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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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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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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료에 나타난 동이 고조선의 실체
“동방문화의 뿌리는 漢族이 아니라 韓族” 최초 확인(신동아.2004.2)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동양문화의 주역이다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이다. ‘사고전서’에서 단군과 동이족의 실체를 확인한 심백강 원장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여러 ‘고기(古記)’ 등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적지 않은 역사서적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일제 36년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런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중의 동이사료’ 등 4 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은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로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가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사고전서’ 중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해당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의 길이 열리는 것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 보기로 한다.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냥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嵎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등이 그것이다. 이자(夷字)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러한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융적(戎狄)이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어서 이들 이적(夷狄)들은 사실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벽(開闢)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兗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로부터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이(夷)를 저(柢)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柢)란 과연 무엇인가. 저(柢)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柢)’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柢),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柢)의 의미를 다시 저지(柢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柢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그 뿌리를 두고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柢地)의 저(柢)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柢)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 동안 알아 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뿌리 이자, 즉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 이자로 변질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고전서’에는, “맹자가 추나라 사람으로,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지인(東夷之人)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라 하였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맹자가 말했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에 의해 건립된 은은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까지도 모두 동이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 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지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다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도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도,낙낭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도,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가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일로서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러나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밝힌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하는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 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 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한 분으로 자칭 군자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본다면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말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이들이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 이전 우리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16)에 건국된 것으로 기술하여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가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널리 섭렵할 수 없다보니 어쩔 수 없는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이상 잘못 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다 보니,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인양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한 동이이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동이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도,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문헌상 최초의 동이인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모두 동이족 출신이었다.
넷째, 부여(夫餘)의 뿌리가 부유(鳧臾)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鳧山)이 발원지이며, 고구려가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고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한족의 시조는 황제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황(炎黃)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 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두파 세파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역사의 단절로 인한 민족 얼의 상실에 있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도(東京) 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이후 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앞으로 만일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심백강 沈伯綱
‘조선왕조실록중의 기자사료’ ‘이이 왕안석 경제개혁사상 비교연구’ 등
민족의 역사와 뿌리
‘역사왜곡 바로잡기’ 또 하나의 밑거름 [중앙일보]
# 중국사서에 나타난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한자가 많은 관계로 읽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괄호를 만들어 한글로 독음을 달아봤습니다. 중복되는 한자는 독음을 달지 않은것도 있으니 이는 윗부분의 독음을 참고하시면 되겠고, 역사 사료를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료의 출처에만 독음을 달았고, 내용부분은 사료의 독음보다 한자 자체가 글의 내용들을 풀어가는 열쇄가 되는 관계로 자료의 고유성을 살리기 위해 부러 독음을 달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이 자료에서는 '예족'을 언급함에 있어 '예'라는 한자어를 '濊'와 '穢'두가지를 혼용하였는데 이는 두 '예'자 모두 맞게 쓰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심백강 역사학박사 / 민족문화연구원장
최근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서 우리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며 일찍이 유례가 없는 역사침략을 강행하고 있다. 고대 중국인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와 다른 한국사라고 史料로써 증명한 것을 현대 중국인이 고구려사는 중국사라고 억지를 부리며 역사침략을 시도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우리는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기 앞서 먼저 중국이 왜 오늘 이 시점에서 동북공정을 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배경부터 규명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원인과 배경이 정확히 규명될 때만이 거기에 대한 정확한 대안의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강단사학계는 한국 고대사연구에서 고조선을 부정해 왔고 고구려사 연구도 대륙에 있던 고구려를 소홀히 한 채 한반도를 중심으로 진행해 왔다. 즉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사 침탈을 강행하기 전에 우리자신이 먼저 우리 역사의 단절과 축소를 자행 했던 것이다.
우리 강단사학 일각의 자주성이 결여된 이런 연구결과가 오늘 중국의 동북공정을 초래하는데 직간접의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서둘러 단절된 고조선사를 복원하고 한반도 중심의 삼국사연구를 대륙 중심으로 탈바꿈 하는 역사인식, 역사연구 방법론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강단사학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외면한채 여전히 타성에 젖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최근 고구려연구재단에서 출판된 『고조선,단군,부여』라는 저술을 통해서 볼 때 종래 고조선,단군,부여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한걸음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하여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 하라는 국민적 열망을 안고 출범한 단체가 국민의 세금으로 이런 연구결과물을 내놓은데 대하여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솔직히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이등박문은 우리입장에서는 역적이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영웅이다. 그래서 그의 동상을 일본 중의원 대청마루에 세워두고 민족의 영웅으로서 기린다. 마찬가지로 동북공정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역사침략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중국 중심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이다.
