용어로 ‘과잉일반화’라고 합니다. 한 사건의 내용을 전체에다 적용시켜 모두 그렇게 생각하며 하는 말입니다. 또 모든 교통 체증이 다 여자 운전자들 때문이라는 말 역시 지나친 ‘과잉일반화’된 말입니다. 이런 말은 모두 부정적으로 성장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말인 것입니다.  

  기독교 인지 치료에서는 부정적인 자동적 사고에서 형성되는 핵심신념이 사람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첫째, 모든 사람들은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인 ‘동조적 핵심신념’이 있다는 겁니다. 둘째, 완벽주의 사고방식을 낳는 뿌리가 되는 ‘강박적 핵심신념’이 있다는 겁니다. 셋째, 자신과 타인을 통제하려고 드는 ‘통제적 핵심신념’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두 병든 영혼 상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영혼이 병들게 된 것은 전적으로 ‘원죄(原罪,Original Sin)'에 기인(起因)됩니다. 원죄는 사람의 영혼을 오염시켰고, 오염된 인간의 영혼은 매사에 육적인 삶에 탐닉되도록 전락시켰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너무도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5절).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필연적으로 육신을 좇고, 육신의 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6절). 육신은 땅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에 땅과 함께 소멸됩니다. 소멸되는 육신에 붙잡혀 살아가니 그 영혼도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만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이해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니, 그 가치를 모르니 그 법에 굴복할 리가 만무합니다(7절). 그렇다고 우리가 육신의 일만 생각하다가 육신과 함께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합니까? 육신의 생각만 품고 일생을 육신에 미쳐서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다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해야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에서 영의 생각으로 말입니다. 영의 생각을 하려면 영의 일을 좇아야 한다고 했습니다(5절). 영을 좇아 영의 일을 하면 생명과 평안이 온다고 했습니다(6절).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됩니다. 하나님과 한 편이 됩니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일에 즐거움을 누립니다(7절). 이런 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그러면 영의 일을 좇아 영의 생각을 하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여기서 기독교 인지치료 의사인 [아치볼드 D.하트]박사가 제시한 ‘마음을 다스리는 열 가지 방법’을 제시함으로서 우리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도움을 드릴까 합니다.


 2. 생각을 바꾸는 열 가지 방법


     첫째,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하길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신뢰를 둘 때, 우리는 사람의 지혜에도 신뢰를 둘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이 세상에서 너무나 어리석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도구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간의 눈으로 보면 매우 어리석어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려 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 지혜로 뭔가를 해내려고 하다가 종당엔 무너지고 맙니다. 이 말씀을 기억해둡시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바꾸려는 나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방법은 예배와 기도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열망을 갖게 되어 기도하게 됩니다. 이 말씀도 꼭 기억해둡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이 말씀을 영역성경 ‘리빙바이블(Living Bible)'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고 싶으면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그가 기쁘게 말씀해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늘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이에게 풍족한 지혜를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렇게 간구하는 것을 꾸짖지 않으신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신다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예배와 기도를 통해 구한 것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닷물결 같아서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약1:6-8).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소망과 믿음은 하나님 한 분께 두어야 합니다. [토마스 A. 켐피스]가 지은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하늘 아래 있는 만물 가운데 내게 가장 큰 위로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당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주님의 자비는 셀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안 계셨더라면 내가 여지껏 어디에서 잘 지냈겠습니까? 혹은 당신이 계시는데 어떻게 나쁜 일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당신 없이 부유하게 사느니 당신만을 위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당신 없이 천국을 소유하느니 당신과 함께 이 땅에서 방황하는 편이 낫습니다. 당신이 계신 곳에 천국이 있고 당신이 계시지 않는 곳에 죽음과 지옥이 있습니다.” [토마스 A. 켐피스]의 비전은 오직 하나님이시지 천국도, 부귀도, 건강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생각을 건전하고 바른 생각으로 바꾸려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소중히 하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 현실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토마스 머튼]이 지은 ‘고독 속의 사색’이란 글 중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신앙생활에서 비현실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단들이 잘하는 짓입니다. 이단들은 언제나 자기네 집단을 부각시키고 자기네 집단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고 하나님이니 예수님이니 성령님이니 부르며 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교회란 명칭의 ‘안상홍’은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무료성경신학원을 운영하는 ‘이만희’는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앉아서 하나님으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통일교의 문선명은 자신을 가리켜 ‘재림예수’라고 부르도록 했습니다. 신천지교회, 추수꾼훈련원 역시 교주를 하나님으로 추앙합니다. 구원파 박옥수씨는 자기가 예수가 된 양 ‘회개 없다!’라고 외쳐서 사람들에게 위장된 평안에 안주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이는 모두 현실을 도외시하는 데서 오는 질병입니다.

