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나라가 어째서 고조선의 속국이라고 주장할까 그근거는 바로 고죽국에 있다. 중국기록에는 고죽국이 은나라의 속국인것처럼 나온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공격할때 제후국이 상국을 공격하는것이 옳지않다며 은나라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자 백이숙제가 주나라의 양식을 거부하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고 한다. 고죽국은 일반적으로 난하의 서북쪽으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대청광여도에는 이상하게 고죽국의 위치가 황하가 구부러지는곳 즉 산서성으로 나온다. 중국역사지도를 확인해보니 은나라즉 상나라의 영역은 황하이남과 이서로 표기되었다. 그 크기는 한반도정도이다. 즉 황하이북지방은 중국학계도 은나라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듯하다. 고죽국은 고조선의 제후국이며 제나라와 고조선이 싸울때 고조선과 함께 출정했다. 그런데 중국학계는 은나라의 제후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은이 고조선의 상국이거나 고조선이 은의 상국이라고 봐야한다. 영역으로 비교하면 고조선이 만주와 연해주 몽골동부 한반도 산둥과 하북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은나라보다 크다. 즉 고조선이 은의 상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주사(告奏使) 최치원(崔致遠)이 표(表)를 짓기를, “우리 나라는 비록 울률(鬱壘)의 반도(蟠桃)와 경계를 접하였으나 위엄으로 다스리는 것을 숭상하지 않았고, 또 이제(夷齊)의 고죽국(孤竹國)과 강토를 연하여 본래 염퇴(廉退 청렴하고 겸손함)한 자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사년 효공왕(孝恭王) 원년(당(唐) 소종(昭宗) 건녕(乾寧) 4, 897) 이첨(李詹)은 지금의 해주(海州)라 하고, 본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나왔다. 《여지승람》에는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하가 지극히 넓은데 《수서》가 어찌 낭설을 지어내 하필이면 한 모퉁이의 고려를 가리켜 고죽국이라고 하였겠는가. 전해오는 속담에도 백이ㆍ숙제가 수양산(首陽山)으로부터 평양(平壤)에 찾아와 기자를 방문하곤 하였다는 말이 있다. 수양산이 지금의 해주에 있으니, 이 말이 비록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천백년 이상의 일을 어찌 반드시 애매한 것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상은 오씨(吳氏)의 말이다. 상고하건대 《여지승람》에서 이 사실을 부인한 것은 《일통지(一統志)》에 ‘영평부(永平府)에 고죽국이 있고 거기에 3군(君)의 무덤이 있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동(河東)의 수양산에 또 이제묘(夷齊墓)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반드시 하나는 진실이요 하나는 거짓일 것이다 동사강목 신라의 영토는 고죽국과 연해있다 즉 바로 옆이거나 고죽국의 땅일부가 신라땅이라고 해석할수있다. 그럼 동사강목을 보면 난하서쪽에 있는 고죽국과 수양산 이제묘말고 하동즉 황하동쪽에 또 수양산과 이제묘가 있으니 어느것이 진실인가 하고 되묻고 있다.즉 고죽국이 황하동쪽이든 난하 서북쪽이든 신라땅은 대륙에도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고대에도 고죽국의 위치가 두군데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하동쪽의 고죽국과 난하 서북쪽의 고죽국중 어느것이 진짜인가 이는 유물발굴로 은나라의 영역이 황하남쪽으로 밝혀졌으니 당연히 고죽국은 황하동쪽에 있는것이 진짜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은 원래 황하동쪽에 있었다는 것이 옳다. 그럼 은나라가 동이족의 나라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미 유물발굴과정에서 증명되었다. 