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尋(伺)-思惟-語行 [vitakko saṅkappo vacīsaṅkhā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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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25
32. 악기베싸나여, 마치, 코끼리 조련사가 숲속의 습관을 제거하고,
숲속의 기억과 생각을 없애버리고, 숲속의 근심과 피곤과 고뇌를 제거하고 마을에서 즐기며,
사람들에게 맞는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 땅위에 큰 기둥을 박고 숲속의 코끼리의 그 목을 붙잡아 매듯,
seyyathā pi Aggivessana,
hatthidamako mahantaṃ thambhaṃ paṭhaviyaṃ nikhaṇitvā āraññakassa nāgassa gīvāyaṃ upanibandhati.
Āraññakānañc'eva sīlānaṃ abhinimmadanāya, āraññakānañc'eva sarasaŋkappānaṃ abhinimmadanāya,
āraññakānañc'eva darathakilamathapari'āhānaṃ abhinimmadanāya,
gāmante abhiramāpanāya, manussakantesu sīlesu sampādanāya1
23. "악기웻사나여, 마치 코끼리 조련사가
코끼리의 숲 속의 습관을 제어하고 숲 속의 생각을 제어하고 숲 속의 근심과 피로와 열병을 제어하고
마을에 사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고 사람들을 좋아하는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
땅에다 큰 기둥을 박고 야생 코끼리의 목을 거기에 묶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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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새김의 토대는 재가 생활을 습관을 제거하고,
재가 생활의 기억과 생각을 없애버리고, 재가 생활의 근심과 피곤과 고뇌를 제거하고
바른 길을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기 위해 고귀한 제자의 마음을 붙잡아 맨다.
evam eva kho Aggivessana, ariyasāvakassa ime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etaso upanibandhanā honti.
Gehasitānañc'eva sīlānaṃ abhinimmadanāya, gehasitānañc'eva sarasaŋkappānaṃ abhinimmadanāya,
gehasitānañc'eva darathakilamathapari'āhānaṃ abhinimmadan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그와 같이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은
재가의 생활 습관을 길들이고 재가에 얽힌 생각을 길들이고 재가 생활에 따른 근심과 피로와 열병을 길들여서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성스러운 제자의 마음을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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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여래는 그를 더욱 길들인다.
Tam enaṃ Tathāgato uttariṃ vineti:
24. "그러면 여래는 더 나아가 그를 다음과 같이 훈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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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 ‘오라 수행승이여,
1)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지만 몸과 관련된 사유를 하지 말라.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찰하지만 느낌과 관련된 사유를 하지 말라.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지만 마음과 관련된 사유를 하지 말라.
사실에 대하여 사실을 관찰하지만 사실과 관련된 사유를 하지 말라.
ehi tvaṃ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1 vitakkaṃ vitakkesi.
Vedanāsu vedanānupassī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1 vitakkaṃ vitakkesi.
Citte cittānupassī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1 vitakkaṃ vitakkesi.
Dhammesu dhammānupassi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ī' ti.
'오라, 비구여.
그대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몸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느낌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마음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법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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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몸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는 Ee의 mā kāyūpasaṃhitaṃ vitakkam vitakkesi를 옮긴 것이다.
... 그러나 Be에는 'mā ca kāmūpasaṃhitaṃ ... '로 나타난다. 이것을 옮기면
'오라, 비구여. 그대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감각적 욕망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느낌... 감각적 욕망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가 된다. Se도 Be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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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는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3) 그는 희열이 사라진 뒤,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평정하게 지내고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고귀한 님들이 평정하고 새김 있는 행복한 삶이라 부르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4) 그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버려지고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을 뛰어넘고 즐거움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So vitakkavicāranaṃ vu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ṃ ca kāyena paṭisaŋvedeti.
Yantaṃ riyā ācikkhanti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 ti tatiyaṃ-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 domanassānaṃ atthaŋgamā
adukkhaṃ-asukhaṃ upekkhā sati pārisuddhiṃ catutthaṃ-jhānaṃ upasmapajja viharati.
25. "그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제3선을 …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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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여기서는 초선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으로 봤을 때 바로 앞 §§22∼24.에서 언급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 초선을 대신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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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경문에서 4념처 수행이 4선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몇 가지 검토할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 sati(sara-)라는 표현과 vitakka(vitakkesi)라는 표현이 몇 번 나타납니다.
