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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강해 제 1장 나오미와 룻의 신앙
사사 시대에 한 가정이 당면하고 있는 우여곡절과 회개, 인간애가 뒤섞인 감동적인 드라마가 전개된다. 약속의 땅을 떠난 가정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고 위로와 안식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부각되어 있다. 특히 유대 사회에서 사람의 수에도 들 수 없었던 여인들의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소개하고 있으며 이들의 신앙이 구속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1. 엘리멜렉 가정의 불행 (1;1-5절)
흉년을 피해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한 엘리멜렉이 10여 년 동안 그곳에서 당한 고난을 함축적으로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흉년을 내리심은 저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았음에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면 흉년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이 도망간 그곳에서 베들레헴보다도 더 큰 환난을 내리심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어디서나 택한 백성을 연단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해 주셨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이 흉년이 들었다.’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제공한다.
첫째, 본서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엄연한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한 구속사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둘째,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는 말은 사사 옷니엘로부터 사울 왕이 등장할 때까지를 의미하는데 그 중에 특히 사사시대 후반기인 기드온시대 이후로 추정된다. 룻의 증손인 다윗이 왕이 되어 치리할 때가 B.C 1010년이므로 이때로부터 약 100여 년 전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에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이를 신명기적 해석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언약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기만 하면 풍성한 소출이 약속된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타락하여 우상을 섬긴다면 온갖 재앙과 기근과 흉년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흉년은 사사시대의 타락상과 연관이 있는데 유대에 임한 흉년이란 그들의 소산물을 미디안이 탈취해 가고 토지를 황폐시켰던 미디안 족속의 침략과 연관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 자손은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고 거기 거하였으며 궁핍함이 심하여 삶이 매우 곤궁하였다.
사사시대의 모압 지방은 르우벤 지파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베들레헴에서 그곳까지는 거리 멀지 않았다. 특히 모압 지방이라는 말 ‘세데 모압’은 모압 들판을 의미하는데 아르논 강을 중심으로 초지가 형성된 기름진 평원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압 지방에 가기는 했어도 르우벤 지파와 가까운 모압 땅 들판에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분명한 잘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은 반드시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그곳에서 10년을 우거했던 것으로 보아 단순히 흉년을 피해 일시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초지가 풍부한 그곳에 안주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불신앙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곳에서 큰 고초를 겪게 된다.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의미로서 이 이름은 그의 부모의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이 사람은 당시 베들레헴에서 상당히 유력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처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온 성읍에 화제가 되었던 것과 그의 친척 보아스의 재력이나 지위가 상당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감미로운자’ ‘은혜로운 자’ ‘사랑스러운 자’라는 의미인데 그녀는 자부로부터 큰 효성과 공경을 받았고, 이웃에게서 큰 사랑을 받았으며, 말년에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던 것이다. ‘말룐’은 ‘병약한 자’ 연약한 자‘라는 뜻이며, ’기룐‘은 사모하는 자’라는 뜻으로 히브리식 이름이다. 이들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인데 ‘에브랏’은 ‘에브라다’이며 베들레헴의 옛 이름이다. 이곳은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은 곳이다. 특히 이곳은 미가 선지자에 의해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되었으며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엘리멜렉이 모압 땅에 들어와 정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때에 두 아들은 장가들기 전이었는데 아마도 나오미는 남편의 사후에도 장성한 두 아들이 결혼하여 살기 때문에 계속해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두 아들은 모압 여인과 결혼했는데 이는 율법을 어긴 것인지 아닌지 이견이 많다.
첫째, 이방인의 아내를 취한 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라는 견해이다.
둘째, 율법에는 가나안 여인과 혼인을 금한 것이지 다른 이방인과의 결혼은 정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신명기의 규례는 모압 족속에 대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결혼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결혼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범한 것은 아니지만 율법의 정신은 범했다는 것이다. 율법에서 가나안 여인과 통혼을 금지한 것은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모압 여인과의 결혼 역시 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결혼 후 가정에 임한 환난을 두고 나오미가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고 한 것을 보아도 잘못된 결혼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아내 ‘오르바와 룻’은 전형적인 모압식 이름이다. 엘리멜렉에 이어 두 아들도 일찍 죽고 말았는데 이는 언약의 땅 가나안을 떠난 죄와 이방인과 결혼한 죄로 보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다. 차라리 이방의 신실한 룻을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불러들이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로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나오미는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다.’고 했는데 ‘남았더라’는 말 솨아르‘는 ’부지하다‘ ’연명하다‘라는 의미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홀로 남은 모질고 비참한 모습을 반영하는 말이다. 욥이 남자 중에 가장 처량한 지경에 빠진 자라면 나오미는 여자 중에 가장 불쌍한 처지에 빠진 자였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국땅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고 말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깊이 좌절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언약의 땅을 쉽게 떠나온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오직 위로자이시오 구원자이신 여호와만을 더욱 의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나오미의 신앙이 마침내 기쁨의 결실을 보는 원동력이 되었다.
