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수많은 실패자들이 등장한다.
놀랍게도 그 실패자들은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다. 베드로는 열정적인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래의 제안에 따라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겠다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애굽인을 살해하고 도망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불린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을 통해 하나님과 배우자, 그리고 충신 우리아에게 큰 죄를 저질렀다.
성경은 실패에 대한 사례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패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실패하지 않도록 막으실 수 없었던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실 수는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허용하심으로써 그분의 공의로운 뜻을 이루신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노예로 파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행위는 훗날 그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회개하며 엎드리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형들의 악한 의도와 행위를 통해 요셉의 온 가족과 애굽을 살리도록 이끄셨다(창 45:8).
실패 그 자체는 미화될 수 없고 장려될 수 없지만, 실패의 경험은 우리 안에 내재된 오만과 자만에 대항하는 약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실패의 시련을 통해 우리의 자만심과 자기중심성, 자기기만을 치유할 기회를 주신다. 실패는 지독한 자아도취의 취기로부터 인간의 불완전한 실존을 직면케 한다. 실패하지 않았다면 겹겹이 포장된 거짓 자아의 내면의 실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패는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다.
실패보다 더 나쁜 것은 도리어 ‘실패의 부재’다. 왜냐하면 실패는 나 자신과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데, 실패해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참된 실재를 직면해보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패할 바로 그때 비로소 우리 자신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요 그분의 섭리로 인해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경에 베드로의 실패가 기록된 이유는, 베드로와 같은 사도도 실은 실패자였으며, 그러한 실패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위대한 사명자로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후 닭울음 소리를 들었다. 그때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몹시 울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진정한 실패자인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았고, 주님께로 가기 위해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실패자인가? 오히려 믿음이 연약하여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안전한 배 안에만 앉아 있던 나머지 제자들이 실패자가 아닐까?
주님께서 생명의 문은 좁은 문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누군가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다가 문에 끼었다. 그렇다면 그는 실패자인가? 아니면 문이 좁다고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이 실패자인가? 후자가 아닌가? 전자와 같은 실패는 건강한 실패요, 살리는 실패다. 하나님은 주님 뜻대로 살려다가 넘어진 자들을 실패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아직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패는 실패가 아니고 성공은 성공이 아니다.
성공이 실패일 수도 있고, 실패가 성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공과 실패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무엇이 성공이고 실패인지, 누가 승리자이고 실패자인지는 하나님이 판결하신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의 실패는 위대한 실패였다.
생명의 길을 걷는 실패였기 때문이다. 그가 실패했고 좌절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자신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패 때문에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패했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까지 다락방에서 기도할 수 있었고, 성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성령이 그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베드로는 자신을 믿었던 무모한 자에서 진정으로 담대한 자가 되었다.
- 섭리하심, 김다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