定學(蘊)에 포함되는 正念과 正定은 팔정도의 7번째, 8번째로 나타나는 보리분법이지만,
gehasitānañc'eva sarasaŋkappānaṃ의 [sati기억]과 [saŋkappa생각vitakka]은 불선법이지 싶습니다.
慧學(蘊)에도 포함되는 [saŋkappa생각vitakka]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른 사유, 다른 하나는 삿된 사유. - 팔정도와 팔사도의 2번째 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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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sati기억]과 [saŋkappa생각vitakka]은 거의 유의어처럼 사용된 것 같습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동일한 단어들이 나타나는 경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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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처럼 멀리 떠남을 갖추어 머물면서 그 법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계속해서 고찰한다."
So t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ṃ dhammaṃ anussarati anuvitakketi.
그는 그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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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멀리 떠남을 갖추어 머물면서
그 법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계속해서 고찰하면
비구에게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자리잡기 시작한다.
‘‘Yasmiṃ smaye, bhikkhave, bhikkhu
t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ṃ dhammaṃ anussarati anuvitakk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āraddho ho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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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dhamma법은 敎法, 생각(기억anussarati)은 사띠(念), 고찰(사유anuvitakketi)은 위딱까(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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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語行인 [saŋkappa생각]와 [생각vitakka]는 동의어로 읽으셔도 되지 싶습니다.
그렇다고 定蘊에 포함되는 [sati기억]이 慧學(蘊)에 포함되는 語行인 것은 아닙니다.
본 경문의 문맥상 이런 의미라는 취지입니다.
[생각vitakka]에 대해서는 하단에 자료들을 올려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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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4념처에 마음을 묶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해탈을 위해서는 묶음<☜ 念念不忘하는 집중(sati)>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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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의 불일치는 곤혹스럽습니다.
두 가지 전승 모두 불법에 어긋나지 않다고 전제하고
문제가 되는 두 가지 전승에 대해서 의견을 드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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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Be의 Mā ca kāmūpasaṃhitaṃ1 vitakkaṃ vitakkesi를 기준으로 하면
4념처 수행을 하더라도 즉 [신수심법]을 대상으로 <☜ 念念不忘하는 집중(sati)>을 하더라도
慾과 관련되는(kāmūpasaṃhitaṃ1 vitakkaṃ)를 vitakkesi하지 말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수심법]에 대한 慾(kāma)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혹시 욕계라고 할 때에도 慾(kāma)을 사용하지만
原함, 욕구, 추求함, 바람, 희망함 ---등의 의미로도
慾(kāma)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예문들도 많이 있습니다.
<念念不忘하는 집중(sati)>을 하더라도> <집착은 하지 말라>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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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Ee의 mā kāyūpasaṃhitaṃ vitakkam vitakkesi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문맥상 4념처를 수행중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선은 나타나지 않고 제2선이 바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석에도 나타나지만 4념처 수행은 초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는 [신수심법]에 대한 [vitakka]를 했지만
여기(초선의 4념처)에만 머물지 말고 제2선등도 수행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4념처 수행은 [신수심법]에 대한 尋[vitakka]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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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외입처인 6境 [(색성향미촉)법]에 대한 尋[vitakka]는 당연히 아닙니다.
<~ santi manoviññeyyā dhamm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cf.
Manañca pajānāti, dhamme ca pajānāti, yañca tadubhayaṃ paṭicca uppajjati saṃyojanaṃ tañca pajānāti,
yathā ca anuppannassa saṃyojanassa uppādo hoti tañca pajānāti,
yathā ca uppannassa saṃyojanassa pahānaṃ hoti tañca pajānāti,
yathā ca pahīnassa saṃyojanassa āyatiṃ anuppādo hoti tañca pajānāti.
마노를 꿰뚫어 안다. 법을 꿰뚫어 안다. 이 둘을 조건으로(緣) 일어난 족쇄도 꿰뚫어 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족쇄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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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akko saṅkappo vacīsaṅkhāro] 尋(伺)-思惟-語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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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ārammaṇā samiddhi, purisassa saṅkappavitakkā uppajjantīti? Nāmarūpārammaṇā bhanteti.