  오늘날 성공학을 가르치는 내용에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치 성공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우리는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 지 잘 압니다. 진정한 성공은 실패를 딛고 일어날 때 가능해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믿음 역시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건강, 성공, 부유해지는 것처럼 말하면 이는 성경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인간적으로 볼 때 실패했습니다. 그는 숱한 핍박을 견뎌야 했고, 조롱과 욕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최고의 흉악한 죄인에게나 언도되었던 십자가 사형에 언도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예수님은 실패자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일을 좋아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나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은 진정한 성공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들 역시 온전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에 바탕을 둔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현실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공상 속에 머물러 있어도 안 됩니다. 비현실적인 사랑, 비현실적인 인생, 풍요, 약속, 유토피아적 발상등으로 우리의 현실을 망가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프랑스의 생물학자이며 저술가인 [장 토스탕]이란 사람은 “나는 책의 철저한 거짓보다는 현실의 정직한 은어를 더 좋아한다.”라고 했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지금 내 몸이 아프단 말입니다. 그건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병을 키우게 되고 급기야는 죽게 됩니다. 인정하면 병원에 가서 진찰도 받고 치료도 받습니다. 현실적으로 지금 내가 물질이 부족하단 말입니다. 그걸 인정할 때 아껴 쓰게 됩니다. 그걸 인정 안 하면 낭비하다가 집안 말아먹습니다. 보십시오. 현실주의가 되라는 아닙니다. 현실을 멀리하지 말란 말씀입니다. 현실적인 생각을 할 때 우리 자신을 알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부족을 알게 되고 주님의 도움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현실을 직시할 때 부정적, 패배주의적인 생각이 주는 영향을 빨리 벗어나게 해줍니다. 대다수 현실을 인정하지 않기에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빨리 현실을 직시하고 대처를 해나가는 것이 좋은 생각을 가지는 지름길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면 좀더 긍정적인 자세를 갖게 됩니다. 자신을 더 잘 통제하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다 자신을 두려는 생각도 건전하게 하게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절대로 현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현실을 살면서 현실을 살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정신병자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그리고 이 어려운 현실을 주께 가져가 맡기시고 힘차게 밀고 나가십시오. 현실의 문제는 풀어지고 우리의 생각은 더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있도록 긍정적이 될 줄 믿습니다.


    자, 이제 나머지는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조건에 잘 덧붙이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좋은 생각의 사람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영의 생각을 하게 될 줄 믿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십시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늘은 몹시 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그러나 놀라거나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으리라. 그런 사람들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으므로.”라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좋은 점을 보기보다는 나쁜 점을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는 것을 습관화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다고 여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고백합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마5:44; 요13:34,35; 15:12”고 하셨지 좋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감정이 나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진리에 입각합니다. 영적인 지식이 필요하지요. 우리는 조건을 내세운 사랑을 하는 것을 많이 보는 데 그것은 모두 좋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혹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다 좋아하게 하려는 망상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원수는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여러분을 칭찬하게 하려는 것은 인본주의입니다. 신본주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원수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시고 감정적인 반응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관점을 갖고 우리 역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자신의 실패를 용납하십시오. 유명한 발명가인 [찰스 케터링]이란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실패는 수치가 아니고 실패를 분석하여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슬기롭게 실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실패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 중의 하나이므로.” 실패는 두렵고 힘들고 비참합니다. 저 역시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괴로운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 우리를 정결케 하십니다. [스티브 데이비스]란 사람은 “당신이 낙심하는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지만,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 잘못이다.”라고 했습니다.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안 되는구나! 나는 틀렸어!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놈이었어.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지요. 또한 실패하게 되면 실패 자체와 실패하는 사람을 혼동함으로써 좌절이 옵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실패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패하면 성공에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겪는 실패를 용납하시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을 정결케 하시고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예) 어린 시절 대부분을 끔찍한 우울증에 걸려서 지낸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상류층 출신이지만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유모의 손에 자랐습니다. 그는 머리가 둔하고 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심한 놀림을 받았습니다. 6학년 때는 낙제를 했으며, 16세 때는 그가 묵었던 유명한 기숙사가 있는 해로(Harrow)에서 “이 아이는 전혀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쓰인 성적표와 함께 집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수년 후 영국수상으로써 히틀러에 대항하여 영국을 지킨 사람이 출연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웃음짓곤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경이었습니다.