이제 우리도 중국 중심의 사대사관, 일본 중심의 식민사관을 버리고 한국 중심의 자주사관의 바탕 위에서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동북공정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우리 강단사학,실증사학에 내재된 단절사관이고 축소사관이다.
역사학의 혁명 없이는 동북공정을 뛰어 넘을 묘안은 없다. 新史學(신사학),新史觀(신사학)으로 역사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것만이 역사 지키기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유일한 대안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일시적으로 사료를 왜곡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자기 조상들이 써놓은 수천년 전해 내려온 원사료를 말살할 수는 없을 것이며 원사료가 파괴 되지 않고 존재하는 한 왜곡된 역사는 언제든지 시정이 가능한 것이다.
본 연구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을 민족적,영토적,문화적 각 방면에서 주로 중국의 사서들을 중심으로 고찰함으로써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아니고 고조선을 계승한 한국사라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民族(민족)과 種族(종족)은 본질상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본래 하나의 종족이 나누어져서 여러개 종족으로 된다. 예컨대 부여족이 백제족과 고구려족으로 분파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또 하나의 민족이 그 안에 무수한 종족을 포함하기도 한다. 오늘날 중국민족 안에 56개 종족이 내포되어 있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종족이 혈통상의 관련성을 의미한다면 민족은 문화상의 동질성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다. 즉 종족이라고 할 때는 생물상& #8228;체질상의 명사인 것이고 민족이라고 하면 정치상& #8228;문화상의 명사인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족과 고구려족은 종족상에서 상호 어떤 계승성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인들은 고조선족을 穢族(예족), 고구려족을 貊族(맥족)으로 인식하였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가. 『漢書(한서)』王莽傳(왕망전)에 보면 고구려를 다음과 같이 貊人(맥인)으로 호칭하고 있다. “先是莽發高句麗兵 當伐胡 不欲行 郡强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遼西 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句麗侯騶 嚴尤秦言 貊人犯法 不從騶起 正有& #23427;心 宜令州郡且尉安之……莽不尉安 穢貊遂反……於是貊人愈犯邊”
陳壽(진수)의 『三國志(삼국지)』東夷傳 濊條(동이전 예조)에서는 箕子朝鮮(기자조선)과 衛滿朝鮮(위만조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조선문제를 고조선조가 아닌 濊條(예조)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은 濊(예)를 고조선과 동일시하고 濊族(예족)을 고조선족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면 穢族(예족)과 貊族(맥족)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동일민족인가 다른 민족인가. 예족과 맥족은 기본적으로 東夷(동이)계열에 속하는 동일 민족이다. 예족이든 맥족이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東夷族(동이족)에서 출발된 민족인 것이다. 그러면 굳이 예와 맥으로 구분하여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司馬遷(사마천) 『史記(사기)』索隱(색은)과 『漢書(한서)』武帝紀(무제기)에 모두 “東夷濊君(동이예군)”이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濊族(예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가지 않고 주로 동방의 원거주지에 그대로 거주하던 夷族(이족)을 가리킨 것으로 파악된다. 『史記』索隱 “姚察以武帝時 東夷濊君降 爲倉海郡”. 그리고 貊族은 같은 東夷族이지만 나중에 동북방으로 이주해가서 살던 동이족으로서 이들을 원래 동방에 거주하던 東夷와 구별하여 貊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본다. 『周禮秋官注』 “夷隸 征東夷所穫”. “貊隸 征東北夷所穫”.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三國志』고구려조에는 東濊(동예), 三韓條(삼한조)에는 韓濊(한예)가 보이고 광개토왕비문과 『北史』신라조에도 韓濊(한예)라는 기록이 있으며 『隋書(수서)』에는 遼濊(요예)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漢書(한서)』의 天文志(천문지)에는 胡貊(호맥), 『後漢書(후한서)』東夷列傳(동이열전)에는 大水貊(대수맥),小水貊(소수맥) 楊雄(양웅)『百官箴(백관잠)』에는 東貊(동맥)& #8228;奚貊(계맥) 『三國史記』에는 梁貊(양맥)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穢(예)는 東方夷(동방이)의 통칭이고 貊(맥)은 東北夷(동북이)의 통칭이며 그것을 다시 세분하면 거주지역에 따라서 그와 같이 구별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중국인들은 西周(서주)이래 자기들과 다른 異民族(이민족)을 호칭할 때 통상 夷(이) 또는 東夷(동이)라고 하였다.