Te pana samiddhi, kva nānattaṃ gacchantīti? Dhātusu bhanteti.
Te pana samiddhi, kiṃ samudayāti? Phassasamudayā bhanteti.
사밋디여,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사람에게 사유[*尋-思惟]가 일어나는가?
존자시여, 정신과 물질[名色]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사밋디여, 그러면 그것은 어느 곳에서 다양하게 되는가?
존자들이여, 요소[界]들에서 다양하게 됩니다.
사밋디여, 그러면 그것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존자시여, 감각접촉 때문에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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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ko vitakko saṅkappo appanā byappanā cetaso abhiniropanā vacīsaṅkhāro
사색, 생각, 사유, 전념, [마음의] 고정, 마음의 지향, 말의 작용[口行]]
[Pubbe kho, āvuso visākha,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ṃ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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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āmasaṅkappo, byāpādasaṅkappo, vihiṃsāsaṅkappo] ☜ 욕계
[nekkhammasaṅkappo, abyāpādasaṅkappo, avihiṃsāsaṅkappo] ☜욕계를 벗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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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a hi tvaṃ, anuruddha, imampi aṭṭhamaṃ mahāpurisavitakkaṃ vitakkehi –
‘nippapañcārāmassāyaṃ dhammo nippapañcaratino, nāyaṃ dhammo papañcārāmassa papañcaratino’’’ti.
아누룻다여, 그대는 여덟 번째로
‘이 법은 사량분별(思量分別)없음을 좋아하고 사량분별 없음을 즐기는 자를 위한 것이지
사량분별을 좋아하고 사량분별을 즐기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이런 대인의 사유를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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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to kho tvaṃ, anuruddha, ime aṭṭha mahāpurisavitakke vitakkessasi,
tato tvaṃ, anuruddha, yāvadeva [yāvade (saṃ. ni. 2.152)] ākaṅkhissasi,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ssasi.
아누룻다여, 그대가 이러한 여덟가지 대인의 사유를 할 때 그대는 원하기만 하면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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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kkhuñcāvuso,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yaṃ vedeti taṃ sañjānāti, yaṃ sañjānāti taṃ vitakketi,
yaṃ vitakketi taṃ papañceti,
"도반들이여,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觸]입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있습니다.
느낀[*受] 것을 인식하고 인식[*想]한 것을 생각[*尋]하고 생각한 것을 사량분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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觸-受-想-尋-희론
界-想-見-尋-思
界-想-思惟(尋)-欲-熱-求
(色聲香味蠋) 法界 →法想 →法惟→ 法觸→ 法受→ 法欲→ 法熱→ 法求→ 法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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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īnaṃ, kaccāna, dhātuṃ paṭicca uppajjati hīnā saññā, hīnā diṭṭhi, hīno vitakko,
hīnā cetanā, hīnā patthanā, hīno paṇidhi, hīno puggalo, hīnā vācā;
hīnaṃ ācikkhati deseti pañña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hīnā tassa upapattīti vadāmi.
깟짜야나여, 저열한 요소[*界]를 반연하여
저열한 인식[*想], 저열한 견해[*見], 저열한 생각[*尋], 저열한 의도[*思],
저열한 소망, 저열한 염원, 저열한 사람, 저열한 말이 생긴다.
그는 저열한 것을 설명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한다.
그가 태어나는 곳은 저열하다고 나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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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kkhammadhātuṃ, bhikkhave, paṭicca uppajjati nekkhammasaññā,
nekkhammasaññaṃ paṭicca uppajjati nekkhammasaṅkappo,
nekkhammasaṅkappaṃ paṭicca uppajjati nekkhammacchando,
nekkhammacchandaṃ paṭicca uppajjati nekkhammapariḷāho,
nekkhammapariḷāhaṃ paṭicca uppajjati nekkhammapariyesanā;
nekkhammapariyesanaṃ, bhikkhave, pariyesamāno sutavā ariyasāvako tīhi ṭhānehi sammā paṭipajjati –
kāyena, vācāya, manasā.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세계를 조건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지각이 생겨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지각을 조건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의도가 생겨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의도를 조건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욕구가 생겨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욕구를 조건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열망이 생겨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열망을 조건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추구가 생겨난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제자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 추구를 찾아서
신체와 언어와 정신의 세 가지로 올바른 길을 걷는다.] <*☜ 66(six-sex)의 흐름 아님=nekkh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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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akkapaccayāpi vedayitaṃ; vitakkavūpasamapaccayāpi vedayitaṃ;
일으킨 생각을 조건으로 하여 [생기는] 느낌도 있다.