고고학자 푸쓰녠(부사년)은 “은(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망한 뒤에 동북으로 돌아갔다”고 단정했다. 이번에 발굴된 원북상성의 경우 중심축이 동북으로 13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이는 전형적인 상나라 도성의 방향인데, “고향(발해연안)에 대한 짙은 향수를 나타낸 것(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이라 해석되고 있다 답사 내내 경탄에 마지 않은 것은 은(상)의 청동기와 옥기 제작 기술이었다. 은허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5000점이 넘는데, 사모술(司母戌)이란 명문이 있는 청동방정(鼎·사각형 모양의 솥)은 무게가 832.75㎏에 이르렀다. 옥기는 2600여건이 확인됐는데, 중국 동북방 차하이-싱룽와에서 발원한 옥기문화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이형구 교수는 “고구려·백제의 선조인 부여 역시 점을 치고, 술과 노래를 좋아하며, 백색을 숭상하는 등 은(상)의 풍습을 빼닮았다”면서 “하늘로부터 왕권을 받았다는 뜻인 역법(曆法)마저 은의 역법을 썼다”고 말했다 윗글은 중국과 한국학계의 주장이다. 내주장이 아니다. 즉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동이족이 세운 고조선과 은나라가 황하동부와 남부를 다스리고 있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럼 누가 상국일까 은나라의 크기는 한반도보다 조금 큰정도인데 이는 은나라의 제후국중에 하나는 닭이 울면 그소리가 끝에서 끝으로 들린다고 하니 은나라의 제후국은 초미니 소국이다. 그러니 은나라 역시 대국이 아니라 한반도보다 조금큰 나라일뿐이다.반면 고조선은 어떠한가 만주와 한반도가 고조선땅임은 중국과 한국학계도 인정한다. 또한산둥에는 고인돌이 나오고 우리민족의 특징인 편두는 만주 연해주 산둥 강소 한반도에서 출토된다. 비파형동검또한 요서에서 대량출토되니 고조선은 은나라보다 최소 10배이상 거대한 나라인것이다.그럼 은나라가 상국이겠는가 고조선이 상국이겠는가 당연히 고조선이 상국이다 결론은 고조선은 은나라의 상국이었고 고죽국은 황하동쪽에 있던 소국이었는데 은나라와 고조선의 속국이었다. 은나라의 지배층은 동이족 피지배층은 한족과동이족으로 보인다. 이는 하남성주민이 현재 한족과 동이족이 섞여있는 것을 보면 알수있다. 그러나 황하북쪽은 아직도 동이족이 대다수이다. 이는 아시아 유전자지도를 보아도 알수있다 아시아 유전자지도를 보면 한반도인과 완전 일치하는 곳은 일본남부 만주 하북 티벳 산둥동쪽이며 한반도인과 대략일치하는 곳은 산둥서쪽 일본북부 바이칼호 몽골등이며 한반도인과 한족의 혼혈은 강소성과 하남성 서안일대이다.즉 이 지도를 보면 동이족의 역사를 알수있다. 1.고조선이 건국되면서 수많은 제후국중에 황하남쪽에 은나라를 두었고 고죽국이 황하동쪽에 있었다. 2.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비로소 황하남쪽에 한족중심의 나라가 건국된다. 3.황하동쪽과 만주 연해주 몽골동부 한반도 일본남부를 다스리던 고조선은 수많은 제후국들이 제각기 독립적으로 분열되고 주나라또한 여래러개의 나라로 분열된다. 4.고조선은 만주의 부여, 요하의 고구려, 대릉하남쪽과 산둥 한반도를 차지한 백제의 3개의 큰 제국으로 분열되며 황하동쪽에 있는 고조선의 남은땅을 한나라가 쳐서 4군으로 분열시킨다. 이때 고구려가 고죽국의 자랑이었던 수양산과 백이숙제묘를 난하 서북으로 옮기고 가묘를 설치해 자신들의 조상의 묘를 한족에게뺏기지 않으려 한다. 이때문에 원래 고죽국은 황하동쪽에 있었는데 고구려에 의해 난하 서북으로 옮겨지고 이후 조선에 의해 요하서쪽으로 옮겨지고 조선후기에 황해도 해주까지 이동시킨다. 백이숙제묘는 동이족의 충절을 나타내는 표상이며 지배층의 입장에서 이와같은 충신은 길이 보존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계속 자신의 관할하에 두어 백성들에게 표본으로 나타내려한것이다. 조선은 동명왕묘와 단군묘를 대릉하의 조양시로 이전하여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드러냈다. 이또한 마찬가지 원리이다. 조선말기에 북한의 평양시로 다시 묘를 이전한다. 5.고구려와 백제는 한나라와 황하동쪽땅을 두고 다투었는데 고구려는 모본태왕때 태원과 북평을 함락하고 요서10성까지 두어 황하동쪽땅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한다. 