『서경』禹貢(우공)편에 鳥夷(도이),& #23886;夷(우이),萊夷(내이),淮夷(회이)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夷族(이족)들은 西周(서주) 이전부터 토착민으로서 중국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夷族들은 중국의 토착민족으로서 중국의 동방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의 전 지역에 걸쳐서 널리 분포되어 살았으며 여기서 四夷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조선은 동이 계열에 속하는 여러 부족 들이 모여서 최초로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고조선민족은 중국의 동방, 동남방, 동북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활동하던 동이계열의 부족들이 다양하게 포함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고조선 국가 구성의 기본성분은 濊族(예족)이고 주요성분은 맥족이었다고 본다. 東北夷(동죽이)인 貊族(맥족)은 결국 東夷인 濊族(예족)에서 분파된 것이라고 할 때 貊族은 혈통상에서 濊族을 계승한 것이 자명하다. 또 고구려는 고조선 멸망이후 고조선의 옛 터전에서 그 유민인 穢族과 貊族을 중심으로 건국했으므로 고구려는 민족상에서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3. 영토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고조선과 고구려가 영토상에서 어떤 계승성이 있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과연 오늘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우선 그것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山海經(산해경)』18권 海內經(해내경)에서는 고조선의 위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여기서 北海(북해)는 渤海(발해)를 가리킨다. 『산해경』해내경에서 고조선국의 위치로 설명된 “발해의 모통이”를 오늘 그 해당하는 지점을 찾아본다면 중국의 산동성,하북성& #8228;요녕성 그리고 한반도 일대가 여기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동해의 안쪽이라”고 말한 만큼 절강성,강소성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한 지역으로 비정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해의 안쪽 발해의 모통이에 고조선국이 있다”는 『山海經』海內經의 표현은 너무 추상적인 감이 없지 않다.
『산해경』12권 海內北經(해내북경)을 보면 거기에는 고조선의 위치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조선은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다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 列陽(열양)은 연나라에 속해 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산해경』해내북경에 말한 고조선의 위치는 오늘의 河北省 秦皇島市 盧龍縣(하북성 진황도시 농용현) 일대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필자가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 “고조선이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列陽은 燕(연)에 속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宋代 四大史書(송대 사대사서) 중의 하나인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의 河北道 平州 盧龍縣條(하북도 평주 노용현조)에 따르면 宋代(송대)의 平州(평주)가 禹貢 九州(우공 구주)에서는 冀州(기주), 周(주)나라 때는 幽州(유주)지역이고 春秋(춘추)시대에는 山戎孤竹(산융고죽),白狄肥子國(백적비자국)이며 전국 시대는 燕(연)에 소속되었다가 秦始皇(진시황)이 천하를 兼倂(겸병:통일)한 뒤 右北平(우북평) 및 遼西 2郡(요서 2군) 지역으로 되고 漢(한)나라 때는 遼西郡(요서군)의 肥如縣(비여현)으로 唐(당)나라 때 다시 平州(평주)로 변경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에 의하면 唐宋(당송)시대의 平州가 秦漢(진한)시대엔 右北平(우북평),遼西(요서)였고 전국시대에는 燕(연)나라에 소속된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바꾸어 말하면 列陽(열양)은 전국시대 때 燕에 속해 있다가 秦漢(진한)시대에 右北平 遼西(우북평 요서)로 바귀고 唐宋시대엔 平州로 되었던 것인데 그 平州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산해경』에 말한 “燕(연)에 소속된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다”는 고조선이 바로 오늘의 하북성 동쪽 秦皇島市(진황도시)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고조선이 海北山南(해북산남)에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다가 발해를 가리킨다는 것은 긴말을 요치 않는다. 다만 여기 말하는 山이 과연 어떤 산을 가리킨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발해를 중심으로 볼 때 산동성의 태산, 하북성의 갈석산, 요서의 의무려산, 요동의 개마대산 등 여러 명산 들이 발해부근에 포진 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여러 명산 들 중에서 고조선이 위치해 있었던 海北山南의 산은 과연 어떤 산일까. 