   다섯째, 양심을 맑게 하십시오. [마크 트웨인]은 그의 작품 ‘허클베리핀’에서 말했습니다. “사람의 양심이란 분별 있는 것이며 어쨌든 본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양심은 사람의 나머지 내면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만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심에는 선한 양심과 악한 양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선한 양심이 존재하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선한 양심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이 죄책감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이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죄를 버립니다. 그러면 그 죄책감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감정의 속임수로 오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젊은 아들의 죽음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일생 죄책감 속에 살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합니다. 그는 감정의 그릇된 판단에서 오는 극심한 죄책감으로 고생하다가 자신을 사형으로 언도하는 재판관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 일전에 저는 탤런트 고 정다빈양의 빈소에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다빈이는 자살했습니다. 왜 자살했을까? 많은 의구심을 남겼지만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울증, 그 파괴적인 우울증은 바로 죄책감 히스테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일 정도의 우울증이라면 역시 죄책감에서 온 것으로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정당성을 악한 양심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죄책감은 상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잘못에서만 나와야 합니다. 이런 죄책감은 회개하면 용서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회개해도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죄책감은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그것은 흔히 악한 양심이 나를 죽이려는 의도에서 주는 것이 아닌 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죄책감은 약을 먹거나 회개를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생각을 달리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죄책감들이 쉽게 사라지는가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여섯째,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지 마십시오. [헨리 나우웬]이 지은 ‘새벽에 이르는 길 중에는’는 다음의 글이 있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니...너의 모든 행동을 보고 있노라. 그리고 나의 형상을 따라 만든 아름다운 너를 사랑하노라...스스로를 심판하지 말라. 자책하지 말라. 스스로를 거부하지 말라... 오너라. 내게 오너라. 너의 눈물을 닦아주고 이렇게 말해 주지 ... 사랑하노라. 사랑하노라. 널 사랑하노라.” 우리는 어릴 적 가혹한 형벌이나 꾸중을 들은 경험이 혹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는 잔소리꾼 어머니나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 보면 바로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잔소리로 여겨지기 쉽상입니다. 아, 무엇을 더 말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우리의 소유된 영혼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말이 어렵게 들릴 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몸과 영혼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군들 귀하지 않은 분들이 있겠습니까?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귀하게 여기십시오.


  일곱째,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 작은 은총이라도 소중히 여기십시오. [리차드 에반슨]이란 사람은 “우리가 가질 수 없거나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가져서는 안 될 것들로 인해 우리가 가지고 있고 가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즐거움을 망치지 말라.”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최고의 구두쇠는 [헤티 그린]이란 여성입니다. 그녀는 3100만 달러의 은행잔고와 1억 달러의 유산을 남기고 죽었으나 병들어도 치료 받지 않아 다리를 절단했고, 제대로 먹지 않아 영양부족 현상을 경험했으며 가장 인색하고 가장 불행하게도 1916년 탈지우유의 좋은 점에 대해 말싸움 하던 중 경련으로 죽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미국의 연합 통신사의 한 보도 자료에 의하면 “건강하지만 건강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미국인들”이라는 표제가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인들도 이젠 그것을 닮아갑니다. 분명 후진국들의 국민들에 비해 엄청 건강해졌건만 건강 추구 중독증이 걸려 늘 건강, 건강을 외치며 건강에 대한 불만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70세를 넘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지금 한국인들은 불만투성입니다. 아주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기에는 너무도 멀리 갔습니다. 이것은 작은 것을 누리며 행복하였던 순수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제자 열두 명 달랑 데리고 다니시는 것으로 행복해하셨습니다. 그 열둘을 위해 요한복음 17장에서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가지고, 얼마나 많이 써야 행복하게 될까요? 제발 작은 것에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야 생각이 영적으로 흘러갈 공간이 마련됩니다.