일으킨 생각이 가라앉음을 조건으로 하여 [생기는] 느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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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ssa ce, bhikkhave, bhikkhuno tesampi vitakkānaṃ ādīnavaṃ upaparikkhato uppajjanteva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pi dosūpasaṃhitāpi mohūpasaṃhitāpi,
tena, bhikkhave, bhikkhunā tesaṃ vitakkānaṃ asatiamanasikāro āpajjitabbo.
비구들이여, 그가 그 사유들의 위험을 면밀히 관찰하더라도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도 관련된, 나쁘고 해로운 사유들이 일어나면,
그 비구는 그 사유들을 마음챙기지 말아야 하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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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ṃ kho, bhikkhu, divā kammante [kammantaṃ (ka.)] ārabbha rattiṃ anuvitakketi anuvicāreti –
ayaṃ rattiṃ dhūmāyanā.
비구여, 낮에 행한 것에 대해 밤에 사유하고 고찰하는 것이 밤에 연기를 내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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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īte, bhikkhave, chandarāgaṭṭhāniye dhamme ārabbha cetasā anuvitakketi anuvicāreti.
비구들이여, 욕탐의 원인인 과거의 법들을 반연하여 마음으로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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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thāsutaṃ yathāpariyattaṃ dhammaṃ cetasā anuvitakkeyyāsi anuvicāreyyāsi, manasā anupekkheyyāsi.
Ṭhānaṃ kho panetaṃ vijjati yaṃ te evaṃ viharato taṃ middhaṃ pahīyetha.
그대는 들은 대로 배운 대로 법을 마음으로 隨尋 · 隨伺하고, 意로 숙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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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smiṃ pahīne tasmiṃ byantīkate santi adhicittamanuyuttassa bhikkhuno
sukhumasahagatā upakkilesā ñātivitakko janapadavitakko anavaññattipaṭisaṃyutto vitakko,
tamenaṃ sacetaso bhikkhu dabbajātiko pajahati vinodeti byantīkaroti anabhāvaṃ gameti.
Tasmiṃ pahīne tasmiṃ byantīkate athāparaṃ dhammavitakkāvasissati [dhammavitakkovasissati (ka.)].
이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나면 높은 마음을 닦는 비구에게는
친지들에 대한 생각, 지역에 대한 생각, 멸시 받지 않음에 대한 생각이라는 섬세한 오염원들이 남게 된다.
마음을 닦는 현명한 비구는 이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이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나면 이제 법에 대한 생각이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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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hoti samādhi na ceva santo na ca paṇīto nappaṭippassaddhaladdho
na ekodibhāvādhigato sasaṅkhāraniggayhavāritagato [sasaṅkhāraniggayhavāritavato (sī. syā. kaṃ. pī.),
sasaṅkhāraniggayhavārivāvato (ka.), sasaṅkhāraniggayhavāriyādhigato (?) a. ni. 9.37; dī. ni. 3.355] hoti.
4. 이러한 삼매는 평화롭지도 않고 수승하지도 않고 [오염원들을] 가라앉혀서 얻은 것도 아니고
단일한 상태를 증득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자극과 노력으로 [오염원들을] 억누르거나 차단하여 얻은 마음의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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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thā yathā, bhikkhave, bhikkhu yathāsutaṃ yathāpariyattaṃ dhammaṃ
cetasā anuvitakketi anuvicāreti manasānupekkhati
tathā tathā so tasmiṃ dhamme atthapaṭisaṃvedī ca hoti dhammapaṭisaṃvedī ca.
비구가 들은 대로 외운 대로
마음으로 생각해 보고 지속적으로 고찰해 보고 마음으로 숙고해 볼 때,
그는 그 법에 대해서 의미를 체득하고 법을 체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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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tehi dhammavitakkehi divasaṃ atināmeti,
그는 이런 법에 대한 사유로 하루 종일을 보내고
riñcati paṭisallānaṃ, nānuyuñjati ajjhattaṃ cetosamathaṃ.