필자는 그 산이 바로 碣石山(갈우산)이라고 비정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 河北道 盧龍縣條(하북도 노용현조)를 보면 “여기에 갈석산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갈석산은 盧龍縣(노용현) 남쪽 23리에 있는데 발해 곁에 竭然(갈연)히 우뚝 서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름을 갈석산이라 한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산해경』에 말하는 “海北山南”은 海北은 발해북쪽, 산남은 갈석산 남쪽을 의미하며 고조선은 발해 북쪽 갈석산 남쪽 즉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오늘의 河北省 秦皇島市 盧龍縣(하북도 평주 노용현조) 일대가 바로 고조선 지역임을 추단케 하는 보다 결정적인 근거는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盧龍縣條(노용현조)의 다음 기록에서 찾아진다. “朝鮮城 卽箕子受封之地 今有廢城(조선성 즉기자수봉지지 금유폐성)” 箕子(기자)가 다스리던 고조선의 옛성이 宋(송)나라 당시까지도 그 유적이 그대로 남아 보존되어 있었다는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산해경』해내북경에 말하는 고조선의 위치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箕子(기자)가 다스린 朝鮮城(조선성)이 盧龍縣(노용현)에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즉 발해와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는 고조선의 수도가 위치해 있던 지역이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발해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 연나라 열양의 동쪽 지역 즉 오늘의 하북성 요녕성 한반도의 광범한 지역에 걸쳐서 고조선의 영토가 위치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기자조선시대 발해,갈석산을 중심으로 하북성 요녕성 등 중국 동북지방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 위치해 있었던 고조선은 후일 서방 2천여리의 땅을 연나라 장군 秦開(진개)에 의해 탈취 당함으로써 그 영역이 滿潘汗(만번한)을 국경선으로 대폭 축소되게 된다. 고조선 영역의 중심지가 발해 갈석산에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위략』의 저자 魚& #35938;(어환)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러면 고조선이 서쪽으로 2천여리의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기고 국경선이 滿潘汗(만번한)으로 축소되게 된 시기가 구체적으로 언제쯤일까. 고조선을 침략한 연나라 장수 秦開(진개)는 燕昭王(연소왕 : 기원전 311-279)때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 4세기 말 ~3세기 초에 고조선 영역의 대폭적인 축소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서쪽 영토가 축소된 이후의 국경선으로 된 滿潘汗(만번한)을 압록강으로 보느냐 아니면 요하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오늘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滿潘汗 서쪽 즉 요동에서 북경 永平府(영평부)까지 2천여리 땅이 본래는 고조선 땅이였다는 사실은 丁茶山(정다산)도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고조선 영역이 기원전 3세기 이전까지는 오늘의 요녕성 및 하북성 동부를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였으나 기원전 3세기 초 서방 2천여리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기고 오늘의 요하 이동으로 영역이 축소 되면서 고조선은 국력이 크게 약화되게 되었는데 그 후 연나라 사람이 衛滿(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해 왔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위만조선이다.
그러면 위만조선은 오늘의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 위만조선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소재를 밝히기 위해서는 『사기』조선열전에 보이는 다음 기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마천은 『사기』조선열전에서 위만이 동쪽으로 조선에 올 때 浿水를 건너 왔다고 썼다. 위만이 건너 온 이 패수가 어디 있었는지 그 소재가 파악되면 당시 고조선의 위치가 드러나게 된다. 이 패수에 대하여 여러 가지 異說이 있는데 대체로 1) 요동에 있었다. 2) 낙랑군에 있었다. 3) 한반도의 대동강이다. 4) 압록강이라는 네가지 설로 요약된다.
『사기』에 위만이 패수를 건너와서 “秦故空地上下障(진고공지상하장)”에 거주했다고 했는데 진시황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上下障(상하장)을 설치한 일은 없다. 그리고 『사기』조선열전 索隱(색은)에 應& #21165;(응소)가 “遼東有險瀆縣 朝鮮王舊都(요동유험독횬 조선왕구도)”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필자는 요동 패수설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으며 따라서 위만조선은 요동에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결국 그 손자대에 이르러 망하고 만다. 漢武帝(한무제)는 元封(원봉) 2년에 천하의 사형수들을 끌어모아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이듬해 여름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樂浪(낙랑),臨屯(임둔),玄& #33759;(현토),眞番(진번)으로 쪼개어 漢4군으로 삼았다.4)
漢武帝(한무제)가 고조선의 영토를 무력으로 침략한 뒤 그것을 넷으로 분할하여 漢四郡(한사군)을 세웠지만 몇백년도 아니고 수천년을 두고 내려 온 고조선민족이 하루아침에 없어질리 만무했다. 일부 한족에 흡수 동화되기도 하는 것이 불가피한 현상 이었겠지만 대부분의 고조선 민족은 엄연히 그대로 잔존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穢貊(예맥)을 비롯한 고조선 유민들은 곧바로 여러 나라를 세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후한시대에 접어들자 끊임없이 상호 연대를 통해 漢族과 싸우며 고토회복운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가 바로 고구려였다는 사실이 다음의 사료에서 입증되고 있다. 『後漢書(후한서)』권 5 安帝紀 “安帝元初 五年……夏六月 高句麗與穢貊寇玄& #33759;”, “建光元年 春正月 幽州刺使馮煥 率郡太守 討高句麗穢貊不克……夏四月 穢貊復與鮮卑寇遼東 遼東太守蔡諷追擊 戰歿 冬十二月 高句麗馬韓穢貊圍玄& #33759;”.