 

  여덟째,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십시오. [W. 클레먼트 스톤]이란 사람은 “사람들간의 차이는 극히 미미하다. 그러나 이런 미미한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 미미한 차이는 태도이며, 큰 차이는 그 태도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텔레비전 방송인 [휴 다운즈]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은 어떤 특정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태도가 몸의 면역체계에 영향을 줍니다. 정신질환, 몸의 질병도 태도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0세기 초에 살았던 [제임스 알렌]이란 사람은 “부정적 생각, 즉 비합법적인 생각을 따르면 몸은 쉽게 병에 걸리거나 쇠하여지고, 즐겁고 아름다운 생각을 따르면 몸은 젊고 아름다워진다.”라고 했습니다. 요즘 부정적 생각을 뒤엎을 수 있는 방법으로 첫째, 운동 둘째, 휴식 셋째, 긍정적 태도 개발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부정적 생각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원죄에서 출발하였고, 환경과 연합하여 더 큰 질병으로 자라났습니다. 따라서 부정적인 생각을 고치려면 첫째가 예수 믿어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부정적인 생각을 자각해야 합니다. 셋째, 부정적인 생각을 공격해야 합니다. 넷째, 부정적인 생각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건전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나의 생각을 환기시켜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정당한 부정적인 생각까지 나쁘게 보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질병이 고쳐져야 하든지, 우리의 잘못이 회개되어 용서받아야 고쳐집니다.


  아홉째, 올바른 낙관론자가 되십시오. 영국의 수상을 지냈던 [윈스턴 처칠]경은 “나는 낙관론자이다. 그 외 다른 주의를 택하는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미셀 드 생 피에르]라는 사람은 “낙관론자는 빛이 없는 곳에서도 빛을 보는데, 왜 비관론자는 늘 달려가서 그 빛을 꺼 버리는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유쾌하고 명랑한 태도를 가지십시오.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하나님도 물론 기뻐하십니다. 괜히 모든 고민을 혼자 지고 있는 것처럼 인상 쓰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괜히 여러분의 얼굴만 미워지고 마음마저 우울해지고 말 뿐이며 사단이 좋아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한 낙관론자는 정신질환자와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현실을 인정하세요. 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낙관론자의 삶을 놓치지 마십시오. 낙관주의는 말기 환자의 수명을 연장시킬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낙관주의는 인내심을 키워줍니다. 낙관주의는 하나님에 대해 건전하게 생각하고 자주 기도하고 심오한 묵상을 하고 희망을 갖고 성경을 봅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열 번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조 코더트]는 ‘실패의 경험에서 나온 충고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상은 살기에 만만한 곳이 아니다. 성실하게 살기에 만만한곳이 아니다. 자신을 이해하기에 쉬운 세상이 아니며 자신을 좋아하기에 쉬운 세상도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살아야 할 곳이다. 그리고 사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함께해야 할 사람이 있다(그것은 자기 자신이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졸업축사를 하러 갔다가 고별사를 맡은 마가릿이 떨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고 합니다. “항상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라.” 우리가 크리스천입니까? 우리는 먼저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애쓰는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준 소명을 완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고,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에라스무스]는 말하기를 “인간이 진정한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자신이 되려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왜냐?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우리가 완벽하거나 다른 사람을 모방한 사람보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사랑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축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좀 밝게 보셨으면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자신, 특히 외모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난 가끔 숲 속에 여행하다 한 노파를 만난 못생긴 사나이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노파는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못생겼구료.’ 그러자 못생긴 사나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도 어쩔 수 없어요.’ 그러면 노파는 이렇게 말하지요. ‘그렇지 않아요. 최소한 집 밖을 나오지 않으면 되잖소!’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잠언 15:13에서는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한다.”라고 충고합니다. 잠언 17장 22절에서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우리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럴 때 우리 생각은 좋은 생각으로 바뀌져서 영의 생각을 하게 되고 영의 이끌림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나가는 말)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의 높이는 305피트입니다. 그 정도 되면 지상에서 자유의 여신상 의 머리 위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1880년대에는 여신상의 머리 꼭대기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여신상의 머리 꼭대기를 볼 수 있는 것은 갈매기들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각가 [오거스트 바르톨디]는 머리 위에도 머리 한 올 한 올을 자로 잰 듯이 정밀하게 정성들여 조각했습니다. 정말 [오거스트 바르톨디]는 진정한 장인(匠人)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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