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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하는 것으로서의 세계 - 어느 한 철학도의 철학적 에세이 |
Ⅰ. 어떤 한 사색가의 철학적 사색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짐으로써 시작된다. 즉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무엇인가? 우주 속에 존재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모든 것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와 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능한가? 그의 이러한 철학적 물음에의 사색은 이미 인류의 상고(上古) 시대부터 기원하는 것이다. 인류 철학사에 있어서 모든 철학자 및 사색가들은 그들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에 대해 어떤 신비로움을 체험하였으며, 그 신비의 궁극적 원인을 탐색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때로는 이데아라는 이름으로 또 때로는 제일원인이라는 이름으로 표상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브라흐만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태극(太極)이라는 이름으로 표상하였다. 이와 같은 궁극적인 신비의 무엇에 대한 언표는 결국 말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규정지어지기도 하였다. 중국 고대시대의 老子는 "道可道, 非常道(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1)라는 말로써, 20세기의 탁월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된다."2)라는 말로써 언표하였다. 결국 철학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인류의 고대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나 사색가들이 우주와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의 위치를 해명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철학적 사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존재'에 대한 탐구였다. 왜냐하면, 도대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있음의 문제에서 출발한 철학적 사색은 늘상 경험하는 존재계, 즉 현상계에서 어떤 불변의 법칙성을 발견하였고, 이러한 발견이 그들로 하여금 절대자나, 제일원인, 신 또는 태극(太極)과 같은 것을 상정하게 하였다. 여기서 세계는 현상계와 본체계로 구분 지어진다. 현상계는 우리가 늘상 경험하는 변화하는 세계를 말하며, 본체계는 변화무쌍한 현상계의 배후에 있는 영원 불변한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론적 탐구는 존재를 본체와 현상으로 이분(二分)한다. 본체는 현상의 배후에 있으며 현상은 본체의 표면에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하듯이 현상은 가상이며 본체가 현실(또는 실재)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양자가 모두 현실이다. 단지 차이점은 현상은 드러난 현실이며 본체는 배후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색의 대표적인 두 철학자로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들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가 대립하는 것들로 이루어졌다고 보았으며, 이 대립하는 것들로 이루어졌다고 보았으며, 이 대립하는 양자가 서로 뒤바뀌며 변화하는 것에 주목하였다. 이에 반해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현실 위에 서 있는 영원 불변한 것에 주목하였다. 흔히 철학사에서는 파르메니데스를 존재로,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을 주장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존재와 생성이라는 상반되는 개념으로 서로 사상적인 대립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을 보다 면밀히 검토해 보면 올바른 주장이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그는 대립이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 깊은 이러한 대립들을 유지하고 있는 단일성이 드러나는 어떤 것을 밝혀낸다. ·····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변화 속에서 보여지고 있는 일자(一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변화하면서 머무른다." 일자는 생동력 있게 자신을 전개시키며, 또 다시 자신만으로 자신을 거둬 들이는 단일성이다. 이렇게 단일성으로서의 일자는 균열된 세계의 심층 현실이다.>3) 이상의 기술을 통하여, 이제 우리에게 드러난 사실은 철학의 문제가 결국 존재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론은 현상과 본체의 문제이다. 따라서 모든 뛰어난 철학과 철학자들은 언제나 본체와 현상의 문제로 고심해 왔으며 그 문제의 해명에 전력투구 해 왔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세계에서, 우리 자신도 탄생·성장·죽음이라는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우주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사색을 계속해 왔고, 계속하고 있으며, 계속할 것이다. 이러한 사색의 연속성 속에서도 도대체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해 내린 해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정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개개인의 체험 속에서만 밝혀질 수 있으며, 보편타당하게 객관화 될 수 없는 것인가? 