따라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단합한 고조선 유민들은 후한시대를 지나 위진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잃어버린 고조선영토를 거의 회복하다시피 하였다. 『周書(주서)』에 보이는 다음의 기록이 그것을 잘 뒷받침 한다고 하겠다.
. 漢의 四郡중 玄& #33759;郡(현토군)을 발판으로 삼은 고구려는 遼東(요동)지방에 있는 수십성을 차지하고 또 오늘의 한반도의 漢城(한성)과 平壤城(평양성)까지를 확보함으로써 고조선시대의 영토를 거의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隋煬帝(수양제)시대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아울러서 발해,갈석산 일대까지도 그 영향권아래 둠으로서 고조선 전성기시대의 영토를 거의 다 차지했다는 사실을 다음의 기록은 역력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周(주)시대의 朝鮮 땅이 漢의 玄& #33759;(현토),樂浪(낙랑)이고 隋(수)의 고구려라는 다음의 두 기록은 고조선과 고구려가 시대의 차이를 두고 동일한 지역에 세워진 국가라는 즉 고조선 영토에서 고구려 영토로 계승된 영토상의 계승성을 요약해서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4. 문화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고조선과 고구려의 문화상 동질성 내지는 계승성에 대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三國志』濊傳(예전)에서 “其耆老 自謂與句麗同種……言語法俗 大抵與句麗同”이라 한 것을 볼 때 고구려는 고조선과 동일한 민족으로서 언어와 풍속이 기본적으로 서로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의 문화가 고조선의 문화와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같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고조선은 犯禁(범금)8조를 통해서 볼 때 형법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백성들이 대문을 걸지 않고 생활하는 안정된 사회를 이룩했다. 다음의 기록에서 보면 고구려도 역시 국법을 매우 엄정하게 집행함으로서 도둑이 없는 사회를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조선에서는 남녀가 혼인하는데 있어 재물을 따지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도 혼인은 남녀의 서로 사랑 하는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혼인에 재물이 오가는 경우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혼인문화가 있었다. 그리고 『三國志』東夷傳 濊條(예조)에 따르면 濊族(예족)들은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음주 가무하면서 즐겼는데 이를 舞天(무천)이라 했다고 한다.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謂舞天”. 그런데 고구려에도 역시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를 개최하는데 이름을 東盟(동맹)이라 한다”는 기록이 그것을 잘 설명한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이러한 일련의 사료들을 통해서 검토해 볼 때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혼인문화,제례문화,놀이문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서 동질성과 계승성이 농후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통상 세가지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200년~300년 전도 아니고 4000년~5000년을 흘러온 과거 역사를 연구하자면 그것을 뒷받침할 史料의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손으로 기록한 고대사료가 많지 않고 주로 중국인의 손에 의해 기술된 사료에 의존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事大主義(사대주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근대 일제식민통치 35년을 거치면서 이때 식민통치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植民史觀(식민사관)의 잔재가 아직도 불식되지 않고 남아 있어 그 장벽을 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지금 농경사회,산업사회를 지나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다. 정보화 사회란 문화자본 지식기반 사회를 의미한다. 세계가 바야흐로 문화중심 역사전쟁시대로 접어든 지금 고대사 연구의 3대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의 眞相(진상)을 復元(복원)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적 국가적 시대적 당면과제가 아닐 수 없다.
위에서 우리는 민족상으로나 영토상으로나 문화상으로나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가 명백하다는 사실을 중국의 여러 사료들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이 소 논문이 동북공정의 허상을 타파하고 우리역사의 진상을 복원하는데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보다 자세한 것은 [몇 가지 추려본 간략한 게시물 목록들], [역사와 관련해 몇 마디 논평해본다....]를 참조하세요.
이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문화재나 유적들에 관한 자료들이 많으니 직접 본 블로그의 게시물들을 둘러보면서 찾아 읽어보세요 기타 궁금한 것은 위에 언급하지 않은 자료들 중에 있으니 찾아보면 그 궁금증 대부분이 풀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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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m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