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잡록 자서(自序)
오랑캐의 난은 어느 시대에도 다 있었다. 주 선왕(周宣王) 때에는 험윤(玁狁 옛 종족으로 흉노의 옛 이름)이
심히 기승을 부렸고, 또 한 고조(漢高祖) 때에는 묵특[冒頓]이 횡행하였으니, 6월에 출병시킨 일이라든지 후한
뇌물을 보내준 계략 따위는 본래 부득이한 일들이었다. 이제 왜적의 변란이 아무런 대비도 없을 때에 일어나
서 먼저 상주(相州)에 견줄 요충지의 군사가 궤멸했고 또 장강(長江 낙동강을 말함)과도 같은 험새(險塞)를
잃어버려, 임금은 파천(播遷)하기에 이르렀고 종묘 사직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8도는 함락되고 만백성은
짓밟혀 우리 국가의 당당하게 빛나는 왕업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 민심은 한실(漢室)에 기울 듯 조국을 생각했고, 하늘의 뜻은 주(周) 나라에 돌아가듯 명 나라에
쏠려 관군이 패전하였지만 의병이 일어났고, 우리 군대가 패퇴하였으나 명군(明軍)이 왔다. 그리하여 비로소
토벌을 벌인 끝에 왜적을 국경 밖으로 몰아 내어 국토를 다시 회복하였고 파천했던 임금도 환도했으니,
명(明)의 출병이야말로 그 은혜가 막중하다. 그러나 천심(天心) 이 돌아서지 않으매 화근이 제거되지 않았으니,
적은 3면을 점거하고서 강화를 요구하여 온 것이었다. 황제의 도량이 관대하여 전쟁을 그만두고, 왕을 봉해
주기를 의논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휴식을 바랐다. 그리하여 멀리 사신을 보냈으니 이것은 후한 뇌물을 보내
준 옛 계략과 같은 것으로, 그 은덕 또한 높다 하겠다.
그런데 저 짐승과 같은 왜적들이 은덕을 저버리고 하늘을 깔보며 해[日]를 욕하여 관군을 도륙하고 침략을
자행하자, 황제의 위엄은 다시 진동하였다. 그리하여 고래[鯨]떼 같은 왜적의 무리가 사라지고서야 변경의
전진(戰塵)이 깨끗이 맑아지고 사방이 편안하여졌으니,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이보다 더 클 데가 어디 있겠는
가. 아! 국운이 막혀 재화와 난이 연달아 일어나 7년 동안이나 전쟁이 계속되었고, 황제의 군사가 세 차례나
출동하였다. 싸우고 수비하기에 편할 날이 없었고 이기고 패하고 할 적마다 기쁘고 비통하였던 일은 한 마디
로 다 말할 수 없다.
나는 때를 잘못 타고나서 이러한 난리를 만나고도 임금을 위해 죽지 못했으니, 신하되고 백성된 도리에
죄책을 면할 길이 없어 한밤중에 주먹을 불끈 쥐고 한갓 혼자서 눈물을 닦을 따름이다. 아! 비록 나랏일에
힘을 바치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은 늘 왕실에 있어서, 승전의 소식을 들으면 춤을 추면서 그 일을 기록했고
아군이 패전한 것을 보면 분함에 떨면서 그 일을 쓰고는 했으며, 애통한 말로 효유(曉諭)하는 교서(敎書)라든가
이첩(移牒)ㆍ공문ㆍ격서(檄書)에 이르기까지 본 일과 들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얻는 족족 기록하고, 간간이
나 개인의 의견을 넣어 연결시켜 글을 만들었다. 이 글이 후일 지사(志士)들의 격절탄상(擊節歎賞)하는 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충신 열사의 사적과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잊은 자의 죄상이 여기에 누락되지 않았다
면 직책 밖의 외람된 일이라는 책망을 나는 달게 받겠다. 아! 한 가닥 천성이 매우 강개하여, 옳지 않은 줄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책망을 당할 것인데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임오년(선조 15년, 1582) 왜란이 싹튼 초기부터 비롯하여, 경술년(광해군 2년, 1610)에 겨우 안정되기 시작한
무렵까지 끝냈는데, 내가 정유년(선조 30년, 1597)에 피난하고 왜적을 토벌한 일을 그 다음에 다 엮어 넣어
나눠서 네 편으로 만들고 ‘난중잡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궁벽한 시골이라 견문이 고루하여 사실과 어긋난
기사도 없지 않을 것이나, 그 가운데는 또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려는 뜻도 많이 들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 잠을 안 자고 심심풀이로 읽는 데 그칠 뿐이랴. 공자가 이르기를, “나를 알아 주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 나를 벌하는 것도 오직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의
뜻을 가지고 외람되나마 후세의 군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만력(萬曆)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가을 7월 16일.
한양인(漢陽人) 조경남(趙慶男) 씀.
[주-D001] 6월에 출병시킨 일 :
주 선왕(周宣王 B.C. 827~781) 때에 당시 유목민족이었던 험윤(玁狁)이 변경을 침노하자, 6월에 윤길보(尹吉甫)
를 시켜 출병 토벌하게 했다. 《詩經》〈小雅 六月〉
[주-D002] 후한 뇌물을 보내준 계략 :
한 고조(漢高祖) 때에 흉노(匈奴)의 군장(君長)인 묵특[冒頓]이 득세하여 변경을 침노했는데, 고조가 평성(平城)
에서 묵특이 이끄는 40만 정병에게 포위당했다. 사세가 급박하게 되자, 묵특의 왕후 연씨(閼氏)에게 많은 뇌물
을 보내어 묵특의 포위를 풀게 했다. 묵특은 본음이 ‘묵독’이어야 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종래 ‘묵특’이라고 읽어
왔으니, 여기서도 이에 따른다.
[주-D003] 상주(相州)에 견줄 요충지의 군사 :
송(宋) 나라 흠종(欽宗) 때에, 금(金) 나라가 침입하여 중요한 고장 상주(相州)가 함락된 것을 인용하여 왜적의
침입을 말한 것이다.
[주-D004] 장강(長江)과도 같은 험새(險塞) :
장강(長江)은 중국의 양자강인데, 남과 북이 싸울 때면 장강을 지키고 못 지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의 임진강ㆍ대동강을 지키지 못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5] 민심은 한실(漢室)에 기울 듯 :
한(漢) 나라가 한때 왕망(王莽)에게 17년 동안이나 짓밟혔으나, 민심이 다시 한실(漢室)로 기울었으므로,
사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왕망을 멸할 수 있었다.
[주-D006] 하늘의 뜻은 주(周) 나라에 돌아가듯 :
주(周)는 천자의 나라인 명(明) 나라를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주-D007] 왕을 봉해주기를 의논함으로써 :
명 나라에서 일본과의 강화를 허락하여 수길(秀吉)을 왕으로 봉하여 주기로 하였으나, 곧 결렬되었다.
[주-D008] 이첩(移牒) :
예로부터 국가에 큰 난이 생기면, 임금이 직접 백성에게 알리는 것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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