적어도 앞서 언급한 노자나 비트겐슈타인의 언표에 따르면, 본체에 대한 앎은 개개인의 체험 속에서 얻어지며 보편적으로 객관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오늘날에 바로 지금 여전히 인류 철학사의 철학적 사색에 몰두하려는 자는 진리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그 진리를 인식하기 위하여 그 사색에 대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 진정한 철학적 사색은 단순히 다른 사람이 써 놓은 권위 있는 문헌에 의존하지 않는다. 진정한 철학적 사색은 모든 문헌에 의존하며 동시에 어떠한 문헌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색은 그 사색 자신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며 체험하는 삶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 자신의 내면의 원천에서 철학적 사색을 이끌어 내 오지 않으면 안된다. 삶이라는 신비 속에서 자유로이 사색하여 얻은 체험이 아닌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진실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용기를 가지고 우리 자신의 철학적 사색을 전개하고자 함에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전제로부터 이 사색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어떤 전제가 없이는 학문이 성립할 수 없으며, 전제는 철학적 사색에 뺄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이다.4) ??? 여기서 내가 설정한 우리의 철학적 사색의 출발점으로서의 전제는, "세계는 영원히 회귀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전제가 옳으냐 그르냐에 있지 않다. 이 철학적 사색의 출발점을 통해, 도대체 무엇이 밝혀 질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Ⅱ. 세계는 영원히 회귀한다.----이것이 지금 우리의 철학적 사색의 출발점이다. 최초의 문명기에서부터 시간의 진정한 본질은 불가사의한 것이었으며, 힌두 문화 및 그리스·로마 세계의 예술가들은 영원한 시간의 순환으로서 회전하는 역년을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모습으로 나타내었다. 이러한 상징은 일정한 간격으로 허물을 벗는 뱀의 모습을 관찰한데서 기원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늘상 경험하는 자연의 관찰에서 하나의 법칙성을 발견해 냈다. 즉 낮과 밤의 순환, 달의 주기적인 순환, 사계절의 순환 같은 것 등에서 이것이 주기적으로 어떤 법칙성을 보인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들은 대우주적 차원, 즉 전(全)우주에 이 법칙성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살아 있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라는 인격적인 관계였다. 고대인들의 우주관은 유기체적인 우주관이었다. 영원회귀의 관념은 고대 문명에서 두드러지게 보인다. 우리는 인도에서, 또 중국에서 그리고 희랍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왜 회귀의 관념을 가졌던 것일까?, 그들이 지녔던 회귀의 관념은 단순히 자연의 경험적 인식에만 뿌리를 두었던 원시적 사고에 불과했던 것일까?, 오늘날에 우리가 그들보다 더 발달된 기술 문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철학적 사유 역시 우리보다는 덜 진보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고대인들의 철학적 사유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들이 제시한 문제들에 대한 해명은 아직도 객관적으로는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고대의 철학적 사색은 우주 만물이 끊임 없이 변화한다는 것에 주목하였고, 여기서 하나의 법칙성을 발견해 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해가 중천(中天)에 이른 뒤에는 반드시 기울고 달도 차면 이지러진다(日中則仄,月盈則食)"든가, "서리가 내리면 얼마 안 있어 엄동설한이 온다(履霜堅氷,陰始凝也. 馴馳其道,至堅氷也)"든가, "해와 달이 운행하며, 추위와 더위가 서로 교체된다(日月運行, 一寒一暑)"든가 하는 사실로부터 '物極必反(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 간다)', '反復其道(법칙성은 되풀이 된다)', '恒久不已(법칙성은 영원하다)'등의 법칙성을 찾아 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 만물의 변화는 이런 법칙을 갖고 진행하며 동시에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가지 요소가 변화 가운데서 상호 작용하며 일정한 조화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5) 이러한 철학적 사색은 고대 희랍에서도 보여지는데, 그 대표적 철학자로서 헤라클레이토스를 들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 만물이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만물이 영원히 흐른다는 것이 세계의 참된 본질이라고 사색하였다. 이 세계는 정도에 따라 불타오르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있는 불인 것이다.6) 또 그는 이 세계가 대립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이 대립하는 것들이 통일되는 곳에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있다고 사색하였으며, 이러한 대립하는 것들을 통일시키는 것이 로고스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세계의 근원에는 불변인 영원한 불이 있으며, 세계 그 자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즉 세계는 멈출 줄 모르는 부단한 변화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정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이 영속적인 흐름은 로고스의 법칙에 의한 것이다.7) 이처럼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적 사색의 위대함은 우주 만물의 영속적인 변화에 주목하고, 이 변화 속에서 불변의 법칙, 즉 로고스를 인지한데 있다. 