북평은 베이징이 아니라 송나라때 작성된 화이도에 태원바로옆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후대에 북평을 베이징으로 이동시킨것이다.또한 백제는 위오촉을 합병한 진나라때 진평군(황하동쪽에 있는 지명)을 함락하고 한족을 몰아낸다. 즉 황하동쪽땅중 태원이남과 진평군 서쪽일부땅만 한족이 점거했을뿐 나머지는 고구려 백제의 땅이었다. 6.고구려 백제 멸망후 신라가 만주와 동몽골을 제외한 나머지를 차지했는데 최치원이 말하길 고죽국의 땅과 신라가 접해있다고 했다. 즉 난하 서북에도 신라땅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만주원류고에는 길림까지 신라땅이라고 했고 거란지리도에는 요동반도를 고려발해신라 여진의 4국의 땅이라고 했다. 즉 신라는 고구려의 남부영토와 백제의 영토 상당부분을 장악했다. 7.고려태조의 부인을 후당에서 하동군부인이라고 작위를 내려주었다. 하동은 황하동쪽을 말하는 당시의 지명으로 황하동쪽을 차지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뒤를 이어 고려가 이땅을 장악한 것이다. 즉 고려시대까지 황하동쪽은 여전히 동이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황하를 기점으로 그남쪽은 동이족과 한족이 섞여 살았고 하남성의 남쪽에는 한족이 압도적이었다. 이는 금나라와 남송의 지도를 보면 알수있다 8.태조이성계는 요하동쪽 송화강일대에서 일어나 금나라를 그리던 여진과 타타르부족을 이끌고 동정서벌하여 바이칼호까지 진격한다. 태조가 나하추를 쫓아 사막까지 갔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태조는 위화도 회군당시 최영의 10만대군과 싸우기 위해 후방의 안전을 위하여 주원장에게 머리를 숙이게 된다. 동국여지승람에 태조가 고려의 8도중 1도를 명에 떼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후 산둥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수백명의 정찰병을 보냈다가 주원장에게 들켜 항의를 받았는데 태조는 모르는일이라고 잡아뗏다. 물론 실록에 다있는 기록이다.태조는 20만대군을 준비하여 명나라를 치고 고토를 수복하려 했는데 주원장이 놀라 대비책을 만들라고 신하들에게 지시한 것이 명나라기록에도 있다. 태조가 노환으로 쓰러지면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러나 태종과 세종 세조는 태조의 이런 아쉬움을 위로하기위해 역사기록에 고려보다 영토가 배나 넓다고 쓰면서 태조의 공덕을 찬양한다. 즉 중원을 제외한 금나라의 옛땅과 고려의 옛땅 거기다 동몽골을 모두 장악했으니 만주남부가 최대영토였던 고려보다 영토가 넓다고 태조를 위안하려 한것으로 보인다.세조실록에 북적이 조선에 귀순한다고 자랑스럽게 적었는데 북적은 흉노와 동호이며 흉노는 몽골에 거주하던 옛주민이다. 세조때 몽골의 상당부분을 점거하고 있던것을 알려주는 반증이다. 태조의 영역은 고죽국이 있는 해주까지인데 역시 난하서북쪽이다. 즉 텐진이남은 명에게 뺏긴것으로 보인다. 실록에 보면 산둥에 있던 달자(타타르인혹은 조선인)가 반란을 일으켜 명나라가 크게 곤경에 처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명에게 점령당한 고려의 옛땅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명을 위협했던 것으로 보인다. 9.조선후기 임진왜란으로 약해져있던 조선은 금나라의 후예들이 세운 후금에게 상당한 영토를 뺴앗긴다.그러나 후금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표현했던 금나라처럼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여겼다. 즉 같은 민족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후 베이징에 입성해 천하를 차지했으니 고려가 망한후 잃어버렸던 황하동쪽의 땅을 같은 민족이자 고구려 발해 조선의 후예인 여진족이 수복한 것이다. 비록 부모의 나라였던조선은 영토가 축소되었지만 조선말기까지 아무르강이남은 조선영토였다. 10.결론은 황하동쪽은 고려가 망한후 조선후기까지 250년 남짓한 시간만 한족의 영토였을뿐 계속 우리 동이족의 영토였다. 유물이 발굴되면서 차츰 사실로 들어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고 순환하니 이사실만 잊지 않고 있다면 언젠가 황하동쪽이 다시 우리땅이 될지도 모른다