2. 나오미를 따르는 룻 (1:6-18절)
엄청난 고난을 겪은 나오미는 그 모든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결단을 내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에 그의 자부들과 이 사실에 대해 대화한다. 나오미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기 때문에 자부들이 자기 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재혼하여 평안히 살 것을 부탁함으로 오르바는 시모와 작별을 고하며 자기 부모와 자기 국가의 신을 섬기기 위해 돌아갔고 룻은 한사코 나오미와 같이 가겠다고 하면서 끝까지 시모와 동행한다.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돌보다’라는 말 ‘파카드’는 ‘방문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라는 의미로 목자가 자기 양떼를 보살피기 위해 찾아가 양들을 계수하며 모든 환경을 주의 깊게 돌아보는 상태를 말한다. 사사시대는 암흑기 시대로 분류하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중 우상숭배가 극심했으며 영적으로 매우 부패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 찾아가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나오미는 지난날을 뉘우침과 동시에 이방 족속의 땅 곧 우상 숭배의 땅에서 떠날 용기를 가졌던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고 홀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결정을 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신앙의 결단이다. 두 며느리도 시모와 함께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떠났는데 이는 평소 나오미의 신앙 인격이 자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압으로부터 낯익은 유다의 고향으로 통하는 대로에 이르자 나오미는 자부들의 장래를 위하여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자 하였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이 말은 나오미로서는 쉽게 나오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며느리들조차 떠나버리면 나오미는 단신의 과부가 되어 의지할 데가 전혀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들에게 돌아가라고 권유한 것은 향후 닥칠지 모르는 고통을 자신이 혼자 짊어지고 가려는 며느리를 향한 애틋한 사랑이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축복 기도를 해주었는데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며느리들이 모압으로 돌아가도 ‘그모스’ 우상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축복 가운데에 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즉 나오미는 이별의 순간에 여호와만이 축복의 근원이시며 참되시고 유일한 신이심을 주지시켜 준 것이다. 나오미는 언약의 땅을 떠났지만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는 잊지 않고 있었으며,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와 민족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오미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이 이름을 사용하는 용례는 두 가지이다.
첫째, 언약의 하나님을 상기시킬 때이다.
6절에 여호와께서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찾아가셨다는 내용이 담겨 있고, 8-9절에 비록 이방 여인이지만 언약 백성 가운데 포함된 자들에게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복주시기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둘째, 언약을 파기한 백성에 대하여 징계할 때 사용되었다.
언약을 범한 백성이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고 할 때에 ‘여호와’라는 신명을 사용하는 것이다.
당시 과부들은 고아와 나그네와 함께 소외된 계층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그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과부들은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나오미는 자부들이 자기와 함께 가는 것을 극구 반대했던 것이며 저들이 재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가지라고 권유했던 것이다. 이 길만이 과부가 사회에서 보장을 받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위로를 받는다.’라는 말 메누하‘는 ’안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보호 받을 남편이 없어 진정한 안식이 없고 도리어 슬픔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는 과부의 고통을 벗어나 남편의 보호를 받으며 안식을 누리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시모의 입맞춤을 받고 며느리들은 소리를 높여 엉엉 울었는데 자식들의 장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장래를 포기하는 시모의 사랑에 감격하여 시모의 장래를 도리어 걱정하면서 함께 가겠다고 울었던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고부의 관계를 보여 준다.
며느리들은 자신들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고 무작정 시모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시모는 이스라엘의 계대 결혼의 규례를 고려하여 저들의 말을 막았다. 즉 남편이 죽고 자식이 없을 때 그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남편의 대를 이을 수 있는 결혼법을 염두에 둔 것이다. 자신에게는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대를 이어줄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첫째로, 나오미는 자신의 계대 결혼을 염두에 두었으나 그는 이미 늙었으므로 자식을 둘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자신이 가령 오늘 밤에 아들을 생산한다 할지라도 그 아이가 계대 결혼을 이해하고 지킬 정도가 되려면 2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오미는 자부들이 자신과 함께 가면 끝내 과부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심층적인 표현으로 설득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나오미가 자신의 계대 결혼은 생각하고 두 며느리의 계대 결혼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사실 나오미의 고향에는 말룐과 기룐의 형제나 친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근족들이 대를 이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 사실을 감추고 며느리를 회유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호소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손이 자기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다.’라고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말을 했다. 그러나 오르바가 돌아간 후 나오미가 룻을 설득할 때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 분명코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여호와 신앙을 확실히 확인하고자 한 것이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종교와 풍습과 언어가 다른 먼 나라로 간다는 것은 참으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며, 더군다나 어릴 적부터 섬기던 신을 떠나 여호와 공동 신앙체인 이스라엘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가족 애정이나 의지만으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되는 것이다.