사실 이 점은 존재의 영역을 연구한 모든 뛰어난 철학과 철학자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이체는 이러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生成)의 철학으로부터 철학적 사색을 자극 받았고, 그는 대담하게 영원회귀의 사상을 주장한다. 니이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언표에 주목할 수 있다. <모든 사물 가운데서 달릴 줄 아는 것은 이미 언젠가 이 오솔길을 달렸음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모든 사물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은 이미 언젠가 일어났고 이루어졌고 달려가 버렸음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것이 이미 있었다면 그대, 난장이는 이 순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출입구도 이미 있었음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사물은 굳게 결합되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자기 자신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모든 사물 가운데서 달릴 줄 아는 것은 이 밖으로 나가는 기나긴 오솔길을 언젠가는 반드시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빛 속에 기어다니는 이 느린 거미, 그리고 달빛 자체, 그리고 함께 속삭이면서, 영원한 사물들에 대해서 속삭이면서 출입구에 있는 나와 그대, 우리는 모두 이미 있었음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회귀하고 밖으로 나가는 우리들 앞에 있는 저 다른 길을, 이 기나긴 소름끼치는 오솔길을 달리고 우리는 영원히 회귀함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8) 또 그는 짜라투스트라의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물 자체가 춤춘다. 만물은 다가와서 손을 내밀고 웃고 달아났다가 다시 되돌아 온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 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회전한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핀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원환(圓環)은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의 공은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한 오솔길은 곡선이다.>9) 뿐만 아니라, 니이체는 과학적 명제, 즉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또한 영원회귀를 요청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0) 니이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성하며 영원회귀한다고 사색하였다. 그리고 이 세계는 질적인 측면에 있어서나 양적인 측면에서도 불변이다. 그에게 있어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성립한다는 것 자체는 이미 우주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일한 것으로서 지속하며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이체에 있어서 영원회귀하는 것으로서 세계 그 자체가 성립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도처에 있는 '힘에의 의지' 때문이다. 여기서 마이어의 글을 살펴보자. <사실에 있어서 오직 하나의 힘이 있을 뿐이다. 영원한 교환 속에서 살아있는 자연과 죽어있는 자연에서의 같은 것이 회전하고 있다. 힘의 상태가 없다면 아무 곳에서도 어떠한 과정도 있을 수 없다.>11) 따라서 니이체는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다.>12)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영원회귀의 관념은 이미 고대 문명에서 사색했던 것이다. 고대 문명의 철학적 사색에서 '부분', 즉 밤과 낮의 태양 주기, 계절들의 연례적인 순환, 달의 주기, 출생, 성장, 죽음이라고 하는 생물학적 순환이 '전체'에 적용되었으며, 우주적인 대희년의 순환사상이 발전되었다. 대희년이라는 순환적인 시간 사상은 인도인의 철학적 사색,(즉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에서 그 정점에 도달하였다. 인도인들의 철학적 사색에서 우주의 대희년은 그 부속하는 순환들과 함께 끝없이 되풀이하는 매우 정확한 유형을 가지고 있었다.13) 그들은 그러한 영원회귀하는 세계에서 정신적인 자유를 추구하였다.
Ⅲ. 지금까지 언급한 것을 종합한다면, 우리 인류의 철학적 사색은 늘 경험하는 자연에서 관찰, 추리, 유추, 사색하여 우주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는 서로 대립하는 것들의 조화로운 교체를 통한 변화임을 인지하였다. 또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모든 뛰어난 철학과 철학자들은 그 변화가 하나의 법칙성을 띄고 있음을 알아냈다. 여기에서 그들은 이러한 변화가 일정한 주기로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고 보았다. 즉 세계는 영원히 회귀한다고 사색했던 것이다. 영원회귀하는 것으로서의 세계는 지금 우리의 철학적 사색에 있어서 매우 근본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색의 출발은 자연의 법칙에 의존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즉 우리는 늘상 경험하는 자연계에서 달이 공전하고 지구가 자전하며, 또 사계절이 주기적으로 순환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떤 면에서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분명히 그것은 하나의 법칙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연의 말할 수 없는 신비스런 법칙의 지배는 인간 외에 다른 모든 존재에만 해당하며, 자연을 관찰하여 그러한 하나의 법칙성을 발견해낸 우리 자신에게는 그 법칙성이 해당하지 않는 가하는 점이다. 