홀로 앉음을 소홀히 하며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止]에 몰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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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na caparaṃ, sandaka, idhekacco satthā takkī hoti vīmaṃsī.
So takkapariyāhataṃ vīmaṃsānucaritaṃ. sayaṃpaṭibhānaṃ dhammaṃ deseti.
Takkissa kho pana, sandaka, satthuno vīmaṃsissa
sutakkitampi hoti duttakkitampi hoti tathāpi hoti aññathāpi hoti.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논리가요 탐구자입니다.
그는 논리에 의해 안출(案出)되었고 탐구를 거듭하여 스스로가 구명(究明)한 법을 설합니다.
산다까여, 그러나 논리가요 탐구자인 스승은
논리를 바르게 전개한 것도 있고 논리를 잘못 전개한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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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kapariyāhataṃ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i vīmaṃsānucaritaṃ sayaṃpaṭibhānaṃ.
yassa ca khvāssa atthāya dhammo desito so niyyāti takkarassa sammā dukkhakkhayāyā”ti.
사문 고따마는 이론으로 완전 무장하여 법을 설하고, 자기 영감에 따라 검증된 법을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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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tha yā vīmaṃsādhipateyyā cittekaggatā, ayaṃ vīmaṃsāsamādhi.
Samahite cite kilesānaṃ vikkhambanatāya paṭisaṃkhānabalena vā bhāvanābalena vā, idaṃ pahānaṃ.
거기에서 고찰이 탁월하여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된 상태가
고찰에 의한 삼매(vīmaṃsāsamādhi, 考察三昧)이다.
마음이 삼매에 들어, 성찰의 힘 또는 닦음의 힘으로 오염이 중지된 상태가 되었을 때 그것이 정근이다.
Tattha ye assāsapassāsā-vitakkavicārā-saññāvedayitā-sarasaṃkappā, ime saṃkhārā.
거기에서 들숨과 날숨, 생각과 숙고, 지각과 느낌, 기억과 의향, 이것이 지음이다.
Iti purimako ca vīmaṃsāsamādhi kilesavikkhambhanatāya ca pahānaṃ ime ca saṃkhārā,
tadubhayaṃ vīmaṃsāsamādhipadhānasaṃkhārasamannāgataṃ iddhipādaṃ bhāveti
vivekanissitaṃ virāganissitaṃ nirodhanissitaṃ vosaggapariṇāmiṃ.
이와 같이 고찰에 의한 삼매를 처음으로 하여, 오염이 중지된 상태에서의 정근과 이러한 지음(行)이 있다.
‘고찰에 의한 삼매’와 ‘정근과 지음을 갖춘’ 두 가지 신통의 기반을 닦는다.
[이 신통의 기반은] ‘떠남에 의지하고 탐냄의 여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포기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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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ridaṃ, bhikkhave, nandassa satisampajaññasmiṃ hoti.
Idha, bhikkhave, nandassa 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viditā saññā…pe… viditā vitakkā…pe… abbhatthaṃ gacchanti.
Idaṃ kho, bhikkhave, nandassa satisampajaññasmiṃ hoti.
5. "비구들이여, 여기서 이렇게 난다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난다에게는 분명하게 지각되는 느낌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분명하게 지각되는 인식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분명하게 지각되는 생각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난다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린다.]
첫댓글 다양한 자료... 잘 보겠습니다.......
저의 의견은... 글로 올립니다.......
이미... 두 갈래 사유 경을 ,,, 댓글로 올리셨더군요....... 잘 통하네요.....
봄봄님 고맙습니다. 올려주신 자료 잘 읽어보겠습니다.
어행인 위딱까와 위짜라...에서 위짜라가 '사유'로 번역되고
그리고 정사유와 사사유에서 '사유'로 번역되는 상깝빠가 있고... 등등
아직 心행, 意행, 語행, 身행이 헷갈리고 정리가 되지 않았는데요...
마침 봄봄님께서 올려주신 자료가 도움이 됩니다...
항상 공부하신 것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