오르바는 시모에게 입을 맞추고 떠나갔는데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될지 모르는 아쉬움 때문에 입맞춤을 한 것이다. 그러나 룻은 시모를 붙좇았다. ‘다바크’라는 이 말은 ‘굳게 결합하다.’ ‘붙들고 늘어지다.’라는 의미로 남녀의 결혼 관계나,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시63: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특히 이 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의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서 당신의 백성에게 충성을 요구하실 때 사용되었다.
*신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러므로 ‘다바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에 사용되었으며 은총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룻이 그의 시모를 좇아간 것은 시모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충성의 마음으로 결코 이별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였던 것이다. 또한 나오미로부터 받은 여호와 신앙에 대한 확실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라는 이 말은 오르바는 단순히 시모의 품을 떠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그모스 신에게로, 바알 신에게로,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나오미는 룻에게 다시 한 번 시험을 해 본 것이다. 그녀가 단순히 시모에 대한 애정으로 함께 가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여호와를 향한 룻의 신앙 때문인지 알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강권했다. 그러나 오르바는 떠나갔지만 룻은 남았다. 이것은 마치 이스마엘은 떠나가고 이삭은 남았으며, 에서는 떠나가고 야곱은 남은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심오한 구속사적 경륜과 섭리의 결과였다.
시모의 강권적인 권유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신의 신앙과 시모를 향한 위대한 고백을 하는데 엄숙한 고백체로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이 신앙적인 고백은 예수 시대에 이방의 가나안 여인이 그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듯이 여호와의 은총의 날개를 활짝 펴도록 하기에 충분하였다. 율법에는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국가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고 개인은 그 신앙 여하에 따라 언제든지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다만 이방 남자는 할례를 통하여 들어오고, 여자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방화는 엄금했지만 이방의 이스라엘화는 적극 환영하셨다.
룻의 고백은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 되신다는 올바른 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녀의 결단은 효성이나 애정을 초월하여 완전한 자기희생을 감수한 위대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라는 고백은 나오미의 위대한 신앙을 엿보게 한다. 나오미가 이방 우상의 나라에서도 그의 신앙의 빛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호와 신앙을 며느리들에게 물려주고 신앙적으로 며느리들을 교육했다는 점이다. 전하는 자나 가르치는 자가 없었더라면 이처럼 훌륭한 믿음의 고백을 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룻의 신앙은 17절에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되는데 룻은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하는 독특한 서약의 형태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이다. 이방의 서약은 어떤 표적이나 의식이 동반되지만 이스라엘은 그 서약을 범할 경우 여호와로부터 벌을 받겠다는 엄숙한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룻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여호와’라는 신명을 사용하여 자신은 이미 언약 백성에 속해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니오미의 신앙 시험에서 룻만이 그 시험에 합격하였고, 그 결과 그녀는 시모와 함께 유대 땅 베들레헴에 이르게 되었다.
성읍 내에서 유력한 가문이었던 엘리멜렉 가족이 먼 이방 땅 모압으로 떠난 사실도 큰 화제꺼리였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낯선 여인과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 나오미의 등장은 조용한 베들레헴 성읍을 온통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소동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이가 나오미냐’ 한 것은 그녀가 고향에 돌아온 것에 대한 놀라움보다는 오히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이방 며느리를 데리고 돌아온 처량한 사람에게 대하는 연민의 정과 동정의 말이었을 것이다.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마라’라 부르게 했는데 ‘마라’는 ‘괴로움’ ‘쓰다.’라는 의미로 그녀의 과거가 극도의 슬픔과 고통이었다는 것과 지금의 처지도 비참하고 괴로운 상태라는 것이다. 나오미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라고 고백했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 부르지 않고 ‘전능자’라고 부른 것은 ‘솨다이’라는 신명은 택한 백성이 순종의 길로 걸어가면 무한한 복을 주시지만 어그러진 길로 걸어갈 때에는 어김없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 주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밝히시면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길로 걸어가기를 명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나오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이 신명을 사용한 것이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날 때는 ‘풍족했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녀의 가정은 지방의 귀족 가문으로서 성읍에서 널리 알려질 정도로 부유했으며 든든한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으므로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았던 재물과 함께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고 괴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그 수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
첫째,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다고 했다. ‘징벌하다’라는 말은 눈 밖에 난 자를 비천하게 만들어 결국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둘째,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했다고 했다. ‘라아’라는 이 말은 하나님의 징계로 괴로움을 당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나오미가 이 두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자기의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 징벌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인다는 회개의 의미인 것이다.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가을에 보리를 파종하여 봄에 추수한다. 보리 추수는 보통 4월경에 하는데 주로 말이나 노새의 먹이로 경작하였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이 양식으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리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고 봉헌하기 위해 ‘초실절’을 절기로 지킨다. 나오미가 고향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바로 보리추수 시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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