과연 우리 자신만이 유독 그 법칙성에서 예외일 수가 있을까? 바로 이러한 의문과 사색에서 우리는 영원회귀의 사상을 요청한다. 영원회귀의 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속에 있는 모든 존재의 영원회귀를 의미하며, 그 사상의 근거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회귀한다. 그리고 영원회귀하는 것으로서의 세계를 가능케 하는 말할 수 없는 신비스런 무엇이 있다. 우리는 그 무엇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는 영원히 회귀하며, 세계 속에 있는 모든 존재자는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그 양은 불변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일한 것이 영원회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영원회귀하는 것으로서의 세계를 가능케하는 것이 바로 철학자들이 말하는 바,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 그것이다. 이때 현상과 본체는 서로 다르거나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체의 힘에 의해 드러난 것이 바로 현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물과 물결처럼 구분 지을 수 있으나, 동일한 것이다. 우주 만물을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으로 지속시키는 것이 바로 이 본체의 힘이며, 이 힘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력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본체의 힘은 생명의 힘이며, 이 힘의 영원성은 생명의 영원성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철학사에서 밝혀진 바는 바로 이 생명의 영원성의 근거 그 자체는 설명할 수 없고, 단지 그 힘이 있다는 것만을 알았다는 것이다. 설사 모든 신비가 벗겨진다고 하더라도, 신비스런 것은 여전히 신비의 신비인 이 생명의 영원성인 것이다. 우주 속의 모든 존재는 생명의 영원성으로 영원 회귀하며, <우리 자신도 그 속에서 살아가고 움직이며 존재한다.>14)
※ 참고 문헌 1. 니이체, 『권력에의 의지』, 강수남 옮김, 청하출판사, 1988. 2. ______, 『비극의 탄생』, 박준택 옮김, 박영사, 박영문고76, 1982. 3. ______, 『이 사람을 보라』, 박준택 옮김, 박영사, 박영문고141, 1983. 4. ______, 『즐거운 지식』, 권영묵 옮김, 청하, 1989. 5. ______, 『짜라투스트라는 말했다』,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1988. 6. 다카쿠스 준지로, 『불교철학의 정수』, 정숭석 옮김, 대원정사, 1989. 7. 모리스, 『시간의 화살』, 정윤근·김현근 공역, 소학사, 1991. 8. 바이셰델, 『철학의 뒤안길』, 이기상·이말숙 옮김, 서광사, 1990. 9. 박준택, 『니이체 思想과 그 周邊』, 대왕사, 1990. 10. ______, 『니이체의 '永遠回歸思想'의 종합적 고찰』, 哲學探究 第十輯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1993. 11. 박정근, 『易哲學의 根本槪念』, 한국외국어 대학교 논문집, 1993. 12. ______, 『儒家哲學에 있어서 삶과 배움의 의미』, ___________, 1992. 13. ______, 『삶이란 무엇인가 -周易을 中心으로』, 東方제7호, 한국외국어대학 동양대학, 1988. 14.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 이광래 옮김, 종로서적, 1982. 15.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이영철 옮김, 종로서적, 1982. 16. 뿔리간들라, 『인도철학』, 이지수 옮김, 天池, 1991. 17. 쇼펜하우어, 『知性에 대하여』, 박범수 옮김, 민족사, 1991. 18. 슈바이쳐, 『나의생활과 사색에서』, 권미영 옮김, 일신서적공사, 1986. 19. 야스퍼스,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들』, 정영도 옮김, 이문출판사, 1987. 20. 정동호, 『니이체 연구』, 탐구당, 1983. 21. ______, 『니이체 철학의 현대적 조명』, 청람문화사, 1984. 22. [周易] 최완식 역해, 계원출판사, 1989. 23. 케인스, 『역사철학』, 이성기 옮김, 대원사, 1990. 24. 호킹, 『시간의 역사』, 현정준 옮김, 삼성출판사, 1990. 25.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上·下』,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1984,1987. 26. [老子讀本], 余培林譯註, 三民書局, 1993. 27. F.Capura 『The Tao of Physics』 Boulder:Shambhala Rublications, 1975.
1) 余培林, [老子讀本], 『道德經, 第一章』, 17쪽 2) L. Wittgenstein, 『논리-철학논고』, 이영철 옮김, 天地, 143쪽 3) W.바이셰델, 『철학의 뒤안길』, 이기상 이말숙 옮김, 서광사, 39,40쪽 4) 쇼펜하우어, 『知性에 대하여』, 박범수 옮김, 박영사-박영문고13, 60쪽 5) 박정근, 『儒家哲學에 있어서 삶과 배움의 의미』 6) 요한네스-휠쉬베르거, 『서양철학사 상·하』,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65쪽 7) 칼 야스퍼스,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들』, 정영도 옮김, 이문출판사, 24-27쪽 8) 니이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204쪽 9) 위의 책, 282쪽 10) 니이체, 『권력에의 의지』, 강남수 옮김, 청하, 603쪽 11) 정동호, 『니이체 연구』, 탐구당, 228쪽 재인용 12) 니이체, 『권력에의 의지』, 강남수 옮김, 청하, 607쪽 13) E.케언스, 『역사철학』, 이성기 옮김, 대원사, 442쪽 14) 앙리 베르그송, <思惟와 運動>, 이광래 옮김, 종로서적, 14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